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09화
한림서원(漢林書院).
2년 만에 찾아와 자기가 살던 곳조차 까먹어버린 동천은 중소구에게 심한 잔소리를 들어가며 아까 보았던 느티나무 쪽으로 되돌아왔다. 오는 동안 도연까지 동천을 변호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었나 보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실수를 할 때도 있고, 저런 실수를 할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동천의 실수 덕택에 되살아난 중소구는 기도 안 차는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실수 저런 실수? 이놈아, 짐승도 자기가 살던 곳은 잊어 먹지 않아!”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동천은 물러서지 않았다.
“짐승하고 사람하고 똑같아요? 그놈은 그 근처에서 노는지라 당연히 기어 들어갈 곳을 까먹지 않는 것이고, 사람인 나는 여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쉼터가 있으니까 잠시 옛날에 살던 곳을 잊어 먹을 수도 있는 거라고요!”
중소구는 동천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황룡세가가 네놈이 살던 곳이냐? 둘러대려면 좀 똑바로 둘러대!”
내심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한 동천은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괜히 목청을 높였다.
“대충 뜻만 이해하면 됐지 쪼잔하게 왜 그래요!”
목청 큰 동천의 주절거림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중소구를 흘겨보았다. 중소구를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한결같이 어린애를 때리는 쪼잔한 인간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적어도 중소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분노가 치민 그는 주먹을 확 치켜들었다가 여기에서 때리면 진짜로 쪼잔한 인간이 되는지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에이! 본 대인이 참는다.”
자신이 직접 찾기로 한 중소구는 그 말을 내뱉곤 앞장서 걸었다. 동천과는 다르게 묻고 물어 드디어 황룡세가의 문 앞에 도착한 중소구는 감회가 서린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동천을 돌아보았다.
“으흐흐, 어떠냐. 본 대인은 이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느냐.”
동천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황룡세가를 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중소구의 으쓱거리는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동천의 눈에는 탄탄하고 잘 짜여진 대문 위로 수수하게 걸려있는 황룡세가라는 현판만이 들어찰 뿐이었다. 그리고 출입구를 막고 있는 형형한 눈빛의 위사들.
‘여전히 그대로구나. 내가 없어도 잘 버텨주고 있었어.’
어린애 하나 없어졌다고 어떻게 될 황룡세가가 아니었으나 정작 동천 자신은 자기 하나가 없어짐으로 해서 황룡세가가 엄청난 인재의 손실과 막중한 위험을 방어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무얼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까.”
도연의 물음에 동천은 급히 눈물을 삼켰다.
“아무 것도 아냐. 그저 예전에 이곳을 지나치며 놀았던 기억이 있어서 말야.”
중소구는 배알이 꼴리는지 기어코 한 소리 더했다.
“흥! 뭐든지 놀았던 것으로 귀결되는 놈이로다.”
자꾸만 걸고넘어지는 중소구의 행동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동천은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는 모든 것을 인내했다.
‘그래, 이제 저 재수 없는 쌍판도 안녕이건만 화를 낸들 화를 참은들 그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러니 참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다면 그 또한 이 몸의 너그러운 마음씨가 빛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마무리까지 끝마친 동천은 욕을 얻어먹었음에도 화를 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후후, 어렸을 때 놀지 언제 또 놀겠습니까. 그보다 황룡세가에 천마도해를 건네주는 것은 대인께서 전적으로 맡아주십시오.”
중소구는 화를 냈어야 정상인 놈이 실실 웃으면서 자신을 대하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걱정 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건 좀 곤란하다. 그것을 얻은 경위를 설명하려면 네가 꼭 필요하니까.”
동천은 정색을 했다.
“예에? 그건 제가 대인께 아주 자세히 설명을 드렸는데 뭐가 또 필요해요!”
중소구는 그게 아니라는 듯 집게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한 법이다. 더군다나 이런 중대한 일에는 전달자보다 목격자의 존재가 더욱 필요해. 또한 없는 것도 아니고 같이 왔는데 당연히 너도 따라와야지 무슨 소리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동천은 난처해졌다.
“그냥 대인께서 그 상황을 겪었다고 하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어허! 감히 네놈이 본 대인에게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냐?”
“그,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런 것이 아니면 뭐라는 것이냐!”
서릿발같은 중소구의 꾸지람에 겁을 먹은 동천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도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도연은 하는 수 없이 나섰다.
“도련님의 품행이 가벼우셔서 대인의 진실이 외면당할 염려가 있으니, 차라리 제가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목격자인 동천이 안 간다면 중소구 혼자 가는 것이나 도연을 내세우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었지만 여기에서 도연을 데리고 간다면 동천의 방정맞음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중소구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소형제의 말 또한 일리가 있네. 그렇다면 내 자네의 뜻대로 하지.”
그 소릴 듣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 동천이었다. 갸웃갸웃거리던 동천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안 들어가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자신을 알아볼 인간들이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었다.
“헤헤, 그럼 갔다오세요.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중소구는 자꾸 빼려고만 드는 동천을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적어도 같이 들어가야지.”
동천은 들어가고픈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아니에요. 오래 걸려도 여기에서 기다릴 테니까 도연이랑 같이 들어가서 빨리 매듭짓고 오시면 되잖아요.”
도연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주군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뒤를 이어 물었다.
“중 대인의 말씀처럼 같이 들어가 있기만 하시지요.”
“됐어, 이 몸은 체질상 이런 곳에 들어가면 두드러기가 일어나서 안돼.”
별로 신빙성 있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주군이 암흑마교에 몸담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그러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도련님을 이곳에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지껏 잠잠하던 추적자들이 도련님께서 혼자 계실 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동천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갈등에 휩싸였다.
‘으으, 안 그래도 도연이까지 소구 자식을 쫓아 들어가 도망치기도 글렀는데 어디선가 숨어있는 놈들까지 걱정해야 된다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 따라 들어간다면 백이면 백 나를 알아보는 인간들이 널려있을 텐데 어떻게 하지?’
동천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미 중소구에 의해서 결론이 나버렸다.
“전적으로 도 소형제의 말이 맞다. 본 대인이 없는 사이에 끌려가서 죽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 잔말 말고 따라 들어오너라.”
동천은 죽는다는 소리만 없었어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꼬리를 마는 것으로 보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하는 건실한(?) 소년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그럼 그러기로 할까요?”
비교적 짧은 앞머리를 모아 안면 부분을 애써 가린 동천은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중소구를 피해 약간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이해 못할 놈이라고 중얼거린 중소구는 무림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도 재앙을 가져다줄 수도 있는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 대문을 지키고 서있는 위사들에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