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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0화


동천이 접견실의 문을 열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사내는 얼른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사내의 인사에 동천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다름이 아니라… 유혼님께 내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씀드려주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동천은 이젠 상관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소전주가 다른 사람들 중에 자신만을 불러서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자신으로써는 기쁜 일이었지만, 왠지 허전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지??’

잠시 황당해하던 사내의 생각은 소연의 말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좀 계시다 가세요…”

똑같이 황당해있던 소연이 마지못해 한 말이었다.


“그래.. 잘했어 동천아.. 그 정도면 됐지 뭐? 그럼.. 그렇고말고!”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전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미진한 감이 많다고 생각했던 동천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시켰다.

“피 뽑는 일이 좀 그렇지만.. 에이! 뭐, 어때? 피 조금 뿌려서 강시라는 특별한 계집애를 얻을 수 있는데? 그래.. 뽑자! 뽑아!!”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어두운 하늘은 마치, 동천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했다.

“어디 보자.. 그래도 유혼이 보낸 서찰을 마저 읽어야겠지?”

유혼을 마치 자신의 친구 이름처럼 막 불러대며 대충 읽어본 동천은 강시를 깨우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항광이 써놓은 것처럼 자세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동천이 건진 거라곤 강시의 가슴속에 비수가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강시에게 피를 뿌릴 때 쓸 칼을 생각하던 동천은 닫혀있던 상자 뚜껑을 열고, 강시의 가슴속에 손을 넣었다.

“으응? 좀 차갑기는 하지만 말랑말랑한 게.. 히히히! 기분은 좋네..! 단검은 찾았지만 좀 더.. 히히!”

차가워도 느낌은 좋았던지 빼낼 생각은 안 하고, 계속 조물락 거렸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동천은 나중에는 그게 그거자 손을 빼고 비수의 검집을 뽑아들었다.

“호오..? 빛이 번쩍번쩍하는구만? 좋아..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예리하게 베인다고 했으니….”

동천은 여유만만하게 비수를 검지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지까지 칼을 갖다 대기는 했지만 막상 이것으로 자신의 피부를 벤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플까? 당연히 아프겠지? 그만둘까? 아냐..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 한다고 강 아저씨가 그랬는데… 근데 무가 어디 있지? 제길.. 그건 포기하고….. 그런데 돼지 피를 뿌려주면 돼지한테도 충성을 할까? 그거 되게 궁금하네..? 나한테는 한 년뿐이라서 쓸데없는 모험은 못하겠고.. 으이그… 항광! 그 늙은이는 그런 것도 실험 안 해보고 뭐한 거야?’

칼날을 검지와 반 치 사이를 두고 벨까.. 말까..보다는 쓸데없는 생각에 한참을 고민하던 동천은 우선, 비수를 거두고 숨을 돌렸다.

“후우….! 이거 생각보다 긴장되는데? 꿀꺽..! 좋았어! 다시 한번….”


수련은 오늘의 할당량(무공 수련)을 끝내고 혼자 있기 심심하던 차에 화원(花園)의 꽃이나 볼 겸. 흥얼거리며 화원 쪽으로 걸어갔다.

“랄라라~… 날씨가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내일도 오늘 같을라나? 참? 그러고 보니… 내일이 동천이 역천 할아버지의 제자로 들어간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벌이는 날이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겠지만, 그래도 누나 체면에 아무런 선물도 안 해준다는 것은 좀 그렇겠지? 그치? 어여쁜 꽃아?”

꽃이 만발한 한 장반의 화원에 도착한 수련은 쪼그리고 앉아서 이름 모를 파란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조그마한 화원의 꽃들은 모두 다가 수련이 들판에서 조금이라도 예쁘다고 생각하면, 뿌리가 다치지 않게 뽑아서 옮겨 심어놓은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잡초들이라는 뜻이었다.

“흐음.. 선물은 뭐가 좋을까? 응? 뭐라고? 내가 가장 아끼는 인형을 선물해 주라고? 쯧쯧.. 너 모르는구나? 내가 말 안 했나 본데… 동천은 남자애야.. 남자애는 인형을 싫어한다구! 응? 그러면, 장난감을 선물해 주라고?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어떠한 장난감이 좋을까? 너도 잘 모르겠다고? 아이 참.. 생각 좀 해봐! 어? 뭐라고? 맞아! 그 선물이 좋겠구나? 호호! 역시 넌 착한 내 친구야.. 좋았어!!”

수련은 혼자서도 잘 놀았다.

우르릉.. 쾅쾅!! 우르르.. 쏴아아아—

“이크? 비가 오네? 아이고.. 빨리 들어가자..”

수련은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상처가 나면 곧바로 강시에게 떨어지도록 손을 상자 안쪽으로 들이밀고 있는 동천은 근 이각이 되도록 실행(實行)에 옮기지 못하고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에 잠겨있었다.

우르르릉… 쏴아아….

한참을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내려치며 비가 쏟아지자, 그로 인해 굳어있던 근육들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음… 벨까.. 말까.. 휴.. 땀 좀 훔치고.. 다시… 벨까.. 말….. 응?”

똑..똑…..! 후드드득…!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친 동천은 난데없이, 강시의 배 쪽으로 떨어지는 빨간 물방울을 볼 수 있었다. 그게 뭘까.. 하고, 생각해보니 피(血)인 것 같았다.

“어? 어디서 피가 떨어지는 거지?”

왼쪽을 쳐다보고,, 다시 오른쪽을 쳐다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던 동천은 혹시, 비가 새나 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연히 천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때, 동천은 자신의 한쪽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에이.. 뭐야?”

