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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21화


“아! 이제 보니 남룡당봉(南龍唐鳳)으로 유명하신 두 분이셨군요? 처음 보았을 때 인세에 드문 용모들이시라 남달라 보인다고는 생각했는데 남룡당봉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남룡당봉은 그들 둘이 근 10여 년을 넘게 붙어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붙여진 외호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궁연경이 죽어라 쫓아다녀서 얻어낸 외호였는데, 성이 남궁이었던 남궁연경은 남궁룡이라 불려야 했지만 당문영과 같이 합쳐 부르자니 어색하자 사람들이 앞글자만 따서 남룡이라 칭하고 당문영을 당봉이라 불러 남룡당봉이란 외호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일부 비꼬기 좋아하는 자들은 사내자식이 자신의 성을 절반 떼어놓고 부르는데도 스스로 고칠 생각을 안 한다하여 말들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남궁연경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당문영과 같이만 다닐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녀서 본의 아니게 공처가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아니, 공자가 우리를 안단 말이오?”

동천 일행이 무림과 연관이 없는 줄만 알았던 남궁연경이 의외라는 얼굴로 묻자 동천 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면 안되었던 것이었습니까?”

남궁연경은 일순 할말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남궁연경의 난처함을 알고 당문영이 끼여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보다 소공자께서는 저희들의 동행을 허락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닐뿐더러 우리가 위험하다 여기신다면 바로 내리도록 하겠어요.”

동천은 아름다운 여인이 부드럽게 말하자 하마터면 자연스럽게 허락할 뻔 했다.

그러나 정도인물들의 동행을 함부로 허락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어떠한 의도가 있어서 접근한 것일 수도 있었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현재 동천일행은 신분을 노출시켜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동천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던지 사정화에게 떠넘겨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녀에게 이번 일을 상담하려고 했다.

헌데 그보다 앞서 사정화가 동천에게 말했다.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허락하거라.”

내심 반색한 동천은 다시 다짐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물어보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정화는 마차 안에서 싸늘히 말했다.

“난 두 번 말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녀와 성공적인 대화를 마친 그는 당문영을 돌아본 후에 살며시 웃었다.

“들으셨다시피 아가씨께서 허락해주셨으니 저기 집사분과 상의하여 아무 마차에나 동승하시기 바랍니다.”

대외적으로 소진은 집사로 불렸기 때문에 그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문영과 남궁연경은 동천이 이들의 상전인줄 알고 있었는데 더욱 높은 여인이 있자 잠깐 놀라는 듯하다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자들답게 일제히 감사의 인사를 해주었다.

“고마워요, 소공자.”

“하하, 소형제 고맙네.”

하는 수없이 그들을 태울 마차를 살피기 시작한 소진은 여건이 좋은 곳은 동천의 마차와 자신의 마차뿐이자 감히 아가씨까지 계신 마차에는 이들을 태울 수는 없는 고로, 이들을 감시라도 할 겸 자신의 마차에 동승하도록 허락해주었다.

“헌데 저들을 태워줘도 될까요?”

자신의 마차로 되돌아온 동천이 사정화에게 묻자 그녀는 마차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무감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신경 꺼.”

욱! 해진 동천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생각했다.

‘우씨! 이년은 내가 호구로 보이나, 물어보기만 하면 무시하고 지랄이야.’

사정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시해도 될 정도의 행동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어도 그의 성격상 반항한답시고 더욱 제멋대로 하며 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랬다간 구타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남궁 뭐시기라는 사람이 내상을 입었던지 안색이 많이 죽어있던데 혹시 쫓기고 있는 사람을 태워준 것은 아닐까요?”

사정화는 그제야 책을 읽던 시선을 동천의 얼굴로 옮겼다.

“내상을 입었다고?”

동천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자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예, 자세히 보니까 다리까지 후들후들하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더라고요. 제 딴에는 안 그런 척하려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헤헤.”

