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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69화


“이쪽으로…….”

마차에서 내린 만독문의 소문주 강소홍은 침착해 보이는 시비의 안내에 따라 그녀의 일행과 함께 걸어갔다. 주위의 소일을 거들던 하인들은 그녀 일행의 등장에 서둘러 무릎을 꿇었고 좀더 안으로 들어가자 잘 다듬어진 청석길 우측에 적룡등천각(赤龍登天閣)이라고 새겨진 붉은 비석이 눈에 뜨였다. 그녀는 조용한 눈으로 바닥의 청석과 비석을 번갈아 보았다.

‘청석(靑石)과 적비(赤碑). 마치, 한열마가를 대변하는 듯한 배치로구나.’

커다란 상징성은 없었지만 찰나간 이유 모를 소름이 끼쳤다. 만독문을 나설 때부터 암흑마교란 단체에 대하여 심한 거부감이 있었기에 그 영향이 작용한 듯도 싶었다.

“…….”

딱히 오래 걸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강소홍은 그 시간이 상당히 길게만 느껴졌다. 마음가짐부터가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시간은 짧아도 체감시간이 그 수배나 달했던 것이다. 그것을 느꼈는지 문영이 그녀를 살포시 바라보았다. 다만 명령이 있었기에 입을 떼지는 않았다.

『아냐, 아무 것도.』

문영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미소하며 전음을 보내주자 드러날 듯 말 듯한 미소로서 답한 문영은 다시 표정을 감추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말을 잘 따르는 순종적인 여인이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음, 우려와는 달리 아직까지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계시는군. 좋아.’

만독문의 육당 중 음혼당(陰魂堂)의 당주 숭의겸은 지시한 바를 잘 따르는 문영의 모습에 내심 만족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은 그는 주위 곳곳에 감추어진 미세한 살기를 느끼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주위의 마도세력들을 내려다볼 만한 강함을 지니고 있구나!’

살기가 없었다면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고수들이 포진되어있으니 무인으로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내실로 안내되어 자리를 잡게된 그들은 시비가 나가고 동료들밖에 없자 그제야 적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소홍은 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주었다.

“잘했어, 문영아. 불편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만은 이렇게 조용히 있어 줘.”

끄덕끄덕.

생긋 웃으며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문영은 생소한 곳에 머물러서 어색한지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그것을 조용히 제지시킨 숭의겸은 소문주인 강소홍에게 말했다.

“실로 상당한 경비가 갖추어진 곳입니다. 이곳에는 매복자가 없어 대화에 불편함이 없지만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항시 언사에 신경을 써야할 듯 보입니다.”

강소홍은 수긍했다.

“그래요. 나도 오는 와중에 느꼈어요. 너무… 음, 아니에요. 됐어요.”

그녀는 이번 임무가 벅찰 듯이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초장부터 사기를 꺾는 것이었기에 뒤늦게 깨닫고 말을 얼버무렸다. 숭의겸은 소문주가 말하다만 뒷 부분이 궁금했으나 감히 물어볼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그저 말씀한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그는 차를 내온 시비에게 자신과 문영의 것은 사양한 뒤에 소문주께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소문주님, 긴장이 되시지는 않는지요.”

소홍은 미소 띈 얼굴로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긴장은 항시 머물러 있으니 그것에 관한 문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다만 그것으로 인해 실수, 혹은 경직된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내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숭의겸은 움찔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아, 그렇습니까. 부디 소신의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공연히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닌지…….”

강소홍은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려 했으나 때맞춰 여러 인기척이 들리자 가볍게 호흡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초고수의 등장이라는 것을 감지했기에 교주인 냉소천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영과 숭의겸은 애초에 자리에 앉지 않고 강소홍을 호위하듯 양쪽 뒤편에 서있었으므로 따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곧이어 인기척이 문 앞에서 멈추었고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께서 듭시옵니다.”

드르륵!

강소홍 일행이 한껏 긴장해있는 가운데 마침내 붉은 물결이 밀려들어왔다. 자신이 익힌 무공을 강조하려는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의복을 붉은 색으로 맞춘 냉소천은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들어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있는 강소홍을 빤히 살펴보았다.

‘흠, 그럭저럭 괜찮군.’

강소홍의 외관 된 모습만을 일단 평가한 그는 부드럽게 표정을 풀고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먼길 오느라 수고 많았네. 앉으시게.”

강소홍은 앉는 일보다 자신을 대하는 냉소천의 태도를 먼저 언급했다.

“소녀에게 경어를 사용해주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그저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냉소천은 자못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아직 내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닌데 어찌 만독문의 소문주나 되는 인물에게 말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하하, 그럴 수 없음이야!”

강소홍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소녀는 만독문을 벗어났을 때부터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왔나이다.”

눈매를 살짝 꿈틀한 냉소천은 긴 숨을 내뱉었다.

“흐으음! 그런가?”

강소홍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어린 계집에게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 기분 나빴던 냉소천은 이만하면 체면을 살려준 것이라 생각하고 못 이기는 척 강소홍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좋다! 내 너를 며느리로 받아들인다고 단언해줄 수는 없으나 지금의 성품을 보아 흡족한 상태이니, 차후 관심 있게 지켜봐 주겠노라고 약조하마!”

‘며느리라…….’

갑자기 서글픈 감정이 솟아올랐다. 원치 않는 결합이 이러한 감정을 유발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녀. 그러나 상대를 앞두고 감성적으로 변할 여유란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감격한 척 깊게 읍을 했다.

