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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58화


“혹시, 부인 마님께서…….”

조정광은 눈을 크게 떴다.

“응?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내 처자는 잘 지내고 있단다. 사정이 있어 다른 곳에 떨어져 지내지만 말이다.”

사주문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님에 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두 분이 따로 떨어져 계신 사연이 무엇입니까?”

조정광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그렇게도 남의 가정사를 파헤치고 싶은가?”

잘못 물었다고 생각한 사주문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식사나 하겠습니다.”

그는 지금의 질문 하나로 며칠 동안 조정광의 불편한 눈빛을 받아야 했다. 그것에 대해 사주문은 더럽게 꽁한 놈이라며 내심 욕을 퍼부었고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의 성과라면 소연이 다소나마 웃음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웃음에 따라 모두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지만 오직 웃지 않는 것은 동화정뿐이었다. 중간에 평탄한 지세라 마부를 고용한 그들은 무리 없이 형산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잠깐 멈추어주시오.”

오십대에서 육십대 사이의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를 들어 조정광을 돌아보았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계십니까요?”

조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불편한 곳은 없소이다. 다만 이제 곧 불편해질 것 같아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외다.”

노인은 뭔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물주가 멈추라는데 피고용인의 입장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노인은 천천히 말을 세웠다.

“이제 어쩔 깝쇼?”

마차에서 내린 조정광은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기도나 하시구려.”

그것이 신호인 듯 수풀이 흔들리며 십여 명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모두들 연녹색 상하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 중 가지런히 꽃무늬를 배열한 옷의 임자가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어찌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사내는 좌우로 각기 두 명씩 아리따운 여인을 대동하고 있었다. 조정광은 한눈에 생기가 없는 그녀들의 눈빛을 확인했다.

“혹시, 좌우의 여인 분들도 그때에 본 것처럼 강시인 것이오?”

조정광의 말에 우측 여인의 머릿결을 쓰다듬은 사내는 옅은 웃음을 짓고 긍정의 표시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너무 말이 없는 것은 상대에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에 관해서는 자세히 들었소이다. 일전에 본좌의 수하가 한번 인사를 했을 것이오. 본좌는 그들의 수좌를 맡고 있는 아수마황(阿修魔皇) 유혼(幽魂)이라 하외다.”

여인들에 이어 양쪽 끝부분의 사내들을 마저 둘러본 조정광은 유혼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열 명이라. 이 숫자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순간적으로 꿈틀한 유혼은 그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자신감이 대단하시구려. 그렇다면 어디 그 솜씨 좀 봅시다.”

“어렵지 않지.”

조정광이 자세를 잡자 유혼을 중심으로 약간 처진 쪽에 자리를 잡은 강시들은 주인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초점 없는 눈으로 조정광을 응시했다. 조정광은 나머지 사내들이 마차 쪽으로 이동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양동작전이오?”

유혼은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지가 않소. 본좌는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으려는 것뿐이라오.”

조정광은 그제야 알겠다는 눈치를 보냈다.

“그때 그자가 원했던 화정이를 데려가려는 것이로군.”

마차에 다가가는 수하들을 잠시 멈추게 한 유혼은 부드럽게 말했다.

“방금 말했다시피 받으려는 것이오. 순순히 내어만 준다면 지금의 상황은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소.”

그러자 마차 안에서 제법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순 없어요! 화정이는 유 전주님께서 제 주인님에게 선물해주신 것인데, 어찌하여 이제 와 도로 가져가신다는 말씀이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혼은 웃고 있는 얼굴에 오직 눈동자만 굳어있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화정이의 상태를 보았다시피 그녀는 지금 망가진 상태이다. 정신세계의 붕괴로 회생이 불가능하지.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데려가려는 것이고.”

유혼의 눈초리에 질려버린 소연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용케 할 말을 다했다.

“그, 그러나 아직은 유 전주님의 말씀을, 마, 말씀을 확신할 수가 없어요. 저는, 주, 주인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화정이를 지킬 의, 의무가 있단 말이에요.”

유혼은 그런 소연을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네가 아직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모르고 있나 보구나.”

소연은 일부러 유혼의 시선을 피하며 반문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유혼은 그녀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본교의 공적으로 몰린 네 사부 덕택에 제자인 너까지 살인명부(殺人名簿)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 그럴 수가!”

유혼은 그녀가 정신 차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허나, 약왕전주님의 친분을 봐서라도 못 본 척 넘어가 줄 터이니,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순순히 화정이를 내어주거라.”

