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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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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

“너의 꿈이 무엇이냐.”

“알려줄 수 없다.”

“…….”

동천은 돌연 웃었다.

“푸히히! 이히히히! 큭큭, 이거 진짜 골 때리게 웃기네?”

과일을 깎고 있던 소연은 잠잠하다가 갑자기 웃어 제키는 주인님의 행동이 궁금하여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셔서 옛날 웃음으로 웃으셨어요?”

동천은 가끔 자기도취에 빠졌을 때 옛날의 그 웃음으로 웃었다.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킬킬거리며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여주었다.

“킥킥킥! 너의 꿈이 무어냐고 물으니까 여기 이 자식이 하는 말이 알려줄 수 없다는 거야! 푸하하하하! 웃기지? 그치!”

<아뇨.>

소연은 그게 왜 웃길까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주인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책의 내용을 잠시 읽어보았다. 내용인즉,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다 마주친 노인과 젊은이가 서로들 비키라고 실랑이를 벌인다는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체면을 중시하는 노인이 ‘너의 꿈이 무엇이냐(조까튼 자식! 대체 뭘 보고 큰 겨?).’ 라고 물었다가 무안을 당했다는 것이고 말이다.

<아하! 여기 이 노인의 속마음 때문에 웃으셨던 것이구나.>

그제야 그녀는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보기엔 전혀 웃기지 않는 내용이었으나 주인님의 취향으로 보았을 때 웃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읽어보고도 반응하지 않으면 맞을 수도 있기에 예의상 웃어주었다.

“호, 호호! 아주 재미있네요.”

동천은 지극히 만족했다.

“하하, 역시 너는 뭘 아는구나.”

“그렇죠… 뭐.”

마지못해 대답한 소연에게 동천이 다른 화제를 언급했다.

“그런데 말이지. 요새 본교의 기운이 심상치가 않은데 너 뭣 좀 아는 거라도 있냐?”

소연은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그런 걸 어찌 알겠어요. 미천한 시녀의 신분인데.”

동천은 바로 수긍했다.

“흠! 그건 그래.”

어째 맞는 말을 듣고도 기분이 나빠지는 소연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자위하며 주인님께 질문했다.

“헌데, 본교의 기운이 심상치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동천은 이야기해줄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너 말야. 비밀 꼭 지킬 수 있지?”

소연은 신중해진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입 무거운 거 주인님도 잘 아시잖아요.”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니 입이 무거워? 난 몰랐는데?”

“…어쨌든 그래요.”

귀찮아진 동천은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쓰윽 둘러보곤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이야기야. 한 나이 어리신 분께서 독야청청(獨也靑靑) 세월을 굽어보시던 중 기연을 만나 방광이라는 할아범에게 내공을 전수 받았지. 그런데… 음! 여긴 건너뛰고. 어쨌든 그랬는데 그때 나이 어리신 분과 방광 할아범은 한가지 약속을 했었지. 나중에 이 몸…이 아니라 그 어리신 분이 크면 천하제일의 미녀와 맺어주기로 말야. 또 어쨌든 그랬는데 사실 그때의 어리신 분은 한가지 속이고 있었던 것이 있었어. 음, 그건 니가 알 거 없고. 또또 어쨌든 그랬는데 그 방광 할아범이 기특하게도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는 거야. 문제는 그 약속의 상대가 잘못되었음이고 말이지. 아아! 이렇듯 하늘의 오묘함은 그 누구도 깨달을 자가 없으니, 있다면 오직 이 몸 뿐이라!”

소연은 대충 깨달았다.

<헛소리네…….>

아무리 잘 들어보려고 해도 도대체가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정작 들어야 할 부분은 다 건너뛰고 잡다한 이야기들만을 나열했으니 어찌 내용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서요?”

동천은 나름대로 감상에 빠져 대충 대답했다.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렇다는 거지. 후우! 세상이 이 몸을 외면하려는 것인가?”

신빙성은 없어도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무언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당사자가 저런 식으로 말해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연으로서는 골치가 아플 따름이었다. 다만 한가지 짐작 가는 부분은 사흘 전 환영회를 간답시고 약전에 갔다가 약왕전주인 역천을 만나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를 한 후로 행동이 좀 이상해졌다는 것이었다.

“주인님,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하늘에서 하늘님이 내려다보시고 계실 텐데 어찌 주인님을 외면하시겠어요.”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지 동천이 마음을 추스렸다.

