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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3화


어둠(暗)…
그 어둠 속에서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독. 드디어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 것 같소.

-무슨 일이냐?

-그게.. 꽤 어렵다고 할 수 있는데..

-흐흐흐.. 나는 뜸 들이는 것을 제일 싫어하지..

-호오? 이런 실례를.. 좋소. 본론부터 말하자면 내 아들을 환골탈태 시켜주시오.

-뭐라? 으음.. 나를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너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보느냐?

-하하하하! 천하의 만독노조 항광이 아니면 내가 감히 이런 부탁을 했겠소?

-…… .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당신이 늙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놈! 내가 그따위 말로 넘어갈 것 같으냐!

-이런이런..?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요?

-꺼져라.

-후후후.. 허락한 걸로 믿고 난 이만 가겠소.

-네 애새끼는 언제 올 거냐?

-일주일 후…

-일주일.. …

-일.. 일.. …

흐려지는 얼굴…
그때 또 다른 암흑에서 하나의 얼굴이 튀어 올라왔다.

-아.. 버지요? 무.. 물론, 잘 계시죠..

-모.. 몰라요. 아버님께서 이곳에 왔다가 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를 않겠다고 하셨었다고요!

-히히! 당연하죠! 내가 누구의 아들인데 좋은 내공심법 하나조차 없겠어요?

-아.. 심심해라. 그 할아범은 아직도 안 오고..

-뭐긴 뭐예요! 옥병이지!

한참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어둠 저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봐.. …요.. 할.. 범..”

조금 후에 더 자세히 들렸다.

“이봐요. 할아범!”

‘할아범? 어떤 자식이야? 감히 나 만독노조에게 할아범이라니? 가만..? 나한테 할아범이라고 부를만한…’

동천이 생각난 항광은 번쩍! 하고 눈을 떴다.

“내.. 냉가?”

동천을 생각한 항광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빛나는 태양이었다. 그다음은 웃고 있는 재수 없는 냉가 자식이 보였다.

“헤헤.. 드디어 깨어났네요? 몸은 어때요?”

일단, 눈을 뜬 항광은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다행히도 몸을 움직일 만한 힘만 없을 뿐 진원지기는 천약뇌수단의 효능으로 어느 정도 보호된 것 같았다. 몸의 점검이 끝나자 그제서야 동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항광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당연히 나오는 말도 고울 리가 없었다.

“이놈! 아직도 더 놀려 먹을 게 남아 있느냐? 차라리 여기에서 나 혼자 죽을 테니, 어서 썩! 꺼지거라!”

항광의 말에 동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정말 그냥 가도 돼요? 정말이라면 나 가요?”

사람의 심리가 묘해서 방금까지 큰소리를 쳤지만, 동천이 왠지 도와줄 듯한 표정으로 간다고 하자 다시 마음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저.. 냉가야. 그냥 해본 말이다.”

항광의 말에 동천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천의 그런 얼굴 표정을 본 항광은 또다시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 생각은 생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히히히!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그 단환을 마저 줄 테니까..”

순간 항광의 눈에서 희망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정말이냐?”

“아따! 속아만 살아왔나!”

“그렇다 임마! 그리고 그게 바로 너다! 이 싸가지 없는 냉가 자식아!”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항광은 애써 참았다.

“그래.. 고맙구나. 너는 내가 처음에 봤을 때, 단박에 착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동천은 뻔한 거짓말인 것인지도 모른 채 칭찬을 받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헤헤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이 단환을 할아버지에게 직접 줄려고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네요.”

동천이 왼손에 하얀 단환을 들고 항광의 눈앞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지만 손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는 항광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 그래.. 네가 착한 건 아는데, 그 단환 좀 빨리 줄 수 없느냐? 아까 너무 무리를 해서인지 지금 힘이 하나도 없다.”

“주긴 줄 건데요..”