창백하게 질린 소연은 의식적으로 화정이의 손을 꼭 쥐었다. 화정이의 손을 타고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녀는 눈을 들어 표정이 풀린 화정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그 웃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는데. 내가 다 질투를 할 정도로…….’

옛 기억을 떠올리고자 눈을 감자 주인님의 방에 앉아있던 화정이가 그녀를 발견하곤 화사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주 웃어준 그녀는 화정이의 고운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화정이는 정돈되는 머릿결이 신기한 듯 그녀가 머리 빗을 건네주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빗었다. 잠시 점심 상황을 알아보고 갔다 오자 그때까지도 빗질을 하고 있는 화정이가 보였다. 그녀는 얼른 빗을 빼앗고 이렇게 말했다.

“화정아, 그럼 못써….”

그것을 끝으로 감았던 눈을 뜬 그녀는 어느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차분해진 어조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 미천한 목숨 바치더라도 주인님의 허락 없이는 화정이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것!’

내심 고개를 내저은 유혼은 자연스레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다섯 명의 사내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혼은 재빨리 강시들과 함께 조정광을 둘러싸고 진기를 끌어모으며 말했다.

“살고 싶다면 저쪽의 상황은 신경 끄시오. 그보다, 그 전설의 단강수를 좀 구경하고 싶은데…. 후후, 가능하시겠소?”

조정광은 왼팔을 가슴께로 들어 올리고 오른손을 어깨너비로 벌린 뒤 차분하게 대꾸했다.

“곧 선보여드리리다.”


마차 안에서의 불리함을 깨닫고 사주문과 함께 밖으로 나온 소연은 화정이를 절대 잃지 않으려는 듯, 배수진의 자세로 그녀를 뒤에 두고 허리춤에서 한 자 가량의 예리한 쌍소도를 빼들었다. 사주문은 ‘나 죽었다.’ 세 번 복창 후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이놈들, 설마 비겁하게 떼로 덤비려는 것은 아니겠지?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겨루자!”

서로들 마주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사내들은 대화 몇 마디를 나눈 뒤 결론을 내렸다.

“좋다, 이쪽에서도 둘을 내보내지. 동분호(同分昊)와 금환(金環)이라는 이 친구들로 말야.”

그나마 안도한 사주문은 ‘희망이 보인다.’ 세 번 복창 후 두 손으로 검을 모아 쥐었다. 그는 싸움이 격렬한 조정광 쪽을 힐끔 쳐다본 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려 했다.

“너희들의 무기는 그 검이냐?”

키가 작달 만한 금환이 대꾸했다.

“그렇다. 문제가 있느냐?”

사주문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 짓궂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네 검이 사용자의 키에 비해 너무도 길어서 하는 소리다.”

키 작다는 소리를 제일 혐오했던 금환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네 이노옴! 두 다리를 잘라 이 몸보다 작은 키로 만들어주마!”

사주문은 그 말이 무섭지 않다는 듯 더욱 놀려댔다.

“그래도 클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곧바로 맞부딪힌 두 개의 검들은 가는 불똥을 튀겼다. 한 번의 경합으로 호각지세를 이루자 놀란 것은 금환이었다. 상대의 검과 함께 베어버리진 못해도 적어도 뒤로 밀리게끔은 할 줄 알았던 그는 금세 당황함을 지우고 검 날을 비틀어 사주문의 다리를 그었다. 하반신이 불안하여 미처 피하지 못한 사주문은 제법 깊숙이 베인 상처에 신음을 삼켰다.

‘요, 요놈아! 내가 고통의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지? 크으, 내가 누구 좋으라고 소리를 질러? 어림도 없다!’

그가 이를 악무는 사이 그를 도와주러 뛰어든 소연은 동분호라고 소개되었던 음침한 사내가 앞을 가로막자 쌍도를 현란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독함이 모자라 휘두른 것만 못한 상황이 되었다. 여유 있게 소연의 공격을 피한 동분호는 막간을 이용해 소연의 고운 팔뚝을 찔렀다.

“아악!”

피가 튀기고, 우연인지 몰라도 그것들 중에 몇 방울이 화정이의 얼굴로 뿌려졌다. 그리고 콧잔등에 튀겨진 한 방울의 피는 또르르 흘러 그녀의 입술로 스며들었다. 그것을 혀로 핥아낸 화정이는 죽어있던 눈을 반짝이더니 소리 없이 움직여 순식간에 소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연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화, 화정아.”

