동천(冬天) – 132화
“이 새끼, 도대체 어디에 갔길래 도통 소식이 없지?”
여기서 이 새끼란 도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금방 올 것같이 사라졌던 녀석이 의외로 며칠 동안 소식이 없자 궁금해진 것이었다. 하인을 불러서, 도연이 지금 뭐하고 자빠져 있는지 알아보라고 시켰던 동천은 도연이 며칠 동안 보이질 않았다는 보고(報告)를 받고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간..밑에 것들은 조금만 풀어줘도 해이해진다니까?”
나흘 동안 부전주가 준 약재와 운기조식을 번갈아 한 덕분에 지금 동천의 상태는 몰라보게 호전되어 있었다. 동천이 이렇게 빨리 나아가는 것은 약 기운보다 운기조식이 한몫을 더했지만 정작 동천은 부전주가 준 약(藥) 때문에 빨리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원래 나돌아다니길 좋아하던 동천은 거의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척을 하느라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자 따분해서 좀이 쑤셨다. 동천은 두 손을 위로 치켜올리며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극~~아…심심하다.”
한동안 멍하니 눈앞의 도자기를 바라보던 동천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지 침대 위로 올라가 의미 없이 좌우로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심심해..심심해…나가 놀고 싶어…. 하다못해 여름이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개새끼들도 놀고 싶어 할 땐, 지 알아서 놀게 내비두는데 사람이 내가 이렇게 따듯하고 좋은 날에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이러고 있어야 하다니…”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동천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에이, 씨발! 이건 너무 불공평해!”
수련을 하기 싫어서 거의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꾀병을 부렸던 동천은 연기하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밖으로 나갈 태세를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새하얀 옷을 집어 내던진 동천은 자신이 즐겨 입는 푸른색 옷으로 바꿔 입었다.
“랄라라…으히히! 오랜만에 나가려니까 절로 흥이 나네?”
그래봤자 사흘 동안 방구석에서 지낸 거였지만(그것도 호의호식하며) 실지로 동천이 느낀 시간은 열흘 이상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마당을 쓸던 늙은 하인이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며 은근슬쩍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도 동천은 기분이 좋고 해서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더군다나 평소에 경로 우대 사상을 존중했던 동천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아…! 공기도 맑아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동천은 오랜만에 혼자서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르는 곳으로 걸어간다면 십중십(十中十) 길을 잃어버리겠지만 근 두 달간 계속 왕복을 하던 길이라면 그럴 염려가 없었다. 또 길을 잃어버린 들 어떻겠는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될 텐데.. 봄나들이하듯이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던 동천은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멀어서 그런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힘이 들었다.
‘어떤 새끼가 저렇게 뛰어오는 거지?’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상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동천은 얼마 안 가 인상을 구기며 한쪽 벽으로 자신의 몸을 붙였다. 상대하기도 싫은 인간이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연이 자식 아냐?’
도연이 없을 때는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막상 도연이 보이자 동천은 마주하기 싫어서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숨어야 하는 거지?
그렇다. 왜 숨어야 하는가.. 자신이 꿀릴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씨발…갑자기 기분 더러워지네?’
동천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제 와서 몸을 돌리기가 뭐해서 그냥 그대로 있었다. 다만 도연이가 자신을 그냥 지나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천은 속으로 도연이 자신을 못 보고 지나치기를 기도했다.
‘지나쳐라. 지나쳐라..그냥 지나쳐라. 지나쳐라. 나 알아보면 넌 개잡종이다. 개잡종.. 개잡종… 잡종.. 잡놈.. 잡놈의 새끼. 개잡놈.. 개잡… 가만? 내가 지금 뭐하고 있었던 거지?’
동천이 잠깐 새나간 기억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왜 불…씨바…..렀냐?”
‘불’자와 ‘렀냐.’ 사이에 덜 숙성된 씨발이 끼어들자 애매한 대답이 되어 나왔다. 그러나 도연은 개의치 않았다. 동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려 하던 도연은 동천의 얼굴이 약간(?) 망가져 있자 얼굴을 굳혔다.
“그 상처는….”
동천은 여자에게 맞았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쪽팔리는 일이라 고개를 돌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니가 그것까진 알 것 없고, 며칠 전에 사라졌다더니 어디서 뭐하고 자빠졌었길래 소식이 없었냐?”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겁니까.”
