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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30화


“크윽! 네, 네놈들이 감히 오련(五蓮)과 적대시하겠다는 것이냐?”

차가운 공기를 밀어내고 아침을 맞이하려는 늦은 새벽에 난데없이 들린 분노의 외침이었다. 그 분노의 당사자는 팔 하나가 예리하게 잘려나가고 옆구리에 굵직한 꼬챙이가 뿌리 부분까지 박혀 있는 것이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서있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의지를 잃지 않고 있어 쓰러질 태세가 전혀 아니었다. 그런 그를 둘러싸고 있는 대여섯 명의 무리들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당장에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으득, 네놈 하나로 인해 형제들 일곱이 세상을 떠났으니 편하게 죽을 생각은 말거라!”

소리친 사내는 보통 겸(鎌 : 낫)의 두 배 이상의 긴 날을 자랑하는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기습을 당한 당사자가 듣기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이건 적반하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친 것도 아니고 기습을 당했는데 그 누가 손놓고 죽기만을 기다리겠는가. 기습을 당한 사내가 남은 한 손에 힘을 가했다.

“오냐, 내 죽더라도 너희들까지는 길동무를 해주마! 으야―합!”

“다 죽은 놈이 어디서? 쳐라!”

그들은 서로들 뒤엉켜 칼부림을 시작했다. 숫자적으로는 기습을 가한 자들이 월등했지만 능력 면에서 차이가 나는지라 그들의 싸움은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는 이들이 있었다. 두 사람이었던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장내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들이 무의미한 욕망에 사로잡혀 물고 물리는 짓거리를 하고있군. 한심하기가 그지없어.”

숲 속에서 살펴보는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정체는 다른 이들에게 들킬 염려가 전혀 없었다. 뭐 그것이 아니더라도 서로들 정신 없이 싸우는지라 그들이 있는 곳을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사내의 말에 여인의 목소리가 반응했다.

“너무 안 좋게만 보지마. 저것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니까.”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흥!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

여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넌 너무 세상을 보는 눈이 부정적이야. 알아?”

여인은 이 사내가 너무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멍청아. 그게 부정적이라는 거야.’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해 봤자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여인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좋아. 나는 가능한 빨리 그를 만나고 싶어. 그러니까 상관하지 말고 가자.”

고개를 끄덕이던 사내는 돌연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도 저런 부류에 속했으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군. 워낙에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사내의 말에 여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지 않아. 시간이 꽤 흘렀으니 분명히 강해져 있을 거야.”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가 제의했다.

“후후, 자신만만하군. 허면 분명히 강해져있을 녀석의 실력을 한번 시험해봐도 될까?”

여인이 약간 동요하여 물었다.

“그의 실력을 시험해본다고? 어떻게?”

사내의 손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터로 향했다. 이어 사내가 말했다.

“저렇게.”

“저렇게? 그게 무슨, 뭐? 그것은…….”

사내와의 교감이 통한 여인은 굳어진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여인이 요염한 듯 보이는 입술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좋아.”

“살려주세요!”

무언가 고전적인 이야기 전개가 시도되며 측면 돌아서는 골목에서 아리따운 소녀가 달려나왔다. 그런 소녀를 보자마자 동천이 느낀 감정은

‘어?’

라는 놀람이었는데 이유는 아까 제갈일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 또한 어디에선가 본 듯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동천의 품안으로 뛰어든 그녀는 오돌오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이런 상황이 과히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던 동천은 품안의 소녀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물었다.

“저기, 우리 어디선가 보지 않았습니까?”

“예? 아, 아뇨.”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은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질문이 먼저 나올까? 라는 어처구니없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을 반증하듯 그녀가 이어 말했다.

“도와주세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무뢰배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제야 현 상황을 직시한 동천은 일단 쫓아오는 인간들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한껏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흐음! 그런 거라면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을 백 번이라도 칭찬해주겠소이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내 한방에 처리해 줄 터이니 낭자는 안심하시오.”

