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32화
세상 밖으로.
결국, 청뇨로명단의 냄새만 맡아본 동천은 보름 동안 후유증으로 생고생을 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수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뿐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조금 더 시일이 걸려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부터 10여 일이 더 지났다. 아침 수련이 끝나고 밥을 먹으러 돌아온 동천은 몇몇 하인들이 자신의 방으로 여러 가지 집기들을 들여오는 것을 목격했다.
“으응? 야, 너희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때마침 작은 거울을 들고 가다 동천을 대한 30대 중반의 남자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오라 소연 아가씨께서 자신의 방에 있는 몇몇 물건들을 이리로 들여오라고 명하셔서 지금 옮기는 중입니다.”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의 이야기 중에 심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천은 그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연 아가씨? 어째서 걔가 아가씨냐?”
하인들도 눈과 귀가 멀쩡하게 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라고 동천과 소연의 관계(?)를 모를 리 있겠는가? 이미 약왕전 내부에는 동천이 어린 나이에 소연을 첩으로 맞아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또 소연이 동천의 첩으로 들어간 경우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는데 어떤 이는 소연이 유혹해서 소전주가 넘어간 거라고도 하고, 서로 눈이 맞았다는 말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동천이 소연을 겁탈했다는 신빙성 있는 말을 해서 주위 사람들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도 했다. 이러한 소문 때문에, 더군다나 암한문 내에서는 아침에 소연이 소전주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던 관계로 어느새인가 소연을 부르는 그들의 호칭이 소연에서 소연 아가씨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남자 하인은 소전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좋게 말을 이끌어갔다.
“소전주님께서 소연 아가씨와 매일 동침을 하시는 걸 알기에 저희 입장에서는 소연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동천은 딱히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인 셈이다.
‘쳇, 그년 횡재한 거네? 아가씨라는 소리도 듣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동천은 본래의 의문 사항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걔가 이것들을 내 방에 옮겨놓으라고 했다고?”
“예, 소전주님.”
동천은 이제 와서 들여온 것들을 다시 갖다놓으라고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빨리 일을 끝마치라고 닥달한 뒤 침대 위에 누워서 소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에이 씨, 더럽게도 늦네? 보나마나 사정화 그년한테 화정이를 데리고 갔을 게 분명해. 으으, 그년 생각하니까 또 열이 뻗치네?”
동천이 단환 생각 때문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때, 소연이 화정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어머? 벌써 다 갖다 놓았네?”
그녀는 자신이 배치해준 자리로 모두 옮겨 놓은 것을 보고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소연은 그사이 화정이가 스르르 앞으로 나가자 그제야 동천을 보게 되었다.
“벌써 오셨어요? 시장하시죠?”
이게 다 뭐냐고 윽박지르려던 동천은 시장하냐는 물음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보낸 뒤, 잠시 후 상을 들여왔다. 허겁지겁 밥을 먹어댄 동천은 두 그릇을 비운 다음 느긋하게 몸을 가누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다 뭐냐?”
만족감에 물들어 있어서 그런지 물어보는 태도가 평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미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동천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소연은 혀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헤헤, 다름이 아니라 치장을 하는데 매일 제 방으로 가려니까 불편해서요.”
동천은 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요즘 민 할멈에게 잘 배우고 있냐?”
“그럼요. 저 잘한다고 칭찬 많이 들어요. 아? 깜박 잊어먹을 뻔했다.”
편안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있던 동천은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였다.
“뭘? 뭘 잊어먹을 뻔했는데?”
소연은 화정이가 계속 먹으려는 것을 제지시킨 후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가씨께서 내일 오시래요.”
“아가씨께서? 왜?”
휘둥그레진 주인님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어댄 소연은 곧이어 그런 표정을 지우고 자신이 아는 한도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때 주신 단환 때문에 내공이 크게 증진되셔서 고마움의 표시로 점심을 대접하는 거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리고 정말로 단환이 효과가 있긴 있었나봐요. 아가씨께서 단환을 받으신 다음날부터 몰라보게 강해지셨는데 아직까지도 무공 수위가 멈추지 않고 성장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아가씨께서 천재라는 말씀이 맞긴 맞나봐요?”
동천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겨우겨우 펴내며 말했다.
“으으, 그렇게, 겠지?”
소연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어디 아프세요?”
동천은 딱 잘라 말했다.
“안 아파.”
소연은 밥을 다 먹고 난 후 사부님께 찾아갔다. 마침, 안에는 민소희 혼자밖에 없었다.
“어서 오너라.”
소연은 그녀의 앞에 공손히 앉았다.
“헤헤, 조금 늦었지요?”
민소희는 살며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다. 그보다 몸가짐을 보니 오늘이 그날인 것 같구나.”
소연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예? 그날이라뇨?”
“그럼, 내일이니?”
소연은 사부님께서 예전에 가르쳐 준 것을 자신이 까먹었는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내일은 또 무슨 말씀이신지…….”
민소희는 제자가 모르는 게 이상했지만 처음이라 그 날을 까먹었을 거라 생각했다.
“달거리(생리) 말이다. 이 사부가 알기로는 오늘이 초경을 한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느냐?”
