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03화
그것을 처음 눈치챈 자는 멀리서 지켜보던 신휘였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시체처럼 건들거리며 서 있는 화정이를 보게 되었다. 화정이는 약간 멍한 기운을 보였는데 그런 그녀의 시선은 살수들과 대치하고 있는 민소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신휘는 마지막 결판이 나는 이 시점에서 살수들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들의 공격이 끝나고 나면 가르쳐주리라 마음먹었다. 허나, 세상일이란 것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듯 화정이도 신휘의 계획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것처럼 육합풍변지환진(六合風變地幻陣) 쪽으로 한 발 한 발을 옮겨갔다. 그리고 그것을 본 신휘가 경악을 했으니.
‘보법? 강시가?’
한눈에 봐선 보법의 명칭을 알 수 없었으나 단 한 가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강시는 보법을 시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보고 흉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기의 유통과 흐름의 이해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강시의 지능으로 그것을 이해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고대의 불사강시조차 겨우 한두 가지 익힐 수 있을 뿐인데 초혼강시가 어찌 보법을 정확히 밟고 이행한단 말인가?’
찰나간의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은 화정이의 신형을 앞으로 띄워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신들이 발산한 희뿌연 강기막에 둘러싸여 있던 살수들은 다가오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풍변 중 마지막 삼변(三變)을 시전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삼괘에 자리하고 있던 살수는 신휘의 전음을 받고, 다급히 공격의 방향을 자신의 뒤쪽으로 바꾸었다.
꽈꽈꽝! 콰광!
선혈이 난무하고 엄청난 폭발음이 일시에 일어났다. 그 접전으로 퉁겨 나간 사람은 네 명. 민소희를 공격했던 자들 중 그나마 내력이 딸리는 자들 셋과 화정이를 공격했던 살수 하나였다. 화정이를 공격했던 살수는 민소희를 맡았던 살수들과는 달리 멀쩡했다. 다만 불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화정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검으로 정확히 심장을 찔렀는데 고무공을 찌른 것처럼 곧바로 퉁겨 나갔으니 놀랄 만도 하리라. 그때 화정이의 흐리멍덩한 눈은 자신 쪽으로 날아온 사람의 몸뚱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몸뚱이가 말 그대로 몸뚱이만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목 부분이 깨끗이 절단되어 머리가 없고 몸뚱이만 남아있는 상태란 소리다. 이 몸뚱이의 주인공은 퉁겨 나갔던 세 명의 살수 중 하나였다. 그리고 퉁겨 나갔던 세 명은 모두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
살아남은 살수들이 하나둘 화정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 앞에 널브러진 주인 없는 몸뚱이를 한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망각의 기억들…….
-어머니, 난 죽고 싶지, 죽고 싶지……. 말씀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헤헤. 흔적은 잘 처리했겠지? 실패했습니다. 또 인가? 호오? 거기까지 손을 봐 뒀는가?
뒤죽박죽 뒤섞여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웠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으윽, 으으!”
편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점점 살아나고 있을 때 진한 혈향이 그녀의 코끝을 맴돌았다. 그녀의 두 눈은 본능에 이끌린 듯 혈향의 근원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시체의 목에서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핏물을 보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다른 명…령을 내려 줄… 때까……. 툭, 데굴데굴. …….
생각이 났다. 그 사내는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사내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서야 말을 멈추었다는 것을, 구르고 굴러 그녀에게로 다가온 머리는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몸은 심한 공포를 견뎌내지 못해 심하게 떨렸다. 마침내 그녀는 혼신의 힘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아! 꺄아아!”
천지사방을 울리는 비명소리였다. 비명의 여파는 산을 넘고 주변의 산들을 넘어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푸드드득!
애꿎은 새들이 비명에 놀라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러나 비단 놀란 것은 산 속의 새들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풍류를 즐기고 있던 어느 두 사람들도 그 비명소리에 놀란 것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물어본 자보다 약간 더 늙어 보이는 자가 얼른 대꾸했다.
“들으셨다시피 여인네의 비명소리입니다.”
눈살을 찌푸린 중년의 사내는 멋들어진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가 그것을 모르는가? 참으로 답답하이. 그러니까 왜 비명소리가 들렸냐는 것일세.”
‘이씨, 니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내심 한바탕 떠들어 댄 사내는 알겠다는 듯 얼른 신발을 신고 일어났다.
“어서 가시지요. 아낙네의 위기를 보고도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중년의 사내는 ‘옳거니!’ 하고 소리친 뒤 자신도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헌데, 도우러 가는 사람 같지 않게 일어나는 것도 천천히였고, 신발을 신는 것도 천천히였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사내는 자고로 품위를 지켜야 하는 것일세. 허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중년인은 이내 신형을 날렸다. 어찌나 빠른 속도이던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속으로 욕을 퍼붓다 얼떨결에 혼자 남게 된 사내는 재빨리 뒤쫓아갔다.
“가, 같이 가요!”
