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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27화


금문(金門), 장문(葬門).

심평은 힘겹게 말했다.

“나는 이명호월을……. 이, 이월이라 들었어도 이분들임을 떠올렸을 것이오.”

“크악? 말도 안 돼!”

천소평 이하 응창삼황들은 이럴 순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동천은 십년 감수했다는 표정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냈다. 그러나 속마음만은 흥분에 들떠 있었다.

‘오오! 이 몸을 위해 어머니를 기녀원 경력 40년으로 만들어놓다니! 이제부터는 은혜 갚은 까치가 아니라, 은혜 갚은 심평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강비월이 차갑게 물었다.

“심평, 네 말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으렷다?”

심평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소.”

고개를 끄덕인 강비월은 말했다.

“그렇다면 죽어라.”

“뭐? …컥!”

뎅겅!

누가 뭐라 할 사이도 없었다. 섬전처럼 움직인 강비월의 손은 예리한 날이 되어 심평의 목을 베어버렸다. 떼굴떼굴 굴러가다 고승척의 발치께로 멈춘 심평의 머리는 부릅뜬 눈으로 고승척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으적으적.”

고승척은 말없이 무언가를 씹고만 있다가 피식 웃고는 이명호월의 강비월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평소 이명호월 선배님들의 공정함에 존경했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나보구려?”

다분히 도전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잠시 공황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동천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도저히 고승척의 발치를 바라보지 못했다.

‘이런 썅! 제기랄, 제기랄!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약조한지, 반각도 지나지 않아 말을 번복하다니……! 이런 개 같은 늙은이들을 봤나!’

그때 강비월이 싸늘히 말했다.

“후배가 말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약조를 한 적이 없다. 그냥 들어보자고 했을 뿐!”

“…….”

곰곰이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해보자 억지도 아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승척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며 그나마 웃는 곳이라곤 오직 입뿐이었다.

“헐헐, 듣고 보니까 그렇구려. 하지만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보는데?”

그의 말투는 여전히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이것은 그가 정의감이 넘쳐서가 아니었다. 그의 성격상 약조를 어기는 자를 혐오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복수하러 찾아올 심평을 생각해서 나름대로 즐겁게 기다리는 맛을 즐기려고 했는데 그것이 무산되자 기분이 언짢아졌던 것이다. 그것을 알 리 없는 강두월이 말했다.

“내 동생의 이야기는 부가적인 것이고 심평이 죽은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새대가리처럼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높이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이미 공언했거늘, 그것을 망각한 심평이 천소평의 잔꾀에 넘어가 소리쳤기 때문에 짜증이 나 죽여버린 것이다. 이제 알았다면 후배는 그만 감정을 거두어라. 선배로서 참아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천소평도 방금 소리쳤는데…….”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킨 천소평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저, 저는!”

질겁하며 물러나는 천소평에게 강두월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비록 얼마 전에 하인으로 인연을 맺었다고는 하나, 내 품안의 자식이라고 했다. 한 식구나 다름없는 일이니 그까짓 일로 손을 쓸 수야 없지.”

“가, 감사합니다! 백골난망입니다, 큰 주인님!”

죽었다가 살아난 천소평은 감격에 겨웠는지 바닥에 연신 머리를 찧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골이 난 동천이 ‘피가 날 정도까지는 아니네?’ 라고 중얼거리자 울며 겨자 먹기로 머리가 터질 때까지 죽어라 박아댔다. 강비월은 흡족하여 천소평의 행위를 제지했다.

“허허, 그만 하거라. 인재란 소중히 할수록 그 보답을 다하는 법인데 이렇게 하다가는 보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죽겠구나.”

결국 천소평은 이마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어질 거리는 와중에도 꾸벅꾸벅 인사를 올렸다.

“물론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진심을 다하여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변치 않고, 중얼중얼…….”

인사를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면 갈수록 정신나간 사람처럼 보이자 인상을 찌푸린 강두월이 나머지 응창삼황들에게 턱짓을 했다. 얼른 치우라는 뜻이었다. 이해력이 딸리는 진창남은 소용없었고, 그나마 천소평 다음으로 눈치가 빤했던 영혜풍이 뒤쪽으로 데려다 놨다. 일단 사태가 정리되자 평소대로 돌아온 고승척이 그런 이유라면 이해했다는 듯 싱글거리며 무언가를 씹었다. 이명호월은 그제야 마음놓고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동천에게 말했다.

