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39화
그의 변신은 무죄 3.
“헉헉, 짜식이 까불고있어.”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동천의 몸에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쏟아 부은 강호영은 만신창이가 된 동천의 몰골을 대하고 기분 좋게 숨을 들이 내쉬었다.
“후웁, 파아! 아하하, 꼴 좋다!”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딴엔 아쉬운 듯 동천의 몸뚱이를 발로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러다 걸리는 것이 있는지 공현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아, 다 좋은데 말야. 저놈 저러다 죽는 거 아냐? 그래도 명색이 본 세가의 손님인데 저 꼴로 만들어놓으면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좀 그렇지 않을까?”
신나게 패주긴 했는데 그 단순한 머리가 이제야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공현은 동천의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혈맥이 엉켜있고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숨쉬는 정도를 보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 보였다. 그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걱정하지마. 네 말을 듣고 나도 좀 걱정을 했는데, 이놈이 생각보다 튼튼한 몸을 가지고있는 것 같아. 약 좀 다려먹고 요양만 잘 해주면 문제는 없을 거야. 뭐,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든든한 제자 놈이 있으니 잘 치료해주겠지?”
“하하, 공현 네 말이 무조건 맞다!”
나머지 소년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던 공현은 아직까지도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있는 문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있을 시간이 있으면 빨리 가서 네 사부를 치료를 해주는 게 좋을걸? 본 공자가 낙관적으로 말해주긴 했지만 아주 위험한 상태니까 말야.”
“이익!”
문정은 조금만 움직여도 명치부근이 찢어질 듯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러한 고통보다 자존심 쪽을 택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공현을 노려보았다.
“이, 이번 일을 위에서 아시면…, 으읍, 당신들도 무사하지 모, 못할 걸?”
문정에게 눈빛을 고정시킨 공현은 목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치듯 다가왔다.
“그래, 아버님이나 그 외의 다른 분들께 심한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야. 그랬다가는 일러바친 인간이 너라는 것으로 간주하고…….”
스윽.
그의 목검이 문정의 목젖을 살짝 짓눌렀다. 문정은 그것만으로도 콜록거렸다.
“큽, 쿨럭!”
공현은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해코지 없이 목검을 거두어들였다. 돌아가기 위해 한쪽에 모여 공현을 기다리고있던 강호영은 참기 어려운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현아, 그딴 놈 놔두고 빨리 와! 나 배고프단 말야!”
“알았어.”
동천의 몰골을 지나치듯 다시 한번 살펴본 그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작에 물러섰으면 좋았을 텐데, 감히 주제도 모르고 까불었던 것이다.
꿈틀.
“응?”
공현이 갑자기 놀람을 발하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강호영이 혹시나 하여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냐?”
한 순간 동천의 어깨가 움찔했던 것을 보게된 공현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동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잘못 봤나? 그래, 고통으로 인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꿈틀거린 것일 수도…….’
별 것 아니라고 답해주려는 찰나였다. 번쩍, 동천의 눈이 뜨여졌다.
‘헉?’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선 공현은 자신이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자 곧 침착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쳇, 나도 참. 다 죽어 가는 놈이 눈 좀 떴다고 이렇게까지 놀라다니.”
그 사이 일행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그래. 저놈이 눈이라도 떴어?”
“형님, 괜찮으십니까?”
동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의식이 돌아온 것만은 확실했다. 공현으로서는 자신이 놀려줄 기회가 적었는데 이렇게되고 보니, 앞으로의 즐거움을 혼자만 만끽하고싶어졌다. 그는 차분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됐어, 올 것 없어. 아무 일도 아냐.”
강호영은 아무 것도 아니자 배를 쓰다듬으며 불평을 터트렸다.
“너 자꾸 그러면 나 먼저 간다? 배고프단 말야!”
알아서 하라는 듯, 대꾸도 없이 여유자적 동천을 향해 걸어가던 공현은 뜻밖의 말을 들어야만했다.
