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98화
화정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안고있는 작은 주인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녀로서는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 동안 내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소연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감송이 떠나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었다. 밤새 잠을 설친 그녀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대충 정돈한 뒤 사부님과 함께 조용히 배웅을 나갔다.
“무사히 도착하세요.”
가벼운 짐 꾸러미만 어깨에 메고 있었던 감송은 가볍게 소연의 인사를 받았다.
“허허, 알겠다. 너도 그 동안 할머니를 잘 모셔라.”
옆에 서있던 민소희는 걱정 말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신도 참. 소연이가 어련히 잘 하려고요.”
“그런가? 허허! 알겠소. 내 빨리 가서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리다.”
위험한 길을 떠나는 사람과 배웅하는 사람치고는 대단히 담담한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여기에서 연륜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인데 연륜을 따지기에도 부족했던 소연은 걱정 반 두려움 반이 섞여 유난히 튀어 보였다. 그것을 느낀 감송은 안심해도 된다는 얼굴로 소연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나갔다.
앞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선 그는 의미 없이 하는 행동처럼 가볍게 손을 들어올린 후 무언가 뿌리듯 손을 휘젓고 난 뒤에야 다시 발길을 옮겼고, 그의 행동이 끝나는 시점에서 어디에선가 무거운 것이 쿵 하고 떨어졌다.
“좀 쉬게나. 아니, 그 동안 수고했으니 영원히 쉬게. 허허.”
아마도 감시자를 제거한 듯 싶었다. 그 후로 바삐 신형을 옮겨 약재창고로 걸어간 그는 대여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끼어 들었다.
“제가 좀 늦었지요?”
2년 전 새로 바뀐 창고지기는 선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감송을 대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그걸 알면 빨리빨리 왔어야지! 자네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야 쓰겠어?”
감송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간만에 이런 일을 맞아서 그만 늦었습니다.”
창고지기는 어느 정도 위신이 섰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추궁은 없었다.
“자자, 그건 넘어가고. 이제 모두들 모였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세들. 이번에 우리가 캐와야 할 약재들은 비교적 고급 약재에 해당하는 것들일세. 그것들은 본 암흑마교 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은 특별히 전주님께서 영기(靈氣)가 강한 산을 찾아 캐오라는 명이 계셨으니 아무 곳에나 캐왔다간 큰일이 날 거라는 것을 명심들 하게. 알겠는가?”
약초꾼들은 저마다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송은 같이 끄덕이며 아직 틀어진 계획이 없다는 것에 만족해했다.
‘그 동안 나를 감시하던 두 놈들은 하루에 여섯 시진씩 번갈아 가며 교대를 했는데, 내가 두 식경 전에 교대 한 녀석을 죽였으므로 다른 놈이 그 사실을 통보하려면 적어도 여섯 시진이 지난 후이다. 으음, 이렇게 냉소천의 꼬리는 일단 끊어놨지만 앞으로 역천의 꼬리는 어떻게 끊을지 좀더 두고봐야겠군.’
“이봐, 늙은 신참!”
누구를 지칭하는지 몰랐던 감송은 계속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옆 사람이 자신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나서야 늙은 신참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창고지기는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왜 긴 왜야! 잘 알아들었어?”
감송은 대답하기에 앞서 저런 놈에게까지 굽실거려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다고 스치듯 생각했다.
“허허, 물론이지요. 영기가 충만한 산에서 약초를 캐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딴 생각을 하고있는 듯 보여 못 들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알아들은 것 같자 창고지기는 헛기침을 한 후 어서 떠나라고 명했다. 그러자 감송을 합쳐 총 다섯 명인 약초꾼들은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이는 바쁜 감송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보시오. 좀 빨리 가면 안되겠소?”
그러자 선두의 사내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거 참. 남는 게 시간인데 빨리간들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겠소?”
