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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04화


한순간 멈춰버린 동천이 다소 멍한 얼굴로 장춘을 쳐다보기만 하자 그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이런이런. 처음 봤을 때부터 중소구에게 구박을 받기에 나처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장춘은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허허, 그렇게 반응을 보이…….”

“어르신!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응?”

장춘은 동천이 무슨 저의로 다시 한번 말해달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감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방금 하신 말,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그렇죠?”

비에 젖어 덜덜 떠는 어린 강아지처럼, 길 잃은 개새끼가 어미를 갈구하는 애처로운 눈동자처럼, 장춘의 눈에 비친 동천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그 동안 저 어린것이 얼마나 모진 구박을 받고 지내왔었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불쌍한 것. 미친놈 밑에서 참으로 힘겹게 지내왔었구나.’

장춘의 콧등이 시큰해지는 가운데 동천이 다시 재촉하자 그는 자애롭게 웃으며 대해주었다.

“허허, 그렇단다. 정신이 나갔다 못해 미친놈이지. 그럼.”

스쳐지나가듯이 듣고 있었던 중소구는 장춘의 말이 동천을 지칭하는 것인 줄 착각하곤 신나게 지껄였다.

“푸하하! 그렇지! 바로 그렇지!”

은근슬쩍 중소구를 돌아보는 동천과 장춘.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미친놈…….’

“응? 뭘 그렇게 쳐다보는 겁니까. 본 대인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이까?”

중소구가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의아해할 때 장춘은 알아서 시선을 돌려주었고 뒤이어 동천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이와 세대를 뛰어넘어 그들 사이를 감도는 묘한 동질감. 말은 안 했지만 시선을 교환하는 동천과 장춘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들 곁을 지나가던 행인 둘이 ‘서로 사귀나 봐.’라고 쑥덕였을까. 물론, 그들은 농으로 한 소리였기에 껄껄 웃으며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뒤에서 좌태상 만한상이 앞서가는 이들을 불렀다.

“이보게들, 조금만 더 가면 객점이 나올 터이니 그곳에서 미리 저녁 식사를 하고 늦은 저녁까지 갈 길을 재촉한 뒤, 적당한 곳에서 투숙을 하는 것이 어떠한가.”

장춘은 당연히 만한상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동천은 볼 것도 없이 밥을 먹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승낙을 표했다. 허나, 도연은 꼼꼼하게 물어보았다.

“정오가 지난 지, 아직 두 시진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저녁을 먹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지요.”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기에 만한상은 기꺼이 설명해주었다.

“허허, 지름길로 가는 중간에 꽤 험난한 산이 가로막혀있는데 정확한 때에 저녁을 먹고 가면 밤을 꼬박 세워 산을 넘어야 하지만, 새참 겸 이른 저녁을 먹은 뒤 곧바로 산을 넘는다면 자정 전에는 숙식할 곳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연장자의 확신에 찬 설명에 마침내 도연도 만한상의 제의에 따르기로 했다. 중소구와는 이미 말이 끝난 상태이니 언급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은 적당한 곳을 찾아 걸어가다 홍문객점(紅門客店)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매화육순(梅花肉筍) 한 접시와 오리구이 두 마리. 그리고 차게 숙성시킨 매화주를 부탁하네.”

만한상이 요리를 시키자 주문을 받으러 왔던 꼬마 점소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른 것은 다 있어도 매화육순 같은 고급 요리는 저희 객점에서 취급하질 않습니다.”

자기 딴에 무심코 음식을 시켰던 만한상도 그제야 이곳의 수준을 생각했는지 웃는 낯으로 금세 정정시켰다.

“허허,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럼 그것 말고 이곳에서 제일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생선 요리로 주문을 바꾸겠네. 되었는가.”

“예, 어르신.”

대략 동천과 동갑내기로 보이는 점소이는 손님이 시킨 음식을 까먹기 전에 얼른 사라졌다. 동천과 장춘, 그리고 도연이 차례대로 한자리에 앉았고 맞은 편에 중소구와 만한상이 앉아있었는데 동천과 장춘은 철저하게 중소구를 무시하려는 듯 전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쯤 되니 중소구가 바보 아닌 이상 지금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동천보다 훨씬 비중이 높은 장춘에게 물었다.

“뭔가 생각하시는 듯싶소이다만.”

장춘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중소구를 응시했다.

“별것 아니라오. 그저 바깥 풍경이 한산하고 정겨워 보이기에 계속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오.”

마침 장춘이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지라 그의 대답에서는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중소구의 시선이 동천에게로 향한 것은 어쩌면 분풀이 겸 만만한 상대를 찾기 위한 속셈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동천은 그 나름대로 먼저 선수를 쳤다.

“저도 그런 이유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중소구는 코방귀를 뀌었다.

“흥! 네놈한텐 안 물어봤다.”

그러자 동천도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저도 중 대인이 아니라, 만 어르신께 이야기한 건데?”

‘윽! 저놈의 자식이!’

