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89화
“으, 으아아악!”
동천은 눈을 부릅뜬 늙은이의 모가지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섭선을 든 사내는 자연히 비명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제 토하기까지 하는 동천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어린아이도 있었구나.”
상대의 이야기에 퍼뜩 정신을 차린 동천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도로 삼킨 뒤 넙죽 엎드렸다.
“어르신, 살려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못 봤고요. 기억도 못해요. 제발…”
아무리 동천이라 해도 시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았다. 자신을 경계하는 외팔이를 슬쩍 쳐다본 그는 이내 동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곳에 들른 것이 죄라면 죄이나 너는 본 서생을 만나서 다행이라 여겨라.”
살 길이 생긴 동천은 희망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살려주시는 거예요?”
섭선을 쫙 펼친 사내는 손에 힘을 주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극락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예에?”
펼쳐진 섭선이 너울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고 곧 일직선으로 동천의 가슴을 베어갔다. 기겁을 한 동천은 몸을 퉁겨 뒤로 한 바퀴 돌았다. 엎드린 상태에서 각력의 힘만으로 한 바퀴 돌았다는 것은 상당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얼굴을 굳었다.
“이제 보니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구나. 나이를 숨긴 노 고수는 아닌 듯한데 누구의 문하더냐?”
동천은 자신이 그 공격을 피했다는 사실에 어리벙벙했다. 그러나 그것이 동천의 기세를 북돋아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히히, 뭐야. 별거 아니잖아? 괜히 쫄았네.”
섭선을 든 자는 분노한 듯 얼굴을 붉혔다.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불쌍히 여겨 시체만큼은 보존해주려 했으나 본 폐혈서생(肺血書生)을 욕보였으니 네놈의 허파를 짓이겨 주리라.”
폐혈서생이 동천에게로 덤벼들자 그의 뒤에 시립해있던 사내들은 외팔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외팔이는 협소함을 이점으로 당당히 맞섰다.
“오냐! 이 엽소가 여기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너희들만큼은 같이 동행하겠다!”
폐혈서생은 엽소의 지껄임을 듣고 실소를 했다. 가소로웠나보다. 그에 반해 동천의 귀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동천은 오직 도망갈 틈만 찾고 있었으니까.
<제길! 아까 그 소구새끼가 쫓아오려고 할 때 그냥 데려올 걸…>
동천은 눈앞의 서생 놈이 잠깐 멈칫하고 웃는 사이, 기회를 포착하고 왼쪽으로 돌았다. 그새 웃음을 춘 폐혈서생은 동천의 심중을 파악이라도 한 듯 문가로 빠져나가기 위한 공간을 막아버렸다.
“사내 대장부가 도망을 가면 쓰나.”
동천은 자신의 의중이 파악되자 치솟았던 용기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더구나 이리저리 눈알을 돌리다 잘린 목을 다시 보게 된 뒤로 더욱 그랬다. 동천은 생명줄과도 같은 철경을 만지작거리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내, 내가 언제 도망가려고 했냐? 너 따위가 두려울까 보냐?”
폐혈서생은 섭선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심히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동천이 눈에 거슬린다고 상대가 멈출 까닭이 없었다. 폐혈서생은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엽소에게 본 서생의 수하가 하나 죽었구나. 내가 너에게 시간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수하를 잃게 되니 더 이상 놀아 줄 수가 없다. 그만 놀자구나.”
섭선이 부챗살처럼 펴짐과 동시에 흐릿한 잔상이 폐혈서생의 몸 주위로 일어났다. 동천은 본능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살기 위해 철경을 마구 휘둘렀다. 그때 우연인지 몰라도 철경과 섭선이 부닥쳤다.
까까강!
불똥이 튀겼다. 동천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충격과 함께 벌렁 나자빠졌고 두어 발자국을 물러선 폐혈서생은 믿을 수 없다는 신색으로 눈을 부릅떴다.
“보통 내공이 아니로구나!”
동천은 내공을 쓰긴 했지만 중소구가 가르쳐 준 대로 타점에 맞게 내공을 유형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철경에 내공을 쏟아부었다면 폐혈서생은 심한 타격을 입고 서있기에도 힘들었을 것이다. 한데, 멍청하게도 자빠지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났다. 그런 동천이 내공으로 폐혈서생의 공격을 무마시킬 리 만무했겠는가? 후다닥 일어난 동천은 입안이 찝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 맛이 느껴졌다.
“으으, 감히 이 몸에게 피해를 입혀? 덤벼! 덤벼 이 자식아!”
동천이 이처럼 폐혈서생에게 까부는 것은 전적으로 그가 섭선을 사용한다는 데에서 기인했다. 검이나 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그 섭선이 방금 전 사람의 목을 베었다는 사실은 동천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만 서로 부닥칠 때 내공이 강한 인간이 이긴다는 중소구의 말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내공에만 자신이 있었던 동천은 끝장을 낼 각오로 철경에 내공을 주입시켰다. 그러자 철경의 주위로 뿌연 막이 생성되는 게 아닌가. 폐혈서생은 기겁을 했다.
