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57화
진화(進化).
“흑흑, 미안하다. 하지만 이 몸이라도 살아야 복수를 해줄 것이 아니겠느냐.”
눈물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중인 동천은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자 재빨리 눈물을 닦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아직도 형운곡 내부인 것 같자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를 것만 같았다.
“뭐가 이따위야…. 아까의 미약한 예지력을 무시하고 달렸더니, 그게 잘못된 건가?”
잘못된 거였다. 그때의 예지력은 전방에 진법이 있다고 가르쳐준 것이었는데, 공포심이 앞서 그대로 도망쳤던 동천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진 것이었다. 진법 안에 갇혀있는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흑흑, 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해.”
자포자기하는 듯하면서도 살고 싶다는 표현을 잊지 않는 동천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길이 막막한 그였지만 먹을 것에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배가 고파진 그는 유일하게 챙기고 다녔던 육포를 꺼내 그 와중에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다 먹고 난 후에야 다시 눈물을 흘렸다.
“흑흑, 도연은 그 마녀에게 잡혀갔는데 먹을 것이 잘도 넘어가는구나. 아아, 내 이리도 속이 없는 녀석이었다니.”
중소구 따위야 잡혀가던 말든 소외당하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했던 사이라고 도연의 안위를 생각하자 식욕이 뚝 떨어졌다. 문제는 먹을 것 다 먹고 식욕이 떨어졌다는 데에 있지만 말이다. 갑자기 그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걱정 말아라. 본 주군께서 본교에만 당도하면 대거 무사들을 파견하여 쓸어버리도록 하겠느니라.”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십여 발자국을 채 걷기도 전에 좌측의 수풀 사이로 뛰어들었다.
‘젠장, 이리도 빨리 쫓아오다니. 걸렸으면 큰일인데…….’
저벅저벅.
간격에 맞춰 또렷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는 점점 동천과의 사이를 좁혀왔다. 완벽하게 숨었다고 자부하면서도 뜻 모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동천은 근처에서 잠깐 멈추었던 상대가 멀어져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그는 울고만 싶어졌다. 이유는 분명히 사라진 상대를 확인했는데, 감지력에는 주위를 맴도는 듯한 느낌이 확연하게 전해졌던 것이다. 그제야 진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동천은 이판사판공사판이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는 태연한 척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휴우, 갔나? 어서 도망쳐야겠다.”
무작정 뛰어가는 듯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상대 쪽으로 다가가자 상대는 주춤하다 오른쪽으로 빙 돌아갔다.
‘시팔, 들켰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동천은 생각을 바꾸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아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가도가도 제자리인 것 같으니…….”
동천이 절망에 빠진 시늉을 하자 효과가 있었는지 등 뒤에서 스르르 다가왔다. 의식적으로 도를 꽉 틀어쥔 그는 아직이라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기다렸다.
‘쫌만 더 와라. 조금만 더. 옳지 잘한다. 그래…, 지금!’
눈부신 속도로 신형을 돌려 치우 도법을 전개한 동천은 도법이 지나간 공간이 쩍쩍 갈라지자 지레 놀라 진기를 흐트러트렸다.
“큭?”
투명한 유리벽이 갈라진 듯한 공간은 금세 복구되어 다시 인공의 주변 경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간 뒤에서 되려 당할 뻔했던 미부는 방금 전의 섬뜩함을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진기를 다스리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동천을 재빨리 제압했다. 그리곤 그를 안아 들었다.
“네가 제일 어린놈이지만, 그나마 일행 중에서는 제일 나은 것 같구나. 그리고 그 도법……. 아주 탐이 나. 호호호!”
그녀는 소리 내어 웃으며 유유히 진법을 빠져나갔다.
동천 일행이 형운곡에서 당한 지 이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장노삼 일행은 마차를 타고 가장 빠른 경로를 통해 나아가고 있었다.
“워, 워!”
더 이상 마차가 진입할 수 없는 가파른 산길이 보이자 장노삼은 여유를 가지고 말들을 세웠다. 그는 뒤쪽의 문정에게 말했다.
“이제 내려야 할 것 같구나.”
문정은 서둘러 나와 장노삼의 옆에서 대기했다.
“어르신, 아까 보니까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왜 이쪽으로 오셔서 마차를 버리시려는지요.”