그들 딴에는 그도 그랬다. 개중에는 딸린 식구가 몇몇 있는지라 빨리 갈 명분이 있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몇십 번의 길을 수시로 떠났던 경력의 그들이 매번 서둘러 돌아오고 싶겠는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마누라와 자식 등살에서 벗어나겠는가. 그들의 생각을 어렴풋이 나마 헤아린 감송은 소매에서 동전 마흔 냥을 꺼냈다.
“실은 내가 빨리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아주 급하다네. 밖에 위급한 친동생이 있는데 이번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전갈이 와서 빨리 가봐야 해. 약소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고 서둘러들 주세나.”
역초꾼들은 이게 웬 횡재냐는 듯 서둘러 받아들었다. 그들은 대번에 만족해져 그러겠다고 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송에게는 여전히 느리게만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래도 벌어 논 여섯 시진을 그대로 까먹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성의를 보여 갈 길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다시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 새삼 마차가 그리워지는 감송이었다.
결국 다섯 시진에 걸쳐 검문소에 다다른 그들은 험악하게 생긴 검시원에게 다다를 수 있었다.
“허가증(許可證).”
간단한 말과 함께 손을 내민 검시원은 선두의 약초꾼에게 붉은 인장이 찍힌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암흑마교 내에서는 신분의 한계만큼 아무 곳에나 돌아다녀도 되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면 그에 합당한 사유와 소속 기관의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물론, 고위급은 그런 절차가 필요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고위급이 아닌 관계로 이렇게 허가증을 제시하고있는 것이었다. 확인을 마친 검시원은 귀찮은 듯 빨리 가보라는 표시를 했다. 굽실거린 약초꾼들은 줄을 맞춰 차례차례 검문소를 지나갔다.
“휘유, 나는 이곳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긴장이 된다니까? 자네는 안 그런가?”
선두 사내의 물음에 약간 뒤쳐졌던 사내가 얼른 맞장구를 쳐줬다.
“말도 말게. 나는 저 검시관이 제일 무섭다니까?”
그들의 대화가 터져 나오자 저마다 하나둘씩 떠들기에 바빴다. 그리고 감송은 이들 중 역천의 끄나풀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 중으로 찾지 못한다면 어쩔 수가 없지.’
감송은 말없이 조용히 그들을 따르기만 할뿐이었다. 그것이 못내 걸렸는지 처음 돈을 받아든 선두의 사내가 넌지시 물었다.
“이보슈, 영감님.”
“무슨 일인가.”
감송은 아까부터 위급한 동생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일부러 초조함을 내비쳤기 때문에 급한 모습이 자연스레 묻어 나왔다. 사내의 이야기로 인해 모두들 잠깐 멈춰 섰다. 선두의 사내는 약간 간사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아까 돈을 좀 받았지만 그리 나쁜 놈은 아니오.”
감송은 자연스레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네.”
그러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풀었다.
“헤헤, 그러니까 우리가 동생을 찾아가기 위해 이렇게 나선 영감님께 돈을 받았는데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 무슨 소리긴 뭐가 무슨 소리예요. 보아하니 약초를 캔다고 우리와 같이 갔다가 동생을 만나보고 되돌아올 모양인데 기왕이면 서로 좋고 좋은 게 좋지 않겠소?”
어렴풋이 이 사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좀 꼬아서 말한 덕에 헷갈렸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감송은 방심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사내는 감송의 말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바로 그거요!”
뭐가 바로 그렇다는 건지 확실히는 몰랐지만 감송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영감님은 원래의 목적대로 동생 분을 만나고 오시란 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영감님의 약초 분을 대신 캐줄 테니까.”
감송은 내심 당황했다. 역천의 끄나풀이 있어 자신과 같이 동행할 줄 알았는데 이들의 눈치를 보니 그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혼란스런 마음을 접고 한번 더 운을 띄웠다.
“정말 그래주겠는가? 내 그렇게만 해 준다면…….”