동천은 도연이 계속 물어오자 그 당시의 악몽이 다시 떠올라 잠깐 동안 몸을 떨었다.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몸서리를 쳐서 그런지 동천은 화를 냈다.
“야!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니가 나 때린 년한테 가서 복수라도 해줄 거야? 이 씨.. 이게 죽을려고…”
손을 들어서 후려치는 시늉을 했다. 그만 아가리 닥치고 꺼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도연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입을 열었다.
“여자입니까?”
동천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어? 너 어떻게 그걸 알았어? 누가 가르쳐줬어? …가만? 그럼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도 모른 척을 했다는 소리 아냐? 너….”
동천은 이를 바득! 갈며 도연을 때리려고 다가갔다. 도연은 주군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자 재빨리 해명을 했다.
“방금 ‘년’이라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동천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
“그러니까 방금 전에 말씀하실 때 나 때린 년에게 가서 복수를 해줄 거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자가 때렸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지 저는 주군께서 왜 맞으셨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동천은 자신의 뛰어난 머리로 방금 했던 말을 반추(反芻: 되새김)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쉽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천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게 없었다. 동천이 머리를 굴리느라고 고개를 약간 수그리며 인상을 쓰자 도연이 다가와 동천을 부축했다.
“아프십니까?”
도연이 엉뚱한 오해를 하자 동천은 올타쿠나 하는 생각에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으응…좀 아프다.”
주군이 아파하는 모습에 도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이 충성(忠誠)을 맹세한 주군이 이렇게 아파하자 그 당시에 없었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 화는 주군을 때린 당사자에게로 서서히 옮겨졌다.
“그 여자가 누굽니까…제가 가만히 두지 않겠습니다.”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했다. 자신도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뒤지게 맞았는데 지가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기도 안 찰 노릇이었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동천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순순히 대꾸를 해주었다.
“임마. 지금 나를 때릴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냐?”
동천의 말을 도연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너무 잘 알아들어도 문제였다. 상대는 대 암흑마교 부교주의 따님이었던 것이다. 매우 곤란했다. 상대가 너무 큰 존재였다. 도연이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자 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동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휴… 내비둬라. 힘없는 분이 참아야지….”
주군이 처량한 모습을 짓자 도연은 마음을 굳혔다. 그는 자못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동천은 깜짝 놀라며 도연을 말렸다.
“야! 너 미쳤냐? 그 년.. 분께 가서 대들다간 큰일 나 임마!”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 일을 더욱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이었다. 참으로 오묘한 이 심리에는 도연도 끼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일이 벌어지면 제가 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당연하지 새꺄…히히!’
드디어 도연을 처분할 기회가 생기자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동천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춤이라도 덩실~ 추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러지도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휴.. 정말로 갈 거냐?”
도연의 굳어진 결심은 바뀌지 않을 듯했다.
“만약에 제가 잘못된다면 화장(火葬)해 주십시오.”
‘짜식, 되게 너무 직설적이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가만? 그러고 보니 뼛가루 뿌리려면 강까지 가야 하잖아? 씨발.. 그거 되게 귀찮을 텐데…..’
귀찮은 건 딱! 질색인 동천은 자신의 생각을 약간 수정했다.
“죽긴 왜 죽어 임마! 니 목숨이 니 거인 줄 알아? 잘 들어.. 내 거다! 알겠냐? 살아 와. 명령이야.”
주군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도연은 가슴 저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감동이라는 것이었다. 도연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도연은 자신의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은지 인사를 마치고 얼른 자리를 떴다. 도연이 재빠르게 사라지자 동천은 나직이 웃었다.
“으히히히…”
동천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보냈는지도 모르는 도연은 어서 가서 사정화 아가씨께 확실한 진상을 알아보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조금만 냉정히 생각해서 동천에게 먼저 상황을 물어보고 그가 잘못했는지 여부를 따진 다음 행동으로 옮겼어야 했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이성보다 본능이 더욱 강했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달리면서 어느 정도 이성이 회복되자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후우.”
도연은 달리기를 잠시 멈추었다. 아무리 환골탈태로 체력이 급상승했다지만 그 체력이 무한(無限)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중간은 왔구나…”
옆구리가 아련히 아파왔다. 그러나 마냥 지체할 수는 없었다. 설혹, 주군이 잘못해서 맞은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할 일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도연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