장노삼은 두 마리의 말들을 마차에서 분리시키며 얘기했다.
“왜긴 왜이겠느냐. 이쪽으로 올라가야만 창산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아?”
장노삼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문정에게 전방을 가리켰다.
“저기 좁은 길목을 지나가 이십여 리만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나오지. 우리는 그 마을에다 말들을 맡기고 그곳을 지나쳐 쭉 올라가면 되는 것이란다.”
“예, 어르신.”
문정을 말 위에 올라타게 한 장노삼은 양손에 고삐를 쥐고 두 마리의 말을 이끌었다. 이에 당황한 문정이 급히 내려가려고 했지만 장노삼은 고개를 젓고 허락하지 않았다.
“어르신, 내려가게 해주십시오. 어찌 저 혼자만 편하게 갈 수 있겠습니까. 말 고삐를 잡고 이끄는 것은 저로서도 충분하니까…….”
장노삼은 그의 말을 잘랐다.
“허허, 괜찮다는 데도 그러네. 늙을수록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거라.”
문정은 ‘하지만….’ 이라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장노삼이 허락하지 않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된 마당에 조용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마을로 도착한 문정은 생각보다 가구 수가 많은 것에 의아해했다. 그것은 장노삼의 중얼거림으로도 증명되었다.
“그사이에 사람들이 늘었는가? 그래,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한 뒤 그곳에서 말들을 맡긴 장노삼은 간단히 요기를 끝으로 문정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갔다. 시간이 흐르고 숨이 헐떡거린 문정은 그때마다 잠깐 쉬자는 장노삼의 의견으로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제 다 왔느니라. 그러게 너로서는 힘에 부치니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문정은 숨을 고르며 멋쩍게 웃었다.
“헤헤, 다 왔다면서요.”
“녀석…….”
잠깐을 쉬고 조금 더 올라간 문정은 사람이 손을 본 듯한 평평한 길이 나오자 직감적으로 이곳이 그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담벼락도 없고, 잡초만 듬성듬성 나 있는 마당으로 진입한 그들은 아담한 초가를 바라보며 멈추었다. 약간 굳어진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장노삼은 곤혹스러운 눈치를 보였다.
“아무도 없는가? 떠났을 리가 없거늘….”
방문을 열어젖히자 부스스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아울러 매캐한 곰팡이 냄새까지 흘러나왔다. 방바닥을 손으로 쓸어본 장노삼은 손바닥에 새까만 먼지가 묻어 나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문정은 그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곳에 계신 분은 떠나신 건가요?”
장노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구나.”
문정은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건가요?”
그가 물었지만 장노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방안으로 들어가 서랍장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텅, 소리와 함께 작은 쪽문이 열렸다. 장노삼은 그 안의 서찰을 빼들고 읽어보았다.
<아들아, 네가 떠난 지 몇 년이 흘렀구나.
이 아비는 네가 돌아오지 않으매 잠시 천하를 주유하고자 한다.
그사이 네가 이것을 보게 되었다면, 조용히 수행을 쌓으며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이 아비가 너를 다시 보게 되는 날,
네가 어여쁜 며느리 감과 함께 다정히 서 있기를 바라며…….
추신 : 아직도 며느리 감이 없다면 가문의 율법상, 이 아비가 정하는 여인과 혼례를 치러야 함을 잊지 말기 바란다.>
서찰의 내용을 모두 읽고 난 장노삼은 조용히 눈을 감고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였다.
“그녀석이 벌써 그러한 나이가 되었는가?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무섭다고들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로변을 이남이녀(二男二女)가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여자 중에 한 명은 업혀가고 있다고나 할까? 십대 후반의 처녀를 업고 가는 사람은 단정한 체구에 몸가짐 또한 중후함이 우러나오는 사십대 중반의 사나이였다. 그 중년인을 보조하는 듯 따라가는 사내 또한 비슷한 연배였고,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여쁜 소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들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인을 업고 가던 중년인은 객점으로 눈을 돌렸다.
“저곳에서 간단한 요기나 하자꾸나.”
소녀는 자신에게 말한 것인 줄 아는 양 조신하게 대꾸했다.
“예, 어르신.”