“하인들이 수집해온 것 외에도 우리가 직접 조사해본 바, 우리를 곤욕스럽게 한 소문의 근원지는 네가 틀림없어 보이는구나. 원래는 송금을 경유해 곽술이의 거처를 알아낸 뒤 네 녀석을 찾아보고자 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나타났으니 억울하다면 해명을 해보거라. 앞서 말했듯 모든 일에는 공정해야하므로 변론의 기회를 주겠다.”

궁지에 몰린 동천은 생각했다.

‘제길, 이놈들이 물렁한 듯 보이면서도 호박씨 깔 것은 다 까는 성격이로구나? 쓰읍!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한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곧,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책이라 할 수 있는 정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공정하시다니! 역시, 이월 어르신들입니다. 그것에 관해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잘 모르겠으나 제 또래의 사내아이가 이 주점에 또 있다는 것은 알고있습니다. 아마도 그녀석이 아닐까 싶은데요?”

처음 듣는 소리이자 강두월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또 있다고?”

“그렇군! 봤지, 봤어! 으적으적, 아까 들어올 때 웬 나잇살 먹은 놈과 같이 있었던 것을 내가 봤소이다.”

고승척이 때맞춰 맞장구를 쳐주었다. 동천은 그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고 대협께서 보셨다니 틀림없을 겁니다. 아아, 저는 이렇게 수긍할 수 없는 소문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진실을 파헤치다가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가셔서 확인해주십시오!”

이명호월은 서로들 한 번 마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참……. 좋다. 그리로 한번 가보자.”

허락이 떨어지자 동천이 재빨리 선두에 섰다.

“제가 감히 앞장서겠습니다. 헤헤, 무죄를 증명하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리거든요.”

이렇게 동천이 나서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심리전이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 누가 강요하기도 전에 나섬으로서 그만큼 이명호월의 의심을 줄여보자는 속셈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처음보다 의심의 강도를 줄인 그들은 동천의 행동을 허락했다.

“네가 그렇게 열심이니 제동을 걸 수 없겠구나. 어디 능력껏 움직여보거라.”

“예, 어르신!”

그리곤 속으로 생각했다.

‘어르신은 개뿔. 니가 어르신이면 난 그 어르신의 할애비다, 짜식아! 퉤, 죽일 놈의 자식! 퉤, 목마르다고 물 마시다가 콱 목 막혀 뒈져버릴 놈 같으니라고! 고작 그따위 것 때문에 심평의 목을 따? 으득, 그래도 이 몸께 은혜 갚은 심평이니 내 언젠가 꼭 복수를 해주고 말 테다!’

나름대로 의리를 부르짖고 긴 통로를 지나 무작정 주점의 중앙 쪽으로 걸어가던 동천은 문득 아무 상관도 없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어? 근데 이 송금 자식은 이런 궁벽한 산골에 살면서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듯 긴 통로와 이어지는 안채까지 꾸며놨던 것이지? 혹, 그놈의 애비가 유산을 넉넉하게 물려줬나? 가만, 그러고 보니까 그 인간……. 누구하고 닮았던 것 같은데? 누구더라?’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랐다. 다만 워낙에 엉뚱한 동천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야, 멈춰라.”

돌연 강두월이 동천을 제지했다. 동천은 의아한 얼굴로 약간 뒤쪽의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강두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앞쪽에 손님들이 계시는구나.”

동천은 그 손님들의 뜻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손님들이요? 손님들이라면 응당 맞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에 반해 강두월은 동천의 말을 복잡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 자고로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했다. 찾아오는 자는 선한 자가 드무니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겠구나.”

‘뭐라는 소리야……?’

그때까지도 동천은 무슨 뜻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통로를 벗어나 넓은 내부로 들어서자 일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중간에 두 노인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나마 어둠에 익숙해졌기에 알아본 것이지, 아니었다면 멋모르고 그대로 올라갈 뻔했다.

“저분들입니까?”

동천이 묻자 강비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잘 보여 점수를 따야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멋모르고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어이구, 이 밤중에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어서,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금문은 이 어린놈이 뭐 하는 짓인가 했다.

“너는 노부를 아느냐?”

‘아, 씨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알아. 기껏 생각해서 체면 살려주려니까 그렇게도 눈치가 없냐?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동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사해(四海)가 다 동도(同道)이니 모른다고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자자, 주변이 별로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만 저쪽 자리에 가셔서 같이 앉으시지요. 술은 제가 찾아 내오겠습니다.”