“간만에 네가 올바른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 의미에서 이 착잡한 심정을 환기시키고자 잠시 바깥 나들이를 하겠으니 너는 하인들에게 가서 심심하면 앞마당에 모이라고 전하거라.”

말이 심심하면 이지, 만일 한사람이라도 빠진다면 그 인간은 물론이고 하인들 전체까지 고통의 나날을 지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소연은 그것을 알기에 내심 조바심을 내며 명령에 따랐다.

“네, 주인님.”


스륵, 스르륵!

조용한 방안에 종이만 넘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안락한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냉소천은 서류들을 살피던 중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바로 반응했다.

“무슨 일이냐.”

밖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접니다.”

바로 그의 아들인 냉현이었다. 냉소천은 기다리고 있었던지 들어오도록 명했다. 그는 다가온 아들에게 차갑게 물었다.

“돌아온다는 소식은 들었다. 허나, 네가 관할해야할 곳의 막중함을 알고 있다면 이렇듯 이 시기에 돌아올 리는 없을 터인데 무슨 일이더냐.”

냉현은 날카로운 눈매를 살짝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곳의 일은 잠시 이 장로에게 맡기었으니 염려 놓으소서. 그보다 소자가 이곳으로 급히 달려온 까닭은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그 서찰의 내용 때문입니다.”

냉소천은 잠시 질책의 시선을 거두었다.

“이 아비가 보내준 서찰이라면 그 만독문의 내용 말이더냐?”

냉현은 끄덕였다.

“예, 아버님.”

냉소천은 상체를 약간 앞쪽으로 기울였다.

“네 성격에 고작 계집 따위의 정보가 궁금하여 이렇듯 돌아오지는 않았을 터. 그래, 어떠한 내용이 너를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도록 만들었더냐.”

냉현은 자신이 외우고 있던 부분을 천천히 내뱉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은원관계가 명확해야하는 법이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는 것이 아니외다. 소홍이를 보내는 것은 일전에 소교주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일 뿐이니 경계할 필요는 없소이다. 라는 부분입니다.”

냉현이 언급한 부분은 일전에 냉소천이 부교주인 사비혼에게도 이야기했던 부분이었다. 냉소천은 흥미를 거두고 평소의 기도를 내뿜었다.

“그 부분이라면 우리측에서도 석연치 않게 생각했던 부분인 고로 이미 이 아비가 만독문에 회신을 요청했다. 또한 소홍이라는 계집이 오거든 자세히 물어볼 사안이기에 소홀함이 없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네 자리로 돌아가 그곳의 세부지리를 낱낱이 기억하기나 하거라. 너도 알다시피 천명(天命)의 때가 오게 되면 한순간의 방심이 너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고개를 끄덕인 냉현은 일단락 되어 가는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아버님, 소자가 의심스러워하는 곳은 조금 다릅니다. 만독문의 늙은이가 분명 써놓았다시피 사람이라면 은원관계가 명확해야하는 법이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부분을 살펴보자면 만독노조 항광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자로서 철저한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자 냉소천이 이의 없이 넘어가 주었다.

“그렇지. 확실히 그런 자이지. 그래서?”

냉현은 눈을 가늘게 모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버님도 그렇게 보고 계셨다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수년 전 소자의 환골탈태를 약속해놓고 돌연 사라졌던 그 날의 일을 말입니다.”

“그게 뭐 어떻다는…….”

냉소천은 이해가 부족하여 눈살을 찌푸렸다가 돌연 눈을 치떴다.

“이런? 서, 설마―!”

냉현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설마가 아닙니다. 그 당시, 어느 찢어 죽일 놈이 소자의 환골탈태를 가로챘던 것입니다.”

쾅!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생각해보면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설마 그런 곳에 자신의 아들 또래의 어린놈이 들어갔을 리가 만무하고, 또 들어갔다고 해도 암호를 알아야했기에 정말 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이상 성사되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주위에 혹시 모를 경계망을 펼쳐놓지도 않았고 말이다.

“소자도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이곳으로 오는 내내 황당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으득, 불찰이라면 불찰이로구나! 그 당시의 일은 너도 알다시피 부교주파를 의식해서 몇몇 사람들 빼고는 측근들조차 모르도록 계획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소리 소문 없이 네 환골탈태를 주관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상 차려놓고 다른 놈에게 준 격이 되어버렸었던 것이란 말인가?”

냉소천은 애써 분노를 참아가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무의식 적으로 다시 한번 탁자를 내려치려 했으나 그 탁자는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였다. 냉현은 분노에 몸을 떠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꼭 잡아 들여야 합니다.”

