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65화
#54
“네, 그러셨군요. 어쨌든 분노한 이 제자는 소교주의 앞에서 탁자를 뒤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예의가 중요하기에 차선책으로 한가지 계책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화리혈현단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눈이 똥그랗게 변한 역천은 물었다.
“엥? 어떻게 말이냐?”
동천은 분위기 조성 차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화리혈현단 한 개를 먹은 상태라고 거짓말을 한 뒤에 같은 화의 성질일지라도 얼마든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다를 것이니 마실 수 없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역천이 바로 수긍해주었다.
“그렇지. 어느 것은 화의 성질을 가지고서도 냉증(冷症)을 유발하는 한편 어느 것은 피를 달구다 못해 역효과를 내어 사람의 몸을 차갑게 만들지. 그런데 말이다. 소교주가 그 말 한마디로 순순히 물러나 주데?”
동천은 냉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따, 사부님도 참 급하십니다. 이제 그 뒤의 이야기가 나올 테니 귀를 밝게 하시어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소교주는 제가 먹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고 남은 단환이 있으면 좀 보자고 했습니다. 말로는 귀한 단환을 눈여겨보아 안계를 넓히고 싶다고 했지만 어디 속마음이 진짜로 그랬겠습니까? 여기에서 이 제자는 한가지 술수를 쓰게 됩니다. 바로 지니고 있던 두 개의 단환 중 한 개를 소교주에게 선물로 바치는 것이지요. 그런 뒤에 남은 단환을 주저 없이 복용하여 그의 의심을 깨끗하게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쓰고싶은 소교주는 받아든 단환을 그 분야의 유식한 놈에게 건네주어 진품인지를 확인할 테지만 진품이 확실하니 뒤탈 또한 확실한 것이지요.”
그제야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역천은 신명이 난 얼굴로 자신의 무릎을 내려쳤다.
“옳거니! 소교주에게 불려 가는 사이에 이 몸이 건네 준 중화용 단환을 먹었던 게로구나!”
동천은 역천의 예상을 깨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처음부터 쉽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놈의 집사란 자가 너무도 예리한 안목을 지니고 있어서 아쉽게도 의심이 갈만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역천은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리혈현단만을 복용한다면 주화입마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것을 복용하지도 않고 화리혈현단을 섭취했단 말이더냐?”
동천은 낮게 웃었다.
“후후, 사부님도 참. 이 제자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었겠습니까?”
그 멍청한 짓을 한 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던 역천은 금세 사태를 파악하고 바로 말을 바꾸었다.
“험! 물론 아닐 테지! 이 몸도 알고는 있었지만 흥취를 돋우기 위하여 한번쯤 놀란 척을 해봤던 것이니라. 그래,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래서 이 제자는 찰나간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내야 할까 고심했습니다. 설마하니 예전의 일을 묻는 것이 아닌 독공과 극성인 액체를 마시게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러나 제가 누구입니까. 바로 위대하신 사부님의 제자입니다. 이 제자는 사부님께서 주신 중화용 단환이 화리혈현단과 거의 흡사한 모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간파하고 화리혈현단을 꺼내는 척하면서 대담하게 품속에서 한 개를 바꿔치기 했습니다. 즉, 같은 단환인 척 두 개를 내밀었지만 사실은 단 한 개만이 진짜 화리혈현단이었던 것이죠.”
“오오, 대단하도다! 그러니까 진짜 단환은 소교주에게 주고 너는 그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복용했다는 말이렸다?”
역천에게는 아쉽게도 동천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워낙에 의심이 많고 간교한 소교주가 그 정도의 하급 계책에 넘어갈 리 만무하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저는 의심이 많은 소교주가 제가 복용하려고 할 때 서로 바꾸자고 할 것에 대비하여 미리 그의 앞에다 긴장한 척하며 진짜 단환을 굴렸습니다.”
그때 역천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잉? 진짜 단환이라고? 그게 뭔 소리더냐?”
동천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는 이렇습니다. 처음 소교주에게 건네준 화리혈현단은 가짜였고 진짜는 이 제자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일 소교주가 가짜 단환을 품속에 넣었다면 대화를 나누며 제가 소지한 단환이 ‘정말로 화리혈현단일까?’ 라는 의심을 가지도록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좀더 쉽게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상태이더군요. 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한 이 제자는 긴장한 척 집어 들었던 단환을 놓치며 가짜 단환 옆에 진짜 단환을 굴렸습니다. 처음에 옥갑 속의 단환들을 보여줄 때는 뚜껑을 열자마자 바로 소교주에게 단환 한 개를 건네줬기 때문에 그 둘의 크기를 살펴볼 여유를 주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확실하게 둘의 크기를 눈여겨보라고 바로 옆에다 굴려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두 개의 단환들은 크기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고, 의심한 소교주는 딴청을 피우는 척하면서 자신의 가짜 단환을 이 제자가 집어들게 만들더군요. 아! 그때의 희열감이란…….”
머엉―!
자신의 예상을 두 번 이상이나 뒤엎은 제자의 계책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탄한 역천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뛰어난 녀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의 대담성까지 지녔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랴. 동천의 성격분열을……. 전혀 숨김이 없었던 동천이 유일하게 숨겼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러한 역천의 반응은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부님.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입가에 침만 흘리면 영락없는 정신병자의 모습에 동천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자 역천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응, 응? 어, 그래. 괜찮느니라. 그런데 말이지. 만약에 소교주가 의심을 않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어쩌려고 그러한 계책을 세운 것이더냐?”