동천이 말한 불유쾌한 상황은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를 말하는 것이고, 금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서로의 대치상황을 생각했으나 뜻은 통했으니 결과적으로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뒤이어 그들의 탁자 주위에 불이 켜졌다. 앞서 말했듯 술과 안주를 떠맡게 된 동천은 진창남과 함께 술안주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고씨의 방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도연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 저런 병신 같은 놈! 왜 하필 이때에…….’

깜짝 놀란 동천은 재빨리 들어가 숨으라고 연신 손을 내저었다. 워낙에 놀랐기에 전음을 펼칠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다행이 도연은 동천의 행동을 보았고 쓰윽, 안으로 들어갔다.

“이놈아, 왜 갑자기 실성한 놈처럼 손을 흔들어대느냐?”

진창남이 의심하자 동천이 인상을 썼다.

“변일구, 댁이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이 아닌 밤중에 왜 손을 흔들어댔겠어. 바로 모기가 극성이니까 잡으려고 흔든 거지.”

“그, 그러냐? 난 또 뭐라고.”

일단 수긍은 했는데 듣고 보니까 욕먹은 것이 아닌가!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아아, 쓸데없는 소리말고 안주는 대충 건졌으니까 술이나 찾아! 아마 이월 어르신들께 늦게 대령했다가는 신상에 좋지 않을걸?”

분노한 진창남을 손쉽게 요리한 동천은 술 창고를 찾아낸 뒤 자잘한 술병이 아닌 동이 채 들고 왔다. 별 이유 없이 뒤따라온 고승척은 그나마 안면을 텄다고 이명호월과 같은 쪽에 앉아있었고 금문과 장문은 그들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명호월의 뒤에서 호위하듯 서있던 천소평과 연혜풍은 물건을 들고 다가오는 동천과 진창남을 발견하곤 재빨리 달려와 도와주었다. 모든 준비가 완비된 것 같자 강두월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에서 오신 분들이오?”

금문은 대뜸 말했다.

“본 노부가 선배이니 말을 놓겠다. 노부는 금문이고, 여기 이 친구는 장문으로서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이곳에 들렸다.”

금문의 언사에 기분이 언짢아진, 아니 분노한 이명호월은 두 눈을 부릅뜨고 금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노련한 노고수답게 강비월이 겨우 참고 입을 열었다.

“실례…하오만, 어찌하여 선배가…… 되시는 것이오?”

씨익 웃은 장문은 거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그거야 네놈들이 기저귀차고 돌아다닐 때, 나와 여기 금문 형은 강호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니라.”

벌떡!

“뭣이라?”

강비월이 참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그의 형 강두월이 제지시킨 후 말했다.

“허허, 그랬구려. 자아, 선배님들. 본 후배의 술잔을 받아주시지요.”

어찌된 일인지 강두월은 화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술동이에서 한바가지 퍼 올렸다. 먼저 금문이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헌데, 내리붓는 술의 무게가 별안간 묵직해지는 것이 아닌가!

“음?”

굵은 눈썹을 꿈틀거린 금문은 묵묵히 술을 받은 후 한잔 마시려는 시늉을 하다가 천연덕스럽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내려놓은 술잔의 속을 보여주며 싸늘하게 말했다.

“네놈이 무례하기가 그지없구나. 술을 따라준답시고 따라주지 않았으니 이 어찌 기만이라 하지 않으리!”

“무슨 소리를……, 엇?”

강두월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낌새를 느끼지도 못했는데 상대는 이미 술을 증발시켜놓은 것이다.

‘이럴 수가! 최소 우리 형제와 비견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구나! 이 정도라면 명문무가의 문주라 말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비견하자면 이명호월도 빠지는 실력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금문의 실력을 접하자 자신들을 스스로 낮추고 금문의 솜씨를 대접해준 것이다.

“대, 대단하구려.”

강비월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술잔의 술을 증발시키자면 강씨 형제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고수의 이목을 숨기면서까지 증발시킬 수가 없다는 부분에서 명암이 갈렸다. 이 어찌 대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거 우리측 장로들과 거의 맞먹는 경지로 보이는걸?’

동천이 내심 혀를 내두를 때 고승척이 나섰다.

“헐헐, 두 분 노선배님들의 화후가 이 후배에게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구려. 으적으적, 저는 이 두 분을 선배님들로 여기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소이다.”

