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05화
“말씀 잘 들었소이다. 허나,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본각에서 거부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의 모습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동천은 여유를 조금 거두었을 뿐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음, 이것은 실로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본 소전주가 각주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끝까지 잡아뗀다면 결과는 전면전을 양산한 따름이외다.”
형위광은 자신이 생각했던 대답과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자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듯 눈썹을 미간으로 모으며 깊은 신음을 흘렸다. 비록,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천은 순간순간이 참으로 길다고 느껴졌다.
‘아따. 별로 늙지도 않은 것이 셈이 느리나,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려?’
그 성격 어디가지 않았는지 속으로 구시렁거리기에 여념이 없던 동천은 상대가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재빨리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하, 드디어 결심을 해주신 것이오?”
형위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소. 요구조건을 말씀해보시오.”
허락은 허락이되 수틀리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자 동천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그는 상대의 얼굴이 상해 있는 김에 몇 대 더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이라……. 뭐 좋소. 원래 도박은 마지막 패까지 펴봐야 결론이 나는 것이니까. 어쨌든 일단 허락을 하셨으니 우리의 요구조건을 말씀드리겠소이다. 첫째, 은중각은 본교에게 3가지의 의뢰를 들어준다. 그리고 그 의뢰들을 청구함에 있어서는 기한이 정해져있지 않다. 둘째, 그 의뢰는 본 소전주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 외에는 효력을 상실한다. 셋째, 그 3가지 의뢰가 다 끝난다면 본교는 은중각이 도발하지 않는 한 일체의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넷째, 그 3가지 의뢰가 다 소진되지 않는 한 본 소전주가 은중각의 각주대행을 맡는다. 이상이오.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봐 주시기 바라오.”
마지막 부분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을 부릅뜬 형위광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눈앞의 어린놈을 찢어발기고 싶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고 물었다.
“으음! 그럼, 물어보겠소. 첫 번째의 조건에서 본각의 존망이 걸린 의뢰까지 감수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소.”
동천은 내심 웃었다.
‘미쳤냐? 이제 은중각은 내껀데 그걸 망가뜨리게?’
그런 생각을 마친 동천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물론 아니오. 본 소전주는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은중각을 평생 친구로 삼고 싶을 뿐이오. 그런 이유로 둘째 요구조건을 내걸었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오. 즉, 살각과 관련된 곳에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우리 쪽에서 의뢰 내용을 살펴보고 그것이 귀각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의뢰라면 걸러주겠다는 말이외다.”
형위광은 조금 안정됨을 느끼며 계속 물었다.
“좋소. 세 번째는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니 넘어가기로 하고, 네 번째 내용 중 약소전주께서 각주대행을 자청하신 이유를 듣고 싶소이다. 만일 불신이 가는 대답이라면 비록 작은 본각이지만 멸문을 각오하고서라도 항전하겠소!”
말을 마친 형위광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길 만큼의 강력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이에 동천은 상대의 눈길을 자연스레 회피하며 대답했다.
“하하, 그것은 이쪽에서도 원치 않는 바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대답을 해드리겠소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살각 쪽에서는 불순한 의도로 접근을 해왔던 것인데, 사실 우리 쪽으로서도 그들의 의도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오. 그러자니 무언가 명분은 내세워야겠고, 그것에 가장 합당한 방법을 찾다보니 겉으로나마 그들에게 은중각을 본교의 세력권 하에 예속(隸屬)시켰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이오. 그래서 부득불 각주대행이라는 요구조건을 내걸었던 것이외다.”
말은 그럴싸했으나 형위광이 듣기로는 자신이 각주대행을 맡으면서 조금씩 은중각을 파먹어 들어가겠다고 수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재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있다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일 뿐.
“잘 들었소이다. 그렇다면 현재 각주의 위치에 있는 본인의 직위는 어떻게 변동되는 것이오?”
동천은 약간 움찔했다.
‘어쭈? 이런 상황에서도 제 밥그릇은 챙겨 먹겠다는 건가? 하여간 자식이 능글맞아 가지고.’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듯 동천은 크게 한번 웃은 다음에 그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재빨리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아, 비웃으려는 의도는 없었소이다. 다만 본 소전주가 이번 일에 긴장하여 그 부분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라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에 웃었던 것일 뿐이었소. 음, 생각해보니 각주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각주대행을 맡는다는 것에 조금 문제가 있구려. 그렇다고 멀쩡한 각주를 폐하자니 이번 취지에 맞는 같지가 않고……. 아? 이러면 어떻겠소이까. 각주의 직위를 나누어 좌각주(左閣主) 우각주(右閣主)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 만일 그렇게 된다면 각주께서는 물러나실 필요도 없을뿐더러 은중각의 대소사 또한 예전 그대로 행하시면 될 것이외다. 하하, 내가 생각해놓고도 참으로 그럴싸하구려! 그럼 이쪽에서 좌각주를 맡을 터이니 각주께서는 우각주를 맡으시겠소, 아니면 그 반대를 맡으시겠소?”
