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559화


48

“…….”

잠시 침묵한 냉현은 당장에 해결방안을 제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알겠네. 기본 방침은 자네의 의견을 따르되 중간에 무리 없는 계책이 대두되었을 시엔 그것을 따라주기 바라네.”

“예, 소교주님.”

마다할 이유가 없는 공영수가 대답하자 냉현도 이쯤에서 대화를 접고자 했다.

“좋아, 이번의 만남은 지극히 만족했네. 차후에도 다시 부탁함세.”

냉현은 적어도 오늘과 같은 개수의 순천을 원했지만 세상 경험이 풍부했던 공영수는 은근히 확실한 답변을 회피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냉현은 공영수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뜻 모를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하세나. 미소(美素), 이 공자를 편히 모셔다 드리거라.”

시비의 이름이 미소였던지 그녀가 재깍 반응했다.

“예, 소교주님.”

끼릭, 끼리리.

그녀는 의자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냉현은 그 소음이 귀에 거슬렸지만 아직은 좀더 유용한 자였기에 묵인해주기로 했다.

“…큭큭큭!”

공영수 일행이 나가고 갑자기 음침한 웃음소리가 냉현의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히죽거렸는데 동시에 참으로 기대가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와. 이제 1년이나 2년 안으로 본교의 기나긴 역사는 크나큰 분기점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있음이고……. 큭큭, 큭큭큭!”

마음 같아서는 미친 듯이 웃어 제키고 싶었지만 그는 인내하기로 했다. 이런 웃음 따위야 그때에 가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뚝 웃음을 그친 냉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진 표정이었다. 그는 한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전에… 나의 환골탈태를 가로챈 그놈을 잡아서 꼭 내 손으로 처리하고야 말리라. 으득! 꼭!”

집요한 그의 복수심은 전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그때에 오셨던 분들이… 이런 썅!”

동천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던 역천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제자가 난데없이 욕지거리를 하자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컥? 네, 네가 지금 본 사부에게 그따위 주둥이를 놀린 것이었더냐?”

자신이 내뱉고도 기겁한 동천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건 갑자기 제자의 귀가 간지럽기에 누군가 또 저를 욕한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제자가 어찌 위대하신 사부님께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지당한 말이었다. 겨우 안도한 역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험험, 이 몸이 위대하기는 하지. 헌데, 귀가 간지럽다고 해서 누군가 욕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느냐? 막말로 후빌 때가 되어서 간지러웠을 수도 있지 않더냐.”

그건 그랬지만 동천은 자신의 감을 굽히지 않았다.

“사부님의 말씀이 전부 옳지만 이 제자가 요 몇 년간 예지력이 발달했던지, 감이 팍 오면 9할은 맞아떨어진답니다. 그러니 틀릴 이유가 없지요.”

역천은 화들짝 놀랬다.

“무엇이? 그게 정말이더냐?”

동천은 자신의 사부가 생각 이상으로 놀라자 분위기 상 아니더라도 원하는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예에, 그렇긴 한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역천은 흥분하여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어제 잠깐 약전에 들렸는데 만편환(滿便丸) 3개를 꺼냈다가 잠시 탁자 위에 놓고 다른 볼일을 보고 왔더니 감쪽같이 사라졌지 뭐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약왕전에서 벌어지다니! 제자야, 너는 믿기느냐?”

만편환이라면 육체의 활동성을 평소보다 월등하게 올려주는 효능이 있는 단환이었다. 그러나 설명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흔히들 말하는 보약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어쨌든 동천은 말했다.

“당연히 믿기지 않죠.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냐. 잠시만 있어보거라.”

멀지 않은 곳의 보관함으로 뛰어간 역천은 주섬주섬 내용물을 만지더니 접시 하나를 꺼내왔다.

“이것이 바로 만편환을 담았던 접시니라. 자아, 어서 이걸로 그 범인을 찾아보거라.”

“…….”

황당해진 동천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주먹이 날아가도 벌써 날아갔겠지만 상대는 그의 사부님이었다. 감히 저급한 단어들을 사용할 수 없었던 동천은 좋게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사부님, 이 제자가 아무리 예지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 접시 하나로 어떻게 범인을 찾아낸단 말씀이십니까. 그러지 마시고 약전에 있었던 환자들과 의원들을 불러모아서 대질심문을 한번 해보시지요. 그렇게 하면 범인의 윤곽이 곧 드러날 테니 말입니다.”

역천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본 사부가 그런 것도 해보지 않았을 성싶더냐? 허나 모두들 바쁜 일에 치이느라 본 자식들이 없다는데 어쩌겠느냐. 이 사부가 아무리 위대한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니라.”

동천은 하는 수 없이 다른 방편을 제시해주었다.

