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96화
저녁 식사를 마친 감송은 언제나 그렇듯 마루에 나와 앉아 물끄러미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눈빛이 전과는 달리 무언가 갈구하는 듯했다.
“으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군.”
풀리지 않는 의혹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음인가? 비록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떠나기에 앞서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불안감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나는 그러한 종류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고역은 없을 것이다.
‘어찌 눈매만이 낯익을까? 마치, 복면을 했을 때 본듯한 눈매처럼…….’
갑자기 감송의 눈이 커졌다.
“복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친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만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녀석이었단 말인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이 감송의 암수에 당하고도? 허!”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감송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절레 내둘렀다. 분명히 죽었을 거라 자신했었는데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놈이 그 상태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뒤에서 조력을 해주는 자가 있다는 소리다. 그놈이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얼마 못 갔을 것이 분명한데 그 정도의 독상을 치료해줄 인물은……. 설마, 역천!’
자신이 생각해 놓고도 불길했다. 아니, 그냥 불길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역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호랑이 아가리에 몸을 던지는 형국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감송의 머리에서 복잡하고도 불안한 심리가 뒤엉키고 있을 때 방안에서 민소희가 조용히 나왔다.
“무슨 일이죠? 분명 복면이라고 소리친 것 같았는데.”
그제야 현실세계로 돌아온 감송은 굳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아내를 다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긴히 할말이 있으니 들어갑시다.”
민소희는 영문을 몰랐지만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준다기에 군말 없이 따라 들어갔다. 남편을 상석에 앉힌 그녀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 사이 좀더 생각을 가다듬은 감송은 차마 해주기 어려운 말을 꺼내야만 했다.
“내가 2년 전에 소문주님께서 단환을 만드실 때 도와주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오.”
민소희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이에요.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요?”
감송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리고 그때 내가 복면을 쓴 놈을 처치했다는 말도 했을 것이오.”
남편의 이야기에 민소희는 흠칫했다. 지금에 와서 그 얘기가 다시 거두 된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자를 놓치긴 했지만 분명히 당신의 암수에 당했다고 했는데 설마 살아있다는 건가요?”
암석처럼 단단히 굳어있던 감송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그렇소.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문제는 그놈의 신분이지.”
“신분?”
의아해하는 부인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자신조차도 믿기 힘든 사실을 말해주기에 앞서 한차례 호흡을 골랐다.
“당신이 믿기 힘들 테지만 그놈의 신분은 역천의 둘째 제자라오.”
민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서 드러난 표정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부릅뜬 눈으로 남편에게 무언의 확답을 얻어낸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곧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당신이 잘못 안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또 그가 진짜로 그 복면인이었다고 해도 약전주와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또한 약전주는 본문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소문주님의 사부인데 그가 배후자라고는…….”
감송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믿기 힘들단 말이겠지?”
민소희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러나 감송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놈이 내 암습에 당했을 때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 줘봤자 일각. 그 상태에서 내공은 점점 소실될 것이고 발악을 할수록 독기는 점점 온몸으로 퍼질 것은 자명한 일. 더군다나 이곳 약왕전이 좀 넓소? 그렇다면 약왕전 내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그놈을 치료할 인간이 얼마나 있을지 생각해 보았소?”
민소희는 남편이 하고자하는 진의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좋은 쪽으로 몰고 가고 싶었다.
“부전주도 있지 않을까요?”
감송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당치도 않은 소리. 시체해부에 관해서 만큼은 인정하지만 내 독을 단시간 내에 치료할 만큼은 아니오.”
인정을 하듯 말없이 눈을 감았다 뜬 민소희는 차가워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역천이 관련되어있을 확률이 대단히 크군요.”
“큰 것이 아니라 확실하오.”
감송은 확신에 찬 기색을 보였다. 민소희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기만 했다. 이는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해서 전적으로 남편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감송의 목소리가 적막해진 방안을 메꾸었다.
“일단 역천의 뜻대로 따라주는 척을 할 것이오. 그리고 나서 기회를 보아 탈출로를 찾겠소.”
민소희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일 역천이 교주와 끈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들이 다시 나설 수도 있어요.”
그들이라 함은 예전에 자신들과 싸웠던 교주의 호위대인 흑혈이살이었다. 그 말에 감송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오. 만일 교주와 손을 잡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다만 역천과 우리가……아니, 본 문인 만독문과 공존해서는 안될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것이 내 추측을 뿐이오.”
부부가 같이 오랜 생활을 하다보면 습관이나 일상생활들이 닮아간다고 했는데 민소희가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방금 전 감송과 같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가 금새 폈다.
“혹시…….”