사정화는 약간 미간을 모으는 듯 하다가 동천의 볼을 잡고는 한도 끝도 없이 잡아 늘렸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 동천, 내가 귀찮은 일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차라리 신경질이라도 부렸으면 그렇구나 하는데, 이건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무언가 더욱 억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당면한 문제가 먼저였다.

“우에에엑! 자, 잘못했어요! 우윽! 이유가……. 이,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예요!”

과연 사정화는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동천의 바램대로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싸늘한 목소리 말이다.

“허튼 소리면 다음 마을이 나올 때까지 뛰어서 따라오게 만들 거니까 알아서 해.”

‘헉? 자, 잔인한 년!’

너무도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지껄인 것이었던 동천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런 보고를 자신의 임의대로 지나친 것은 그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에에, 그러니까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인지. 또한 요즘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무림에서는 정보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새로운 정보를 물 수 있지나 않을지. 뭐 그러한 이유로 잠시 태워주기 위하여 알려드리지 못했던 겁니다. 아시면 지금처럼 반대를 하실 까봐요.”

사정화는 동천이 말을 다 끝낸 것 같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문 쪽으로 움직였다.

“나가.”

“예?”

“뛰어.”

“예?”

“맞을래?”

“아, 아뇨.”

결국 동천은 죽어라 신법을 발휘하며 자신의 마차를 뒤쫓아야만 했다.

“헥헥! 그, 그년이 아주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헥헥헥!”

중간에 말들을 쉬게 하느라 쉬는 시간이 마련되자 남궁연경이 다리를 후들거렸던 것을 비웃었던 동천은 현재 그보다 더한 상태가 되어 다리는 물론이고 전신까지 후들거리는 상황이었다.

너무도 힘들어서 풀숲에 드러누운 동천은 예전에 재미로 한번 해보았던 누워서 운기조식을 시작하며 숨을 고르기에 먼저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재빨리 약식 운기조식을 끝낸 동천은 상대가 사정화라는 것을 깨닫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오, 오셨습니까?”

또 무슨 봉변을 당할까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사정화는 파김치가 되어버린 동천을 바라보더니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구나.”

현재의 동천은 노력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어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던 동천은 절로 이가 갈리는 것은 느꼈다.

“헤헤, 안 그래도 앞서의 일을 반성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을까?

살짝 웃고 난 사정화는 곧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계속 반성해.”

‘켁?’

동천은 무언가 잘 될 것만 분위기여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이었었다가 한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사정화는 그런 동천에게 곧 떠날 것이니 마차에 들어가 운기조식을 취한 후 다시 달리라고 명했다.

이어 그녀는 동천이 계속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건 말건 그대로 놔두고 산책하듯 주위를 거닐었다.

문득 그녀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신형을 돌렸다.

“아!”

“어머?”

동시에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로 소진과 함께 산책을 나선 남궁연경과 당문영이었다.

사정화를 처음 보는 것이었던 그들로서는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람을 금치 못한 것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남궁연경은 다소 흥분하여 말했다.

“실로 선녀가 하강한 듯하여 잠시 내 눈을 의심할 뻔했소이다.”

그러자 사정화가 말했다.

“선녀는 제가 아니라 남궁대협의 옆에 있는 듯 하군요.”

뒤늦게 당문영이 자신을 째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남궁연경은 당황하여 재빨리 당문영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했다.

“아, 그렇지 참. 하하, 바로 옆에 선녀를 두고도 몰랐었다니. 하하하!”

그러나 당문영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는 나직이 흥! 하더니 사정화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죽자고 따라다니던 자의 입에서 선녀와도 같다는 찬사를 들을 정도이니 아가씨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부해도 좋을 듯 싶군요.”

사정화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전 당신들과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굳이 아가씨라 높여 부르시지 않아도 됩니다.”

당문영은 마치 인형과도 같은 무표정한 그녀를 바라보며 점점 더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호호, 그렇지 않아요.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그럴 수야 있나요?”