얼굴을 굳힌 냉소천은 목청을 높였다.

“당연하고 말고! 꼭 찾아낼 것이다! 찾아내서 근골을 파열하고 심맥을 터트려서 그 녀석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할지 통감하고 또 통감하게 해주리라! 배후자가 있다면 그놈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극한의 분노에 도달한 냉소천의 전신은 불같이 뜨거워졌고 그의 두 눈동자는 더 없이 붉게 물들어갔다. 그 모습을 접하고 움찔한 냉현은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그 수색작업에 소자가 참여하게 해주십시오.”

순간 냉소천의 두 눈에 핏빛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

“네가 말이더냐?”

“예. 그 계집이 온다면 소자가 형식적으로나마 잠시 있어주어야 만독문과 상대하는데 있어 수월할 것입니다. 녀석들이 같잖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에 일시적으로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이지요.”

괜찮은 의견이자 냉소천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홀로 생각했다. 간간이 아들 쪽을 흘끔 쳐다보던 냉소천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좋다. 허락하겠다. 허나, 이번 일이 애매한 사항인 만큼 대외적으로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다. 소수정예는 붙여주되 이 아비는 뒷일을 감당하지 않을 터이니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번 일을 잘 파헤쳐 보거라.”

냉현은 만족한 듯 싸늘하게 웃음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소자, 꼭 기대에 부흥하여 보이겠습니다.”

냉소천은 아들의 말을 받았다.

“음, 두 달의 기한을 주마. 만일 네가 그 시간 안에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 아비가 맡아 몇 십 년이 흐를지라도 꼭 범인을. 혹은 그 무리들을 잡아내고야 말 터이니 너무 무리하게 헤집고 다니지는 말거라. 공연히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 있음이야. 알겠느냐?”

냉현은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 피곤할 터이니 오늘은 이 정도만 하겠다. 들어가 푹 쉬거라.”

“예, 아버님. 소자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대답을 마친 냉현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보폭을 넓게 하여 걸어가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새하얀 그의 피부가 유난히 창백하여 보였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서 있을 듯 보이던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게 다물어진 그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누구일까……. 그따위 독공 때문에 나의 몇 년간의 세월을 허송세월로 만들어 버린 놈이?”

갑자기 그가 킥킥 웃었다.

“큭큭, 어쨌든 좋아. 큭큭큭! 누구 인지만 밝혀진다면 천천히 재미있게 놀아줄 테니까.”

걸어가는 그의 전신은 점점 더 창백해져만 갔고, 그가 지나간 자리는 서리가 내리는 듯 새하얀 운무가 흩날렸다. 바로 한열마가의 또 다른 비전 무공인 빙강파천수(氷剛波天手)의 심결을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관된 걸음걸이로 장내를 벗어났다.


“에, 그런 고로 너희들은 이 암한문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이런 썅!”

하인들을 불러놓고 무난하게 이야기하던 동천이 돌연 욕을 내뱉었다. 당연히 하인들은 불안에 떨었으며 옆에서 조용히 서있던 소연까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얼굴을 구긴 동천은 소연에게 대답해주는 대신 귀를 후비며 하인들을 노려보았다.

“어떤 새끼가 감히 이 몸을 욕했어? 너야? 아니면 너?”

멀거니 서 있다가 동천의 손가락 끝에 걸린 하인들은 기겁을 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럴 리 가요! 소인은 결백합니다요!”

“예에! 저, 저도 그렇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동천은 일단 믿어주었다.

“흠, 그래. 생각해보니까 너희들은 죄가 없겠구나. 우리 암한문의 식구들 중에는 속으로 상전을 욕하거나 씹어대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없을 테니까…….”

끝을 흐리고 잠시 침묵하던 동천이 다시 소리쳤다.

“이런 우라질! 그럼 대체 어느 새끼가 이 몸을 욕한 거야? 엉?”

소연은 다시 흥분하려는 주인님에게 살짝 말해주었다.

“주인님, 사람들 앞인데 욕은 삼가 하심이…….”

의외로 동천은 자신의 막말을 인정했다. 그는 자못 슬픈 듯 말했다.

“아아, 내 흥분하여 잠시 옛날의 안 좋은 버릇을 드러냈구나. 자중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 말이지. 으음,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인간이 이 몸을 욕했단 말인가?”

그런 동천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하인들은 기가 막혀했다. 고작 귀가 간지럽다고 괜한 사람들을 범인으로 지목하다니……. 그들은 다시 한번 치를 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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