“그렇다면 만편환이 사라진 시기에 들락거린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보심이 어떨는지요. 그런 연후에 한 놈들씩 잡아 족치면 그놈도 사람인 이상 실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역천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동천에게 종이쪼가리를 건네주며 대꾸했다.

“명단이야 작성했지. 그게 바로 명단이야. 그런데 일이 꼬여서 범인 자식이 마지막에 나와봐. 그럼 그 전에 족쳤던 의원들은 반병신이 되어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환자들은 누가 보니? 매일 물건을 날라주는 지게꾼이? 아니면 잡일 보는 하인들이? 그것도 아니면 이 나이에 내가 하리?”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했다.

“아? 거기까지는 제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남들보다 두어 발자국을 앞서가시는 사부님의 혜안에 이 제자는 감탄을 금치 못할 따름입니다.”

자신을 추켜세워 주는 아부이자 역천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험! 신의(神醫)란 그렇게 앞서나가야 하는 것이니라. 천 것들과 발을 맞춘들 그 누가 이 몸을 알아주랴! 세상은 그저 앞서가는 자들만이 대우를 받는 것임을 사랑하는 제자는 잘 새겨듣길 바라노라.”

동천은 감격하여 대답했다.

“과연 피가 되고 살이 되시는 말씀이십니다!”

만족한 역천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헐헐, 뭘 이 정도가지고. 하긴… 뭐든지 이 몸만큼만 하라고 그래! 안 그래? 그렇다고? 푸헤헤헤!”

너무 띄워줬는지 역천이 자기도취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챈 동천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사부가 쥐어준 종이명단으로 눈을 돌렸다. 하찮은 단서일지라도 찾아내기만 한다면 화젯거리로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명일이, 덕팔이, 삼돌이, 웅이, 광수……. 참나, 뭔 놈의 이름들이 이따위야? 이놈들 혹시 갓난아기 때 고아원에 버려졌는데 거기 원장이 술 처먹고 이름들을 지어준 거 아냐?>

해도해도 너무한 이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행히 역천이 제정신을 차렸다.

“음, 그보다 일이 골치 아프게 되었다.”

동천은 종이명단을 슬그머니 내린 후 물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뭐긴 뭐겠느냐. 바로 그 만독문의 소문주 계집아이 때문이지.”

동천은 무슨 소리인지 몰랐으나 아는 척 심각하게 대꾸했다.

“아, 그것 말씀이시군요? 하긴…….”

제자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생각한 역천은 말했다.

“그 문제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 너는 이제부터 함부로 무위를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예, 사부님.”

일단 대답은 했지만 아직도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요점이 뭘까…….>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머릿속이 헝클어지자 한번 더 사부님을 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제자의 화후가 모자라서 그것을 맞추기가 힘들 것 같사옵니다. 일신의 내공이 상승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나 일천한 것도 아니고, 기교 또한 뛰어난 것은 아니나 턱없이 모자란 상태는 아닙니다. 남들도 이 제자의 경지를 대충 가늠하고 있을 것이 뻔한데 대체 어느 정도 선까지 드러내야 하는지요.”

역천은 제자의 타당한 질문에 흡족함을 금치 못했다.

“오오, 역쉬! 이 몸의 제자로다! 자고로 진정한 무인이란 일신상의 능력 중 삼 푼을 드러내고 칠 푼을 감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네 경지로 같은 방법을 택한다면 어설픈 삼류 자식들을 따라하기나 다름없으니 사랑스러운 제자는 육 푼을 드러내고 사 푼을 감추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알긴 알겠는데 어째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네, 사부님. 헌데 사부님의 말씀 중 그 삼 푼, 칠 푼 말인데요. 혹시 칠 푼을 드러내고 삼 푼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 정석 아닙니까?”

역천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더니 길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허어, 이 몸의 영특한 제자가 어디에서 개 같은 소리를 주워담았구나! 제자야, 잘 듣거라. 무인이 칠 푼을 드러냈을 시엔 상대의 경각심 또한 칠 푼 가량 곧추세워지게 된다는 뜻과 다름이 없느니라. 그렇게 된다면 그 삼 푼을 아껴봤자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가 없음이 자명할 터. 허나! 삼 푼만을 드러냈다가 나머지 칠 푼을 쏟아 부어보거라!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더냐?”

정말 느끼는 부분이 많았던 동천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방법은 동천의 음흉한 성격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아아! 이 제자가 미쳐 거기까지 앞서나가지 못했나이다. 오늘부터 제자는 사부님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 수련에 좀더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역천은 짐짓 폼을 잡았다.

“헐헐헐! 네가 깨달음을 얻었다니 이 사부의 마음 또한 흡족하구나. 헌데… 이 몸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고?”

동천은 바로 대답해주었다.