“…….”
동천은 상대가 안면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자 되게 잰다고 생각하며 좀더 구슬렸다. 솔직히 그 누가 갑작스레 변경된 제안에 섣불리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강압적인 방법으로 제안된 사안을 말이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내가 맡게 되는 직위가 좌각주이던 우각주이던 영향력은 있어도 각주 이상의 권한은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아 둘 테니까 말이오.”
듣기에 따라서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제안이었지만 일단 형위광은 자신의 자리가 보존되자 후일을 기약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로들 이외에 모든 원로들은 이미 자신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대답했으니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도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좋다! 나 형위광! 당장에는 너희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망정, 결코 선대의 피와 땀이 베인 본각이 너희들의 수족 노릇을 하게끔 놔두지는 않으리라!’
피눈물을 삼키며 굳게 다짐한 그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천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좌각주를 뵈오이다.”
동천은 진한 미소를 뿌렸다.
“하하, 탁월한 선택이오! 본 각주 또한 우각주를 뵈오.”
일 처리를 잘 끝마친 동천은 형위광과 모종의 대화를 좀더 나눈 뒤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형위광의 부름을 다시 한번 받았다. 이번에는 살각의 좌봉공 일행과 함께였는데 여기에서 동천은 처음 찾아가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형위광을 만났다. 이에 형위광 또한 동천과 입을 맞추어 처음 대하는 척 대화를 주도하다가 스스로 암흑마교의 아래임을 자처하며 동천이 제시했던 요구조건을 역으로 자신이 먼저 꺼내어 동천을 좌각주로 인정해주었다.
동천이 좌봉공 일행을 떼어놓고 혼자 일 처리를 했다는 것을 상대들이 알면 심기가 크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잔머리를 썼던 것이다. 결국, 좌봉공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눈앞의 상황을 의심하면서도 나쁜 제의는 아니어서 잠자코 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은중각의 좌각주가 된 동천은 성대한 연회에 사나흘 푹 빠져 있다가 의기양양하게 암흑마교로 돌아가기 위한 마차에 올라탔고, 후방의 마차 안에서 안전함을 확인한 잔심마도(殘心魔刀) 양위(陽威)는 좌봉공에게 조용히 물었다.
“좌봉공님, 아무래도 서로들 미리 만난 듯 합니다만…….”
좌봉공은 껄껄거리며 웃고 난 후에 입을 열었다.
“아무 말 하지 마라. 우린 그저 본대로 봤을 뿐이고, 결정된 사항을 보고하면 그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도 약소전주의 능력인 게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좌봉공 염화수는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묵인해주고 있었던 듯했다. 덕분에 아는 척 나섰던 양위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그것을 본 좌봉공은 한마디 더했다.
“그래도 제법이지 않으냐? 그 나이에 은중각의 각주를 구워삶았으니 말이야.”
그제야 고개를 든 양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허나, 좌봉공께서 애초에 빈틈을 보여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끼리의 독대는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씨익 웃은 좌봉공은 말했다.
“윗전에서 시키신 일이었지. 본각의 비전 무서를 되찾게 해주었으니 은중각 따위야 구워삶던 볶아먹던 그대로 놔두라고 하셨던 게야. 허허,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 하러 처소를 멀리 잡아주게끔 방치했으며 약소전주를 엄밀히 호위하지 않았겠느냐.”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듯 양위가 놀라하는 눈치를 보였다.
“아? 이제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속하가 주제도 모르고 나섰던 모양입니다. 실로 부끄럽습니다.”
좌봉공은 손을 내저었다.
“허허, 되었다. 어쩔 수 없었음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 또한 이제부터라도 알았으니 본교에 도착할 때까지 입 단속을 철저히 해야만할 것이다.”
“복명!”
양위는 재빨리 대답했고, 이렇듯 상대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동천은 다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좋아라 마차 안을 뒹굴었다.
“큭큭큭! 그 누가 있어 이 몸의 혜지(慧智)를 따라오겠느냐! 푸하하하! 큭큭! 아아, 너무 잘나도 서글픈 내 인생아. 큭큭큭!”
너무 좋아해도 탈인지 옆에 있던 화정이가 그걸 보고 물었다.
“동천, 미쳤어?”
벌떡 일어난 동천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떽!”
