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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4화


어두운 석실(石室)..

그러나 사방에 훤히 불을 밝혀 놓았기 때문인지 그렇게 어둡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 석실의 뒤편에는 청수한 얼굴의 인물이 반듯한 자세로 정좌해 있었다. 나이는 한 사십 정도는 돼 보였다. 그리고 그 인물의 앞에는 검은 마의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부복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왠지 모르게 그 사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데려온 아이들은?

스산한 어둠 속을 헤치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석실을 퍼져나가자 그 목소리에 부복해있던 여인은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내 잠잠해진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 확실하게 뒷탈이 없는 아이들로 데려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사내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래.. 이번 일은 마유(麻誘). 네가 실행한 일이니까 한치의 어긋남도 없겠지..

마유라는 여인은 사내가 긍정적인 인상을 풍기자 저으기 안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표정도 한순간일 뿐 금세 표정을 지웠다. 그녀는 이번 일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 이번에 데려온 아이들은 총 사백삼십이(四百三十二)명으로써 백여 명의 아이들이 상당한 수준의 근골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네 명의 아이들이 놀라울 정도의 재능과 무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유의 말에 중년의 사내는 놀라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네가 칭찬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아이가 무려 네 명이나 된다고?

마유는 사내가 놀라워하자 내심 기쁜 듯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는 놀랍게도 자미성(紫微星)의 기운을 타고 난 것 같습니다.

-뭣-이?

순간 깜짝 놀란 사내는 하마터면 체면이고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다행히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이냐? 자미성(紫微星)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게?

그런 사내의 모습을 마유는 짐짓 즐기는 것 같았다. 사내가 굉장히 흥분을 하자, 마유의 안색도 처음과는 달리 많이 풀어져 있었다. 지금 사내는 지극히 만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 제가 어찌 교주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 아이의 이름은 장소량(張少亮). 나이는 9살로 남자아이. 떠돌이 고아로 운 좋게도 제 눈에 띄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사내는 교주라는 엄청난 직위를 가진자답게 차분한 신색으로 조용히 마유를 쳐다보았다.

-…. .

마유는 오로지 기다릴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사내는 천천히 손을 저었다. 이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마유는 사내가 손을 젓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두운 석실을 조용히 사라졌다. 마유가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사내의 입이 열렸다.

-드디어..

사내의 목소리는 격앙(激昻)되어 있었다.

-드디어 우리 혈사교(血死敎)가 날개를 펼 때가 도래했는가? 흐흐흐흐.. 으하하하하하하!!

우르르르르—

사내의 엄청난 광소에 불빛들은 심하게 일그러져 버렸고, 사방 정도의 석실은 고통스러운 굉음을 토해냈다.

-으하하하하! 천하(天下)여! 이십 년만 기다려라! 그때가 된다면 나의 혈사교가 너를 접수하러 갈 것이다!! 하하하하하!

여기는 혈사교의 교주가 연공하는 석실이었다.

“우-와! 벌써 산을 벗어났네? 어떡하지? 다시 올라가야 하나? 에이.. 또 올라가면 이번에도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엄청난 내공을 가지게 된 동천은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며 달렸었는데(그러나 아직 내공을 제대로 쓰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달릴 수는 없었다.), 종래에는 자기가 왜 달리는지도 모른 채 달리다가 그대로 소려산을 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동천은 지금 길가로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어떡하지? 또 하늘님에게 부탁을 해야… 어?”

동천이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늙은이가 길 옆에 서서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동천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어이! 이봐요. 할아버지!”

동천이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노인의 주위를 끌자 손을 흔든 보람이 있었던지 그 노인 동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노인은 다시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손을 흔들었던 동천은 그 노인이 자신을 보긴 봤는데 아무런 반응도 안 보이자 화가 났지만, 급한 건 자신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노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봐요. 할아버지.”

동천이 다가가서 자신이 불렀는데 왜 반응이 없느냐고, 노인에게 따지려는 순간 노인이 물고 있던 곰방대가 빠른 속도로 동천의 머리통을 휘갈겼다.

“따-악!”

“아코!”

동천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정수리를 감싸 안자, 근엄하게 생긴 노인이 괘씸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 지금 네놈이 나한테 어이! 라고 한 거냐?”

순간적으로 한 방을 맞은 동천은 화가 났다.

“이씨! 그럼, 뭐라고 불러요!”

순간 노인의 눈썹이 휘어졌다.

“이놈이 그래도?”

“따악-!”

“크에엑! 씨발놈의 늙은이! 같은 데를 또 때리다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으으으, 아파.”