동분호도 놀라 공격을 멈춘 사이, 화정이는 소연의 다친 팔을 들어 천천히 피를 핥기 시작했다. 소연은 상처 부위가 따끔거렸지만 화정이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만히 놔둘 명분은 충분했다. 할짝거리는 끈적끈적한 소리가 모공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가운데 사주문 쪽의 싸움도 멈추어 버렸다. 다리 쪽에만 상처를 입은 사주문은 검을 지팡이로 의지한 채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소연 쪽으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피까지 빨아먹으면 어쩌나 싶어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아까 저자들의 우두머리 말로는 망가진 강시라던데, 재수 없어서 아군 적군도 못 가리고 덤비는 거 아냐?’

피가 멎을 때까지 계속 핥아낸 동화정은 사주문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생글거리는 얼굴로 소연에게 물었다.

“소연, 이제 피 안 나와?”

“화정아, 너…….”

소연은 놀랐다. 놀란 이유는 정신이 되돌아온 화정이가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에 관한 부분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니까.

“너, 목소리가.”

그녀가 진정으로 놀란 이유는 바로 화정이의 음성에 있었다. 항상 높낮이가 일정했던 화정이가 마지막 부분에 소리를 높인 것이다. 언뜻 보면 대단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몇 년을 두고 화정이의 목소리를 고쳐보려고 했던 그녀로서는 실로 놀라 할 만한 일이었다.

“왜? 목소리 이상해?”

소연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화정이를 바라보며 한줄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니, 너무도 좋아. 아주 좋아.”

“고마워. 나도 좋아.”

그녀들의 잡담 아닌 잡담에 정신을 차린 동분호는 이래서 어린것은 처치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생사의 와중에도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으니, 이건 ‘죽여주세요.’ 하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네 소원대로 고통 없이 죽여주마.’

그의 손이 움직이자 그것을 제일 처음 발견한 사주문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위험해!”

그 소리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발견한 소연은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한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아, 주인님을 못 뵈고 죽는 것이 억울하지만 그래도 화정이의 안전한 모습을 보았으니 그나마 위안이로구나. 지금쯤 주인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식사는 잘 하시고 계실까? 그래서 늠름하게 커 계실까?’

이런저런 길고 긴 생각들을 이어나가던 소연은 아무리 죽음의 순간이 길다 하겠지만, 지금의 순간은 너무도 길다고 생각했다. 그때, 사주문의 급박한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뭐해, 빨리 눈을 뜨고 찔러 죽여!”

눈을 뜬 그녀는 화정이의 손에 잡혀있는 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임자인 동분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검을 빼내려 하고 있는 것도 말이다. 그녀가 움직이려 하자 눈치 빠른 동분호는 무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을 버리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이어 재빨리 소연의 곁으로 달려온 사주문은 기가 산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빨리 화정이에게 저 자식들을 죽이라고 명령해!”

소연은 죽음의 간접경험을 해보았던 탓에 명령을 내리고 싶어도 얼어붙은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화정이가 먼저 물었다.

“정말로 나 저거하고, 저거하고, 저거하고, 저거하고, 저거하고 죽여도 돼?”

아직 복수의 개념을 모르는 듯 하나하나 집어서 의견을 묻는 화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연이 놀란 것은 사주문의 간접 명령을 토대로 자신이 명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죽여도 되냐고 물어보는 화정이의 행동이었다.

“그, 그러니까.”

소연이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자 긴장한 눈앞의 적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세를 펼치려 들었다. 바로 그때,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더불어 조정광을 공격하던 초혼 강시 하나가 뒤로 퉁겨 나갔다. 다급해진 적들은 그것이 신호인 듯 신속하게 달려들었다.

“어서 명령해!”

움찔한 소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정이는 미소하며 신형을 움직였다. 적들은 화정이가 단독으로 뛰쳐나오자 전체를 상대한다는 작전을 바꾸어 그녀를 빙 둘러쌌다. 그들은 세 명이 공격하고 나머지 두 명이 그 뒤를 받쳐주는 방법으로 합격 진을 이루어 나갔다. 화정이는 상대에게 빼앗은 검으로 아름다운 검무를 추었다. 그녀의 검세는 상대들의 기세를 흡수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흘려보내며 매끄럽게 이어졌다. 적들은 너무도 정교한 검법을 시전하고 있는 화정이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시가 이렇듯 복잡한 검로와 운기 방법을 시도하다니!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것은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소연이 묻고 싶은 것이었다.

“오, 옥로무녀검법(玉露巫女劍法). 그것은 수련이도 익히다 만 것인데, 쟤가 그걸 어떻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에 알아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우선 관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우우웅!