중소구의 안면이 일그러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앞에서 기도 못 폈던 녀석이 황룡세가를 나올 때부터 대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놈이 돌았나?’

당혹스러워하는 중소구. 그와 반대로 동천은 내심 웃고 있었다.

‘히히, 복수의 시작은 기본부터다. 차근차근. 이히히히!’

만한상은 동천으로 인해 자신이 들추어졌으나 괜한 알력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그저 잔잔한 웃음만을 지어 보였다. 동천에게 알아들었다는 무언의 대답을 해주고 자신은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든든한 육장로 때문인지 전혀 위축됨이 없이 콧대를 세우고 있던 동천은 아까의 꼬마 점소이가 커다란 쟁반 위에 모든 음식을 올려놓고 뒤뚱거리며 다가오자, 재빨리 달려가 점소이를 거들어 주었다.

“이봐, 뒤엎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한꺼번에 들고 온 거야.”

점소이는 굉장히 무거운 것을 동천이 가뿐히 들자 깜짝 놀라 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황급한 사과가 먼저였던 것이다.

“손님까지 나서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도 못하면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처지라서…….”

동천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중소구가 대뜸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놈은 너를 위한 게 아니라 아까운 음식이 날아갈까 봐 도와준 거니까.”

그러자 동천이 아닌 육장로 장춘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 대인. 어찌 사람의 호의를 그렇게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소이다.”

중소구는 눈을 확 치켜떴다.

“뭐요?”

장춘은 네가 눈알을 치켜떠봤자 별거 있냐는 눈빛을 보냈다.

“어찌 화부터 내시오. 본인의 말이 틀렸소이까? 잘 생각해 보시오.”

잘 생각해 보라는 소리에 중소구는 화부터 가라앉히고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정말로 자신이 잘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눈곱만큼도 말이다.

‘분하지만 도 소형제가 지켜보고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군.’

불리해진 그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뭐,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구료. 이번 일은 내가 경솔했소. 인정하오.”

장춘은 사과하는 중소구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삐딱하게 대꾸하는 저 모습이 어디를 봐서 사과하는 거라고 생각되겠는가. 허나, 솔직히 중소구가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던 터라 그도 대범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시다면야.”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추이하고 있었던 동천은 점잖게 끝나자 내심 안타까웠지만 겉으로는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리곤 자신과 또래인 점소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런 고생도 다 약이라 생각하고 참아. 그리고 힘들 때면 꼬마 점소이들이란 노래를 부르면서 견디라고. 알았지?”

점소이는 그런 노래의 제목을 처음 듣는지라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꼬마 점소이들이요? 그런 노래도 있었나요?”

그러자 동천이 더욱 의아해했다.

“너 그 유명한 노래도 몰라? 동씨 성을 가진 분이 작사, 작곡, 편곡. 그 모든 것을 도맡아 해서 한때 안휘성 일대의 너 같은 어린 점소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었던 그 전설의 노래를?”

성이 동씨라면 누가 지었는지 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가 없었던 이 순진한 점소이는 자신이 점소이 생활로 뛰어든 지 얼마 안 돼 그 유명한 노래를 모르고 있는 줄만 알았다.

“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이곳 생활이 얼마 안 돼서 잘…….”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넌 오늘 날 만나서 다행인 줄이나 알아. 이 노래를 모르면 점소이 세계에서 따돌림을 당하니까 말야.”

점소이는 긴장된 기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동천은 만족스러웠던 듯 씨익 웃었다.

“좋아, 이제부터 그 노래를 들려주지. 잘 들어.”

점소이는 그렇게 대단한 노래인가 싶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동천이 꼬마 점소이들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점소이~. 네 꼬마, 다섯 꼬마, 여섯 꼬마 점소이~. 일곱 꼬마, 여덟 꼬마, 아홉 꼬마 점소이~. 열 꼬마 점소이들~!”

“…….”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가만히 듣고 있었던 점소이는 그것을 끝으로 동천의 입이 굳게 다물어지자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그게 끝인가요?”

아니라는 듯 혀를 차는 동천.

“쯧쯧, 어째서 그게 끝이겠어. 이 노래의 핵심은 무한으로 반복된다는 것. 즉, 음정이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노래가 끝나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이 이 노래의 장점이자 거듭되는 장점이기도 하지. 자, 따라 해 봐.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점소이~. 네 꼬마…….”

뭔가 이상했지만 사람의 심리가 참으로 오묘해서 듣고 보니 대단한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전설로 불린다는 그 ‘꼬마 점소이들’이라는 노래를 마침내 전수받고야 말았다.

“감사합니다. 손님께서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동천은 이 어리고 불쌍한 중생에게 삶에 보탬이 되는 것을 가르쳐주어 참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그보다 이따가 쉴 때 점소이들이 모이면 한번 멋지게 불러보라고. 그럼 다음부터 네 인생은 활짝 필 거니까.”

“예, 손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동천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나간 뒤 이 순진한 점소이는 열심히 새겨들은 노래를 이곳 점소이들에게 선보였고, 그는 그날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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