그러나 그런 동천이 미덥지 못했는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소녀가 그의 경각심을 돋궈주었다.

“조심해야해요.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어요.”

동천에게는 공염불이었다.

“하하, 여기에서 노는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거기인데 뭘 그리 걱정하는 겁니까. 다 알아서 처리해 줄 터이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시죠.”

휘리릭! 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개의 그림자가 동천에게로 쏟아져왔다. 놀란 동천이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뒤로 물러서자 방금 전까지 동천이 서있던 자리에 차가운 인상을 한 세 명의 사내들이 들어찼다. 동네 건달들을 생각했다가 당황한 동천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에에, 그러니까……. 어르신들은 누구십니까?”

동천이 고분고분 묻자 윗머리가 훤칠히 까진 삼십대 후반의 사내가 말을 꺼냈다.

“네가 품고있는 계집을 넘기고 꺼져라.”

“에? 내가 품고?”

영문을 몰라 살펴보자 어느새 동천이 그 소녀를 껴안고 있었다. 자신은 분명 손만 잡아끈 것으로 아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이것 좀.”

창피함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다가 뒤늦게 기회를 가져 말을 꺼낸 소녀가 서둘러 동천의 품에서 벗어났다. 동천은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내버려두었다.

‘쩝, 아쉽다. 그나저나 동네 무뢰배들이라면서 웬놈의 무림인들이지?’

동천이 전반적인 상황에 의심을 품고 껄끄럽게 생각할 때 사내가 다시 말했다.

“꺼져라.”

“아, 예에… 에? 이게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수긍했다가 정신을 차린 동천은 뭐가 아니냐는 표정의 상대들에게 은근슬쩍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모름지기 일에는 순서가 있듯 여러분들이 이 낭자를 잡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게 바로 사람 살아가는 이치이고, 에 또……. 중이 시주를 받았으면 예의상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 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천의 이야기에 서로들 눈빛을 교환한 사내들은 제각기 무기를 꺼내들었다. 죽이기로 작정한 그들은 방금 전 동천이 피하는 움직임을 보고 삼류들과 똑같이 대할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안 그래도 냉랭했던 분위기가 살벌해지기까지 하자 안되겠다고 생각한 동천이 돌연 하늘을 가리켰다.

“엇? 저것은?”

도망을 치거나 기습을 할 때 가끔 사용되곤 하는 전형적인 하류배들의 수법이었지만 그동안 상대방들이 맡아온 일의 수준으로 볼 때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잔꾀였다. 당연히 그들은 무의식 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동천은 이때를 놓칠 새라 소녀와 함께 냅다 줄행랑을 쳐버렸다.

“아니? 도망을?”

“이런 황당할 때가!”

“쫓아라!”

곧바로 눈치챈 각각의 소리가 동시에 들렸고 속았다는 것에 분노를 느꼈는지 그들이 동천을 쫓는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반면, 힘도 못쓰는 소녀를 안고 뛰는 동천이었기에 당연히 그들과의 차이는 급속도로 좁혀졌다.

‘아이고, 이놈들아. 밥 처먹고 쫓아다니는 게 네놈들의 일상생활이냐? 뭔놈들이 이리도 빨라?’

얼마나 거리를 떼어놨나 돌아보았던 동천은 방금 전의 대치 상황보다 더욱 거리가 좁혀져있자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사람 살려! 백주 대낮의 날강도들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주위에는 동천의 소리를 들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점점 외곽진 곳으로 도망치다 보니 그만큼 사람들이 나오는 확률이 적었던 모양이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추적자들은 쫓아오는 것을 중단하였다. 동천에게는 멈춘 그들이 더 이상했지만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 중 한 사내가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법?”

앞머리가 까진 사내가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보이는군.”

진법이라 결론을 내린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문을 찾아다녔는데 뒤쪽에서의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자 소녀를 안고 달려오는 동천이 보였다.