아울러 그는 화정이의 볼을 잡고 이리저리 늘리며 그녀를 구박했다.
“이런 씨, 니 눈엔 위대하신 이 주인님이 미쳐 보이디? 응? 어디 미친 주인에게 괴롭힘 한번 당해볼래? 진짜 당해봐?”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었던 화정이는 어떻게든 덜 아프려고 주인님의 손길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다니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아야야! 잘못했어. 안 미쳤어. 동천, 안 미쳤어. 아파잉…….”
그 밑에서 호연화는 껑충껑충 뛰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천의 팔목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떨어지고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놀이를 즐겼다. 결국 표적을 바꾼 동천은 조그마한 연화의 좌우 볼 살을 잡고 쫙 늘어트렸다.
“니야아아옹!”
“얌마, 어흥 하라니까.”
불가능한 요구에 질렸는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간 호연화는 창문 밖으로 나가더니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그런 호연화가 마차 위에 있는 것을 감지한 동천은 곧 관심을 끊었고, 다시 저 혼자 킬킬거리며 좋아라 바닥을 뒹굴었다. 이번에는 화정이도 입을 다물었다.
“주군, 잠시 후 식사를 위해 멈추겠습니다. 객잔에 들를 생각이니 준비해 주십시오.”
은중각을 나선지도 어느새 닷새가 흘렀다. 그동안 자화자찬도 그 효력을 상실했던지 슬슬 지겨워진 동천은 이미 먹을 것에 관심을 돌린 상태였다. 그런 동천이었으니 먹는다는 소리만큼 반가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오! 그래? 보아하니 곧 산길의 초입에 들어설 듯한데 어디 먹을 곳이라도 있대?”
도연은 마부석 옆에서 대답했다.
“예, 주군의 입맛을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나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라고 합니다.”
도연이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대충 먹을만한 곳이라는 뜻과 일치했다. 벌써부터 군침이 돈 동천은 혀를 날름거렸고 옆에 있던 화정이는 개 같아 보인다고 잘못 말했다가 또다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응? 저것들은 뭐냐?”
화정이를 괴롭히다가 객잔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마차에서 내린 동천은 객잔 입구에서 진을 치고있는 무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도연도 자세한 것을 모르는지라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곧 확인을 해봐야할 듯 싶습니다만 아마도 먼저 도착한 무림단체 중 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동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꼬며 말했다.
“쳇, 도대체 니가 아는 게 뭐냐?”
“죄송합니다.”
“아아, 죄송이고 안 죄송이면 싸가지 없는 거고 뭐고 어쨌든 간에 눈빛들을 보아하니 정파인들은 아닌 듯한데, 괜히 나섰다가 칼침 맞지 말고 양 대주에게 시켜서 알아봐 봐.”
도연은 명령에 바로 회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심기가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 그래도 뒤쪽 마차에서 걸어나오던 잔심마도 양위는 객잔 앞을 점거한 무림인들에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상대 쪽에서는 양위 혼자 걸어오자 경계를 하면서도 막진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듯 얼굴을 굳혔고 돌아온 양위는 좌봉공과 함께 나란히 서있는 동천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혈사교의 무리인 듯 합니다. 상당한 고위층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좌봉공은 쉽사리 심중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한적한 곳에서 만나기 어려운 자들은 만났군. 어떻게 하시겠소, 약소전주. 이번 일의 책임자는 약소전주이니 내 그 뜻을 따르리다.”
별로 좋은 일도 아닌 사안을 떠맡게 된 동천은 폼을 잡고 객잔 쪽을 바라보며 결단을 내렸다.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그쪽도 고위층이고 이쪽도 고위층이니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고, 아무리 혈사교라 하나 이쪽은 암흑마교이니 꿇릴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리가 없었던 좌봉공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젊다는 것이로구려. 허허, 혈기가 넘쳐서 좋소이다.”
칭찬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으스댔다.
“하하! 혈기하면 저를 빼놓을 수 없지요.”
고개를 끄덕인 좌봉공은 뒤에 시립해 있는 오행은살수들을 스윽 둘러본 후 객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하시니 오랜만에 이 염모가 나서서 일을 보리다. 허락해주실 수 있겠소?”
마다할 동천은 아니었다.
‘그러엄! 가서 뒈지면 더 좋지!’
실현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내심 당하는 꼴을 보고 싶었는가 보다. 그는 행여라도 좌봉공의 생각이 바뀔까봐 재빨리 허락해주었다.
“물론이지요. 어느 누가 감히 좌봉공님의 앞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본교의 위신을 드높여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이거 벌써부터 부담이 되는구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신형은 스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오행은살수들이 조용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