얼마나 고통이 심했던지 동천은 그 자리에서 떼굴떼굴! 굴러버렸다. 같은 부위를 또 맞는다는 것은 정말로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런 동천의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은 아까와는 달리 자뭇 흥미로운 시선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씨발놈의 늙은이? 허허허! 흐흠.. 그래, 같은 데를 또 때렸다.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

너무 심한 고통에 눈물을 찔끔한 동천은 노인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심한 분노를 느꼈다. 평소에 경로우대(敬老優待) 사상이 투철하다고 생각했던 동천은 그 노인을 어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자 노인을 한껏! 째려본 동천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후다다닥!”

그리고는 어느 정도 달렸다고 생각한 동천은 그제서야 달리기를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뒤를 돌아보자 곰방대를 물고 있던 늙은이는 조그마하게 보였다. 동천은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안심을 하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우우읍!”

멀리서 동천이 하는 짓을 바라보고 있었던 노인은 저 꼬마가 왜 저러나.. 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이! 담배쟁이 늙다리야! 너는 집에 나만한 귀여운 손자도 없냐? 흥! 당연히 없겠지! 우선 자식 새끼도 없을 테니까! 누가 너 같은 늙은이한테 시집을 오겠냐? 아마 자식이 있다면, 창루에 가서..! 지랄해서 얻어온 애새끼밖에 없을 거다! 왜, 내 말이 틀렸냐? 맞다고? 히히히! 어쨌든 내가 참아주는 줄 알아라!!”

그러고는 얼른 도망갔다.

“……. 허허… 허허허허!”

한참 애새끼 답지 않은 욕설에 멍해있던 노인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웃어 봤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떠한 웃음이든 말이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내 구십 평생 역천(逆天)이 빼고는 다른 황당한 녀석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놈이 또 있었단 말인가?

역천을 알고 있는 노인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동천은 발에 땀나도록 도망치고 있었다.

“히히히! 속이 다 시원~하다! 음.. 그건 그렇고 딥따! 아프네.. 응? 그런데 이 느낌은..”

동천은 후련한 마음에 달려가면서 아픈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려갈 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자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느낌은 어디서… 아! 맞다. 아까 방광인가 탄광인가 하는 할아버지하고 같이 있을 때 느꼈던..’

그때 앞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틀리다.

‘응? 뭐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의문을 가질 때쯤! 회초리 같은 게 동천의 얼굴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휘-익!

“빠악!”

“끄아-악! 이마 깨진다..!! 나 죽어…”

노인의 곰방대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동천은 달리다 말고, 다시 바닥에 떼굴떼굴! 굴러버렸다. 그런 동천의 모습을 본 노인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엄살은 그만 피우고. 썩! 일어나지 못할까?

노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하면서 다시 곰방대를 들어 올리자 깜짝 놀란 동천은 뒹굴다 말고 얼른 일어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한 소리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씨.. 할배도 맞아봐요.. 얼마 나 아픈지… !

동천이 아픔을 호소했지만 노인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통하질 않았다.

-이놈이 그래도?

늙은이는 동천을 곰방대로 인정사정 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퍼억! 퍽! 따악!

-억! 으억!

늙은이의 손놀림이 얼마나 묘한지 동천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곰방대 또한 동천이 움직이는 쪽으로 휘둘러졌다.

-그.. 그만해요! 악! 아프다고요!

그러나 노인의 손길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악! 이.. 이씨!

계속되는 고통에 약간(?) 이상해진 동천은 맞고 있는 와중에 순간적으로 때리고 있던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동천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피했다. 당연히 무턱대고 밀고 나가던 동천은 제 힘에 못 이겨 넘어지고야 말았다.

-씨.. 빌!

넘어지고 나서 분한 마음에 나직이 울분을 토하던 동천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네놈이 잘했다는 것이냐?

노인의 말에 고개를 돌렸던 동천은 늙은이가 눈을 부라리고 있자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그 기세(氣勢)에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고 기가 죽어 있었다.

-….. .

그 노인은 동천이 아무 말도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자 어느 정도 화를 풀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느냐! 아직까지도 네 잘못을 모르겠다는 말이냐?

동천은 가만히 있다가 노인네가 다시 눈을 부라리자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괴롭히는 거지? 씨발탱이!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늙은이한테 길 좀 물어보려고 한 죄밖에 없는데.. 길 좀 물어본 게 죄야?’

-정말이냐?