놀라는 바람에 선수를 빼앗겨버린 이명호월은 다급히 고승척의 뒤를 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실례를 용서해주시지요.”

“저희들이 숨은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인이 고개를 숙이자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던 응창삼황들도 허리를 굽혔다. 딱히 끼여들 자리를 찾지 못한 동천은 굳이 늙은이들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어물쩍 넘어갔고 말이다. 금문과 장문은 애초에 동천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조용히 넘어갔다. 금문은 말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선배 된 도리로서 너그러이 덮어주겠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래, 너희는 무슨 일로 이 주점에 들어와 설쳐댄 것이냐.”

강두월은 공손한 자세로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난데없이 천마도해를 가진 자들로 몰려 한바탕 드잡이 질 했던 일과 그 와중에 쫓기는 응창삼황을 만나 하인들로 받아들인 일. 그리고 응창삼황이 수집한 정보 중에 동천이 유력한 용의자로 걸리자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는 곽술이의 거처를 알기 위해 송금에게로 찾아온 일까지……. 제법 말솜씨가 있었던지 강두월의 이야기는 매끄러웠고 금문과 장문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허허, 그래그래. 나름대로 겪을 만큼 겪었구나.”

이야기에 만족한 듯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 못한 장문은 여태껏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동천에게 그 호기심을 돌렸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동천은 금문 일행과 이명호월 간에 어떻게 하면 싸움을 붙일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책이라 할만한 것이 생각나려는 찰나 방해를 받게되자 그렇게 짜증이날 수가 없었다.

‘아 씨, 하필 질문을 해도 이런 때에 질문을 하냐? 아주 구린내 나는 독방에 십 년을 처넣을 늙은이 같으니라고. ……아니지? 아무리 그렇다 하나, 다 늙은 할아범에게 해코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아, 어쩌랴! 착하디 착한 이 몸께서 참아야지.’

조금 정정하자면 다 늙어 해코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안되어 참는 것이었다. 일단 포기한 그는 심중이 드러나지 않게 철저한 안면관리를 했다.

“동천이라 합니다.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순간 장문의 두 눈에서 신광이 터졌다.

“동천? 동천이라고 했느냐?”

장문의 신광에 깜짝 놀란 동천은 ‘고양이과 인가?’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예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동천이 수긍하자 금문과 장문이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문 형, 이 아이가 맞아 보이오?”

“음, 동천이란 이름이 흔치 않은 것으로 보아 틀림없어 보이는군.”

“하지만 어딘가에서 주워들었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것은 너무 비약일세.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예측한 것도 아닐텐데 이름을 속여서까지 자신을 내세울 리가 있겠는가.”

“아참, 그러고 보니 그 여아의 이름도 모르고있지 않았소이까.”

“……그렇군. 당시의 상황이 묘하여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나보군. 아?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떠한가. 만일 대답하지 못한다면 감히 거짓부렁을 늘어놨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이상 허투루 대답하지는 못할 것일세.”

마침내 저희들끼리 이야기가 끝났는지 장문이 날카로운 뱁새눈을 모으며 동천에게 물었다.

“너는 동행이 있더냐?”

동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고작 그따위 걸 물어보려고 지들끼리 옆집아줌마 저리 가라할 정도로 재잘댔단 말이야?’

그러나 일단 공손하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9호실에 묵고있으니 같이 가셔서 확인하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데려와 볼까요?”

9호실까지 간다면 든든한 화정이가 버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숨통이 풀리는 존재가 그녀였기에 은근히 떠보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장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까지는 필요 없다. 그렇다면 네 동행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말해보거라.”

“물어보시니 대답은 하겠습니다. 헌데, 무엇 때문에 물으셨는지 감히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허허, 당돌한 놈이구나. 내 아랫것들이었다면 팔 하나는 잘랐겠지만 그런 사이도 아니고 하니 묵과해주겠다. 어서 질문에나 답하거라!”

결국 그 속뜻은 가르쳐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게 다 있어?’ 라고 내심 씨부렁거린 동천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물음이자 거짓은 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예, 알겠습니다. 9호실에는 두 여인이 있는데 한 명은 소연으로서 순박한 미모에 마음씨 또한 착하니 그만하면 어디에 내다놔도 모자람이 없는 아이입니다. 굳이 오늘 입었던 옷까지 알고싶으시다면 연녹색 상의와 하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화정이인데 미모와 실력은 뛰어나나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보다 크게 뒤떨어지는 것이 흠입니다. 차츰 나아지고는 있지만 언제 철이 들는지 걱정이 되는 아이죠. 다 제 아랫것들인데 나이는 각각 17와 19세입니다. 아? 화정이가 오늘 입었던 옷을 까먹었군요?”

