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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12화


“그래서 말야. 이 몸께서 말씀하셨어. 니들이 주글라구 이 몸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것이냐?”

“와아, 그랬더니?”

동천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물어보는 화정이에게 힘차게 말했다.

“야, 너도 봤으면서 그랬더니는 뭐가 그랬더니냐? 뭐 어쨌든 그랬더니 쫄아가지고 은중각을 바치겠다며 굽실거리지 뭐냐? 큭큭, 그때 어찌나 통쾌하던지! 하하하하!”

소연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웃어주었다.

“호, 호호! 호호호…….”

벌써 다섯 번째 같은 내용을 듣게 되는 소연으로서는 웃어주기도 참 힘들었지만 호응을 해주지 않으면 뒤따라올 보복이 두려워서 하는 수 없었다.

그나마 곁에 있는 화정이가 대견하게도 크게 웃어주어 어색한 그녀의 웃음을 가려주었다.

“호호, 재밌다 동천. 또 해줘! 또 해줘!”

이미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버린 동천은 수많은(?) 청중이 원하자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아! 험험! 으험험! 에에, 그러니까 은중각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어.”

마침내 두 손 두발을 다 들어버린 소연은 상당히 지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그건 화정이 너도 알 거야.’

그와 동시에 동천도 말했다.

“그건 화정이 너도 알 거야.”

소연은 역시나 앞서의 다섯 번과 똑같은 내용이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쯤은 대화의 내용이 틀려야 그렇구나 들어주는데, 마치 책을 보고 읽는 것처럼 단어 하나 틀리지 않는 것이다.

소연은 화정이를 보며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응응. 배고픈데 먹을 거 제때에 못 먹어서 속상했어…….’

화정이 또한 그녀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응응! 배고픈데 먹을 거 제때에 못 먹어서 속상했어!”

‘이 바보야. 그거하고 이 험난하고는 다른 거야…….’

“이 바보야! 그거하고 이 험난하고는 다른 거야!”

거기까지 듣고 난 소연은 아무래도 자신이 대화 내용을 전부 암기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는 새삼 반복학습의 무서움을 체감하며, 차이는 있겠지만 공부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인간은 다 개뻥이라고 굳게 믿었다.

“저어, 주인님. 죄송한데요. 이제 날이 저물어가니까 그만 쉬세요. 그래야 내일 일찍 맑은 정신으로 전주님을 뵙던가 할게 아니겠어요?”

동천은 한창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방해를 받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어서 그러기로 했다.

“음, 그래. 사실 사부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참된 제자의 도리이지만 암흑대전회의라면 언제 돌아오실지 장담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 일찍 자고 내일 아침에 찾아뵙는 것이 좋을 듯 싶구나.”

드디어 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한 소연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지 밝게 웃었다.

“호호, 잘 생각하셨어요. 방금 식사를 마치셔서 더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만약에 배고프시면 말씀만 하세요. 다시 준비해드릴 테니까.”

방금 먹어놓고도 그 소리에 다시 군침이 돈 동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알았어. 배고프면 부를게.”

방긋 웃은 소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네, 푹 쉬세요. 화정아, 너도 빨리 나와. 주인님 피곤하실 테니까.”

소연은 화정이의 손을 잡아끌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화정이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소연, 난 안 가도 돼.”

“뭐? 무슨 소리야?”

소연이 의아해진 눈으로 묻자 화정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헤헤, 동천이 이젠 자기하고 같이 자래.”

그녀의 대담한 말에 기겁을 한 소연은 불신에 찬 눈으로 주인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동천은 상당히 찔리는 얼굴을 하다가 얼버무리듯 입을 열었다.

“에에, 그게 말이지. 은중각에 가고 오는 동안 화정이를 혼자 재워둘 수가 없지 않겠어? 그래서 본교에 돌아올 때까지만 같은 방을 쓰자고 했던 건데 쟤가 그걸 말하는 거야. 음, 뭐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넌 그만 네 방으로 가봐.”

소연은 자신만 나가라는 소리이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 저만요?”

동천은 아무래도 소연이 까무러칠 듯한 얼굴이어서 은근히 불안했으나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사실 가출하기 전까지는 아무 탈 없이 동침을 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화정이와 떨어져서 그런지 재회를 했어도 어색함에 같은 방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 임무를 계기로 자연스레 동침을 했던 것인데, 고기를 맛본 중이 이제와 쉽게 물러날 성싶겠는가?

“험험, 말하자면 그렇지 뭐.”

결국 그렇다는 말에 소연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놀란 동천은 기절하는 소연에게 달려가 급히 안아주었다.

다행이 신법을 발휘했고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어서 바닥에 쓰러지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소연의 볼을 툭툭 쳐가며 그녀를 깨웠다.

“야! 야, 정신 차려!”

진기까지 주입해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소연은 자신이 주인님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에 잠깐 부끄러워 하다가 화정이의 일이 떠오르자 울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흑흑, 주인님 미워요! 불결해요!”

기껏 진기까지 주입해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미워요.’ 와 ‘불결해요.’ 이자 흥분한 동천은 펄쩍 뛰었다.

“불결? 이런 씨! 불결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 아니 토끼고 있네! 야! 어디가 불결하다는 거야? 세상에 나처럼 깨끗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소연은 뛰쳐나가면서도 대답은 해주었다.

“몰라요! 흑흑, 상관 안 할래요!”

“우씨! 너 이리와! 이리 안 와?”

바로 뒤쫓아간 동천은 홧김에 잘못 때렸다 애가 이상해 질까봐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윽박지르며 그녀를 혼내주었다.

결국, 힘없는 소연은 잘못했다고 빌었고 기분이 상한 동천은 그래도 화정이와 동침을 했는데, 바로 근처인 소연의 방에서 계속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짜증이 치솟아 올라 마침내 그도 포기하고 화정이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런 뒤 동천은 소연의 울음소리가 바로 그치자 무언가 속았다는 느낌에 이불을 찢어발기듯 세게 움켜쥐었지만 비싼 거라는 생각이 미쳤는지 그저 잠들 때까지 인상만 험악하게 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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