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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14화


“그러니까 뭐라는 말인가요.”

추궁하듯 물어오는 황룡미미의 어조는 절로 동천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무리 못 알아본다 하여도 동천의 심리 깊은 곳에서는 아직까지 두려움이란 것이 잔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 말을 못하죠?”

동천은 쫄아버린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는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리쳤다.

“내가 참견한 이유는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황룡미미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던졌다.

“자격? 훗,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당연히 자격이 있습니다. 며칠 전, 만 어르신의 말씀이 제가 원한다면 추연을 제 몸종으로 주시겠다고 약조를 하셨거든요.”

바닥에 엎드려 전전긍긍하고 있던 추연은 그 말에 기겁을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고, 공자님! 어찌 그런 말씀을…….”

동천은 넌지시 추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이건 다 미미 년이 재수 없게 행동해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내 책임이 아니라 미미 년 책임이라는 말이야.’

그가 책임 회피에 급급한 사이, 너무도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황룡미미는 당황해하는 추연의 목소리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무엄하군요!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다니, 본가를 우습게 보는 건가요?”

동천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간만에 발휘된 정신력으로 꿋꿋이 버티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러자 황룡미미가 싸늘하게 말했다.

“흥! 좋아요.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이 추연을 데려갈 수 있는지 타당한 설명을 해봐요.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할 시에는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동천을 향한 그녀의 호칭은 동 공자에서 어느새 당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허나, 궁지에 몰린 쥐가 ‘휴우, 도망갈 곳이 없네요. 잡수세요.’라고 순순히 머리를 내밀 것 같은가?

“물론입니다. 잠시 후 만 어르신께서 오시면 진상이 가려지겠지만 그 전에…….”

당당히 나가던 동천이 말끝을 흐리자 황룡미미가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그전에 뭐지요?”

동천은 ‘그전에 추연에게 확인해보십시오.’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난처해질까 봐 입을 다문 것이었다. 황룡미미의 쌍판을 봐서는 ‘당장에 확인해봐!’ 하고 싶었지만 그놈의 옛정이 뭔지……. 마음이 약해진 동천은 차마 추연을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태연하게 말꼬리를 돌렸다.

“그전에 배를 채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직감으로 엉뚱한 소리라는 것을 눈치챈 황룡미미는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사양하겠어요.”

동천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말던지. 아? 어르신들 식사하시겠습니까?”

그제야 방관자 입장에서 깨어난 그들은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흐음, 글쎄.”

“시, 식사? 본 대인은…, 찬성이다.”

동천은 마지막으로 도연을 바라봤다.

“너는?”

주군이 잠시 휴식을 원한다고 생각한 도연으로서는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련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리하여 때아닌 시간에 이른 점심을 먹게 된 사람들은 싸늘한 바람이 이는 가운데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리라.

“와득, 아그득! 짭짭, 쩝쩝. 꾸울꺽!”

부진한은 분위기에 전혀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손과 입을 놀리는 동천에게 결국 한마디 건네주었다.

“……참 식성이 좋구나.”

말이 ‘식성이 좋구나.’ 지, 머리가 약간이라도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좋은 뜻으로 건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천에게 두뇌회전을 바라는 것은 뒤집어진 거북이에게 똑바로 서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칭찬인 줄 알고 먹는 것에 더욱 열중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 내두르는 가운데 볼일을 마치고 잠깐 들른 만한상은 황룡미미를 발견했는지 엄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아가씨, 어찌하여 이리도 경거망동하십니까. 가주께서 얼마나 걱정하실지 생각이나 하시고 따라오신 겁니까?”

움찔한 황룡미미가 당당하게 대꾸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전에 확실히 알아둘 것이 있어요. 추연을 저자의 몸종으로 준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죠?”

만한상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허어,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동천에게로 향했다. 황룡미미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천에게 초점을 맞춘 만한상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하하, 그게 말이죠.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요.”

만한상이 부인하지 않자 황룡미미는 싸늘한 분노를 터트렸다. 아무리 좌태상이라지만 그녀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일을 벌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좌태상께서는 제 몸종까지 마음대로 처리할 만한 명분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만한상의 고개는 의외로 쉽게 끄덕여졌다.

“그럴 만한 명분이 있었으니 본 좌태상이 임의대로 처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룡미미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되는!”

만한상은 한숨을 내쉬고 동천 일행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휴우, 실은 저들이 아주 귀한 물건을 본가로 가져와 가주님께서 사례를 해드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일단 가주님께서 물러나셨으나 이번에 저와 육 장로가 떠날 때 당부하시길 ‘저들을 따라가 편의를 봐주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한 들어주도록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허나,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추연에 관한 부분은 농담 반으로 건넨 이야기인지라 저도 섣불리 허락할 수는 없으니 자중을 하시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동천은 깜짝 놀랐다.

‘응? 가주님께서 사례를 하신다고 했는데 사양했다고? 언제?’

그러고 보니, 천마도해라는 엄청난 보물을 건네주었는데 아무것도 안 받았다는 게 이상했다. 아직 진본이 확실하지 않다 하여도 너무 소홀한 대접인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동천은 도연을 팔꿈치로 찌르며 전음으로 물었다.

<야, 언제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었냐?>

도연의 입장에서는 이 일을 감추고 싶어했지만 (알면 난리가 날게 뻔하니까)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떠나기 전날 밤에 황룡 가주님께서 사례를 하고 싶다 하셨는데 중 대인께서 극구 거절을 하셨습니다.>

“뭣이?”

동천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은 약간의 오해를 하게 되었다. 시기적절한 동천의 외침이 ‘이제 와서 추연을 못 주겠다는 소리야?’라는 의미로 전달된 것이다. 그에 실소를 한 만한상은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지금의 네 행동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때 너도 분명히 말도 안 된다며 거절하지 않았더냐.”

비록 고의가 아니었지만 사태가 이런 지경까지 처하게 되자 은근히 똥 배짱만 늘어난 동천은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다.

“방금 말씀을 드렸다시피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질 수 없다고 생각한 황룡미미는 대뜸 반격에 나섰다.

“과연 그럴까? 일단 당신이 거절을 했으니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니 당신의 말은 억지야.”

동천은 황룡미미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씨팔 년. 이제 막 나가네?’

동천의 생각대로였다. 그녀의 입에서 단어라는 존재가 튀어나오면 튀어나올수록 점점 반말 비슷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진행된다면 ‘너, 야, 네놈.’과 같은 말들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동천뿐만이 아니었던지 무게 있는 도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야기하실 때 신경을 좀 써주십시오. 도련님께서는 아가씨에게 그런 수준의 말을 들을 정도의 신분은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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