“이, 이 정도면 따돌……, 헉?”

잠시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어리벙벙하게 멈추어버린 동천은 곧 자신의 방향치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여 왔던 길로 되돌아 도망쳤다.

‘이런 젠장! 이 씨팔 것들은 쫓아오지도 않고 이득을 보려고 그러네?’

내심 이를 갈고있는데 작은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살짝 내려보자 안쓰러워하는 얼굴의 소녀가 보였다.

“땀이 흘러요. 저 때문에 괜히…….”

동천의 성격상 작은 불평이라도 했어야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하, 이 정도쯤이야! 가녀린 소녀를 악당들의 손에서 무사히 구출해줘야 하는 것이야말로 사내 된 도리가 아니겠소이까!”

그녀는 살풋이 미소했다.

“어머, 그러한가요?”

그 모습에 넋이 나간 동천은 보면 볼수록 빠져들 것만 같은 소녀의 용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히야, 진짜로 끌리는 얼굴이네? 근데 내가 이 여자를 어디에서 보았더라?’

물어보면 될 것을 너무 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미처 거기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달려가는 앞쪽에 소녀를 쫓던 자들이 보이자 그런 생각들은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으이 씨! 꽉 잡으시오!”

“네? 네에.”

동천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다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아까 와는 다른 곳으로 다시 도망을 쳤다. 헌데 얼마 못 가 이번에도 그들과 마주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제풀에 지쳐버린 동천은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추어야만 했다.

‘헉헉, 이런 요사한 자식들을 봤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방향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들은 가만히 있는데 매번 다른 길로 도망치는 자신과 마주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동천은 힘겹게 말했다.

“다, 당신들 말야. 헉헉, 그따위로 놀면 기분이 좋아? 흐에, 흐에!”

때마침 이 진법은 일정 거리를 끊어 놓아, 계속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하는 효능밖에 없음을 간파한 그들은 일단 걸리적거리는 것들부터 처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그나마 길었을 명줄인데 네놈이 기어코 먼저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그들이 천천히 다가오자 동천은 도저히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때울 수가 없음을 감지했다. 그는 왜 하필 이럴 때만 화정이를 떼어놓게 되는지 그것이 한스러웠다.

“저, 저기 말입니다. 우리 대화로서……, 후우, 후우. 좋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요?”

동시에 다가오는 사람들 중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사내가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배 떠난 뒤에는 손을 흔들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그들의 살기에 온몸이 쩌릿쩌릿해졌다. 그에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일 저지르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하듯 귀의흡수신공이 아닌 역심무극결을 운용했다. 대번에 마음의 안정을 찾게된 동천은 안고있던 소녀를 내려놓고 저만치 옆으로 보냈다.

“가능한 떨어져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가오지 마시오.”

소녀는 동천의 억양 없는 대답에 흠칫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떨어지며 한순간 돌변해버린 동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곧이어 그녀는 시선을 내려 천천히 동천의 허리띠로 옮겼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마치

‘당신의 짓인가?’

라고 묻는 듯 보였다. 그러나 대답해주는 이도, 대놓고 묻는 이도 없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앗!”

선제 공격은 상대측에서부터 이루어졌다. 두 명은 좌우에서 치고 들어왔으며 머리가 까진 중간의 사내는 일도양단의 기세로 쳐들어왔다. 허리띠를 푼 동천은 움직이는 동시에 싸늘해진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뒤로 피하면 약속된 다음 공격이 곧바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좌측으로 피하자니 담이고, 우측에는 바로 소녀가 있다. ……남은 선택은 정면승부 뿐인가?’

동천은 거리낌없이 뛰어나가며 허리에 걸린 도를 뽑아들기 시작했다. 아울러 채 절반이 뽑혀지기도 전에 치우도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단전에 쌓여있던 그의 내공은 썰물처럼 그곳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어 검은 물결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낮은 파장음을 시작으로 치우도법이 그 위력을 드러냈다.