“알겠소! 내 다 알겠소! 헤헤, 영감님은 그저 약간의 수고비만 주시면 되는 것이오.”
가만히 간사한 사내의 눈빛을 들여다 본 감송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자네들도 그러한가?”
모두들 기분 좋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물론이오!”
돈이 들어오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리오. 감송조차 만족의 미소를 띄웠다. 그는 품속에서 어린애 주먹만한 은 덩어리를 꺼낸 후 작은 손칼로 정확히 4등분했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비록 나누긴 했지만 아까 받은 금액도 적지 않은 금액인데 각기 은자로 두세 냥 정도가 다시 생길 것 같자 횡재하기에 앞서 은근히 두렵기까지 했다. 그 증거로 말을 꺼냈던 선두의 사내가 쉬이 받으려하지 않았다.
“저, 정말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이오?”
감송도 뒤늦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 동안 내가 꾸준히 모아온 돈들일세. 그러나 이것들이 내 동생보다 귀하겠는가? 적어도 아우가 떠나는 모습을 봐줘야 하는 게 형님으로서 도리가 아니겠는가. 내 이 정도로 급하니 제발 좀 잘 처리해주게.”
서로들 눈치를 보던 약초꾼들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오자 감송에게 미안한 감이 있으면서도 군말 없이 은덩이들을 집어갔다. 사실 무단 이탈이 얼마나 중죄인지는 그들도 알고 있었기에 그 정도 감수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험! 영감님의 우애가 그토록 깊은 줄 몰랐소. 영감님은 정말 착하신 분이오. 그런 영감님에게 이렇게 돈을 받아 미안하긴 하지만 대신 일 처리는 깨끗이 해주겠소. 그러니 마음놓고 갔다 오시오.”
감송은 일일이 약초꾼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럼 나는 서둘러 가봐야겠네. 부디 잘들 해주게나.”
약초꾼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헤어졌다. 촌부처럼 엉거주춤 달려가던 감송은 그들과 멀어지게 되자 걸음을 멈추고 약초꾼들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허허,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네.”
그 말을 끝으로 감송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인적이 뜸한 산길에 십 수명의 사내들이 나란히 도열해있었는데, 그들 뒤에는 어디에서 준비했는지 고급 의자 위에 앉아있는 사내가 거만한 폼으로 자신의 수하에게 상황설명을 듣고 있었다.
“손을 타고 올라온 독이 일정 시간동안 몸에 퍼지다가 효과를 발휘해 즉사한 듯 싶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전방의 시체들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질문을 꺼냈다.
“독은?”
무슨 독이냐는 뜻이리라. 수하는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집어내어 즉각 답해주었다.
“미분독(尾粉毒)입니다.”
사내는 네 구의 시신에서 시선을 거두곤 흥미로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미분독?”
“그렇사옵니다.”
사내가 갑자기 크게 웃어 제쳤다.
“크하핫! 그놈이 생각해 낸 것만큼 조잡한 독이군. 그래, 만들 독이 없어서 가축의 털이나 꼬리들을 삭혀 주성분으로 만든 그런 독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으하하하!”
허리를 굽히고있던 수하는 하나도 안 웃겼지만 상관이 좋다고 웃는데 뭐라 할 수가 없어 조용히 듣기만 했다. 마침내 사내의 웃음이 멈추었다.
“크흠. 그렇단 말이지? 헌데 네가 키운 놈들은 뭐 하는 것들이냐.”
싸늘해진 뒷말에는 진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창백해진 수하는 무릎을 꿇고 재빨리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놈이 설마 처음부터 흔적을 지우며 갈 줄 몰랐었습니다! 제 죄가 크나 며칠 말미를 주시면 꼭 그놈의 흔적을 잡아내겠사옵니다!”