동천이 말끝을 흐리며 무언가를 원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 꼬마가 또 뭐를 원하길래 이러는 건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뭐.. 뭐냐? 원하는 게 있느냐? 말해봐라. 그 단환만 준다면 아주 어려운 일이라도 내가 나중에 들어주마!”

“헤헤.. 사실 원하는 게 있긴 있는데…!”

동천이 점점 시간을 끌자 더욱더 불안해지는 항광이었다. 항광이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짓자 동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사실은 제 꿈 중에 하나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헤헤. 천하제일의 미녀와 혼례를 치르는 거거든요? 으히히히히.. 낮 간지러워라!”

동천의 말을 듣자 여태껏 가슴 깊이 쌓여 있었던 불안감이 싹! 하고 쓸려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하하! 난 또 뭐라고.. 지금은 네가 어리니까 안 되고, 네가 다음에 커서 나와 만난다면 그때 네 소원을 들어주마. 어떠냐?”

동천의 부탁은 정말로 너무나 간단한 부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다시 만나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 소원을 들어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정말이죠? 약속했어요!”

동천이 좋아서 방방! 뜨자. 항광의 눈알도 단환을 들고 있는 손에 따라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약속을 지킬 테니 어서 그 단환을 주겠니?”

동천은 단환이 못내 아쉬운 듯 만지작거리다가 항광의 입으로 단환을 가져갔다. 순간 항광의 입 부근까지 내려오던 단환이 멈추면서 동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참? 물어볼 게 있는데요?”

‘씨.. 씹새끼..’

한순간 엄청난 허탈감을 느낀 항광은 힘없는 목소리로 동천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냐…?”

“헤헤.. 다름이 아니라. 소려산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애새끼가 왜 갑자기 웬놈의 산을 물어볼까..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항광으로서는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끄..응.. 네 뒤편으로 계속 밀어붙이고 달려간다면 무사히 소려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제 정말로 단환을 줄 수 없겠니..?”

“아? 제가 너무 할아버지를 기다리게 한 거 같네요. 어쨌든 이거 먹고 나중에 저한테 천하제일 미녀와 혼례를 치르게 해줘야 해요! 알았죠?”

“그래.. 그래. 어서 단환이나 줘라. 정말로 힘이 없다..”

“히히.. 아~! 하고, 입 좀 벌려 보세요!”

“아…”

항광이 누워서 입을 벌리자 입안을 들여다본 동천은 웃으면서 말을 했다.

“어? 히히히.. 할아버지 이빨이 두 개나 빠졌네요? 히히히!”

순간적으로 항광의 인상이 팍! 하고 구겨졌다.

“으윽! 냉가야! 너 정말 나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동천은 속으로 늙은이 놀려 먹는 것도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진짜로 줄 테니까 약속을 지키려면 입을 아~! 하고 벌려봐요.”

항광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정말이냐?”

“정말이니까, 어서 입이나 벌려봐요.”

선택권이 없는 항광..

“아.. 압. 꿀꺽!”

‘돼.. 됐다!’

정말로 단환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항광은 기쁜 마음을 뒤로하고 얼른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한 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항광의 몸에서 푸른 운무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 참, 심법 한번 괴상하네! 히히히.. 어쨌든 나는 환골탈태도 했고, 소려산을 넘는 법도 알아냈으니 어서 가볼까나.. 할아버지! 고마워요…. 히히힛!!”

동천은 정말 뜻깊은 이틀이었다고 생각한 후 사부님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바삐 뛰어갔다. 동천이 사라지자 방금 전까지만 떠들썩했던 주위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신나게 뛰어가던 동천은 자신이 이렇게나 빠르게 달릴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후아? 신기한데? 내가 이렇게나 빨리 뛰어가다니.. 더군다나 숨도 하나 안 차는데? 히힛! 그렇다면 좀 더 속력을 내볼까?”

그렇게.. 신이 난 동천은 단숨에 소려산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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