감송은 급히 물어보았다.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라도 있소?”
민소희는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제 추측일 따름이지만 자신의 무공에 자존심이 강한 역천이 본 문의 신공을 제자이신 소문주님께서 익히시자 자존심이 깨져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어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던 감송은 무엇 때문인지 이내 그 생각을 바꾸었다.
“그럴수도 있겠구료. 대대로 암흑마교 사전(四傳) 중에 약왕전과 독전은 서로 앙숙이었으니까. 그래, 그래서 역천이 독을 경시하고 증오해 우리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어! 내가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 가지 그럴듯한 대안이 나온다면 그것을 믿고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절박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민소희의 추측대로 결론을 맺어버린 감송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장시간의 상의를 하다 자신의 부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럼, 이렇게 된 마당에 당신은 어찌 할 것이오.”
잠시 망설이던 민소희는 고심해하는 얼굴빛이 역력한 얼굴로 겨우 말을 꺼냈다.
“저 역시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말은 꺼냈어도 결론을 짓기가 어려운 듯 했다. 그래서 감송은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허허, 어려워 말고 말해보시오. 같이 가겠다고 해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테니까.”
민소희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다 결국에는 입을 열었다.
“동생인 묘희(苗希)에게 가볼 생각이에요.”
그녀의 우려대로 간만에 웃음을 떠올린 감송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처제에게……말이오?”
“예.”
“하지만 그때 그렇게 떠난 뒤로는 연락이 끊어진 줄 알고 있었는데…….”
민소희는 어색해하는 남편의 모습에 안쓰러워했다.
“당신의 심기가 어지러워 질까봐 연락이 닿았음에도 숨겼었어요. 그것을 지금 밝히게 되어 죄송해요.”
감송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소. 내 당신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다만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약간 당황했을 따름이니 괘념치 마시오.”
남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민소희는 더 이상 그것에 관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그리고 저는 당신이 떠난 다음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가 상대편의 이목이 당신에게 쏠렸을 때 가는 게 좋겠어요.”
감송은 부인의 결정을 십분 배려해주기 위해 잠자코 그 의견에 따랐다.
“좋소. 당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을 시엔 그만큼 생각한 바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안심하고 떠나겠소.”
민소희는 살며시 웃었다.
“고마워요.”
마주 웃던 감송은 문득 소연에게 생각이 미쳤다.
“헌데 말이오. 그렇다면 소연이는 어떻게 할 것이오?”
민소희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방금 전 그것도 생각해 보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같이 데려갈 생각이에요.”
“으음.”
감송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녀 혼자 가기에도 분명 벅찰 텐데 어린것까지 동행시킨다 하니 아까와는 다르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당신이 그 아이를 아끼고 있다는 걸 알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
민소희의 고개가 살며시 저어졌다.
“그렇지 않아요. 그 아이에게는 초혼강시가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던 감송은 감탄을 했다.
“오오, 그렇구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도 못했소. 허허허.”
“소문주님을 기다리고있는 그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제가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그 초혼강시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그렇겠지. 그렇겠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자인 소연을 험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는 죄책감이었을까? 민소희는 좋은 쪽으로 부연설명을 더했다.
“제가 동생이 있는 곳까지 간다면 몇 년 더 수련을 시키다가 이곳으로 다시 되돌려보낼 생각이에요.”
감송은 약간 눈을 치켜 떴다.
“다시 이곳으로?”
“그래요. 역천도 그 아이 만큼은 예뻐하고 있으니까 별 탈은 없을 거라고 확신해요. 더군다나 소문주님의 곁에 그 아이가 있어야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만일 그때까지도 소문주님께서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 아이가 소문주님을 보필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제야 감송이 제법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거기까지 안배를 해놓고 있었을 줄은 몰랐소. 허허, 다시 봐야겠는걸?”
민소희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너무 띄워주지 말아요. 안배는 무슨…….”
감송은 껄껄 웃었다.
“허허허! 알았소. 헌데 처제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어디오?”
갑자기 민소희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동생이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서 자세한 것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다만 형산(衡山)에서 사 십리밖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감송은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먼 곳으로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형산? 그렇다면 호남성에 자리한 바로 그 형산이란 말이오?”
“네, 자세한 것은 제가 그곳에 도착하면 인편으로 소식을 띄울 테니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허허, 당신은 마치 내가 무사할거라는 듯 말하는구료.”
민소희는 어린애 마냥 즐거워했다.
“제가 이렇게 라도 해야 궁금해서 당신이 살아남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감송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과연! 과연 그렇소!”
그들은 마치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처럼 즐거워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부부가 좋은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