“다가오지마….”
멈칫!
차가운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멈춰버린 공현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다가가면 어쩔 건데?’ 라는 얼굴로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동천의 검은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발했다.
“경고했다.”
주춤한 공현은 지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동천의 눈동자와 마주보았다. 마주본 칠흑색 눈동자는 기분 나쁜 무언가가 일렁이는 듯 보였다. 속이 거북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숨결이 차츰 거칠어졌고 전신이 식은땀으로 물들어갔다.
‘제길, 재수 없는 눈빛이야.’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압박감은 알 수 없는 존재가 흘려보내는 입김인 듯 끈적끈적한 숨결을 내뿜으며 그의 정신을 옥죄어갔다. 공현은 점차 그 강도가 거세 지자 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누가 네 눈빛이 무서워서 고개를 돌린 줄 아느냐? 다만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그랬을 뿐이다, 어린놈아.’
서서히 공현의 고개가 돌려지는 가운데 동천의 두 발은 어느새 대지 위를 밟고 서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잠시 멍청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던 제갈연이 정신을 차렸다.
“으, 으응? 왜?”
올해로 열 다섯인 시녀는 소녀 티가 물씬 풍기는 얼굴로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정신이 돌아와서 안심이네요. 전 아가씨가 하도 넋을 놓고 계시기에 어떻게 된 줄 알고 깜짝 놀랬었어요.”
제갈연의 양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랬어?”
아가씨의 얼굴 변화를 유심히 살펴본 시녀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어머,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셨네?”
“부, 붉어지다니. 너도 참.”
시녀는 짓궂게 말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허둥대시는 건 또 뭘까? 흐응, 꿈속에서 미래의 낭군을 만나셨나?”
순간 제갈연이 과민반응을 보이며 시녀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퍽퍽퍽퍽!
“어머, 어머, 그 무슨 소리니?”
어깨가 부러지는 줄 알고 경악을 했던 시녀는 곧 정신을 차린 뒤 약간 물러나 입을 열었다.
“아, 아니셨다니…, 그것으로 됐어요.”
그녀가 그렇게 물러날 태세이자 잠시 머뭇하던 제갈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실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예에에에? 정말이세요?”
시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들었다. 상체를 뒤로 물린 제갈연은 다시금 얼굴을 붉히며 꿈꾸는 소녀가 되었다.
“그래, 난 그 공자의 순수한 면이 마음에 들어. 어떨 때는 너무도 순진해서 내가 당혹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순수함에 물들어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
시녀는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더욱 많은 정보를 원했다.
“그분이 누구인데요? 어디에 머무세요? 생김새는 요? 나이는 요? 명문가의 자제예요? 그럼, 그분께도 멋쟁이 시종이 붙어있겠네요? 꺄아, 좋아라!”
“…….”
이 상황에서 자신의 몫(?)을 차지하려 하다니. 제갈연은 내심 무서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씨의 시선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된 시녀는 곧 어색하게 웃었다.
“호, 호호. 제가 마지막에 했던 말은 잊으시고요. 말씀해보세요.”
제갈연은 생각을 바꾸어 자세한 사항은 빠트리기로 했다.
“그분 공자는 지금 본 세가에 머물고 계셔. 하인도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용모도 그런 대로 단정하지만 걸리는 것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는 거야.”
시녀는 12살이 10살을 좋아한다고 하자 기가 막혔지만 겉으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좀 그렇겠네요.”
제갈연은 풀이 죽은 얼굴로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시녀는 아가씨의 그런 모습에 차마 ‘예.’ 라고 못을 박을 수 없었다.
“아, 아뇨. 그러니까 제 말은 당장에는 무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관없을 듯 보인다고요.”
그러자 제갈연의 얼굴에 금새 생기가 감돌았다.