그때 금문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너는 잠시 노부를……, 응?”

콰앙!

“여기에 송금이란 놈이 있으렷다?”

갑자기 한 무리들이 들이닥쳤고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듬직한 체구의 장한이 그렇게 소리쳤다. 기세 등등하게 들어온 그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가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발견하곤 그제야 주춤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조촐하게 켜진 등잔 주위에 어린놈에서부터 늙은이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말이다. 시체가 바로 주위에 있는데 술잔을 기울이다니…….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들의 행각이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에 장한은 생각했다.

‘사람으로서 죽은 자들을 옆에 놓고 희희낙락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을 봤나!’

으득, 이를 간 장한은 분노하며 소리쳤다.

“……가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 나갔다. 아니, 도망쳤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순간의 황당함에서 벗어난 강비월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저것들 뭐야?”

작은 주인에게 잘 보일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천소평이 나섰다.

“기회를 주신다면 저희가 추적하여 쓸어버리겠습니다.”

강두월은 대뜸 말했다.

“아서라. 너희들의 실력으로 여섯까지는 가능하나 그 이상으로는 어렵다. 공연히 수발들 인력들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너희는 그냥 눌러앉아 있거라.”

“예, 큰 주인님!”

천소평의 단념은 간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지하리라 예측하고 떠벌린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들의 이야기가 일단락 되자 금문이 중단되었던 말을 다시 이었다.

“너는 잠시 노부를 따라오너라.”

대답을 마치고 일방적으로 일어선 금문이 앞장서자 동천도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랐다. 혹시나 따로 데려가서 해코지하려는 것이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금문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조심스레 그의 뒤를 뒤따르며 갖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워나가던 동천은 순간적으로 풍기는 비린내에 얼굴을 구기고 코를 막았다.

“욱? 이게 무슨 냄새지?”

일층에서도 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강렬하진 않았다. 잠시 후 동천은 통로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죽은 이들의 수가 언뜻 보아도 십여 구는 넘어 보였다. 금문은 놀란 동천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자 차분히 일러주었다.

“이들은 나오지 말라는 본 노부의 명을 어겼기에 징벌을 내린 것이다. 다행이 네 일행은 관여하지 않았기에 무사할 수 있었지. 헌데…….”

일단 일행의 무사함에 안도한 동천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어르신! 대저 우주의 조화가 천지에 이르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지만 않으신다면 성심 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눈앞의 죽음들을 목도하자 약간(?)은 비굴해졌나보다. 금문은 이 어린놈이 불필요한 말들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데리고 다닐 것도 아니기에 넘어가 주었다.

“그렇게까지 묻는 이가 있다면 필시 미친놈일 테니 당연히 묻지 않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네가 몸담고 있는 곳을 밝히거라.”

“예? 제, 제가 몸담고 있는 곳 말입니까?”

동천이 당황하자 금문의 눈이 대뜸 싸늘해졌다.

“그렇다. 내 눈은 속일 수 없으니 나를 똑바로 보고 답하거라. 만일, 이 노부를 바라보며 말하는 눈빛에 거짓이 느껴진다면 네놈도 가차없이 베어 버릴 것이니 그리 알고 신중히 대답해주길 바란다.”

“아,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요.”

번쩍!

금문의 손이 하나의 선을 그리며 동천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강기의 파도가 뒤편의 벽을 쩍 갈라버렸다. 너무도 놀라 두 눈만 끔뻑거린 동천은 후들후들 떨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나름대로 방비를 한답시고 긴장을 곧추세웠는데 상대가 봐주지 않았더라면 머리 위가 아닌 목이 날아갈 뻔했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삼십 장 밖 수풀에서 빨간 책을 읽으며 손 운동하던 춘삼이 형도 발견한 두 눈인데, 이 두 눈으로도 전혀 진로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니! 이게 사람이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조차 안 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운기할 때 빼고는 꺼리고있던 역심무극결을 운용했다. 일단 역의 성격으로만 들어가면 아무 거부감이 없어지지만, 평소의 그가 역의 성격을 생각할 때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차분히 내공을 끌어올리고 그것을 전신으로 퍼트리자 뛰던 가슴이 진정되고 사물을 판단하는 시야가 넓어졌다.

