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89화
그 다음 날부터 동천의 속임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밤마다 몰래 한심을 불러낸 동천은 살 빼는 방법을 빙자해 산속에 들어가 하나하나씩 그릇들을 만들게 했다. 이미 동천의 언변에 속아 넘어간 한심은 정신을 집중하여 그릇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간혹, 힘이 들어 한심이 포기하려고 할 때는 “으응? 자네 살이 꽤 빠졌네?”라는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흘려보내 한심의 피폐된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찌는 듯한 이 여름에 낮이 아니라 밤에 작업을 하는 게 한심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소전주님. 매일 밤 무리를 했더니 피곤합니다. 오늘은 그만하면 안 될까요?”
아직 두 개나 더 남아있는 상황이었지만 무리하게 나가면 언제 한심의 마음이 돌아설지 몰랐다. 동천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한심의 마음 또한 달래주었다.
“수고했네. 그리고 미흡하긴 하지만 자네에게 희망이 보이는군.”
동천의 긍정적인 반응은 꺼져가는 한심의 사기치를 완전히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동천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자네만 믿고 있네. 이제 쉬도록 하게나.”
“예예.”
인사를 마치고 자러 가려던 한심은 아무래도 못 미더웠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근데, 좀 빠지긴 했나요?”
동천은 자신의 말을 의심하는 한심에게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나 참. 빠졌다니까? 정 그렇다면 만검전 밖으로 한 번 나가봐. 아마 남들이 몰라볼걸?”
당연한 소리였다. 만검전 내부도 아니고, 만검전 밖에서 “나 알아?” 그러면 당연히 “몰라.”라는 답변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새벽잠을 설치다 결국 밖으로 뛰쳐나간 한심은 길 가는 무사들을 붙잡고 대뜸 물어보았다.
“이보게들! 자네들 나를 알겠는가?”
예의상 한심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본 세 명의 무사들은 곧이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 한심을 두들겨 팼다.
퍼버버-벅!
“켁? 왜, 왜 때려! 으엑-?”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한심을 패버린 무사들 중 한 사내가 바닥에 침을 뱉고 난 후 거칠게 말했다.
“씨발 놈. 어디서 병신 같은 게 나타나가지고. 가자!”
그들은 당주를 팬 것도 모른 채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한심의 몸은 만신창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만족의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 으헤헤헤헤!”
힘들게 일어난 한심은 집으로 돌아와 신나게 퍼질러 자고 있는 동천을 흔들어 깨웠다.
“음냐. 뭐야.”
한심은 꽤나 흥분했는지 침까지 튀겨가며 수다를 떨었다.
“소전주님! 소전주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제가요. 밖에 나가서 무사들을 붙잡아놓고 저를 아냐고 물어보았더니, 아 글쎄! 저를 몰라보는 거 있죠? 헤헤헤! 소전주님의 말씀대로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튀겨지는 침을 피하느라 재빨리 정신을 차린 동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보게. 한 당주.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나만 믿게! 나만 믿으면 자네는 꽃다운 미녀와 백년해로를 하고, 아들딸들과 오순도순 살 수 있을 걸세.”
한심은 코가 바닥에 닿도록 굽실거렸다.
“알겠습니다. 소전주님. 어이쿠! 제가 주무시는데 깨웠네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나가고 지랄이고, 이미 잠에서 깨어난 동천이었다. 동천은 한심이 나갈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갈 때까지 말이다.
“하여튼 저 새끼도 참 짜증 나는 놈이라니까?”
동천은 계속 투덜거리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운기조식을 취했다. 한 식경 후,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은 어제 밤에 한심이 만들어 놓은 그릇을 찾아다가 가마 깊숙이 넣고 불을 지폈다.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었지만 이런 과정은 어쩔 수 없이 동천이 해야 했다. 물론, 한심에게 살 빼는 걸 강조하며 일을 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혈귀옹에게 들키게 되므로 이 일은 동천이 도맡아 해야 하는 것이다.
“히히히! 앞으로 하나. 그러면 나는 해방이다! 아아, 사부님은 지금쯤 뭐하고… 가만?”
동천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동안 사부님이 나를 찾지 않는 거지?’
그렇다. 단 하루라도 소식이 없으면 찾아봐야 하는 게 사부 된 도리일 텐데 여태껏 깜깜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동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굴렸다.
“뭔가 있어.”