화정이는 방어적으로 공세를 수습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검기를 폭발시켜 적들을 쓸어갔다.

“으악! 악!”

순식간에 한 명을 분시(分屍)하다시피 한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다음 상대의 허리를 동강 내버렸다. 다섯 사람이 덤볐어도 평행선이었는데 갑자기 둘이나 줄어들자 아주 잠깐이었지만 적들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화정이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하나의 목숨을 꿰뚫어버렸다. 그러자 남은 자들은 공포에 물든 얼굴로 소리치며 뒷걸음질 쳤다.

“오지마! 오면 죽여버릴 거야!”

그런 그들에게 어느새 다가왔는지 좀 당한 듯한 차림새의 조정광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은 후 말했다.

“뒤쪽에 너희들의 수좌가 있으니 데리고 가거라.”

“헉?”

조정광이 입을 열어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사내들은 보기 흉한 꼴로 자빠져 있는 유혼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그것을 본 조정광은 아직 의식이 남아있는 유혼에게 조용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마시구려. 본인은 암흑마교와 적대시하고픈 마음이 없으니까.”

유혼은 입술을 몇 번 꿈틀거리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유혼을 등에 업고 나 살려라 도망치는 적들을 바라보던 조정광은 그들을 처치하러 다가오는 화정이의 진로를 스윽 막았다. 화정이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비켜, 소연이 죽이라고 했어.”

조정광은 두 눈에서 신광을 터트리며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강시라지만 살인에 관해서 만큼은 아직 이르다. 소연에게 돌아가거라.”

주춤 물러선 화정이는 겁먹은 듯한 얼굴로 토악질을 하고 있는 소연에게 다가왔다.

“소연, 소연. 나 저거 무서워. 저것도 죽여야 해?”

더 이상 토할 것이 없었던 소연은 급히 그녀의 팔을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안돼. 헉헉, 아무도…, 더 이상 죽이지마.”

화정이는 기쁜 듯 소연의 곁에 앉았다.

“응, 안 죽일게. 나 착하지?”

소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살풋이 웃음 진 화정이는 안도하는 얼굴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 졸려…. 잘래.”

소연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그것을 허락했다.

“그래, 푹 자.”

화정이가 곤히 자는 가운데 사주문은 ‘이젠 살았다.’ 세 번을 복창하고 있었다.


한 달 후 형양(衡陽)에 당도한 이남이녀는 여전히 세 사람이 걷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그때 졸립다고 잠을 잔 화정이가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중간에 한번 깨어나긴 했지만 그날 십인분 이상의 음식을 섭취하고선 다시 숙면에 빠져들었다. 처음에 소연은 화정이가 깨어나지 않은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고 자책했지만 중간에 그녀가 깨어나 그렇게 먹어대고 다시 잠들자 어느 정도 안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런 그녀는 화정이를 업고 있는 조정광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걔가 생각 외로 좀 무거운데 하루 종일 업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다. 고작 며칠 동안이니 그런 마음 가질 필요는 없단다. 그보다, 사주문.”

사주문은 재빨리 대답했다.

“예, 주인 어른. 말씀하십시오.”

조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형운곡은 아직도 멀었는가?”

사주문은 오늘 세 번째 물어보는 그 소리에 다소 짜증이 났다. 그러나 뛰어난 의지력의(살고자 하는 의지력의) 사나이인 그가 심중에 담아둔 것을 겉으로 표현해낼 리 없었다.

“여기에서 엿새 거리이니 당도하는 것은 금방일 겁니다.”

“그래, 잘 알겠네.”

사주문의 말대로 엿새째 되는 날 형운곡 부근에 도착한 일행은 근처 마을에서 저 멀리 보이는 곳이 형운곡이 맞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한 노인이 두려움에 떨며 그들을 극구 말렸다.

“아이구, 그곳으로 가실 생각이면 진작에 마음 고쳐먹으슈. 저곳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자들이… 있어. 하지만 그들은 형산파의 사람들이었으니 가능했던 거고, 당신들은 어림도 없어. 한두 달쯤에도 겁 모르는 사내와 아이들 둘이 들어갔다가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라고. 아아,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안내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야. 그놈의 돈이 뭔지……. 어쨌든 여자아이들까지 데리고 있는 자네들에겐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당부하겠네. 알겠나?”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인 조정광은 노인의 손에 은자 한 덩이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빨리 가자고. 해 떨어지면 큰일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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