“만독문의 소문주 이야기를 하시다가 삼 푼, 칠 푼에 관하여 지식을 전수해주셨습니다.”

그제야 생각난 역천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 그렇구나. 어쨌든 만독문의 소문주를 계기로 교주 측에서 냉현의 환골탈태가 무산된 진의를 알게될 것이 분명하니 곧 그 문제에 관해서 은밀한 역추적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 당시의 냉현의 나이를 살펴보자면 열 살. 그렇다면 조사 대상자를 10세 전후로 볼 것이며 그 당시에 갑자기 뛰어난 능력을 보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겠지? 거기에 네가 벗어날 수는 없음이고 말이다.”

<헉? 그게 그 소리였던 겨?>

기겁을 한 동천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는 만독문의 소문주가 냉현의 여자로 내정되어 온다는 소리에 자신의 물건(?)을 빼앗겼다고 내심 이를 갈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일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라고나 할까?

“으음! 그, 그렇다면 이 제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야만 하는 것입니까?”

잠시 생각한 역천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주었다.

“어느 정도 자중은 해야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거라.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바깥출입을 자제한다면 그들이 추적하는 시기와 더불어 네 태도의 변경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시선을 집중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 심기가 뛰어나니 그 점만 조심한다면 큰 탈은 없을 것이니라. 막말로, 제까짓 놈들이 뭐라고 단서 하나 없는 수년전의 일을 해결해내겠느냐?”

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한 동천은 긴장 뒤에 밀려오는 정신적 피로감을 견뎌내며 말문을 열었다.

“듣고 보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면 며칠 후 윗분들과 주선된 연회에 이 제자가 참석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과연 잘 해낼지 모르겠습니다.”

역천은 껄껄 웃었다.

“네가 잘 해내지 못한다면 그 누가 잘 해내겠느냐. 너만 조심한다면 이 일은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사건이니 너무 심려치 말거라.”

맞는 말이자 동천은 바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예, 사부님! 까짓 거 지들이 설쳐봤자 거기에서 거기일 것이 분명한데 이 제자가 너무 신중하게 생각했었나 봅니다!”

역천은 눈을 반짝였다.

“오오, 누가 이 몸의 제자 아니랄까봐 자신감 또한 최고로구나! 그래야지. 사나이라면 응당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뭐 걸리면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푸헤헤!”

“…….”

하늘로 치솟았던 동천의 사기는 바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다.


“흐음, 이것들이 7년 전에 본교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자들의 명단이란 말이지?”

두 장으로 나뉘어진 서찰들을 자세히 훑어본 냉현이 묻자 그것을 건네주었던 산관(汕灌)이 재빨리 대답했다.

“예, 소교주님. 첫 번째 명단은 유력한 자들의 명단이옵고 두 번째 명단은 그들보다 쳐지는 자들의 명단을 간추려 적은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냉현은 말했다.

“이런 조건을 갖춘 자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군. 좀더 자세히 알아봐서 그 일주일 사이에… 아니, 그 한달 사이에 석연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던 녀석들로 대폭 간추려서 다시 보고하길 바란다.”

“존명!”

절도 있게 대답을 마친 산관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다시 명단을 가져온 산관은 그간의 성과에 만족했던지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냉현은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차갑게 말했다.

“보고하라.”

산관은 얼굴의 표정을 지우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그 날로부터 전후 한달 간의 행적을 조사해본 결과 총 마흔 두 명에서 스물 네 명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그 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그곳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냉현은 별다른 변화 없이 다소 따분해진 얼굴로 간추려진 한 장의 명단을 펴들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일각 정도를 조용히 읽고 또 읽어 내려간 냉현은 산관에게 명단을 다시 건네주었다.

“행적의 모호함만으로 간추린 것치고는 너무 많아. 아울러 명단에서 제외된 인물들 중 행적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 다시 시간을 내줄 터이니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간추려서 명단을 가져오길 바란다. 알겠느냐?”

명령을 내리는 냉현의 눈빛에 진한 살기가 어리자 찔끔한 산관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존명! 이번에는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실내를 벗어났고, 사흘이 지나서야 다시 찾아온 산관은 자신감 대신 조마조마한 얼굴로 최대한 간추려온 명단을 소교주에게 건네주었다.

“소교주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행적을 조작한 자가 둘이나 있었습니다. 보시면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열거된 자들이 그들이옵니다. 그 아래의 나머지 인물들은 다시 처음부터 조사에 착수하여 간추리고 또 간추려 기입한 자들이고 말입니다.”

냉현은 입술만을 살짝 웃었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산관이 조마조마해하는 가운데 명단을 펴든 냉현은 미묘한 표정으로 두어 번 읽어 내린 후 마침내 씨익 웃으며 합격점을 내렸다.