빌고있는 이 사내의 말이 약간 이해가 안 가리라. 자세히 설명해 주자면 이들은 감송을 쫓아오고 있었는데 출발 당시부터, 아니 그 전부터 감송이 흔적을 지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추적자들은 당연히 네 개의 흔적 중에 감송이 끼어있는 줄 알고 열심히 추적을 했었는데 오늘 죽어 나자빠진 네 명의 약초꾼 중에 감송이 없자 무척이나 당황했고,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하가 잘못을 빌고있음에도 그의 상관은 쉽사리 용서할 기세가 아니었다.
“네놈이 적어도 감시소에서 빠져나간 놈들이 몇 명이었는지 물어만 봤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죽음을 감지한 수하는 부르르르 떨었다. 한번의 실수로 허무하게 죽는 것이다.
‘제길, 끝인가?’
그런데 그때 그에게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잘해본다고 한 것이니 이번만큼은 용서해 주시지요. 그러면 저 녀석도 충심을 다해 더욱 열심히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주군의 넓은 아량으로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그 목소리는 전리염(電利炎)이란 자의 목소리였다. 바로 독전의 전주인 혼독마예(混毒魔藝) 광예(胱刈)의 충실한 심복인 전리염 말이다. 심복의 말이라서 그럴까? 당장 쳐죽일 것 같던 광예의 음성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좋아좋아. 공영(空營).”
무릎을 꿇고 죽음을 각오하던 공영은 희망이 보이자 바닥에 급히 머리를 찧으며 대답했다.
“옛, 전주님!”
의미 없이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광예는 잠깐 뜸을 들인 후 그 손을 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푸시시시.
팔걸이가 녹아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예는 겁에 질린 공영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3일. 그 이상을 넘기면 네놈은 이렇게 될 것이야.”
“존명!”
급하다고 생각한 공영은 그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감송에 대한 추적을 나섰다. 예닐곱 명이 빠져나가고 네 구의 시체들 앞에는 광예를 비롯한 몇몇의 초 고수들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광예는 이미 의자 구실에서 멀어진 물건을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쯧쯧, 꽤나 비싼 건데 하찮은 놈 때문에 아깝게 녹여버렸군. 차라리 그놈의 대가리를 녹이는 건데 말야.”
전리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끼여들었다.
“주군, 뭘 그리 심려하십니까. 이번 달 그놈의 급료에서 까면 되는 것인데.”
광예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가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으응? 푸하하!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너는 정말로 똑똑하구나.”
전리염의 고개가 직각으로 숙여졌다.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빼지 말라고. 크크, 그럼 우리도 천천히 가 볼까나?”
“명을 받듭니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신형을 날린 광예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평소에 암실에 파묻혀 독의 배합에만 열심이었던 광예에게 살각의 각주인 신휘(呻徽)가 찾아왔던 것이다.
“놀랍군. 자네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이제 갓 사십을 넘긴 신휘는 차가운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온 목적을 아신다면 더욱 놀라실 겁니다.”
순간 광예의 눈빛이 호기심을 발했다.
“자네가 찾아온 것보다 더욱 놀랄 일이 있다는 것인가?”
신휘는 낮게 웃었다.
“후후, 왜 없겠습니까.”
신분상으로는 맞먹는 관계이지만 광예가 연장자인 탓에 신휘를 낮춰 부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신휘는 별로 괘념치 않는 듯 했다.
“뜸들이지 말아줬으면 하네.”
광예는 자신이 놀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굳어진 얼굴이었다. 덕분에 좀 더 끌고 싶었던 신휘는 어쩔 수 없이 본론을 꺼내야 했다.
“광예님께서 그렇게 고대하시던 순간이 왔습니다.”
“고대했던 순간? 그렇다면 역천이 죽었다는 소리인가?”
신휘는 내심 실소를 했지만 겉으로는 놀라는 척했다.
“생각보다 직선적이시군요.”
한번 굳어졌던 광예의 얼굴을 쉽사리 펴질 생각을 안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자네와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이 없으니, 이곳에 찾아온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가주시게.”