“호호, 그렇겠지? 이곳에는 너무 계산적으로 사는 또래들만 넘실대서 나중에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그분 공자가 나타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꼭 그렇지만은 않을걸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니?”
“음, 그러니까 방금 아가씨가 말씀하신 계산적으로 사는 또래들 말이에요. 이곳에 자주 들르시는(그러나 별 소득을 못 보는) 공 공자님과 강 공자님들만 해도 성격이 활달하시고 배려하는 마음씨가 곱잖아요. 남자 분들에게 마음씨가 곱다는 것은 실례인가?”
제갈연은 나직이 혀를 찼다.
“네가 나와함께 있어서 헤헤거리는 모습만 봐서 그래. 밖에서 그들은 벌써부터 기녀원(妓女院)이나 출입하고 손버릇도 고약한 자들이라고.”
시녀는 대뜸 얼굴이 벌개져 물었다.
“소, 손버릇이라면……. 저, 저어.”
제갈연은 대뜸 미간을 찌푸리고 시녀의 손등을 아프게 꼬집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니? 그 손버릇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을 괴롭힐 때를 말하는 손버릇이야.”
“아아, 저는 생각이 미천하여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갈연은 상관없다는 듯 두 손을 모아 턱을 괴었다.
“혼자서 못하니까 단체까지 만들고…, 최저야. 그렇게들 자신이 없나?”
시녀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건 그분들이 아가씨를 너무도 사랑해서 독차지할 수 없음을 알고 서로들 눈치만 보며 애태우고있는 거잖아요.”
“내가 물건이니? 독차지하게? 그리고 뭐가 눈치만 보며 애를 태운다는 거지? 그 단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공 공자와 강 공자만을 위한 단체잖아! 나머지는 누가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 끌어들인 거라고!”
아가씨가 버럭 화를 내시자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
“예예, 모두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너무 분노했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그녀는 곧 화를 풀었다.
“미안해. 난 그런 단체 같은 것이 창피할 따름인데 네가 그렇게 말해서 잠시 화가 났을 뿐이야. 이제는 괜찮아졌으니까 너도 마음쓰지마.”
시녀는 ‘예.’ 라고 대답은 했지만 아가씨의 얼굴이 계속 어둡자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괜찮다고 하셨으면서 왜 아직도 편찮은 얼굴이세요?”
제갈연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방금 전의 일들은 괜찮아. 하지만 엊그제의 일이 생각나 창피해죽겠어.”
“뭐가 그리도 창피하지요?”
제갈연은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글세, 처음에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에 대해 그분과 언성을 높일 때 내가 그 공자에게 빌어먹을 이라고 한 거야. 내가 그런 저속한 말을 내뱉었다니. 그 공자는 분명히 이해해줬겠지만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어.”
시녀는 가슴아파하는 아가씨를 위로해주었다.
“괜찮아요. 원래 아가씨는 귀중한 난초가 어떻게되면 가끔 그러시잖아요.”
제갈연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 그럴까?”
“물론이에요. 근데…….”
“근데? 근데, 뭐?”
시녀는 신중하게 물었다.
“그 공자의 하인은 멋진가요?”
“…….”
일어난 그는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처음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는 강호영 일행이 보였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가슴을 부여잡고 막 일어서려던 문정의 모습이 보였다. 혀로 입안을 오물거려 피 섞인 침을 뱉어낸 그는 이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끊고, 왼손을 들어 흙먼지 뭍은 상의자락을 털어 냈다. 그는 마치 눈앞의 공현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흙먼지 하나 하나를 꼼꼼히 털어 내며 자신의 몸 상태를 진단해나갔다.
‘오른쪽 어깨 탈골. 좌우로 갈비뼈 손상. 위장 부근에 걸쳐 극 통증. 허벅지부터 그 아래로 심한 타박상. 그에 따른 체력저하와 기혈 손상……. 엉망이군.’
동천은 표정 없는 인형처럼 탈골된 어깨뼈를 맞추었다.