제법 친근한 인상을 주며 대화를 주도해 나가려고 했는지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에 휩쓸릴 사정화가 아니었다.

“그러신가요. 그렇다면 편하실 대로 부르세요. 저는 잠시 집사와 할말이 있으니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태도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당문영은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주객이 전도될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아쉽지만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사정화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

“그들과 이야기는 나누어 봤겠지?”

소진은 공손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건질만한 정보는 있던가?”

소진은 죄송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송구하오나 강호경험이 만만치 않은 자들이라 잠시의 동행으로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강압적인 방법 외에는 알아내기가 어려울 듯 합니다.”

사정화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그건 안 돼. 분란을 일으키면 종적이 남아.”

소진은 수긍하는 눈빛을 보냈다.

“소신도 그리하여 이대로 놔둔 뒤 마을이 보이면 바로 축객령(逐客令)을 내릴 생각입니다.”

사정화는 부전주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있자 차가운 기도를 어느 정도 줄였다.

“그렇게 해.”

“예, 아가씨. 헌데…….”

사정화는 소진이 머뭇거리자 표정에 변화 없이 물어보았다.

“뭔데. 말해봐.”

소진은 감히 자신이 나설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어서 충성심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전주님에 관해서 인데, 어떠한 잘못을 하셨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어 차후 본교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질까 적이 염려가 되옵니다.”

필시 약왕전의 명예가 떨어지거나 사정화가 소전주의 신분인 자를 마차나 뒤쫓게 만들었다는 음해성 발언들이 나돌면 여러모로 안 좋게 작용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정화는 그러한 소문들이 안중에도 없는 듯 투명한 유리알 같은 눈으로 소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화가 났다한들, 가학적인 장면을 즐길 만큼 난 타락하지 않았어.”

움찔한 소진은 급히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소신은 절대 그러한 의도로…….”

“역천을 대신해서 훈련을 시켜주고 있는 거야.”

부전주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간 사정화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진 소진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동안 녀석을 계속 지켜봤는데 전혀 무공수련에 박차를 가하지 않더군. 물론, 아침에 일어나서는 운기조식을 꾸준히 했어. 하지만 직접 움직이고 부딪힘이 없는 내공증가는 반쪽자리야. 심하게 말하자면 고수를 만났을 시에 힘도 한번 못 써보고 죽을 팔자가 되는 거지. 그래서 녀석에게 필요한 것이 경공인데, 나는 제 사부의 특기를 썩히는 녀석에게 관대할 만큼 성격이 좋지 않아.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겨진 것을 택한 것뿐이니까 날 믿고 관심 끊어.”

그제야 깨닫고 아가씨를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소진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죽여주시옵소서! 실로 생각이 짧았나이다!”

그런 장면을 보는데 별 관심이 없었던지 사정화는 그만 머리를 찧으라고 명했다.

소진은 주춤거리며 일어났지만 차마 고개는 들지 못했는데, 이야기가 끝나 자리를 벗어나려던 사정화는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었는지 그런 그에게 물어보았다.

“남자 쪽이 내상을 입었어?”

뜻밖의 말씀에 소진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남궁연경이 나타났을 때에는 제법 눈썰미만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그의 상세를 알아낼 수 있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편히 마차를 타고 오며 내내 운기조식만 취했기 때문에 내상은 아직 건재해도 혈색이 좋아진 터라 어지간해서는 내상을 입었는지 아닌지를 구분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상태에서 그자의 상세를 가려내라고 한다면 나조차도 진맥을 하기 전에는 섣불리 단언할 수 없는 상태이거늘, 아가씨가 어찌 지금 처음보시고 그걸 알아내셨단 말인가! 설마, 의술에도 조예가 경지에 달하셨다는 것인가?’

그가 어찌 알겠는가.

동천이 이미 말해준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아니,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대충 예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당황해온 터라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 그렇습니다. 용케도 알아내셨습니다.”

사정화는 소진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굳이 자잘한 이야기까지 꺼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하고픈 말만 그대로 이어나갔다.