노인의 말에 속으로는 무지하게 욕하고 있었던 동천은 겉으로는 처량한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늙은이야! 너 같은면, 나와 같은 상황에서 하는 말이 정말로 보이냐? 덜떨어진 늙은이…’

노인은 동천이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자 그제서야 마음을 풀었다.

-좋다. 네가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네가 잘못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내 집에서 며칠 동안만 일을 하다가 가거라.

그 말에 동천은 한순간 절망적인 표정을 짓더니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면서 애원했다. 방금 전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할아버지.. 저 좀 살려주세요.. 제가 무심코 돌아다니다가 무려 하루가 넘도록 헤매고 다녀서 사부님한테 가지도 못했는데 이번에 할아버지를 따라간다면, 저의 사부님께서 심하게 걱정 하실 게 뻔하다고요..! 그러니까 그냥 보내주면 안 되나요? 일단, 제가 사부님만 만나 뵈면요. 자초지정을 다 설명한 후에 할아버지한테 다시 와서 열심히 일을 할게요.. 네? 아잉.. 할아버지이이!!

동천이 있는 힘껏 바지를 잡아다니자 흘러내리는 바지를 추스리느라고 정신이 없던 노인은 동천이 사부님에게로 가야 한다고 하자 그 사부가 누군지 심히 궁금해졌다.

-사부? 너한테 사부가 다 있었냐?

-네.. 네.

-그래. 네 사부가 누구냐?

동천은 늙은이가 어느 정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듯한 시선을 보내주자 용기를 가지고 말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요. 그 이름도 위대(偉大)하고, 거룩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귀영광의(鬼影狂醫) 역천(逆天)! 이십니다요. 헤헤..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 사부에 그 제자라고 생각했다. 동천의 말을 들은 노인은 방금 전의 노여움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동천은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짓던 늙은이가 배꼽이 빠져라 웃는 모습을 보고, 실성한 줄 알았다.

-왜 웃어요?

-하하.. 하하하.. 휴우! 그래.. 네 사부가 누군지 알겠냐고? 알다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닮은꼴 제자를 두었군..

노인의 말에 동천은 깜짝 놀랐다.

-어? 우리 사부님을 아세요?

동천의 질문에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노인은 다시 표정을 굳히며 말을 했다.

-나는 네 사부의 절친한 친구가 된다. 네 사부가 나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하더냐?

노인의 말에 동천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노인을 대하는 동천의 말투도 달라졌다.

-정말로 제 사부님에 대해서 아세요?

그 노인은 동천이 자꾸만 물어보자 슬슬 짜증이 났다.

-그만 물어보고 내 말에나 얼른 대답하거라. 네 사부가 나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했느냐?

노인의 계속되는 물음에 동천은 이 할배가 누구일까.. 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는 인물이 없었다. 그때 동천은 아마도 아까 이 늙은이가 자신의 머리를 쳐서, 사부님의 말을 저장하고 있던 기억세포가 죽어서 모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심한 생각을 하던 동천은 왜 기억이 안 나는지 알았다.

‘아하? 그러고 보니 사부님께서 사부님의 친구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한적이 없었지?’

자기 같은 천재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동천은 노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아.. 그게요. 제가 사부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사부님의 친구분들을 아직 모르겠는데요..

동천의 말을 들은 노인은 잠시 인상을 쓰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다면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겠군. 잘 들어라. 내가 누구냐 하면, 만검장인(萬劍匠人) 혈귀옹(血鬼翁)이라 한다. 네 사부의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고 할 수도 있다.

‘단 하나밖에.. 단 하나밖에.. 단.. 하나… 큰일났네? 사부님의 단 하나밖에 없는 절친한 할아범한테 별의별 욕을 다 해댔으니.. 앞으로 사부님을 어떻게 뵙지? 에구.. 요놈의 입.. 입이 문제야!!’

한참을 자기 주둥이를 치고 있던 동천은 혈귀옹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응? 내가 또 생각에 몰두했나 보네? 으이그..! 그나저나 어떡하지? 사부님이 아시면 큰일인데… 어떻게 하면 될까… 그래! 사부님이 모르시면 되는 거야! 히히히!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좋은 거지?’

생각을 마친 동천은 다시 혈귀옹의 바짓가랑이를 잡고는 늘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잉!

혈귀옹은 동천이 또다시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자 다시 바지를 추스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야..! 어허? 이놈아. 무슨 짓이냐? 할말이 있으면, 이거.. 이것 좀 놓고 얘기해봐!

