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84화
서장(序章).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으리라 생각했을 때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잠재된 능력의 경이로움에 놀라고 찬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음의 벽에 부딪혔을 때 인간은 더 이상의 경지가 없을 것이라고 또다시 단정을 지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하아, 이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조차 본좌의 호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음에…….
슬프고, 또 슬플 따름이로다.
화중지복(禍中之福).
아침식사를 들여온 소연은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도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동천을 대하고는 별일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 식사하세요.”
“…….”
“주인님. 식사하시라니까요?”
“…….”
“주인님?”
“…….”
“주인님! 식사하세요!”
“응? 아아, 벌써 다 차렸어?”
소연은 뒤늦게나마 반응한 주인님에게 대꾸했다.
“네, 그런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시기에 음식이 차려진지도 모르셨어요?”
“그게…….”
그녀의 물음에 약간 입을 열던 동천은 무엇 때문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너 말야. 방금 전에 이 몸에게 소리치지 않았냐?”
소연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랬다간 경을 치게요?”
그도 그렇다고 생각한 동천은 품위를 고수하는 가운데 음식을 집어먹으며 점잖게 말했다.
“음, 너도 알다시피 이 몸은 예전의 이 몸이 아니시다. 그러니 이 몸이 예전의 이 몸이라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칠 줄 알아라. 그 예로 이렇게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초연하지 않느냐.”
확실히 동천의 말대로라면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먹을 것에 환장했던 주인님이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며 으스대는데 과연 그녀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느냐가 현 상황의 핵심이었다. 결론은 ‘믿을 걸 믿어야지.’였고, 그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준 소연은 바로 옆에서 어제의 주인님을 보는 듯한 화정이의 입가를 닦아준 뒤 아까 물어보았다가 끊겼던 질문을 다시금 시도했다.
“잠시 말이 새어나갔는데요, 방금 전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고 계셨어요?”
동천은 약간 반응을 보였다.
“아, 그거?”
“네, 그거요.”
그녀의 지체 없는 대답은 그렇다 치고, 잊고 있었던 고민거리가 또다시 새록새록 일어나자 동천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는 말했다.
“그게 있지, 요 근래에 소교주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의 여인네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야. 너 혹시 알아?”
소연은 당연한 질문을 하는 주인님을 잠시 살펴본 후에 대답했다.
“그 여인네라 함은 만독문의…….”
쾅!
“엄마야!”
난데없이 식탁을 내려친 주인님의 행동에 뒤로 넘어갈 뻔한 소연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동천은 그러던 말던 상당히 기분 나빠하는 얼굴로 말했다.
“너는 이 몸이 바보인 줄 아냐? 강소홍은 소교주의 여인으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 몸이 지금 걔에 관해서 물어볼 것 같으냐, 이 말이 야!”
소연은 화를 내는 주인님의 모습에 약간 겁을 먹고 물었다.
“그, 그럼 어떤 여자를 물어보신 거예요?”
중요한 본론으로 들어가자 동천은 그 즉시 표정을 거두었고, 방금 전에 떠든 것이 무색하리만큼 신중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본교에서 소교주를 남몰래 사모하는 여인네라던가…….”
“아아, 상관은혜(上官恩惠)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의외로 쉽게 터진 소연의 답변에 되려 어리둥절해진 동천은 물었다. 자신과 관련되어 이득이 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일지라도 잘 보여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철저하리 만치 관심을 끊었던 동천이었기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상관은혜? 걔가 누군데?”
소연은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을 약왕전의 소전주나 되시는 주인님이 모르고 있자 기가 막혔지만 공연히 티를 내서 주인님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왜 있잖아요. 십이 장로님들 중에 십 장로님의 손녀.”
그녀가 십 장로의 손녀인지 이모인지 그가 알게 뭔가. 여하튼 동천은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십 장로 상관봉(上官鋒)에게 금지옥엽인 손녀딸이 하나 있다고 들은 것 같군. 소문에 상당한 미인이라지?”
그저 나오는 대로 지껄인 동천은 소연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십이 장로들의 이름이야 어쩔 수 없이 외운 상태라서 틀리지는 않았지만 동천이 그들의 가족관계까지 외울 정도로 세심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금지옥엽이니 상당한 미인이니 하는 것은 대충 듣기 좋게 둘러대었던 것이다. 뭐 그녀가 아니라고 하면 다른 여인의 소문이랑 착각했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네, 맞아요. 외호는 흑봉(黑鳳)이고요, 올해로 16세래요. 어렸을 적부터 장로님에게 무공을 전수 받아 상당히 뛰어나고 재색까지 겸비하셔서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이고요. 근데 조금 문제시되는 것은 성격이…….”