“치료에 도움을 주도록 해.”

소진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 헤어질 관계이고, 제 의술 실력을 드러내어 좋을 것이 없다고 보는데 아가씨께서는 그래도 생각을 굽히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너에게 고치라는 소리가 아냐. 다른 의원들은 어디에다 쓰려고 데려가는 중이지?”

소진은 바로 허리를 굽혔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면, 어느 선까지 치료에 도움을 주어야겠습니까?”

사정화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절반 정도만 고쳐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서 하게 놔둬.”

“존명!”

동천은 계속 달리라는 소리에 충격을 먹긴 했어도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작용하여 마차에 들어가 운기조식을 마쳤는데, 사정화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운기조식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길! 도대체 이 몸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생고생을 시키는 거야? 말 잘 듣지, 비위 잘 맞춰주지, 헌신적이지, 대화도 잘 나눠주지, 멋있지, 잘 생겼지… ….’

뒤로 갈수록 들어볼 필요가 없는 관계로 길게 나열하지는 않겠다.

‘아참, 그런데 뒤에 눈깔 똑바로 치켜 뜨고 마부석에 같이 앉아있는 저 새끼는 뭐지?’

한참 동안을 불만에 열을 내다가 우연히 보게 된 뒤쪽의 마차에서 장검을 애지중지 비스듬히 감싸안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무언가 음울한 기도가 느껴지는 사내였는데 동천은 가뜩이나 뛰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마음까지도 음울해질 것 같자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야! 너 뭐야?”

너무 뒤로 갔다간 달려오는 말에 밟혀 죽는 수가 있었으므로 동천은 적당한 거리를 맞춰 등뒤의 마차에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부의 옆에 앉아있던 사내는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혈각주님께서 아가씨의 안전을 위하여 잠시 저를 이 행렬에 붙여주셨습니다.”

동천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뭐? 언제?”

사내는 말했다.

“보름 전입니다.”

그러자 의아해진 동천은 의심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이 몸이 그 보름동안 오면서 너 같은 녀석을 본 적이 없는데!”

사내는 비교적 간단히 동천의 의심을 비집고 들어갔다.

“저는 멀리에서나마 소전주님을 보았습니다.”

“우이씨! 너만 보고 끝나면 다냐? 막말로 자객이 척살 대상을 몰래 지켜보았다가, 헥헥!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죽이고 그 상대가 ‘전혀 기척을 감지할 수 없었거늘!’ 이라고 놀라하면 난 언제나 너를 주시하고, 허억, 허억! 있었다고 말하면 그 상대가, 에고 나 죽겄네. 헥헥헥!”

가뜩이나 달리느라 체력소비가 큰데 거기에다 흥분까지 하여 멈추지 않고 계속 조잘대었으니 기운이 빠질 만도 하리라.

그런데 사내가 거기에다 기름을 부어버렸다.

“소전주님, 신법을 오랫동안 지속하시고자 한다면 흥분은 금물입니다.”

“우익! 됐어! 됐어, 이 자식아! 어쨌든 방금 전에 말했던……. 에에, 했던!”

경황 중에 소리부터 질러서 그런지, 말이 잠시 끊긴 동천은 중도에 끊어졌던 부분이 어디였는지 잊어먹고야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반대로 생각하면 사내는 경황 중도 아니었고 흥분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끊긴 부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객이 척살 대상을 몰래 지켜보았다가 그 대상을 죽인 후, 난 언제나 너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잠시 멈추셨습니다.”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아하? 그렇지 참? 바로……, 어쨌든! 그렇게 말하면 그 상대가, 후엑후엑! 아? 실로 대단하오! 존경하니 앞으로 계속 살수의 일에 전념해주시오! 헉헉, 그, 그렇게 말해주며 그냥 뒈질 것 같냐? 헉헉, 그럴 것 같냐고 임마!”