“기를 유형화시킬 정도란 말인가?”
기겁을 하기는 동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기가 유형화될 정도라면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사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히히. 이히히히!”
동천은 갑자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소름 끼치는 웃음에 폐혈서생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그는 섭선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래봤자 어린애일 뿐이다!”
고작 어린놈의 위세에 놀라 물러섰다는 사실에 분노를 한 그는 전신의 힘을 섭선에 모았다. 동천보다는 못하지만 그의 섭선에도 희미한 무언가가 맺혔다. 여유만만해진 동천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으히히, 반딧불이 똥을 싸냐?”
“놈!”
섭선을 가슴께로 모은 채 달려드는 폐혈서생의 위세는 방금 전과 딴판이었다. 그의 손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동천은 바람이 불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기분 좋은 바람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동천의 어깨와 옆구리에 깊은 상처가 피어올랐다.
“으엑?”
극렬한 통증을 받게 된 동천은 연신 물러섰다. 정신이 분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철경에 맺혀있는 백색 무리가 점차 그 기세를 잃어갔다. 두려워진 동천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철경을 마구 휘둘렀다. 허나, 상대가 바보 아닌 이상 그것을 간과하겠는가? 폐혈서생은 철경이 지나간 자리에 섭선을 쑤셔 넣었다. 동천은 눈이 튀어나올 듯 그 섭선을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여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헛된 바람이었다. 생각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주, 죽는 거야?>
상대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반문했다. 동천의 마음속에 또 다른 그가 없는 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웃고 있는 화정이가 떠올랐다. 그를 뒤이어 소연과 사정화가 떠올랐다. 모두들 웃고 있었다. 그들조차 사라지고 없는 빈 공간에는 사부인 역천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의 사부는 걸걸하게 웃고 난 뒤, 동천에게 입을 열었다.
-흐르고 또 흐르면 내 몸 또한 그렇게 되리라(流流則本身爲然).
<귀영유수?>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구결이 지금 상황에서 딱 들어맞았다.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생각했다. 허나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흐른다면 못 흐를 것 또한 없지 않겠는가. 동천의 몸은 느린 듯하나 분명히 섭선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폐혈서생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의 그 희열감. 동천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 뒤에는 대가가 있는 법. 1단계조차 완벽히 습득 못한 동천은 3단계의 귀영유수를 시전 함과 동시에 근육이 뒤틀리는 현상을 맛보았다.
“끄아아아! 사부!”
동천의 가슴에 천근만근이 올려졌다. 그것은 묵직한 굉음과 함께 동천의 심장을 압박해왔다. 아무리 불러보아도 사라졌던 사부는 다시 돌아올 생각조차 안 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왔고 동천은 사부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런 동천의 뜻이 통했는가? 한줄기 옛 기억이 생생한 음성으로 들려왔다.
-하나가 둘이 됨은 곧 둘이 하나라는 이치로다(一爲二 則, 二若一意). 돌리고 또 돌리면 더불어 곱절이라(回回則與倍). 몸은 하나지만 뜻은 넷을 포함한다(體一而義包四)… 사랑스런 제자야.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게다. 으헤헤!
동천이 그러고 있는 사이, 다급해진 폐혈서생은 광풍연사(光風連蛇)라는 초식을 사용했다. 바람의 강기를 이용해 상대를 얽어매는 수법인 이 절초는 위력이 강한 만큼 내공의 소모도 그에 비례하기에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 최후의 보루 같은 초식이었다. 그러나 광풍연사를 시전 한 폐혈서생은 곧 후회했다. 꼬마 놈이 피하는가 싶더니 입가에 피를 흘리며 비명을 내질렀던 것이다. 그는 엽소의 상황을 힐끗 보았다. 엽소는 넷 중 셋을 죽였으나 다행히 기력이 다해 마지막 남은 수하와 양패구상을 할 것 같았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폐혈서생은 그 찰나간에 자신이 상대하던 꼬마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기겁을 했다.
“엇? 이놈이?”
폐혈서생이 찾던 이놈은 바로 그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쌍놈아, 죽어라!”
쾅!
“크헉!”
폐혈서생은 등뼈가 아작 나는 소리를 온몸으로 들었다. 동천의 입가에 좁쌀만큼 흐르던 피와는 달리 엄청난 양의 피가 폐혈서생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자신이 해놓고도 믿기지 않아 멍청히 서 있던 동천은 곧 정신을 차렸다.
“이히, 이히히! 꼴 좋다. 이 씹새끼! 씹새끼!”
동천은 폐혈서생을 마구 걷어찼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상대의 등을 내려칠 때 사용했던 철경으로 뚜드려 팼다. 몇 번 신음을 터트리던 폐혈서생은 고통에 못 이겨 기절해버렸지만 그건 동천이 알 바 아니었다.
“감히 이 몸을 해코지하려고 해? 죽어! 죽어!”
무자비하게 보복을 하던 동천이 그 손속을 멈춘 것은 엽소의 부름 때문이었다.
“소, 소협. 헉헉, 이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