우둑, 우드득!
그 소리가 신호였다. 다급히 정신을 차린 공현은 목검을 중단세로 놓고 이를 갈며 위협했다.
“이놈, 그대로 누워있었으면 편했을 것을 괜히 일어나 다시금 고통을 자초하다니! 너도 참 멍청하구나!”
동천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툭 내뱉었다.
“잠깐 기다려. 아직 덜 맞춰졌어.”
공현은 정신이 멍해졌다.
‘뭐, 이런 자식이 다…….’
그로서는 저렇게 무심하고 현실감 없는 대사를 지껄이는 자를 처음 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방금 전의 그가 아닌 것처럼 대놓고 반말에다, 공세를 가할 듯 위협하고있는 상대에게 고작 한다는 소리가 아직 덜 맞춰졌으니까 기다리라니.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황당한 이야기가 아닌가.
비단 멍청해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놈이 일어난 거 맞아?”
직접 때린 놈의 말이었다.
“제 눈이 틀림없다면 마, 맞습니다.”
직접 목격한 놈의 말이었다.
“어떻게 저런 몸으로 일어난 수가…….”
입다물고있기 뭣해서 떠벌린 말이었다.
아무튼, 일어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사람이 바뀐 듯 행동하자 모두들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리고 멀리서 동천의 얼굴을 살펴보던 문정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 사부가 맞긴 맞지만 뭔가 틀리다! 성격이 다시 바뀐 거야……. 그렇다고 예전의 그가 아닌…, 차갑고, 내, 냉철하고, 그리고…….’
동천은 돌연 그 서늘한 눈을 들어 공현을 응시했다.
“약속대로 내가졌으니 제갈 소저에게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문정은 몸을 한껏 움츠렸다.
‘그, 그리고, 무정하다…….’
동천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상대의 눈초리에 이유 모를 한기를 느껴야만했던 공현은 뜻밖에 그가 쉽사리 물러날 태세를 보이자 엉뚱한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 알고 보니 속은 아직도 엉망인가 보구나. 하긴, 그사이에 회복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흐흐, 감히 안 그런 척 이 몸을 속이려했단 말인가? 개자식, 죽여버리겠다!’
그는 여유를 되찾고 목검을 한쪽 어깨에 턱 걸쳤다.
“하하, 네가 인정을 했으니 물러나 주겠다만 그런 몸 상태로 갈 수 있겠느냐? 원한다면 이 형이 부축해주겠다.”
동천은 다시 한번 맞춰진 팔 상태를 확인하며 조용히 말했다.
“말조심하시오.”
흠칫한 공현은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 양손으로 목검을 꼭 쥐었다.
“뭐, 뭐라고?”
그제야 동천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관심을 돌렸다.
“머리가 나쁜 것 같아 좀더 자세히 말해주지. 말조심하라고 했다. 난 하대 받을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다.”
성질이 급했던 강호영은 참을 수가 없었던지 비호같이 몸을 놀렸다.
“이놈이 맞고 일어섰더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그런 놈에겐 매가 약이지!”
강호영이 쏜살같이 달려들자 마침 껄끄러운 점이 있었던 공현은 은근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강호영은 마음껏 싸워보라는 뜻으로 알고 기세 좋게 주먹을 휘둘렀다. 동천은 피하지 않고 목도를 쭈욱 내밀었다. 어느 쪽이 더 길겠는가.
“컥? 아이고!”
동천은 강호영이 명치부근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자, 공현에게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곳을 맞으면 숨이 좀 막히지. 안 그렇소?”
‘윽? 저, 저게 감히!’
동천은 공현이 질린 얼굴로 한발 물러서자 그에게 엷은 웃음을 지어주었다.
“저는 손님의 신분이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바랄 뿐이죠.”