역천의 말처럼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모험이었다. 만약에 원래 성격의 동천이었다면 미친 짓이라 생각하고 시도조차 안 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고 성공까지 한 일이었기에 동천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사부님도 참. 이 제자가 누구입니까. 앞서 한번 말했듯 바로 위대하신 사부님의 전지전능함을 우러러보며 성장한 제자가 아니옵니까. 이 제자는 치밀한 상황파악과 분석력으로서 소교주의 행동양식을 두어 단계 뛰어 넘어 실천했던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실패할 리가 없지요. 하하하!”
역천은 원하는 대답이 아니자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만약에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대담한 계획을 세운 후에 실천했냐니까?”
동천은 답답하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실패할 리가 없으니까 했지 왜 했겠습니까. 이 제자의 계획은 애초부터 완벽했다니까요?”
“어허! 그건 알겠다 만은 만약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러니까 완벽했는데 만약이 왜 나와요.”
마침내 성질이 난 역천은 제자의 머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뻐억!
“이놈의 자식! 그래서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만약이라고!”
설마 사부가 자신을 때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동천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커헉? 사, 사부님께서 이 제자를 때리시다니……. 저, 정녕 때리신 것입니까?”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된 역천은 그 또한 제자를 때린 손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흐미! 이 몸이 사랑스러운 제자를 때리다니. 흐미! 흐미!’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잠시 눈알을 굴리던 역천은 나이를 헛되이 먹지 않았던지 그 짧은 순간에 이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는 돌연 한줄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 제자야. 이 사부는 오늘 참으로 기쁘도다!”
동천은 자신을 때려놓고 뭐가 그렇게 기쁜지 알 수 없었지만 예의 상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왜 그리도 기쁘십니까?”
“그건 말이다. 내 너에게 생에 처음으로 사랑의 매를 때렸기 때문이니라. 생각해보거라. 진정한 사제지간에 사랑의 매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더냐? 제자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제자가 잘못을 저지르건 말건 파문을 시키면 그만인 것을 무슨 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사랑의 매를 들겠느냐. 하늘의 뜻이 우리 사제지간의 믿음을 단결시키고자 오늘과 같은 일을 배려해주셨으니……, 이 사부는 감격에 감격을 금치 못할 따름이로구나!”
역천의 복받쳐 오르는 설득력이 주효했던지 동천은 크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역천에 관해서만 단순한 아이가 되는 듯 했다.
“아? 그러한 깊은 뜻이!”
이어 그는 눈물을 흘렸다.
“흑흑, 이 못난 제자가 한순간이나마 사부님을 의심했습니다. 사부니임―!”
역천은 자신에게 안겨오는 제자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오오, 제자야! 괜찮느니라. 괜찮아!”
동천은 더욱 감동하여 쉴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흑흑흑!”
이쯤 되자 역천도 진짜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야. 그것으로…….”
“흑흑, 사부님!”
“오냐, 제자야!”
이 둘은……, 이런 관계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이미 상대를 예측한 듯 냉현이 신경질 적으로 소리쳤다.
“들어와!”
산관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귀중한 보물이라도 쥐고있었던지 앞으로 모은 양손을 조심스레 움직여 소교주의 앞에다 내려놓았다. 그것은 옥합이었는데 작은 구슬 한 개가 들어가 있을 만한 작은 크기였다. 냉현은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뒤에 물었다.
“결과는?”
“진품입니다. 상당한 전문가의 솜씨로서 정제된 상태가 완벽에 가깝다고 합니다.”
눈살을 찌푸린 냉현은 중얼거렸다.
“전문가의 솜씨인데 어째서 단환의 크기가 그렇게 달랐단 말인가.”
산관은 소교주의 눈치를 보다 주워들은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독전의 전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 때가 간혹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자 냉현이 차가운 눈을 반짝였다.
“의도적이라고? 그 무슨 말이더냐.”
산관은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독전의 광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단환을 복용해야할 대상이 일정 수준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아니라 그 이하의 강호인이라고 가정했을 때 정해진 분량의 단환을 먹게 된다면 치솟는 진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고로, 적은 분량에서부터 시작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크기가 제각각인 단환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죠.”
냉현은 보일락 말락 미세한 고갯짓을 하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라.”
동천에 관해서 어느 정도 의심을 떨친 냉현은 산관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7년 전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후에 외부에서 들어왔다가 나간 아이들 건은 어떻게 되었느냐.”
찔끔한 산관은 쩔쩔매며 말했다.
“그게… 면목이 없습니다. 너무도 오래 전의 일인지라 정보수집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합니다.”
냉현은 지체 없이 손안에 잡히는 것 하나를 내던졌다. 산관에게는 운 나쁘게도 벼루였다.
퍼―억!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고 이마에 그대로 적중한 벼루는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그 잔해를 남겼다. 냉현은 산관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건 말건 한없이 차가워진 눈으로 물었다.
“만독문의 계집은 언제쯤 도착한다고 하더냐.”
산관은 흐르는 피를 닦을 사이도 없이 대답해주어야만 했다.
“사나흘 뒤쯤에야 도착할 것이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래?”
“예, 소교주님!”
산관의 확답을 듣고 나서 무언가 곰곰이 머리를 굴린 냉현은 돌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큭큭, 큭큭큭큭!”
그 웃음의 의미를 드러내지 않은 냉현은 손을 내저어 산관을 밖으로 물렸다. 그제야 이마를 지혈한 산관이 물러나자 냉현은 방안을 천천히 거닐며 살며시 이죽거렸다.
“재미있겠군. 재미있겠어…….”
무슨 재미를 말하는 것인지, 당사자 이외에는 알 길이 없지만 결코 좋은 쪽으로의 재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게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고 마침내 만독문의 소문주 강소홍은 나흘 뒤 암흑마교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