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75화
#64
탐색(探索).
“흠, 무슨 옷을 입고 가야 멋있다는 소리를 들을까나?”
꾸미길 좋아하는 여자도 아니고 있는 옷 없는 옷들을 들춰가며 온 방안을 어질러 놓은 동천은 연한 하늘색 바탕의 상하의를 입고, 그 위에 새하얀 백삼을 하나 더 걸쳐 입은 뒤 동경을 통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호오, 어느 옷을 입어도 소화해낼 수 있는 이 몸이지만 오늘따라 이 옷들이 유난히 당기네? 캬∼! 저 늠름한 사내대장부는 도대체 누구라니? 낄낄낄!”
동천은 자기 혼자서도 잘 놀았다. 그러나 옆에서 흩어진 옷가지들을 정리하는 소연은 그게 아니었다. 어질러는 놨지만 그 중에서 한가지라도 골라 입었더라면 그녀도 이렇게까지는 심기가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데, 지금 동천이 낄낄거리며 골라 입은 옷들은 애초에 옷을 고르기 전에 그가 입고있었던 옷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못살아, 정말.’
표정을 들키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옷가지들을 챙긴 그녀는 주인님 옷의 구겨진 곳을 일시적으로나마 펴주며 당부했다.
“분명 높으신 분들이 대거 참석하실 테니까 관심 밖의 이야기들이 오고가면 슬쩍 자리를 피하세요. 그런 것도 나름대로의 대처법이니까요.”
동천은 어째 집 떠나는 아들에게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자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애냐? 그런 것도 처신하지 못하게? 알았으니까 집에서 화정이하고 연화나 잘 보고있어. 특히, 연화 훈련시키는 거 잊지 말고. 알았어?”
소연은 그 사이 기분이 풀렸는지 살며시 미소하며 답했다.
“네, 주인님. 여긴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화정이도 인사를 거들었다.
“잘 가! 올 때 맛있는 거 가져와!”
그녀다운 배웅에 동천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일단 이 몸이 시식 먼저 해보고 먹을만하다 싶으면 네 것도 남겨올 테니까 말썽피우지나 말고 기다려.”
별로 믿을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오늘 열리는 연회에서 강소홍을 보게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동천은 별다른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오르려던 그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청년은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간 편히 계셨는지요.”
눈살을 찌푸리며 잠자코 청년의 인사를 받은 동천은 꽤 오랜 시간을 마주 본 다음에야 반응을 보였다.
“아? 이제 보니 도연이네?”
“…….”
동천은 도연이 입을 다물던 말던 비꼬듯이 말을 이었다.
“하도 오랜만이라 얼굴을 다 잊어먹었다, 야. 면상이라도 좀 자주 비추지 그랬냐?”
도연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들께 돌아가며 가르침을 받았기에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마차의 문을 연 동천은 삐딱하게 창가에 팔걸이를 하고 빈정거렸다.
“그냥 거서 살지 그러냐?”
동천은 진심이었으나 도연은 일시적인 화풀이 중이라고 착각했다.
“죄송하다는 말 이외엔 뭐라 드릴 말이 없사옵니다. 그보다 전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텐데 마차에 먼저 오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퍼득 정신을 차린 동천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 맞다! 괜히 집 나간 자식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날렸네? 야, 마부! 최대한 빨리 몰아서 사부님께로 가자!”
“예, 소전주님! 이랴!”
방삼은 급히 마차를 몰았고 덕분에 금새 역천의 거처에 당도한 동천은 사부가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자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제자가 조금 늦었습니다.”
동천이 오는 것을 미리 발견했던 역천은 잠깐 사이에 폼을 잡고 있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늦을 수도 있는 게지. 이제 네가 왔으니 만검전을 거쳐 연회에 가자꾸나.”
의외의 전개에 동천은 깜짝 놀랐다.
‘잉? 만검전? 거긴 왜 간다는 거지?’
그곳에는 혈귀옹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사부님, 어제만 해도 그곳에 들른다는 말씀은 없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엔 무슨 일로 가시려는 겁니까?”
확실히 그랬기에 역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설명해주었다.
“원래는 영수 녀석이 바쁘다고 거절한 마당이라서 갈 때 우리 둘이서만 연회에 가기로 할 예정이었다. 헌데, 네가 가고 난 뒤에 귀옹에게서 연락이 왔지 뭐냐? 가는 길에 자신도 태워서 같이 가달라고. 만검전이야 방향만 약간 바꿔서 들르면 되는 것인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느냐? 그래서 알겠다고 회답을 해주었느니라. 험, 그렇게 된 것이지.”
‘윽! 그 혈뇨(血尿) 영감이랑 같이 있으면 연회에 가는 게 아니라 초상집에 가는 기분일 텐데…….’