“후후, 이제야 제대로 된 명단을 가져왔군.”

죽었다가 살아난 산관은 기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되었다고 손을 내저은 냉현은 살무사의 눈처럼 눈을 가늘게 뜨더니 살짝 벌어진 입으로 중얼거렸다.

“총 열두 명이란 말이지…….”

그 말을 끝으로 냉현은 이렇다할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초조감에 마른 입술을 축인 산관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교주님?”

냉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긴, 은밀히 한 놈씩 불러들여야지.”

“존명!”

“존명이라. 큭큭, 큭큭큭!”

냉현의 눈은 광기에 번들거렸다.


“언니, 언니!”

시간적인 여유가 남아 언니에게 놀러 온 수련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소연의 어깨를 흔들었다. 소연은 곧 정신을 차렸다.

“아? 왜, 왜에?”

수련은 샐쭉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팩 돌렸다.

“몰라요! 오늘 하루 정신나간 사람처럼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쳇쳇, 나도 언니하고 상대 안 할거야!”

토라져도 단단히 토라진 수련의 행동에 소연이 미안해진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미안해 수련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지 뭐니? 그래서 잠시 그 부분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까 좀 봐줘라. 응?”

이렇게 되자 수련은 언니가 신경 썼던 부분이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언니가 신경 쓰는 부분을 말해준다면 봐주도록 할게요. 내가 정말 큰 맘 먹고 봐주는 거라는 거 알죠?”

소연은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긴 알겠는데……. 저기, 그걸 꼭 말해줘야 하니?”

수련은 언니가 대답하기를 꺼려하자 더더욱 궁금해졌다. 아울러 어떻게 해서든 듣고만 싶어졌다.

“물론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닌 말로 언니가 나한테 놀러 왔는데 내가 상대도 안 해주고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봐요. 정말 죽고만 싶을 심정일 걸요? 그냥도 아니고 정말정말정말, 죽고만 싶은 심정이요. 안 그래요?”

수련의 기세에 눌린 소연은 조그맣게 말했다.

“아니 꼭 죽고 싶은 심정은 아닐 것 같은데…….”

“언니!”

“아, 알았으니까 진정해. 에휴, 그게 그러니까 일주일정도 전의 이야기인데 주인님께서 하루는 혼잣말 비슷하게 어느 여인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수련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어느 여인이요?”

소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고 천하절색의 미녀인데 주인님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여인인가 봐. 그 문제로 푸념 섞인 나날을 보내시고 계시는 게 벌써 오늘까지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닌 것 같지 뭐니?”

심각한 표정으로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수련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쁜 자식! 언니, 그건 바람을 폈다는 증거예요! 아마 강호를 떠돌다가 언니 모르게 사고를 쳤을거라구요! 씩씩!”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동생의 말에 용기를 얻게된 소연은 그동안 끙끙거리며 참고 있었던 자신의 속내를 꺼내들었다.

“그,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바람이라니……. 아아, 이제 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그러자 수련이 놀라했다.

“에? 나는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뭐? 웃자고?”

“네에.”

“…….”

순간 방안에 정적이 일었다. 가만히 동생과 마주 앉아 눈동자만 또르르 굴리던 소연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자신이 했던 말을 전면 부인했다.

“누, 누가 뭐라고 했니? 나도 웃자고 한 소리였어. 정말이야. 호, 호호!”

차마 어설프다고 말해줄 수 없었던 수련은 그녀로서는 드물게 언니인 소연을 달래주었다.

“그래요. 걱정 마세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천 걔가 그따위 얼굴로 제대로 된 여자 하나 꼬실 수나 있겠어요? 아마도 저 혼자 궁상맞게 짝사랑을 했다가 봄이 되니까 심란해져서 주절거렸던 것이 분명하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나마 위로가 되는 말이자 소연이 고마움의 눈길을 보냈다.

“알았어. 그렇게 생각하지 뭐.”

수련은 멋쩍게 웃었다.

“헤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동천의 외모가 그따위라면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소연은 뭐가 되는 것일까? 바로 기분이 나빠진 소연은 수련의 주둥이를 살포시(?) 노려보았다. 그것을 느낀 수련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고 말이다.

“왜요? 제 입술에 뭐라고 묻었어요?”

지레 놀란 소연은 재빨리 변명했다.

“아, 아냐. 그냥 본 거야. 네 입술이 참 고와서.”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한 수련은 기분이 좋았던지 양 볼을 수줍게 감싸 쥐었다.

“아이 참! 뭘 그런 당연한 걸 가지고 부끄럽게 시리. 호호호호!”

“호호. 호호호…….”

예의 상 마주 웃어준 소연은 얘가 왜 오늘따라 이리도 안 가고 버티나 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