중년의 사내가 먼저 장내에 도착했을 때 맨땅에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사람은 고작 세 사람뿐이었다.
우두둑! 투둑!
“크어억!”
그나마 그들 중 한 사람도 그새 목이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주인 없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화정이와 무슨 이유에서인지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신휘뿐이었다. 손아귀의 힘만으로 살수의 머리와 몸뚱이를 분리시킨 화정이는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신체와 고통에 못 이겨 눈알이 튀어나오고 혀가 한 자나 늘어져있는 살수의 머리를 부여잡은 채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머리가 잘려, 잘려있다. 그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잘렸다. 잘렸다…….”
신휘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작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방금 도착한 중년인은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의 사태를 둘러보았다.
“흐음, 참으로 잔혹하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화정이는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중년인은 잠시 후 신휘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보시오.”
경각심을 돋우고 있던 신휘는 상대가 물어보자 못 본 척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중년인의 등장을 그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 했다.
“아? 당신은 누구시오?”
“그 전에 잠시.”
중년인은 자신이 먼저 물어보고도 정작 말할 기회가 오자 손을 들어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신휘는 중년인의 기도를 느꼈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대단하군. 적어도 나에 뒤질 자가 아니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란 말인가? 하지만 저 정도의 기도라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리 없다. 조금만 유도해보면 곧 신분이 드러나겠지.’
중년인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다소 늦게 도착하고 있는 그의 심복을 기다리는 것이다. 잠시 후 한 사내가 나타나 중년인의 바로 옆에 내려섰다. 그 자의 용모에 신휘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는데 생김새가 영 아니었던 것이다. 사내의 얼굴에는 이리저리 굵고 긴 상처들이 나 있었고 잘려진 한쪽 귀는 예전에 한 가닥 했다는 인상을 풍겼는데, 이곳의 참상을 보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신휘의 입장에선 차마 못 봐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당신의 신분을 말씀해 주시겠소?”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심복에게 말했다.
“이보게, 사주문(査朱門). 저분께서 내 이름을 알고자 하신다네.”
사주문은 ‘그래서요?’ 라는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즉, 네 입 놔두고 왜 자신을 시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중년인이 낮게 혀를 찼다.
“쯧쯧, 아직도 모르겠는가?”
몰랐다. 아니, 이해를 했어도 정말로 말하기 싫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시키는 대로 해야 앞일이 편안한 것을.
“미천한 제가 이제야 알았습니다. 헤헤.”
그는 아니꼬와도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나섰다.
“험! 이분께서는 조정(趙精)자 광(光)자를 쓰고 계시는 분으로서 세상이 너무 타락하여 그것을 바로 잡고 세우시기 위해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 분이외다. 그러니 당신은 오늘 이분을 뵌 것을 영광으로 아시오.”
“허허, 이보게 너무 띄워주면 곤란하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웃음 진 그의 얼굴에는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신휘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이유는 조정광의 이름이 상당히 낯설었기 때문이다.
‘조정광? 흐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가물가물했지만 분명 예사롭지 않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처음 보는 상대임에도 말이다.
“…….”
속이 넘어오는 것을 참아가며 갖은 아첨을 다 했던 사주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신휘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니 그의 입 놀림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리 만무했다.
“이보슈. 내가 이분의 소개를 해드렸으면 당신도 자신의 소개를 해야 할 것 아니오.”
신휘는 피식 웃었다. 가소로웠던 것이다. 조정광은 몰라도 사주문이란 자는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 주인의 힘만 믿고 까부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태가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소? 그랬다면 미안하오. 본좌는 암흑마교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살각의 각주외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료.”
“흑? 아, 암흑마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사주문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못된 짓 하다 걸린 아이마냥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조정광의 뒤로 말이다. 조정광은 그런 사주문의 어깨를 토닥인 다음 습관적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도 신휘처럼 암흑마교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이리라.
“암흑마교라. 그렇군! 허허, 그랬었지.”
신휘는 자신이 알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여유롭게 물었다.
“지금에야 생각이 나신 모양이오?”
조정광은 바로 대답했다.
“내 그곳에 종사하는 분과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소. 어디 보자. 성함이 어떻게 되었더라? 무슨 부(府)에서 종사하고 계시고, 눈이 아주 크시고, 무공 또한 강하신 분이었는데……. 허허, 이것 참. 그 이상은 생각이 안 나는구료.”
조정광은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었으나 신휘는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대화했던 누군가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외부로 임무 차 나갔다가 엄청난 사내를 본 적이 있었소. 이십 대 후반의 사내였으나 나이답지 않게 아주 강했소이다. 조정광이라 말했던 그 사내의 무공은 혼천부(混天府)의 부주(府主)인 나조차 삼초도 채 막아내지 못하고 당했으니 말 다한 거겠지. 조심하시오. 만일 그자와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면 상대의 손을 조심하기 바라오. 그자는 전설의…….
신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단강수(斷剛手)! 분명 전설의 삼대수 중 단강수를 익히고 있다고 했다. 으음, 정말로 곤란한 상대를 만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