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15화
“감히 하인 주제에…….”
“하인이 바른말을 하면 죄가 되는지요.”
황룡미미는 욱하는 것 같았지만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동천에게 간단히 말했다.
“실수를 했군요.”
싸가지 없게도 그녀의 사과는 그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태가 진정되었고 이를 놓칠 수 없었던 만한상은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추연이 물건이 아닌 이상 이 문제는 가주님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인 고로, 잠시 보류를 하겠다. 동철은 알겠느냐?”
만한상이 안 된다고 거절했어도 동천은 순순히 물러서려 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생각 없이 나선 것에 대한 명분을 원했던 것뿐이니까. 그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 없습니다.”
황룡미미는 만한상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마지못해 수긍했다.
“저도 없어요.”
“휴우, 그럼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
만한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정신이 맑아진 그는 그제야 잠시 미뤄두었던 본론을 꺼내 들었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니 잘 듣기 바라오. 본인이 제갈세가까지 방문하여 제갈 가주께 상세한 소식을 전달하려 했으나, 예상을 깨고 그분께서 친히 이곳까지 와주신 덕분에 그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되었소. 그래서 본인을 비롯한 아가씨와 추연은 곧바로 제갈세가의 분들과 본가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부진한 자네는 여기 중 대인을 비롯한 아이들을 제갈세가까지 정중히 안내하라는 제갈 가주님의 명이 있으셨으니 그리 알게나.”
부진한은 그러겠다고 말했지만 황룡미미는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이 다시 되돌아가게 되자 울컥하여 소리쳤다.
“저는 연(淵)아를 만나러 온 거예요! 이렇게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일단 제갈세가의 사람들과 만나면 아무리 만한상이라 해도 체면 때문에 동행을 허락할 줄 알았는데, 그들이 전부 본가인 황룡세가로 간다고 하자 숨어서 쫓아온 며칠이 너무도 억울했던 것이다. 남 보기가 창피하여 얼굴을 붉힌 만한상은 ‘가주의 딸내미만 아니었어도 그냥!’이라는 생각만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부진한이 조심스레 나섰다.
“마침, 저희 아가씨께서도 미미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시던데…….”
끌면 끌수록 손해니까 그냥 허락하는 게 어떠냐는 뜻이었다.
“으음!”
잠시 고심하던 만한상은 하는 수 없이 허락해야만 했다. 급한 문제는 이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수고 좀 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만한상은 부진한의 대답을 듣고 추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아가씨를 잘 보필해드려라.”
추연은 자신의 불안한 미래 때문인지 어두운 얼굴이었으나 곧바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으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만한상은 황룡미미에게 따로 당부를 받았다.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걸 알아두십시오.”
확정이 되어 금세 기분이 좋아진 황룡미미는 유쾌하게 웃었다.
“호호,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 심려하지 마시라고 말씀이나 잘 드려주세요.”
만한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야지요. 그럼, 이제 가봐야겠군요. 제갈 가주님께서 사람들과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가 헤어질 채비를 하자 사람들은 서둘러 인사를 올렸고, 나오지 말라고 당부한 만한상은 떠나는 내내 한숨을 입에 매달았다. 물론, 제갈가의 사람들과 돌아갈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말이다.
“좋아요. 이것으로 점심은 먹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곧바로 제갈세가를 향해 가도록 하죠.”
드디어 방해자가 없어진 황룡미미는 오만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에게 섣불리 대할 수 없었던 부진한은 내심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잘 따라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미미 아가씨. 마차를 준비할까요?”
치켜떠지는 황룡미미의 눈썹.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치켜떠지는 동천의 눈깔.
‘아주 살판났구만, 자리 깔아줄까?’
동천의 눈은 앞머리가 가리고 있는 상태인지라 어떠한 변화를 주어도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 한 알아채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러니 지 마음대로 치켜뜰 수밖에. 그녀와 동행하게 되어 심란해진 동천은 당분간 자중하며 없는 듯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리시지요.”
일주일 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했던 동천은 정신적인 피곤에 절어 약간 날카로워진 눈매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눈매는 중소구가 노려보자 눈 녹듯 사르르 풀려졌다. 동천은 먼저 내린 뒤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도연에게 말문을 열었다.
“다 왔냐?”
도연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려졌다. 무언가를 보는 듯싶었다. 잠시 후 고개를 원위치 시킨 그는 주군에게 대답했다.