벌써부터 초상집 기분을 만끽한 동천은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물어보았다.
“사부님, 그럼 적룡등천각에 들어서면 따로따로 떨어져서 행동하는 건가요?”
역천은 동천의 기대를 져버렸다.
“아니지. 가뜩이나 친분 있는 사람들도 적은데 가급적 같이 행동해야 연회의 기분을 즐길 수 있을 것이 아니더냐. 고로, 거기에서 나올 때까지 같이 행동할 예정이란다. 잉? 근데 왜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느냐?”
혈귀옹 때문이라고 말 할 수가 없었던 동천은 시치미 뚝 떼고 말했다.
“하하, 벌써부터 기대가 되어 흥분에 몸을 떨었습니다.”
역천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오오! 그랬더냐? 그렇다면 어서 가자꾸나.”
“예, 사부님.”
일단 가겠다고 대꾸는 했는데 생각만큼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혈귀옹과 같이 있어서 결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지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가면 안 된다. 혹시나 치매에 걸린 그 혈변(血便) 노친네가 이 몸을 다시 만검전으로 붙잡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으음, 하지만 무슨 수로 이제 와 갈 수가 없다고 사부님께 변명하지?’
쉴새없이 눈알을 굴린 동천은 무언가를 결심을 굳힌 듯 진한 결의가 느껴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이 제자, 연회에 가지 않겠습니다!”
놀란 역천은 마차에 오르다말고 다시 내려왔다.
“안 가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한창 수련에 물이 올라있는 상태인데 이런 상황에서 흐름을 끊긴다면 그 열기가 수그러들어 자칫 수련에 지장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입에서 저런 대견한 소리가 나올 줄 몰랐던 역천은 잠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손을 들어 제자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이게 몇 개로 보이냐?”
“3개입니다.”
“헉? 제정신이로구나!”
이번에는 제자가 제정신이라는 것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역천은 이내 절로 흐뭇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가 수련을 위해 준비된 즐거움을 포기한다는데 그 어느 사부가 기뻐하지 않겠는가.
“푸헤헤! 네가 드디어 진정한 무인의 길로 들어섰구나! 아암, 진작에 이랬어야지! 좋다! 이 사부도 너의 뜻에 부흥하여 같이 남아 확실한 지도를 시켜주마!”
뜻밖의 전개에 당황할 만도 했건만 동천은 자기중심을 잃지 않았다.
“사부님,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이번 연회는 예사 연회가 아니라 교주님께서 직접 주관하시어 벌이시는 연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참가한 가운데 사부님만 불참하셔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상당히 함축된 내용이기도 했다. 세력의 교체가 다가오는 이런 시기에 약왕전의 전주나 되는 역천이 불참한다면 지금의 교주를 종이호랑이로 알고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물러설 상대인데 굳이 잠자는 호랑이를 깨워서 무슨 이득을 보겠는가 말이다.
“허어! 네가 다 컸구나. 이 사부는 안심하고 갔다와도 되겠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역천은 겸손하기까지(?) 한 제자의 행동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헐헐, 잘 알겠다. 내 얼른 갔다와서 열정적으로 네게 모든 비술을 전수해주도록 하마!”
‘그럴 필요까지는 전혀 없는디…….’
괜히 사부의 의욕에 불씨를 던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동천이었다.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마차에 올라탄 역천은 연신 웃어대며 적룡등천각을 향해 떠났고 도연과 함께 남게 된 동천은 언제 미소지었냐는 듯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아, 짜증나. 짜증나! 하필이면 혈분(血糞) 영감탱이가 옆에서 집적거릴 것이 뭐람?”
주군이 연회를 사양한 연유를 대충 파악한 도연은 나서는 것보다는 그저 조용히 서있는 것이 일을 크게 벌리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혼자 열 받아서 씩씩거리던 동천은 차츰 화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후우!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화를 내어 무엇하겠는가. 정말로 수련에 임하여 이 몸도 한다면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주군께서 결심이 굳은 것 같자 그제야 도연이 입을 열었다.
“훌륭하십니다. 오늘의 결심은 분명 정상을 향한 앞으로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었기에 동천은 절로 으스대짐을 느꼈다.
“후후후, 네가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 자아, 그렇다면 수련장을 향해 출발이다!”
“네, 주군.”
의기양양하게 수련장을 향한 동천은 그곳에 당도하고 나서 일각이 지난 후에 졸리다며 암한문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켈켈, 마차에 오르시지요.”
청목신장 정원이 문을 열어주고 권하자 사정화는 잠시 마차의 내부를 살펴보는 듯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잘 다녀오세요! 가셔서 너무 재미없게 노시지 마시고요!”
배웅 나온 수련이 손을 흔들며 사정화의 무뚝뚝함을 걱정했다. 사실 지 걱정이나 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말이다.