지이이이이잉.

“허엇? 이 무슨!”

상대들은 듣도 보지도 못한 현상에 놀라하는 눈치였으나 이미 화살은 떠난 상태였다. 지금에 와서 무기를 거둘 형편도 아니었고, 또한 협공이라는 방어선이 그들의 뇌리에 깔려있어 이제와 손해보는 장사를 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끼리링, 콰직!

“크흡! 으헉?”

“크으악!”

검은 영역의 끝을 기점으로 동시에 두 사람이 튕겨나갔다.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진 그들은 즉사를 했는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쿨럭쿨럭!”

그나마 남아있는 자들은 중앙을 맡았던 사내와 동천이었는데 그들의 꼴도 말이 아니어서 당장에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흐으…, 대단하긴 했다. 그러나 네놈의 상태가 말이 아니로구나.”

방금 전의 기침으로 어느 정도 위급함을 넘긴 사내가 돌연 이죽거리며 말하자 그의 입에서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버린 동료들이 삼분지 이 이상을 막아준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내상을 입진 않았다. 이런 외상(外傷)쯤이야 보름정도만 요양하면 거동하는데 불편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

반면, 한마디 멋지게 되받아 쳤어야할 동천은 내외상을 심각하게 입은 탓에 도저히 말문을 열 수 없는 지경이었다. 흔들린 오장육부가 아직까지 진정이 되지 않아 입을 열었다간 진기가 새어나가 피를 토하고 죽을 정도로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 아마도 지금의 동천이 아니었더라면 엄살을 피운다고 비명을 지르다가 비명횡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시, 실수다.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장 할아버지에게 배운 수법으로 현혹시킨 뒤 치우도법을 펼쳤어야 했는데…….’

원래 지금의 그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주 미약하게나마 뒤쪽의 소녀를 걱정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파생된 주춤거림 때문에 공격의 시기를 놓쳐 치우도법만을 시전하게 된 것이다.

‘크으으.’

휘청거린 동천이 기어코 무릎을 굽혀 한 손으로 바닥을 집었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그의 손안에 허리띠의 운석 부분이 만져졌다. 허리띠를 푼 장소에서 전진했던 그였는데 상대들과 얽히면서 다시 원점까지 물러났던 것이다. 문득 자신의 실력에 통탄을 금치 못한 동천은 운석을 으스러져라 부여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분하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거늘! 능력이 아닌 노력으로 인해 승패가 갈리다니……! 어찌 분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는 평소의 동천에게 하는 질책이었다. 그가 조금만 더 노력을 했더라면 이런 결과가 놓여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으으으.

‘어엇?’

동천은 홀연히 일어나는 청량한 기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운석을 잡고있는 손으로부터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단전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것은?’

동천이 느끼기에 그 기운은 분명 귀의흡수신공이었다. 그는 곧 뒤흔들린 내부를 진정시키더니 추가의 움직임 없이 다시 운석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록 대단한 조화는 아니었으나 그로 인해 단 한번의 공격이 가능해졌으니 어찌 모자라다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다시 치우도법을 시전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온다. 헉헉, 그러나 수법(手法)으로 인한 최소한의 일격은 겨우 가능해 보인다. 그로 인해 혼절은 하겠지만 뒤의 소녀가 무사하니 잘 처신해 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멈칫! 동천의 생각이 끝난 바로 그 시점에서 사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바로 한 발만 더 움직이면 손쉽게 베어버릴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사내는 신중해진 눈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으음, 다 죽어가던 놈이었는데 갑자기 눈빛이 달라진 이유가 뭐지?’

상대는 마냥 생각 없이 사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도 평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사선들을 넘나들었다면 나름대로 넘나든 사내였다. 분함에 노려보는 것과 무언가 한 수를 가지고 노려보는 것의 차이 정도는 파악해낼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는 만일을 위해 동천을 떠보았다.