“현판에 제갈세가라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런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야 정상이건만 동천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지금 그거 웃으라고 한 거냐?”
“안 웃깁니까?”
그냥 해본 소리인데 도연은 진짜로 웃기려고 했던 것 같았다.
“…….”
동천의 혈압이 쭉쭉 내려가는 가운데 중소구가 도연을 돕고자 나섰다.
“사내자식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동천의 뒤에서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는 안 그래도 짜증 나 있는 그의 기분을 더욱더 하강시켰다.
‘으으,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감히 이 몸을 배신하고 미미 년과 짝짜꿍 놀아나? 저 새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몸이 죽이고 말 거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마차를 타고 제갈세가로 향할 때 두 대의 마차를 대여해 한 곳은 부진한, 황룡미미, 추연이 타고, 다른 한 곳은 동천 일행이 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중소구와 황룡미미가 짝짜꿍 놀아날 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 왜 동천이 그렇게 씹어 댄 걸까? 이유는 첫날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원체 독단적이었던 황룡미미가 주변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감상을 하자고 마차를 멈춘 것이다. 그러니 같이 가야 했던 동천 일행으로서는 멈춰야만 했고 덕분에 그날 오후는 미미의 나들이로 끝나고야 말았다.
처음 도둑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 있듯, 맛이 들린 황룡미미는 온갖 핑곗거리를 내세워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나섰고 덕분에 사흘이면 도착할 거리를 일주일이 되어서야 도착하게 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행동 뒤에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게 중소구였다. 만사태평이었던 중소구가 풍류를 즐긴답시고 황룡미미의 행동을 적극 찬성했던 것이다.
이에 기세가 오른 황룡미미는 단순한 중소구를 다독여가며 물놀이까지 즐겼고, 죽은 듯이 있어야 했던 동천으로서는 매일매일 분노를 가라앉히며 이를 갈기만 했으니 어찌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호호, 참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동천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매섭게 상체를 비틀자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진한의 모습이 보였다. 내색은 안 했어도 아마 철부지 계집애 때문에 속 꽤나 상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가씨께서 즐거우셨다니 저로서는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실제 위경련으로 고생하고 있는 중이었다. 꼴도 보기 싫은 미미에게 시선을 거두고 묵묵히 부진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동천은 무언가 잘 짜여진 구조물들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자 유심히 그것들을 관찰했다. 허나, 그런다고 그가 뭘 알겠는가. 진법에 관해 무식한 아이가 말이다.
“이상한 거라도 있습니까?”
도연의 물음에 동천은 손을 휘저었다.
“아냐, 느낌이 좀 그래서 본 거야.”
“느낌이 좀 그렇다뇨?”
“너 같이 어린애는 몰라도 돼.”
그들을 안내하며 가만히 듣고 있던 부진한은 동천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으나 ‘설마, 발동하지도 않은 진법을 느꼈을 리가 없지.’라는 생각에 관심을 거두었다. 어린놈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냐는 생각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대로부터 제갈세가가 안전했던 것은 곳곳의 건물들과 이어진 화단 배치, 그리고 풍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리 매김한 방치된 석주(石柱)들의 위치로 인해 하나의 거대한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어린아이가 한번 훑어보고 ‘어? 진법이네?’라고 말할 만큼 허술한 진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건축 무한 육면각진(建築無限六面各陣)이라 불리는 이 진법은 제갈세가 최대의 비밀이었으며, 제갈세가 자체가 진법으로 이루어진 것을 파악한 기인들은 역사상 단 두 명만이 있었을 정도였다.
“연아는 아직도 화초에 빠져있나요?”
부진한은 황룡미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것은 이제 간간이 취미로 즐기실 따름입니다. 요즘은 가주님의 뜻에 따라 공부에 열중이시죠.”
동천은 부진한이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황룡미미가 살짝 시기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네년 성격이 어디 갔겠냐? 쳇, 지보다 예쁜 애를 보면 그날 밤 잠도 못 자는 성격 더러운 년! 그런 의미에서 며칠 전 미호를 보지 못한 건 천만다행……, 응? 미호? 미호가 누구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이라 막상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려 하니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더군다나 머리도 아파 왔다. 당연한 거지만 그래서 생각을 중단했다. 아픈 건 질색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