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85화
아가씨란 대목에서 수련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의 난리로 인하여 중요한 일을 까먹었던 것이다.
“내 정신 좀 봐! 오늘이 아가씨께 음식을 가져다주는 날이었지?”
소연은 얼른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일이라면 빨리 가봐야겠다. 다음에 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신형을 돌리던 수련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말했다.
“언니, 같이 갈래요?”
“뭐? 내가?”
“예. 아가씨도 언니를 본 지가 꽤 되었으니, 분명히 반가워하실 거예요.”
소연과 사정화 사이에는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었던지라 망설였다.
“괜찮아. 난 그냥 갈게.”
좀 더 언니와 함께 있고 싶었던 수련은 이 기회를 놓치려들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러면 안 되죠. 아? 이번 기회에 아가씨께 화정이도 보여주는 게 어떨까요?”
소연은 화정이를 올려다보았다. 화정이는 작은 주인의 시선을 받고 빙긋 웃어주었다. 소연은 쉽사리 결론을 못 내렸다.
“글쎄…”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수련은 얼른 언니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야야. 아파, 수련아.”
수련은 언니가 통증을 호소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프긴 뭐가 아파요. 만약 언니가 그냥 가버리면 가서 아가씨가 보기 싫어서 갔다고 이를 테니 알아서 하라고요.”
소연은 겁을 집어먹고 말조차 더듬었다.
“그, 그런.”
“그런이고 저런이고 따라오기나 해요.”
결국, 소연은 수련의 억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언니를 거실에 잡아놓고 그사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 수련은 따끈한 소고기뭇국을 쟁반 위에 담아왔다.
“다 됐어요. 좀 늦은 것 같으니까 빨리 가요.”
소연은 한숨을 내쉬고, 수련을 따라갔다. 정오를 넘어서서 그런지 한낮의 더위는 무시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다. 바로 수련이 만든 소고기뭇국 때문이었다.
“수련아. 어째서 이런 더위에 그렇게 더운 음식을 준비하는 거지?”
그렇다. 더워 죽겠는데 더운 음식을 준비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수련은 낮게 웃은 후 그 이유를 설명했다.
“호호. 언니도 참. 밖이 덥다고 동굴 안까지 더우란 법 있어요?”
“그렇구나. 맞아. 동굴 안은 좀 선선하지?”
수련은 일부만 수긍했다.
“모든 동굴이 그런 것은 아닌데 이곳은 특히, 냉기가 강해서 여름에는 수련하기에 딱이에요. 쩝. 반대로 겨울에는 얼어 죽지만요. 어휴. 작년 생각만 하면 끔찍해요.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고 들어갔는데도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그 추위란… 아주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제가 이렇게 말로만 해서는 잘 모르겠죠? 당연한 거예요. 그게 바로 체험과 미체험의 차이라고 그러는 건데 저는 그때를 계기로 그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어요. 그러고 보면, 아가씨도 참 대단해요. 그 추위 속에서 계속 무공 수련에만 전념을 하셨으니 말이에요. 어떤 때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니까요. 예? 그때가 어떤 때였냐고요? 헤헤. 말하자면 긴데 해 드릴까요? 호호. 그럴 줄 알았다구요. 그러니까 작년 겨울에…”
“아? 동굴에 다 왔다. 수련아. 어, 얼른 들어가야지.”
수련은 벌써? 하는 표정을 보였다. 주절거리느라 도착한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네요?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할게요.”
소연은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들어가자.”
수련은 언니의 말을 듣고 총총걸음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연은 숨을 깊게 들이내쉬고 화정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바람에 조금 지체됐는지 안쪽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빨리 와요.”
“알았어. 가고 있어.”
동굴 안은 확실히 선선했다. 소연이 오늘 방문하는 것까지 합하면 정확히 다섯 번이었다. 비록, 먼저 들어간 동생을 놓쳤지만 동천이 아닌 이상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그새 수련이 불렀는지 사정화는 석실에서 나와 국을 떠먹고 있었다. 소연은 아가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안녕하셨어요.”
사정화의 눈은 소연에게 향했다가 그녀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지?”
화정이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소연은 자신에게 묻는 줄 알았다.
“예? 저, 저는 소연인데요.”
다행히 먼저 눈치챈 수련이 언니 대신 대답했다.
“왜 저번에 동천이 강시를 거느리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죠? 쟤가 바로 그 강시예요. 이름은 화정이고요. 뭐더라? 초, 초…”
“초혼강시.”
“예! 맞아요. 초혼강시래요.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아주 무식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많이 성장해서 천자문을 다 뗐대요. 더군다나 오늘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가 빼앗은 꿀떡 그릇을 순식간에 가로채는 거 있죠. 호호! 근데요. 욕심이 많아서 꿀떡 다섯 개를 한꺼번에 먹으려다가 목이 막혀서 죽을 뻔했지 뭐예요. 호호호! 재미있죠?”
사정화는 무표정한 눈으로 수련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의 아미가 살풋이 찡그려졌다. 그걸 본 수련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사정화는 소연에게 말했다.
“그 애. 데리고 와 봐.”
“예. 아가씨. 화정아. 따라와.”
화정이는 빙긋 웃으며 작은 주인을 따라갔다. 사정화는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서있는 강시를 세심하게 살폈다. 다소 창백한 피부이긴 했지만 보통 사람들에 비해 특이한 점은 없었다. 이쯤에서 그녀는 예전에 동천의 사형이 느꼈던 의문점을 똑같이 떠올리게 되었다.
‘체온은 얼마나 될까?’
사정화는 화정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러나 그녀는 강시의 체온을 마저 느낄 새가 없었다. 화정이가 그녀의 손을 뿌리친 것이었다.
“으응?”
사정화는 깜짝 놀랐지만 그녀보다 더욱 놀란 이가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정이는 저와 주인님 빼고는 타인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날 그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화정이의 행동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련이도 거들었다.
“그래요. 아가씨. 쟤가 원래 맛이 좀 갔으니까 이해심 많고 착하신 아가씨께서 용서해주세요.”
사정화는 심히 기분이 나빴다. 그 이유는 화정이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강시의 돌발행동을 가지고 자신이 어떻게 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녀는 빌고 있는 소연을 보면서 자신이 무슨 악녀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화를 내고 싶었으나 만약 여기에서 화를 낸다면 여태까지의 수련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화 안 났으니, 그만해.”
그사이 계속 빌고 있었던 소연은 아가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수련의 따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사정화는 그 여운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화정이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그때 그녀는 화정이의 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적개심?’
혹시,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화정이와 다시 시선을 맞춘 사정화는 아까와 그대로인 강시의 눈을 보았다. 사정화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화정이와의 사이는 불과 한 자도 못 되어 보였다. 소연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급히 화정이를 부르려 했으나 너무 긴장되었던 탓인지 공허한 메아리만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사정화는 고정된 자세에서 눈길만 돌려 소연에게 물어보았다.
“소연아. 다른 사람이 만지면 뿌리치는 게 다야?”
소연은 사정화가 물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네. 그 이상의 추가 행동은 없었어요.”
“그럼, 나를 노려보는 것도 정상이야?”
“예?”
소연은 설마 하는 눈으로 후다닥 달려와 화정이의 표정을 주시했다. 확실히 표정이 굳어있었지만 그건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서운 눈빛을 한 화정이의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소연은 화정이를 거세게 흔들었다.
“화정아. 왜 그래! 화정아!”
화정이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미소를 머금었다. 소연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흑흑! 괜히 왔어. 그냥, 내 방에서 무공이론 공부나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