객점으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은 중년인은 업고 있던 여인을 마주 앉아있는 소녀의 옆에 앉혀주었다. 소녀는 멍한 듯 허공을 쳐다보는 여인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 뒤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자 한쪽 귀가 잘려나가고, 네 줄기 길다란 상처가 이마에서부터 잘려진 귀까지 흉측하게 이어진 사내는 한숨을 내짓는 소녀에게 한마디했다.
“소연아, 걱정 말거라. 화정이는 분명히 정신을 되찾을 것이야.”
고개를 든 소연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래야죠. 아뇨, 꼭 그럴 거예요. 저는 믿어요.”
그녀가 앙증맞게 힘주어 말하자 한쪽 귀의 사내는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내들도 묘한 눈길로 소연과 화정 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는 급히 정신을 추스렸다.
‘아미타불, 부처님께서 보우하사. 나 사주문, 한때는 타락한 놈이었지만 이제는 손 깨끗이 씻었다. 어찌하여 어린아이에게 흑심을 품겠는가. 그 옆의 저 강시라면 모를까. 꿀꺽, 그러고 보니 건드리지 못하는 게 아쉽구나.’
그가 사주문이라면 그의 옆에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중년인은 당연히 조정광이었다. 사주문이 요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어놓은 조정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색마혈불(色魔血佛)이라고 들어봤는가?”
조정광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질 때, 찔리는 것이 있어 덩달아 가슴까지 철렁한 사주문은 멈출 뻔한 심장박동을 급히 복구시킨 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소문은 많이 들어봤지요. 헌데 그것은 왜…….”
사주문의 물음에도 조정광은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그것이 아마도 15년 전의 일이었을 게야.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데 참한 여인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더군. 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잘한 것도 없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일에 방해를 했다고 되려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사주문은 재빨리 박자를 맞춰주었다.
“저런 못된 놈을 봤나! 잘못했으면 빌어야 할 것이지, 도리어 주인 어른께 화를 냈다는 말씀입니까?”
조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네 같았으면 충분히 잘못을 깨닫고 빌었을 테지만 그자는 화를 냈던 것일세. 그래서 잠시 손을 봐줬더니 그제야 잘못을 빌더군.”
사주문은 내심 색마혈불을 동정했다.
‘분명히 그 단강수를 써서 제압했겠지. 쯧쯧, 그것에 당했을 그 중놈이 불쌍해지는군.’
조정광의 이야기는 그 사이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말일세. 그자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화를 내었던 것이라네.”
“그럴만한 사정이요? 그 짓을 하다가 걸린 색마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뭐 있겠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자는 옥황색연등(玉皇色蓮燈)이란 무공을 익히고 있었는데 잘못 익히는 바람에 보름을 주기적으로 색을 탐하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걸려 죽게 된다는 것일세.”
사주문은 남들이 모르는 비사를 알게 된다고 생각하자 흥미가 동한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런 증상이 있다면 알아서 기녀를 옆에 끼고 다닌다거나.”
조정광은 일리가 있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틀렸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 그런 의심도 해봤지만 그자의 말인즉, 그 증상은 보름의 시간을 두고 아무 때나 발동되어 언제 색을 탐할지 예측할 수가 없고, 일단 그 증상이 발휘되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몇십 리 안에서 제일 음기가 강한 여인을 자신도 모르게 갈취해 일을 벌인다는 것이야. 그렇게 당한 여인은 음기가 고갈되어 반년 이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해지고.”
주위의 사람들이 어느새 귀를 기울이며 듣는 가운데 사주문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짓말쯤이야 지어낸다 치면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정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내 그자의 증상을 보고 직접 확인하였으니 그것은 사실이라네.”
신비 고수인 그가 확인했다고 하는데 사주문이 뭐라고 더 반박하겠는가. 혹여, 반박을 하더라도 득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조정광은 말했다.
“내 그자의 상태를 확인했으나,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 해도 한 가정을 망치고 한 여인을 망치는 짓은 봐줄 수가 없었네. 그리하여 내공을 소멸시키고 악인 하나 구제한다는 의미에서 거두어주려고 했는데, 죽으면 죽었지 내 밑으로는 들어올 수 없으며 절대로 내공 또한 잃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분개한 사주문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감히, 주인 어른께 대들다니.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내 이놈을 당장에!”