소연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 제자는 도통 이해가…….”
민소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응? 한 달 전 소문주님께서 아무 말 없으셨더냐?”
한 달 전이란 소리에 소연은 불안한 눈으로 사부님을 응시했다.
“없으셨는데요.”
“이런, 이런.”
민소희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그 당시 바로 앞에서 소연의 초경을 목격했던 소문주가 자신이 소연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서 그런 줄 알고 아무 말도 안 했었는데, 자세한 설명을 들었어야 하는 당사자가 지금에 와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니 실로 당황했던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민소희는 차근차근 처음 부분부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한 달 전 네가 하혈을 한 것은 여아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란다. 그리고 그것이 여인으로서 한 달에 꼭 한 번은 겪어야 하는 달거리라는 것이지. 달거리란 것은 너도 들어봤을 테니 알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실, 그날 네가 미리 겁을 먹고 기절을 했었을 때 이 사부가 깨어난 다음에 곧바로 설명을 해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와 남편에게 달거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으신 소문주님께서 본인이 말씀해주시겠다 하여 우리는 이의를 달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게지. 네가 창피하지 않게. 그런데 지금에 와서 네가 모른다고 하니, 이 사부가 심히 당황한 상태이다. 어찌된 연유인지 자세히 설명해보거라.”
사부님에게 말씀을 듣는 내내 진땀을 흘려대던 소연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던 민소희는 소문주가 막상 말을 꺼내려다 창피해서 그만두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알았으니 고의 안에 천을 몇 겹으로 접어서 넣어두고 피가 흐르지 않게 조심하거라.”
소연은 불안했다.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보았다.
“그, 그렇다면 제, 제가 깨어났을 때 거기가 아팠던 것은 어째서지요? 원래 처음에 달거리를 하면 그곳이 아픈 건가요? 그런 건가요?”
민소희는 제자의 거기가 왜 아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미를 살짝 모았다. 그런데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문주께서 제자의 그곳에 옷을 집어넣어서 통증을 느낀 모양이로구나.’
예전에 소문주에게 소연의 성격을 들었었던 민소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소문주가 설명을 안 해줬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 생각하자 정황이 딱 들어맞았다. 생각해보라 만약 이 사실을 소연이 알았을 때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과적으로 동천에게 책임지라고 발악을 했었지만, 민소희는 행여 제자가 자결을 할까 싶어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처음에 달거리를 할 때에는 모두 그곳에 통증을 느끼는 거란다.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거라.”
“예? 저, 정말이에요?”
경악을 한 소연은 몸 전체가 경직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민소희는 제자가 의구심을 풀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대의 표정을 짓자 혼란스러웠다.
“왜 그러느냐?”
소연은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힘없이 일어났다.
“아니에요. 저……, 이만 가봐도 될까요?”
민소희는 제자가 충격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하거라. 며칠 쉬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온 소연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때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오해를 해서 주인님께 발악을 했던 일. 책임지라고 했던 일. 또 과감하게 밤에 찾아들어가서 해도 된다고 했던 일. 그리고 근 한 달 동안 같이 껴안고 잤던 일……. 소연은 그동안 주인님이 어거지를 써댄 자신을 얼마나 비웃었을까 생각했다.
‘흑흑, 죽고 싶어.’
그녀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자신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한편, 내일 사정화에게 간다는 생각에 심란한 마음으로 오후를 보낸 동천은 밤이 되어 잠을 자려고 하는데 무언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꼈다.
“얼레? 그러고 보니 소연이가 없잖아? 잘 때 되면 잘도 기어오던 게 안 오니까 그게 또 그렇네? 얘가 어디 가서 안 오는 거지?”
화정이가 곁에 있었지만 막상 소연을 놔두고 잔다고 생각하니까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동천은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소연의 방으로 가봤다.
“야, 소연아. 거기 있냐?”
동천이 말문을 열고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 갑자기 안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열지 말아요!”
찔끔한 동천은 얼떨결에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막상 물러나고 보니 화가 났다. 동천은 방문을 확 열어젖힌 후 어두컴컴한 방안에다 소리를 질렀다.
“이게 죽으려고! 어따 대고 발악이야? 너 한 번 맞아볼래?”
대답 없이 가만히 몸을 숨기고 있던 소연은 잠시 후 소리 내어 흐느꼈다.
“흑흑흑! 죄송해요. 그냥, 주무세요.”
그 덕분에 동천은 조그맣게 소리를 죽였다.
“야, 왜 울어. 내가 소리를 질러서 그러냐?”
소연은 방안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에요. 제가 못나서 그래요. 흑, 혼자 있고 싶어요.”
멋쩍어진 동천은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지 뭐. 잘 자라. 그만 울고.”
“흑흑흑! 네. 흑흑!”
죄지은 사람 마냥 얼른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온 동천은 다시금 기세등등하게 행동했다.
“저 년은 또 왜 우는 거야? 씨발! 가뜩이나 사정화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쟤가 저러고 있으니까 더 골치가 아프네? 아아, 몰라 몰라! 화정아, 자자!”
“으응.”
동천은 화정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두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내일의 걱정을 다소 덜어냈다. 동천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소연과의 어설펐던 생활은 끝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