혈귀옹의 말이 떨어지자 동천은 그제서야 잡고 있던 바지를 놓았다. 동천이 손을 놓자, 혈귀옹은 얼른 바지를 추스려 입었다.

-예에.. 다름이 아니라.. 저기. 지금 있었던 일은 제발 제 사부님께 비밀로 해주세요..! 네에? 제발요..!

‘허허! 이 녀석.. 걱정이 되긴 되는 모양이로군..!’

동천의 애원 섞인 부탁에 혈귀옹은 속으론 어느 정도 봐주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전혀, 그런 표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네 이름이.. 동천(冬天)? 동천이 맞느냐?

혈귀옹의 말에 동천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비록, 그 중간에 맑디맑고, 푸르디푸르며,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겨울 하늘이라는 말이 빠져 있긴 하지만 그 이름이 제 이름인 것은 틀림없어요!

혈귀옹은 눈앞의 꼬마가 정말로 희한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 뭐냐. 맑디고, 푸르딩딩이고, 간에.. 너 같으면 그따위 소릴 들어놓고,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순간 동천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해 버렸다.

‘허허허! 이 녀석.. 표정 한번 쥑이는데? 허허허허!’

혈귀옹이 내심 웃음을 참고 있을 때 동천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나중에 시키실 일이 있으면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제발 사부님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말아주세요.. 예? 아잉~! 할아버지..!

나중에는 애교 작전으로까지 나가자 혈귀옹은 어차피 봐줄 거면 지금 봐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좋다. 네가 정말로 반성하는 것 같으니 내가 역천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마.

-정말요? 우와! 할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나는 할아버지가 봐주실 줄을 꼭! 알고, 있었다고요!

혈귀옹은 동천이 좋아서 방방! 뜨자 나도 저런 제자 하나 가져 봤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래! 흐음…’

일단 생각을 마치자 동천을 바라보는 혈귀옹의 눈초리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날카로워졌다. 혈귀옹이 이번 일은 봐준다고 하자 좋아서 혼자 지랄 거리던 동천은 자신을 쳐다보는 늙은이의 눈초리가 이상하게 변하자 내심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동천의 겁먹은 듯한 표정에 혈귀옹은 그제서야 자신의 심리 상태가 얼굴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는 얼른 표정을 지웠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지금 역천을 만나러 헤매고 있는 중이라고 했지?

혈귀옹의 물음에 동천은 순순히 대답했다.

-예.

-좋다. 내가 너하고 직접…

순간 동천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예? 직접.. 뭐요?

‘제발.. 제발.. 나는 저 늙은이가 싫어요! 하늘님! 제발…!’

혈귀옹은 동천이 불안한 눈초리를 느긋한 표정으로 보면서 말을 이었다.

-가고는 싶지만. 지금 내가 할 일도 있고 하니.. 약왕전으로 가는 길만 가르쳐주마.

순간 동천의 얼굴이 절망(絶望)적인 얼굴에서 환희(歡喜)의 얼굴로 바뀌어 버렸다.

-만세! 하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헤헤!

혼자 지랄하다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동천은 멋쩍은 웃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대체하려고 했다.

-뭐? 하늘님. 감사합니다? 이게 뭔 소리냐?

동천의 거짓말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예?.. 그게요.. 아? 드디어 사부님께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 겁니다! 헤헤헤..

그제서야 혈귀옹은 동천의 행동에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냐? 어쨌든 내 뒤쪽으로 쭉! 가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그러면, 그곳에서 왼쪽으로 가야 되고, 또 주욱! 가다 보면 다섯 갈래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누구든지, 다 가리켜 줄 거다. 알겠느냐?

-우와! 아주 자세하게도 가르쳐주시네요? 너무 잘 가르쳐주셔서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혈귀옹은 동천이 너무 잘 가르쳐 준다고 하자, 기분이 좋았다.

-오냐. 오냐. 그럼 역천한테 잘 가기 바란다.

-예.. 예!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동천은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혈귀옹의 곁을 스쳐 달려갔다. 동천의 얼굴과 혈귀옹의 몸이 스치는 순간.. 동천의 얼굴은 놀라운 변신 능력을 발휘하더니, 야차귀신의 얼굴처럼 심하게 구겨져 버렸다.

‘빠드득-! 늙은이…! 이 수모는 언젠가.. 꼭!! 갚아주고야 말겠다.. 으으으..!’

동천은 혈귀옹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듯 앞만 보면서 열심히 달려 나갔다. 한편, 혈귀옹은 동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흐흐흐.. 푸르딩딩아.. 또 보자!

그러고는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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