이어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자아, 볼일은 끝난 것 같군요. 저도 돌아가서 쉬어야하니 그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심경으로 손익을 따진 공현은 결심한 듯 강호영을 부축해 장내에서 빠져나갔다. 다른 아이들까지 모두 그들을 따라가자 홀연히 남게된 동천은 손짓으로 문정을 불러들였다.
“나는 몸 상태가 안 좋다. 안전한 곳에서 요양을 해야겠으니 가능한 빨리 거처로 안내하거라.”
“예, 사부님.”
두려운 마음으로 동천을 안내한 문정은 한참을 지나 그를 방으로 들여보낸 뒤 초조한 얼굴로 바깥에서 서성였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에 몰두했던 도연은 때가 지났음에도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자 숨을 고르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왔다갔다 거리는 문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정아, 무슨 일이지?”
흠칫한 문정은 그를 발견하더니 조금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그, 그게 말입니다. 돌아오실 때 이곳 공자님들과 싸우셨는데 잠시 기절하셨다가 깨어나시더니 또 성격이 바뀌셨습니다. 지금은 안에서 요양을 하시는 중이고요.”
동천의 방을 힐끔 쳐다본 도연은 다시 문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설명해봐.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뜻이야?”
고개를 마구 저어댄 문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다 듣고 난 도연은 잠시의 침묵 끝에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들어가 보겠습니다.”
문을 중간쯤 열어갈 때 동천의 정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생각할 문제가 있다. 먼저 식사들하고 찾아오너라.”
그 말은 식사를 거르거나 나중에 따로 먹겠다는 소리였다.
‘식사시간을 거르겠다니…….’
놀란 도연은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주군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명령대로 하겠다고 했지만 감히 이 상황에서 그 누가 식사를 하겠는가. 애태우는 마음으로 부르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은 마침내 동천이 부르자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동천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자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도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문정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안색이 좋으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도연의 말을 받아 동천이 억양의 고조 없이 말했다.
“무리하게 도법을 펼치다 내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이 무리됨을 알고 그 즉시 거두었던 탓에 큰 화는 모면했다. 내 몸을 생각해주었다니 기쁘구나.”
도연은 꿇어앉은 상태에서 상체를 숙여 절을 한 뒤 제일 궁금한 점을 물었다.
“설마 했는데 성격이 또 바뀌셨군요.”
“어떠하여 보이냐.”
“제가 어찌 자세한 것을 알겠습니까. 다만 이대로 가다간 어떻게 되실 지 몰라 그것이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동천이 긍정했다.
“그렇다. 나도 실로 그것이 걱정스럽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지금의 성격이 된 나는 예전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있고 또 지금의 성격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로 생각해볼 만한 문제지.”
“생각해볼 만한 문제요?”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성격이 바뀌기 이전의 모든 행동들을 유치하기 짝이 없고, 비효율적인 행동이며,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지금 성격 전의 나도 십 년 동안의 나를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 망나니짓을 했을까? 왜 쓸데없이 사람들을 괴롭혔을까? 왜 그렇게 모든 것에 욕심을 부려왔을까?’ 대충 이러한 것들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모든 쓸데없는 짓들과 더불어 왜 이전 성격의 나는 그렇게 세상물정을 모르고 타협조차 몰랐던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타협이라는 문제하나를 놓고 본다면 전전 성격의 내가 훨씬 낫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잠시 입을 다문 동천은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문정이 두려움에 떨고있는 것을 보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생각했지. ‘어째서 나는 갑자기 성격 변화를 일으키고있는 것일까?’ 라고……. 그것에 관한 결론은 처음부터 나와있었다. 내 몸 안에 상주하고있는 세 가지 내공심법. 그리고 그것들을 대변하는 각기 세 가지 성격들. 처음의 나는 만독혼원공을 흡수한 변이 된 귀의흡수신공. 두 번째의 나는 순수한 귀의흡수신공. 마지막으로 지금의 나는 역심무극결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인 나의 성격은 내공심법들의 성격과 일치한다. 그러나 첫 번째의 만독혼원공만은 틀리다. 오히려 그 음침함이 지금의 나와 비견될 정도지만 처음의 나는 그러한 음침함이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 약간의 모순됨이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무리가 없어진다.”