듣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인지는 희미하게 감을 잡았지만 전달방식이 유치해서인지 사내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숨이 차서 말하기도 힘든 상황일텐데 그것을 이겨내고 끝까지 이야기한 동천의 끈질김에 감탄은 해주었다.

“사 아가씨께서는 이미 저를 만나보시고 기왕에 동행을 하게 되었으니 주제넘게 나서지만 않는다면 문책하시지는 않겠다 말씀하시어 조용히 지내다보니 소전주님께서 미처 절 보시지 못하신 듯 합니다.”

그 정도면 바로 들통날 내용이어서 자객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성부터가 삐딱한 놈이었던 동천은 사내의 대답을 곡해해서 들었다.

‘저 씨부랄 놈이 이제 보니, 정화년의 후광을 등에 업어 이 몸을 비웃고 있는 것이로구나! 아아, 이 몸이 이제는 정화년도 모자라 저런 듣도 보지도 못한 놈에게까지 얕보이는 신세가 되어버리다니! 하늘이시여! 정녕 저를 버리시나이까? 원통합니다, 하늘이시여!’

동천이 하늘님을 찾지 않은지가 벌써 몇 년은 되는 관계로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놈이었다.

“소전주님, 신법을 전개하시는 몸이 무거워 보이십니다. 그것은 곧 정신이 흩어졌다는 반증이니 하체를 가벼이 하시고 상체의 흐름을 그것에 동조하십시오.”

사내는 잠시 이어진 동천의 침묵을 오해가 풀린 것이라고 착각하여 그의 움직임을 지적해주었지만 동천은 오해는 풀었어도 그 외에는 아직까지 부동심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닥쳐! 헉헉, 너, 너 따위에게 지적을 받을 정도로. 흐아, 흐아! 돼, 됐어! 말 안 해!”

어지간히도 힘든 모양이었다.

사내는 동천이 다시 속력을 내는 듯 하자 반발심에 잠깐 무리를 했음을 눈치채곤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가뜩이나 헐떡이는데 무리까지 했으니 곧 속도가 대폭적으로 줄어들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마부에게 미리 속력을 늦추라 명령했고 그것과 때맞춰 점점 멀어지던 동천의 모습이 종래에는 속력을 늦추기 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달라붙게 되었다.

“아직 늦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안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니 앞서의 흥분은 깨끗이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 그의 자존심이 죽지 않았던지 동천은 홱 돌아보며 소리쳤다.

“우익! 이 새꺄! 시, 시끄럽다고 했지!”

자신이 나서서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듯 하자 사내는 동천의 바램대로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그는 옆의 마부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당황한 마부는 머뭇거렸지만 사내의 무서운 눈초리를 보고는 당장에 무서운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소, 소전주님! 더 이상 속력을 늦추시면 말에 부딪혀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운을 차리실 때까지 만이라도 옆으로 피해주십시오. 그러다 정말 큰일납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동천도 벌써 옆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뒤 마차와의 일직선 선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한다면 사정화가 그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잘라 버리겠다고 위협을 가해온 터라, 그는 말발굽에 밟혀 죽으면 죽었지 절대 피하지는 않겠다고 내심 외쳤다.

‘흑흑, 안 피해! 안 피해, 시팔놈아! 너 같으면 15년 고이 길러온 머리카락 자른다는데 피할 수 있겄냐? 이 몸의 머리카락이 네놈들의 몇 십 년 기른 머리카락하고 같은 줄 알아? 정화수 떠놓고 백 날을 빌어봐 개새꺄! 이 몸과 같은 머릿결을 지닌 애새끼가 태어나나!’

그걸 어느 미친놈이 정화수까지 떠놓고 빌겠느냐 만은 동천에게 있어서 가장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머리카락이었던 것만큼 사정화로서는 그것을 담보로 위협을 가했던 일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으오오오! 우와와와왁!”

어쨌든 괴상한 기합소리를 질러댄 동천은 눈물 찍! 콧물 찍! 흘려대며 죽어라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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