동천은 소연이 말하기를 주저하자 대신 이야기해주었다.
“왜, 성격이 지랄 맞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하마터면 ‘주인님정도까지는 아니고요.’라고 말할 뻔했던 소연은 급히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에. 원래는 성격이 그렇지 않았는데 어렸을 적부터 소교주님을 우상처럼 떠받들어서 그분과 비슷한 성격으로 성장하셨다는 설(說)이 있어요.”
동천은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갖다 붙이기는 잘하네. 야! 너는 그만 좀 처먹어! 그렇게 처먹고도 살 안찌면 주위의 여자들에게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듣는다는 거 몰라?”
괜히 잘 먹고있는 화정이를 나무란 동천은 날카로워진 눈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
소연은 주인님이 이유 없이 성질을 내시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조용히 다음 말을 이었다.
“네, 그래서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성격은 좀 그래도 순종적인 면이 다분한지라 소교주님이 찾아주시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소교주님의 일에 관해서는 굉장히 고분고분하대요.”
잠시 소연의 말을 경청한 동천은 이어지는 말이 없자 툭 내뱉었다.
“그게 다야?”
소연은 떨떠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죠, 뭐. 아무래도 제 신분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음,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세요? 그러시면 전주님께 물어보시거나 혼천부(混天府)에 가셔서 조금만 힘을 쓰시면 낱낱이 알아내실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제가 혼천부에 가서 알아봐 드릴까요?”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던 동천은 손을 내저었다. 말은 안 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상관은혜의 신변을 캐봤자 소교주의 눈에 좋게 비추어질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됐어. 됐으니까 이제 밥이나 먹어.”
“네, 주인님.”
대답을 한 소연은 바로 생각에 잠기는 주인님을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았다. 그러나 동천은 그저 묻기만 했을 뿐이어서 딱히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 포기했고 때마침 자신의 몫을 다 해치운 호연화가 그녀의 다리를 살며시 긁어대고 있었기에 피식 웃은 후 고기를 약간 덜어내 주었다. 그리고 동천은 신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흐음! 모든 일에 다 순종해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소홍이를 제거하고 소교주를 독차지하겠다 이거로군. 독한 년! 그렇게 살고 싶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인생관에 대해서만큼은 타인에게 욕할 만한 처지가 아님을 동천 자신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살수는 말 그대로 살수이므로 기회가 포착되지 않는 한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목표물인 소홍이를 노릴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놓고 볼 때 빠른 시일 안에 소홍이가 그 빌어먹을 새끼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한마디로 살수들의 입장에서는 조속히 기회를 포착해서 처리를 해야한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는 것은 살수들의 습격이 최대 일년에서 그 이하라는 말이겠지?’
머리를 굴린 보람이 있었던지 동천은 그렇게 점점 하나의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의 몫을 다 해치운 화정이는 어디에서 배웠는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행동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윽? 저, 저년 저거 뭐 하는 짓이야!”
그런 건 또 잘 봐가지고 냅다 소리친 동천은 소연을 쥐어 팰 듯이 쳐다보았다. 아무리 강시라지만 채신머리없게 다 큰 처녀가 대놓고 이를 쑤시고 있으니 그로서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연도 저런 장면은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한 그녀는 재빨리 화정이의 이쑤시개를 빼앗은 뒤 말했다.
“모, 몰라요! 저도 오늘 처음 봐요. 진짜예요!”
그러나 동천은 믿으려하지 않았다.
“이런 씨!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너 솔직히 대답 못해?”
그때 화정이가 소연을 무섭게 다그치는 동천에게 대답했다.
“왜 그래, 동천? 이 쑤시면 큰일나? 난 동천이 사용하기에 나도 사용한 건데?”
“…….”
잠시 침묵한 동천은 천장을 올려보며 한탄했다.
“아아! 이래서 애들한테는 가려서 행동하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로구나. 참으로 내 불찰이 크다!”
소연은 그것 보라는 얼굴로 억울한 심경을 대변했고, 화정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별 위협감은 못 느꼈기에 새로운 이쑤시개를 꺼내서 마저 쑤셨다.
“츱츱, 이거 쓰니까 되게 편하다. 동천도 줄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쑤시개를 권한 화정이는 곧 말 없이 다가오는 동천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