“…….”

금문은 말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동천의 모습에 약간 놀라했다.

‘음? 이것 봐라? 눈빛이 바뀌었다?’

그때 동천이 말했다.

“경행록(景行錄)에서 가로되,

‘은혜와 의리를 넓게 베풀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지 아니하겠는가.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돌아 피하기 어려우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금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동천은 개의치 않고 또 말했다.

“태공(太公)이 가로되,

‘자기가 귀하다고 해서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자기가 크다고 해서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용맹을 믿고서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지니라,’

하였습니다.”

금문은 그제야 동천이 말한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어이가 없어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호라? 허허, 네가 본 노부의 행동을 꾸짖는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작은 득(得)을 얻기 위해 큰 해(害)를 가했으니 연장자답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문은 살아 평생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흥미를 가지고 대꾸해주었다.

“노부는 너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답을 듣고자 시간단축을 위해 네 뒤의 벽을 그었을 뿐이다. 어찌 이것이 큰 해가 된다는 소리냐.”

동천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저는 직접적인 피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이해관계가 이렇듯 이루어진다면 인(人)과 예(禮)와 의(義)가 끊어지는 것이니 어찌 큰 해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금문의 목소리가 약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이 노부를 가르치겠단 말이더냐?”

동천은 단호히 말했다.

“잘못에는 나이의 고하를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

마침내 싸늘해진 금문이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살아온 나름대로의 인생철학이 있다. 나는 이제와 그것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잔소리는 그만하고 네 신분이나 밝히거라. 이것이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구나.”

금문의 은근한 강압에 동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자가 어찌하여 내 신분에 집착하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앞서 이야기들을 되 집어보면 소연이나 화정이. 이 둘 중 하나가 이들과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그중 눈여겨본 것은 화정이. 짧은 만남 속에서 그 애의 숨겨진 화후가 대단하자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신분에 뒤늦게나마 관심을 보인 것일 게다. 예의를 갖추고 물었다면 가르쳐줬을 것이나 그 반대였으니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없구나. 내 계산이 맞는다면 승산은 있다. 해보는 수밖에!’

그는 대뜸 소리쳐 불렀다.

“화정아!”

그러자 마치 대기라도 한 듯 문을 연 화정이가 쪼르르 달려나왔다.

“도, 동천 왔어?”

그녀는 몸을 사리며 동천의 눈치를 보았다. 주인의 변화된 모습을 감지하고 벌써부터 주눅이든 것이다. 알다시피 그녀는 역의 성격일 때의 동천을 어려워했다. 동천은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금문만을 직시하며 말했다.

“저와 여기 화정이가 어르신께 한 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단, 방금 전의 일을 없던 일로 해주신다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금문은 오랜만에 유쾌한 상황이라 생각하여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좋다, 좋아! 내 그 용기가 가상하여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 아울러, 본 노부의 강압적이었던 태도도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해주겠다. 단, 네 신분을 밝힌다면 말이다.”

“…….”

동천은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대답해줄 마음이 없었는데, 체면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까지 인정한다고 하자 그도 마냥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화해의 방향으로 결론을 매듭지었다.

“후우, 어르신의 일관됨에 제가 졌습니다. 좋습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은 없을 것이라 믿고 말씀드리죠. 저는 암흑마교의 사람입니다.”

그 얘기에 금문이 놀라했다.

“암흑마교? 어허, 이제 보니 같은 가족이나 다름없었군?”

잠시 머리를 굴린 동천은 날카롭게 말했다.

“같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하심은 삼대마교 중 하나라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금문은 부정하지 않았다.

“허허, 처음엔 못나 보이더니 가면 갈수록 놀라게 하는 놈이로다. 그렇다. 하지만 마교 중 하나는 하나이되 그쪽에서는 나의 존재를 모르니 아니라 고도 할 수 있다. 자아, 그렇다면 과연 이 노부의 신분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겠느냐.”

동천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분열된 마교가 하나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금문 또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감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가 얼굴을 굳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너무도 간단히 맞추었기 때문이다.

‘이놈. 살려두었다가는 자칫 위험하겠구나. 애초에 싹을 자르던지 아니면 우리 쪽 인재로 끌어들이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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