참으로도 일찍 생각한 동천이었다. 동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부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여러 가지 상상들을 대입시켜보고 의외의 결과물을 도출시켜도 본 동천은 마침내 길고 긴 생각의 두루마기를 말아 접었다.
‘아직, 확신은 이르다.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자. 조금 더…’
동천은 개 폼을 있는 대로 잡고 한동안 자리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런 동천이 움직인 것은 밥을 먹으러 가기 위해서였다. 급히 아침을 먹고, 가마 앞에 죽치고 있었던 동천은 오후가 되어서야 식어버린 가마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수 십여 가지의 그릇들을 꺼낸 동천은 지가 무슨 장인이라도 되는 양 구워진 그릇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가차 없이 깨뜨려버렸다.
쨍강-!
“이게, 아냐.”
인상을 찌푸린 동천은 다른 그릇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망치가 내리쳐졌다.
파직! 쨍그랑.
“이것도, 이것도 아니야!”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동천은 마지막에 남은 한심의 작품을 보고 나서야 감격의 표정을 지었다.
“오오! 이거야! 하하하! 또 하나가 완성되었구나! 어르신!”
동천은 보물을 감싸쥐듯 소중히 들고 갔다. 혈귀옹은 지가 알아서 먼저 온 동천을 참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그는 동천이 가져온 작은 종기 그릇을 돌려본 후 동천을 예리하게 살폈다.
“희한한 게 굽기만 하면 좋아지는구나.”
그러나 혈귀옹이 살펴본다고 두꺼운 동천의 얼굴 가죽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헤헤. 그만큼 제 솜씨가 특별하다는 거죠.”
코방귀를 뀐 혈귀옹은 그릇을 동천에게 던져주며 물었다.
“이 그릇에 또 무슨 작품명이 있더냐?”
혈귀옹은 동천의 작명 솜씨를 같잖게 여기면서도 궁금하긴 했나 보다. 여기에서 기대를 저버릴 동천이 아니었다.
“물론 있죠. 이름하야 작은 돌멩이의 미소! 헤헤, 끝내주죠?”
“허, 허허허!”
허탈한 웃음이었다. 혈귀옹은 돌연 안색을 굳히더니 거세게 문을 닫았다. 깜짝 놀란 동천은 괜히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앞으로 하나. 단 하나만 만든다면 이제 이런 짜증 나는 곳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만 한심을 꼬드기면 끝날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오늘만이라도 혈귀옹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도기실에서 형편없는 그릇을 만들었다. 근 두 달 정도면 조금이라도 숙련된 모습이 보여야 하건만 동천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오십보백보였다. 동천은 자신이 만든 그릇을 바라보았다.
“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것(한심이 만든 것)보다 이게 훨씬 나은데 말야. 하여간 수준 낮은 것들이랑 놀면 안 된다니까?”
동천이 다른 이의 수준을 의심하고 있을 때 뒤에서 한심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소전주님.”
“어? 한 당주가 대낮에 웬일이야?”
한심은 헤프게 웃더니 자신이 온 이유를 말했다.
“실은 밖에 누가 찾아왔거든요.”
동천은 별로 기대 없이 물어보았다.
“누굴 찾아? 어르신을 찾아? 어르신이라면 방에 계셔.”
한심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아버님이 아니라 소연이라는 여아가 소전주님을 찾아왔어요.”
동천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뭐? 소, 소연이가? 어디야!”
“헤헤, 밖에 있다니까요.”
동천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갔다. 정말로 밖에는 여러 개의 보따리를 싸 들고 온 소연이 서 있었다.
“지, 진짜네?”
소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동천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야 그 소년이 자신의 주인님임을 깨달았다.
“주인님~! 흑흑흑!”
“오오! 소연아!”
둘은 서로 달려와 부둥켜안았다. 소연은 동천과 감격의 상봉을 하자마자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웩!”
동천은 깜짝 놀라 떨어졌다.
“야!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소연은 동천에게서 저만치 물러난 후 흐느끼며 말했다.
“흑흑! 주인님, 봬서 정말 기뻐요. 하지만 냄새가 너무 나요. 흑흑흑. 기쁘지만 냄새가 너무 나요.”
동천은 버럭 화를 냈다.
“뭐야? 고작 냄새 때문에 나를 밀쳤단 말이야?”
소연은 수건으로 눈시울을 닦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비위가 약해요. 흑흑. 그 꼴이 뭐예요. 저는 늠름해진 주인님을 상상하고 왔는데 너무해요!”
“어쩌라고!”
찔끔한 소연은 계속 훌쩍이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모, 목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