분개할 만도 하리라. 만일에 그놈이 걸렸으면, 오늘날 자신이 조정광 밑에서 굽실거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이 악당이랍시고 잡혀온 게 그놈 대신이라고 생각하자 혈압이 급상승하는 사주문이었다. 조정광은 분통 터져 자신의 가슴을 후려치는 사주문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 뒤 조용히 웃고 말했다.
“나를 위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진정하게나.”
사주문은 속으로 소리쳤다.
‘네놈을 위하는 마음? 그래,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이 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니 그것 참 다행이로구나. 오냐, 그때가 올 때까지 참아주기로 하마.’
조정광은 그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신을 다스리는 듯하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고심을 했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는 노릇이고, 싫다는 사람 억지로 내공을 소멸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일세. 그래서 한참의 고민 끝에 아주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지.”
“어떻게 말입니까?”
조정광은 진한 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했겠나. 허허, 좋은 여인을 소개시켜 주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아, 흡혈마희(吸血魔姬) 종요홍(鍾妖紅)이라고 했다네. 허허허!”
조정광은 웃었지만 사주문은 기겁을 했다.
“헉? 흐, 흡혈마희라면 70년 전 무림 고수들의 양기를 빨아먹으며, 한 무술 한다는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었던 그 흡혈마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허허, 잘도 아는군. 바로 그렇다네. 음기가 강한 여인이 필요하고, 나에게 내공을 소멸당하기 싫어하니 그것에 걸맞는 여인을 소개시켜줄 수밖에. 그 여인이라면 너무도 음기가 강해서 고갈될 염려가 없질 않겠는가.”
사주문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그, 그렇다면 그 색마혈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요?”
조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허허, 그 뒤로는 본적이 없다네. 그녀가 멋진 낭군이라며 데려갔으니 아마도 잘 살고 있겠지.”
“…….”
할말을 잃게 된 사주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옛이야기를 하고 있는 조정광이 참으로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옛날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지금의 이야기로 그것을 확실하게 인지했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몸서리치다 의아함을 느낀 그는 어쩔 수 없이 질문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조정광의 대답은 사주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하하, 아까 자네의 눈빛이 예전의 색마혈불을 떠올리게 하여 자네에게도 좋은 여인을 소개시켜줄까 해서 물어본 것이라네.”
“예에? 그, 그럴 리가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주문이 극구 아니라고 하자 조정광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흐음, 어쩔 수 없군.”
사주문은 정말로 아쉬워하는 조정광의 표정에 또 한번 몸서리를 쳐야 했다.
‘으으, 행동이라도 옮겼다면 아주 큰일 날 뻔했구나.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아야겠다.’
뭔가 아쉬움이 남았던 조정광은 주위의 몇몇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은근슬쩍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 분들도 그런 눈빛들을 하셨는데…….”
찔리는 게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맛있게 먹었다.”
“어이쿠, 내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사람들이 서둘러 도망치는 가운데 그 모습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연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푸웃, 호호호!”
사주문은 처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네가 다 웃다니. 어쩐 일이냐?”
그녀는 가는 미소를 짓고 웃음의 여운이 남아있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방금 조 어르신께서 엮어낸 상황이 제 주인님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사주문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주인도 싸가지가 없는 놈이겠구나.’
그런 사주문의 생각을 모르는지 조정광이 태연히 말했다.
“그 아이가 동천이라고 했지, 아마?”
“예, 올해로 12살이세요.”
대답을 하는 소연의 눈빛은 다소 우수에 젖은 눈빛이었다. 조정광은 미소하며 그런 소연을 바라보았다.
“열둘이라…. 한두 살만 더 먹는다면 장가갈 나이로구나.”
소연은 대번에 얼굴을 붉혔다.
“어머, 그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어리신 분께서 무슨 장가를 가신다고 그래요.”
그러자 사주문이 그들 중간에 끼여들었다.
“그렇지도 않단다. 여기 계신 주인 어른만 하셔도 열세 살에 장가를 가셔서 4년 뒤에 도련님을 낳으셨지.”
놀란 소연은 벌어지려는 입을 두 손으로 급히 가렸다.
“저, 정말이세요?”
조정광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단다. 그래서 아주 훌륭한 아들을 낳았지. 그리고…….”
그의 말끝이 흐려지며 안색 또한 흐려지자 소연은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