신휘는 자신에게서 신형을 돌리려는 광예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감송이 외부로 나갔소.”
흠칫!
약간 틀어졌던 광예의 신형이 재빨리 원위치 했다.
“언제 말인가.”
그의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진한 광망(光芒)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신휘조차 거리를 두고 물러설 정도였다.
“하하, 고대하시던 순간이 맞지 않습니까.”
“인정한다. 그게 언제냐.”
어느새 반말이 되어버렸다. 신휘도 그것만큼은 용납해줄 수 없었던지 살각의 각주답게 자세를 바로잡고 전신에 살기를 흘렸다.
“저를 누구로 알고 계시는 겁니까. 뭔가 착각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광예는 더럽고 아니꼽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미안하네. 내 잘못을 인정하지.”
신휘의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셨다니 됐습니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넘어가죠. 감송이 사라진 것은 저조차 몰랐는데 한식경 전에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더군요. 그 인물은 방금 광예님께서 언급한 자이기도 합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광예는 낮게 이를 갈았다.
“으득, 역천이란 말인가?”
맞았음인지 신휘의 입이 열렸다.
“그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감송이 방금 본교를 떠났는데 각주께선 그 사실을 아시오?’ 라고 말입니다.”
“계속 말해보게.”
신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의 진의를 알 수 없었던 제가 왜 그 사실을 가르쳐 주냐고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헴! 어쨌든 그렇다는 것만 알려준 거요. 각주가 그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 같기에 가르쳐 준거니까 알아서 하쇼. 아? 감송의 거처 부근에서 각주의 수하로 추정되는 놈이 죽어있더라고? 그래서 부전주에게 보냈는데, 이의 없지?'”
광예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심한 굴곡을 보였다.
“역천의 말투까지는 따라하지 말게. 심히 기분이 나쁘니까.”
“아? 하하,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가 그러고 나간 후 제가 직접 감송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광예님이 떠올라 시간이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 뵌 겁니다. 예전에 감송과 꼭 손속을 겨루어보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원래는 항광과 겨루어보고 싶었으나 그가 만독문으로 도망친 후 감송이 나타나자 꿩 대신 닭이었지만 상대를 바꾼 것이다. 만독문과 자신의 독공을 비교해보고 싶었던 그는 예전부터 감송과 싸워보고 싶다는 의사를 종종 표시하곤 했는데 마침내 오늘 그 기회가 찾아오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좋아. 아주 좋네. 헌데 자네가 나에게 이런 건수를 양보해주다니 의외일세.”
신휘는 그 무슨 말이냐는 듯 정색을 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너무 추켜세워 주지 마십시오.”
그러겠다고 대꾸는 했지만 광예의 속마음은 달랐다.
‘간사한 놈. 손 하나 안 대고 코를 풀 작정이군. 흥, 어쨌든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놈이 이것을 빌미로 나중에 뭘 요구할지…….’
이런 은밀한 거래에는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어야하는 법이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화통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쪼잔한 성격 또한 아니었던 광예는 우선 당면한 문제부터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이 일은 내가 맞겠네.”
신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광예님께서 손수 맡겠다고 하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용무가 끝났으면 나가달라고 말하려던 광예는 갑자기 다른 곳에 생각이 미쳤다.
“독살은 그렇다 치고, 단묘는 어찌할 것인가?”
신휘도 그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처럼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그렇군요. 갑자기 감송이 떠나는 바람에 그녀에 관해서 약간 소홀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광예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휘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지금 그녀의 내공은 거의 소실된 상태입니다. 간간이 소연이란 아이가 건네주는 피를 마시며 내공을 끌어올리고는 있지만 오십보 백보지요. 남편이 도망갔는데 그 몸으로 혼자 도망갈 리 만무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녀의 명성을 고려해 제가 직접 나설 생각입니다.”
“그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 상관은 않겠네. 그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신휘는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 하고는 조용히 사라졌고 광예의 생각도 거기에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