뜨끈~ 뜨끈하고, 끈적한 것이 자신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자 이상히 여긴 동천은 비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옆 이마에 흐르는 것을 손으로 훔쳤다. 그런 다음 무심코 손을 내려다보니….

“으으으… 피.. 이이? 왜..? 왜에..?”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피가 흘러내리니 당황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천은 강시가 자신에게 이상한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공포(恐怖)와 흥분(興奮) 때문인지 예리하게 베어진 동천의 이마에서는 더욱더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급기야, 한쪽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동천의 얼굴은 정말 가관(可觀)이었다.

“으아아아악–!!”

우르릉.. 콰-광!!

시꺼먼 하늘에 번개가 내려치는 가운데, 자신의 방에서 번개 소리에 떨고 있던 소연은 동천의 방에서 들리는 괴성에 화들짝! 놀랐다.

“으으… 무슨 소리지이…? 주.. 주인니임.. 방에서…..”

못 들었으면 모르나, 일단 주인의 괴성을 들은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던 소연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문을 열고 천천히 동천의 방으로 다가갔다.

꽈-과광!! 우르르.. 쾅! 꽈-광!!

“엄마야!!”

무서운 천둥 소리에 머리를 두 손으로 보호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소연은 연달아 내려치는 천둥 번개가 지나가자, 가쁜 숨을 들이 내쉬며 다시 일어섰다.

“후우.. 후우…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킨 소연은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동천의 방문을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몸은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못했다. 문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열렸다.

스르르르….


“으악!! 피가.. 으아악!! 저주가…. 으악!! 우악!! 으아악!!!”

그다음은 생각이 안 나서 계속 으악! 거리던 동천은 이마에서 계속 흐르는 자신의 피가 지속적으로 강시의 몸에 뿌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당량이 떨어졌는지 강시의 배 쪽에는 빨갛게 핏물이 배어 있었다. 혼자 지랄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머리가 어질거리자 위험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의 옷 소매를 찢어서 이마에 얹어 놓았다.

부우우욱…..

“헉헉… 아이고.. 골이야. 띵.. 하네.”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옆 탁자에 한쪽 손을 기대고 있던 동천은 갑자기 강시의 피부색이 점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푸른색에서 연분홍색으로 바뀌는 것이 아마도 깨어나려는 것 같았다.

“오…! 신기해라…. 살색이…….”

신기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강시를 쳐다보던 동천은 한순간 강시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억..?’

갑자기 눈을 뜬 강시의 모습에 동천은 한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흐릿한 초점으로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는 강시의 모습에 점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은 강시는 순간적으로 동공(瞳孔)을 확대시키더니 천천히 눈을 돌려 자신을 깨워준 상대를 찾았다.

그리곤 얼마 안 가 동천을 볼 수 있었다.

“으으으… 깨어… 났………..”

동천을 지긋이 쳐다보던 강시는 떨리는 동천의 말을 듣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완전히 일어나 앉자, 강시는 동천을 향해 살풋이 웃었다.

콰-콰쾅!!

갑자기 내려치는 천둥과 아울러 그 빛에 반사되어 웃고 있는 강시…. 아무리 강심장인 동천이라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동천의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얼떨결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동천은 두려움에 거의 실신 지경에 빠져있는 소연을 볼 수 있었다. 건드리면 힘없이 쓰러질 것 같은 소연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상자 안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모습에 검은자위보다 흰자위가 많아지려던 소연은 자신의 소리에 고개를 돌린 동천의 모습에 다시 한번 소릴 질렀다.

“꺄악! 꺄아아-악!! 꺄… 으음..”

“앗? 소연아? 이런 제길.. 이 계집애가 왜 여기에 온 거지? 야! 정신 차려봐!”

쓰러진 소연에게 달려간 동천은 이미 의식이 끊겨버린 소연의 뺨을 몇 대 쳐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 가지고 소연이 깨어날 리 없었다. 그런 동천의 행동을 멍하니 주시하던 강시는 소연과 동천을 번갈아 보더니 순간적으로 눈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시는 웃음을 거두고는 천천히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뒤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던 동천은 그제서야 강시에게 생각이 미쳤다.

“참? 강시는?”

상자에서 상체만 일으켰던 강시가 안 보이자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다가간 동천은 눈을 감고 누워있는 강시를 볼 수 있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동천은 항광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분홍색을 띠고 있는 강시의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가졌다.

“우와…!! 좀 따뜻해졌는데..? 오오! 이렇게 신기한 일이..”

신기해할 새도 없이 방금 전의 일로 이마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리자 동천은 이마를 부여잡고 얼른 상자 뚜껑을 닫았다. 생각 외로 심한 상처 때문에 역천에게 가려고 밖으로 나가려던 동천은 문 쪽에 쓰러져있는 소연이 보였지만 지금 자신이 소연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나가는데 걸리적거리는 소연을 발로 차서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유 없는 분풀이었다. 대충 천으로 상처를 싸맨 동천은 얼른 하인을 불러서 마차를 타고 역천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떤 새끼가 내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칼질을 했어? 응? 누구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제자가 칼 맞았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온 역천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리 큰 상처가 아니자(피를 많이 흘린 것 빼고는…) 헛소리를 나불댄 한심을 몇 번 밟아준 뒤에 동천의 이마를 세심하게 꿰매주고 있었다. 역천이 흥분해서 물어보자 동천은 역시 나 생각해주는 것은 사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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