동천은 허리띠를 풀러 운석을 꺼내들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놈이 그 동안 잠재되어있던 나의 본능들을 심법의 종류에 맞게 설정해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음의 나는 성격이 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독노조의 내공을 흡수했을 때 운석의 간섭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나 황룡신단을 흡수하려고 할 때부터 이상이 생겨버렸다. 때가 아닌데 흡수하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째의 나로 변신한 후에야 깨닫게되었지. 그때의 모든 일들은 쓸데없이 들어차 있는 내공들에 대한 운석의 경고인 동시에 선택이라는 것을 말이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마지막 부분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 그때의 나는 나의 내공을 독공으로 성장시켜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각한 채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와 더불어 역심무극결을 익히고있는 상태였다. 황룡신단을 흡수할 때는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하고있을 때였지.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두 개의 황룡신단을 모두 흡수했다면 갑작스레 커진 순수함과 지키려는 속성의 변종이 서로 부딪히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 여세를 몰아 역심무극결까지 난동을 부렸을지도 모르지. 허나, 다행히도 운석이 그것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 주(主)가 되었던 성격을 잠시 밀어내고 순수한 귀의흡수신공의 성격을 부여하여 그 성격을 내세웠던 것이고.”
도연이 다시 물었다.
“대충 이해는 가지만 굳이 성격이 뒤바뀐 이유에 관해서는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천이 말했다.
“끝까지 들어라. 여기에서 운석의 선택이 거론된다. 너는 이쯤 되어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바로 그 두 번째 성격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꿀꺽, 침을 삼킨 문정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그 성격은 지금의 사부님께 흡수된 것이라고 봅니다.”
“정답이다. 놀랍게도 지금의 나로 뒤바뀌며 전의 성격이 흡수됨은 물론 이 할이나 되는 본래의 귀의흡수신공이 역심무극결로 흡수되었다. 오랜 시일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그런 의미에서 만일 처음의 나로 되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될까? 그야 뻔하지. 나는 지금의 나와 삼 할이 된 역심무극결까지 흡수한 채, 원래의 나로 되돌아감은 물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참으로 멍청했지. 그 많던 시간에 놀고먹지 않고 힘들게 냄새나는 땀이나 흘리고 있었다니 말야. 아니지? 오히려 좋지 않은가. 힘들이지도 않고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대로 내가 아무 일도 없이 지내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아주 만족할 것이다. 더불어 나의 내공이 독공을 앞질러갈 정도가 된다면 그 천방지축 성격조차 흡수해버릴 생각이다. 나는 세 가지 성격 중에서 지금의 성격을 선택하게되는 것이다.”
도연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흡수되었다는 그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는구나. 지금의 나는 그 성격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성격이 좋은데 무엇 때문에 그 성격을 일깨우겠느냐. 그 성격이 잠재의식내부에 존재하고있음을 느끼지만 깨우기 싫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나 자신도 모르게 동화될 가능성이 크기에 그것이 기분 나쁠 뿐이다.”
도연과 문정은 해괴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에 직접 듣고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러자 동천이 말했다.
“나 자신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한 탓에 미진한 부분이 많다. 또 잘못 생각했을 부분도 있을 테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대충 상황정리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동천이 다시 허리띠를 매자 여전히 껄끄러웠던 도연은 걱정스런 어투로 말했다.
“그것을 또….”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은 무감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해진 선택일지 강요된 선택일지 확인은 해봐야겠다. 이제 운석에 문제에 관해서는 그만두고 식사나 하자. 너희도 아직 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조용한 동천을 이리저리 살핀 문정은 속으로 연신 한숨을 내쉰 뒤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했다.
‘지금의 성격도 괜찮을지도……,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