“알았어. 나 없다고 너무 늘어지지 말고.”
사정화 나름대로 수련의 가벼움을 걱정해줬지만 수련은 그게 그런 뜻인지도 몰랐다.
“에이, 제가 뭐 늘어질 성격인가요? 보라구요. 이렇게 탱탱한 피부를. 호호호호호!”
“…….”
수련 딴에는 웃으라고 한 소리였나 보다. 그러나 전혀 웃기지 않자(실소는 했다) 정원은 사정없이 수련의 머리를 내려치며 말했다.
“요년아, 여기서 농을 할 시간이 어딨어?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수련해도 모자랄 판에!”
순간 분노한 수련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었다.
“아야! 왜 때려요? 내가 뭐 할머니에게 맞으려고 태어난 줄 알아요? 그리고 자꾸 때리면 밥 안 줄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정원은 대드는 기세와는 별개로 저 멀리 도망쳐 점으로 변해있는 수련에게 소리쳤다.
“물 속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뜰 년 같으니라고! 바로 앞에서 좀 까불어봐라, 요년아!”
“내가 미쳤어요? 메롱! 메에로∼옹!”
속 시원하게 정원을 약올린 수련은 재빨리 문을 닫은 뒤 안으로 들어갔고, 사정화는 분개하여 쫓아가 작살을 내주려는 정원을 제지시켰다.
“할멈, 수련하고 놀 시간 없어. 쫓아가지마.”
정원은 하는 수 없이 속으로 분을 삭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켈켈.”
적룡등천각을 향해 말머리를 돌린 마차는 보통보다 약간 빠른 속력으로 목적지를 향했다. 좌석에 나란히 앉은 그녀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 바로 사정화가 쓸데없는 일에 입을 놀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정원이었다.
“아가씨, 요즘 천마도해와 천마지가가 나돌아다녀 무림이 뒤숭숭한데 혹시 그것들을 보셨습니까요?”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던 사정화는 정원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야.”
무인으로서 호기심이 동한 정원은 재빨리 물었다.
“켈켈, 천마님의 무공답게 정말로 대단했습니까요?”
사정화는 간략하게 대꾸해주었다.
“나는 아직 멀었음을 느꼈어.”
“오오, 그 정도였습니까?”
자존심 강한 사정화가 한 수 물러나고 있었으니 천마지가에 수록된 무공의 경지가 어떠했을 지는 대충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정화는 정원이 놀라하며 묻자 천마지가를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이 되살아나는지 약간 흥분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천마이해(天魔二海)의 내용이 수록된 도법이어서 검법을 사용하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마라비천삼도법(魔邏飛天芟刀法)이라는 그 도법은 충분히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깨닫게 해주었어. 그것도 몇몇 구절과 도식(刀式)이 빠져있는 상태였음에도 말이야.”
정원은 차마 자신도 보고싶다는 말은 못했기에 약간의 아부만을 해주었다.
“켈켈, 아가씨께서 한 단계 성장하셨음을 의미하는 것만 같아 소신은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그 말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정화는 관계없는 질문을 했다.
“아버님은?”
정원은 대답했다.
“부교주님께서는 연회 이전에 별도로 교주님과 상의할 것이 있으셔서 꽤 오래 전에 먼저 도착하신 상태일 겁니다.”
사정화는 그만하면 되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었던지 그녀는 무표정하게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런 상황에서 말을 걸 수가 없었던 정원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조심스레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에 마차가 멈추고 나서였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요.”
약 반 시진에 못 미쳐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오는 내내 눈을 감고있었던 사정화는 마침내 살짝 눈을 떴다.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화려한 건물 외관의 장식들과 더불어 붐빌 정도의 사람들을 보고 눈가에 미세한 주름을 만들었다. 딱히 사람이 붐비어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이 무슨 구경이라도 난 듯 넋을 놓고 시선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어느 안전이라고 눈알들을 놀리느냐?”
정원이 일갈하자 놀란 사람들은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한편 허리를 숙였다. 사정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느라 미처 몰랐는데 마차 위에 펄럭이는 기(旗)를 보고 뒤늦게 누구인지 눈치챘던 것이다. 사정화는 쩔쩔매는 그들의 모습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일 크게 벌리지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에는 관심 없으니까.”
습관적으로 킬킬거린 정원은 그녀의 말에 따랐다.
“알겠습니다요, 아가씨. 켈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가씨와 함께 입구에 당도한 정원은 방명록을 적고있던 문사의 붓을 눈 깜짝할 새에 가로채더니 거친 필체로 자신과 사정화의 이름을 적었다. 불식간에 붓을 빼앗겨 어안이 벙벙해있던 문사는 방명록에 쓰여진 이름을 보고는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고 말이다. 허둥지둥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문사는 그녀들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입구 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