“곧 죽을 놈이 살려는 의지는 있어 초라한 발악이라도 해보려는 작정이더냐?”

꿈틀한 동천이 말했다.

“그렇소. 과히 부족하지 않은 한 수이니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나는 당신을 상관하지… 울컥! 웁?”

동천이 고통스런 얼굴로 피를 토하자 상대는 눈빛을 발했다. 내심 ‘옳거니!’ 라고 소리친 사내는 두 번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나아가며 검을 쑤셔 넣었다. 목표는 훤히 드러나 보이는 동천의 가슴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어린놈의 두 눈이 급격히 서늘해지는 것을.

“아차?”

상대방은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디 중상을 입은 몸이 뒤로 뺀다고 수월하게 빠질 수 있는 몸이었던가? 대번에 신형이 흐트러진 그는 어정쩡하게 엇박자를 그리게 되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동천의 공세를 피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놀란 동천이 서둘러 움직임의 급정거를 시작했다. 그대로 나아 갔다간 공격이고 뭐고 그 전에 상대에게 찔려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 하하……. 아하하하! 하늘은 나의 편인 게로구나! 하하하하!”

뜻밖의 행운으로 죽음에서 벗어난 사내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한순간의 실수로 위기에 처했다가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으니, 이 어찌 기쁘다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웃다가 순간 대소를 멈춘 사내는 싸늘해진 얼굴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나머지는 네놈의 명줄을 완전히 끊어 놓은 후에 웃기로 하지.”

동천은 미약하게 웃었다.

“훗, 마음대로 하시오.”

그의 얼굴에서 절망이 아닌 자조적인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있었던 사내는 호되게 당한 것이 뒤늦게 떠오르자 분함에 못 이겨 진한 살기를 내뿜었다.

“이제 네놈을 끝낸 뒤 저 계집을……. 윽? 아, 아니, 이게?”

어쩐지 당황한 듯 보이는 사내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푸들거리며 얼굴의 근육을 일그러트리기까지 한 사내는 마치 그대로 혈이 집힌 사람이 움직이고자 미친 듯이 발악을 하는 듯 보였다.

“으야아압! 으악! 제기랄!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상대의 행동으로 보아 혈은 집힌 것 같지 않았다. 찢어질 듯이 커진 사내의 동공은 동천 너머의 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툭, 투둑! 그의 무리한 발악이 벌어진 상처 부위에서 핏물들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우, 움직… 이럴 수는!”

“아?”

동천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끊어질 듯한 맹수의 본능에 날카로운 숨결을 다시 불어넣었다.

‘이 얼마나 멍청한 시간을 흘려 보냈는가! 기회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몰랐다. 아니, 몰라도 상관없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상황은 그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으야압!”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움직인 그는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짠 뒤 바닥에 떨어진 도를 집어 들고 물 흘러가는 듯한 동작으로 상대의 가슴팍에 그것을 찔러 넣었다. 이어 푸욱, 거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상대의 입에서는 듣기에도 껄끄러운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끄어어어어억? 끄어, 끄으…….”

사내의 몸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는 사내의 양팔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속박에서 벗어난 본능적인 움직임일 뿐이었다. 사내는 결국 동천에게 찔린 힘에 못 이겨 뒤로 벌렁 넘어졌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한 동천은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천은 바닥에 얼굴이 부딪히기 전 누군가 자신을 감싸 올렸다고 생각했다. 포근했다. 심신을 안정케 하는 이름 모를 향기가 그의 폐부를 상쾌하게 씻어주는 듯 했다. 자신을 안아 올린 상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늘은 그가 아닌 당신의 편이었나 보군요.”

같은 목소리였지만 생각 이상으로 감미롭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는 애써 살펴보고자 눈을 떴지만 감기는 두 눈은 도무지 감감무소식이다.

‘그만두자. 어차피 누구인지 아는 것인데…….’

동천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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