“아? 소녀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냉소천은 만족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그래! 만독노조께서 상당한 공을 들여 가르쳤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인 듯하여 내가 다 기분이 좋구나!”

껄껄 웃은 그는 이어 말했다.

“현아와의 만남은 이 자리가 끝난 후에 주선해줄 것이니 그렇게 알고, 그것보다 네 뒤의 사람들이 궁금한데 소개해줄 수 있겠느냐?”

소홍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소녀가 긴장하여 소개에 소홀했습니다. 이분은 본문의 육당 중 음혼당을 맞고 계시는 숭의겸(崇義兼)이란 분으로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소녀의 호위를 맡아 주셨습니다.”

숭의겸은 자신의 소개가 끝나자 형식적으로 나서 포권을 취했다.

“소문주님께서 언급했듯 숭의겸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인 냉소천은 짐짓 아는 척 입을 열었다.

“호오, 음혼당의 당주라면 살인마독(殺人魔毒)이라 불리며 그 위명이 쟁쟁하던데, 이렇게 실지로 보니 과연 허명이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겠구먼!”

교주의 입에 발린 칭찬이었지만 숭의겸은 알고서도 넘어가 주었다.

“과찬이십니다.”

냉소천은 손을 내저었다.

“하하, 과찬은 무슨!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었을 뿐인데!”

“소신,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이런, 너무 자신을 비하하지 말게나. 자네는 충분히 능력이 있어 보이니까.”

“그렇게 까지야…….”

“어허! 아니라니까 그러네.”

강소홍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칭찬과 감사의 답신이 오고갈 것 같자 이야기 도중에 슬며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쪽은 소녀의 시비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로서 문영이라고 합니다. 지닌 바 자질은 뛰어나나 어렸을 적의 주화입마로 언어계통이 마비되어 말을 잘 못합니다. 이 아이에게 질문을 하셔도 대답을 듣기에는 어려우실 것이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냉소천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언어계통의 마비라고? 시비로서는 적격이로군.”

비밀이 새어나갈 확률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눈치챈 강소홍은 비인간적 상대의 발언에 하마터면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그것을 깨닫고 내심 놀란 그녀는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심신을 가다듬고 보란 듯이 미소지었다.

“그만큼 더욱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어 좋답니다.”

냉소천은 의외의 대답에 돌연 웃었다.

“하하!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구나! 좋아. 그래야지. 독하지 않으면 마도에 몸담을 수 없는 것이야. 하하하!”

그저 미소 띈 얼굴로 답한 소홍은 입안이 바싹 말라있음을 느끼곤 한 모금의 차를 마셨다. 어느 정도 갈증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심리적인 불안감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불안감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대화를 계속 이어갔고, 이런 저런 형식적인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냉소천이 오늘의 만남을 끝마치고자 했다.

“가만있자. 아무래도 긴 여정에 피곤한 상태일텐데 내가 너무 주책 없이 붙잡아둔 것 같군.”

기다린 순간이었던 만큼 그녀는 긴장감이 사르르 풀림을 느꼈다.

‘후우, 드디어 가려는 것인가?’

내심 안도한 강소홍은 냉소천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니옵니다. 소녀는 편하게 왔으니 그런 걱정은 말아주십시오.”

냉소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그렇다해도 외적, 내적으로 누적된 피로는 무시할 수 없는 게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냥 푹 쉬도록 하거라. 내 생각을 바꾸어 현아도 내일 만나도록 조치를 취해주마.”

강소홍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냉소천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아?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지 않으셔도…….”

잠시 멈칫한 냉소천은 턱수염을 쓰다듬은 뒤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배려라……. 훗, 그렇군. 배려로군.”

순간 강소홍은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에서는 별다를 것이 없었으나 여자의 직감이라는 것이 발휘된 모양이었다. 그때 냉소천이 다시 말했다.

“상황을 봐서 며칠 내로 연회를 성대하게 열 것이다. 그것도 미리 준비하고 있거라. 거처할 곳은 잠시 후 시비가 알아서 안내를 해줄 것이니 그렇게 알고.”

강소홍은 공손히 상체를 숙여 대답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거라.”

만족한 얼굴로 방을 나선 냉소천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과 함께 사라졌다. 긴장감이 해소된 강소홍은 한숨이라도 돌리고 싶었으나 바로 들어온 시비가 거처할 곳으로 안내해주는 바람에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마차를 타고 이각 여를 지나 소운정(疎韻停)이란 장원에 도착한 그녀 일행은 강소홍과 문영이 가깝게 자리를 잡은 반면 숭의겸은 다소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호위라 해도 남녀간의 일이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전혀 아니지만 행여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에는 혼사가 깨지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후우…….”

그녀가 원하던 한숨은 돌렸지만 어쩐지 더욱 허탈해짐을 느꼈다. 문영을 힐끔 쳐다본 강소홍은 그녀가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물어보았다.

“왜 그래, 문영아? 무언가 마음에 안 들어?”

문영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강소홍은 일부러 활기찬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풀이 죽어있지? 응?”

눈을 들어 주인과 눈을 맞춘 문영은 소홍의 손바닥에다 글씨를 써 내려갔다.

-배고파.

순간 강소홍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풋,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지 않았네? 알았어. 우리 같이 먹기로 하자. 됐지?”

-응.

“그래, 조금만 기다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찰나간에 불과하리라는 것은 강소홍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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