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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3화


아침에 일어난 동천은 누가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났다. 아마 평소보다 반시진 일찍 일어난 것 같았다. 힘차게 기지개를 편 동천은 옆자리에서 누워있는 강시에게 눈길을 돌렸다. 혹시나.. 어제 일이 꿈인가 해서 본 것이었다.

“진짜였구나…”

꿈결에 만졌는지 풀어헤쳐져서 탐스럽게 드러난 강시의 가슴을 몇 번 찔러본 동천은 행여 누가 볼세라 가슴섶을 얼른 여며주었다. 그런 다음, 일어나 봐.. 다시 누워.. 등등… 여러 가지 명령을 시켜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나중에는 별 재미가 없어지자 그만두었다. 괜히 일찍 일어났다고 투덜대며 초조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방안을 서성이던 동천은 다른 사람들이 미리 준 선물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어디 보자.. 다른 인간들은 무슨 선물을 줬을까..?”

들뜬 기분으로 처음 상자를 집어본 동천은 서둘러서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편지와 함께 침구(鍼具)가 들어있었다. 침들은 하나하나가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에.. 소전주께서 앞으로 약전주님의 진전(進展)을 잇게 되었으니 그에 부끄럽지 않을 침구를 보내오. 이것의 이름은 금은만년옥침(金銀萬年玉鍼)이라 하오… 성능은 어쩌고저쩌고. 에이.. 이딴 거보다 차라리 먹을 게 더 좋은데… 할 수 없지. 그래도 준 거니까 받아야겠다.”

마지못해 받는다는 시늉을 한 동천은 다른 여러 가지를 꺼내 보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 어느 것에도 먹을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동천은 약간 휘어진 곡선미를 자랑하는 칼 한 자루를 뽑아들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따위 것들이 뭔 소용이 있다고 나한테 주는 거지? 난 먹을 게 더 좋은데.. 하여간 나이 든 인간들의 생각은 도저히 모르겠단 말야?”

들고 있던 칼로 허공을 향해 몇 번 휘둘러본 동천은 얼마 안 가서 짜증을 내며 바닥에다 던져버렸다. 혼자 화를 내고 있을 때, 뒤통수가 근질거림을 느낀 동천은 뒤를 돌아보았다.

“넌 그렇게 할 일이 없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게?”

소연 같았으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겠지만 강시는 오히려 웃음을 띠며 동천을 계속 쳐다보았다. 이에 흥미를 느낀 동천은 심심한데 잘됐다 싶어 강시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냐? 뚫어져라 쳐다보게?”

그러나 강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어? 말 안 해? 야, 말해봐!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내가 우습게 보이냐? 대답해 보라니까?”

강시의 묵묵부답(黙黙不答)에 화가 난 동천이 신경질을 내봤지만, 강시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계속 말을 시켜봤지만 강시가 대답을 안 하자 의아함을 느낀 동천은 그제서야 생각나는 게 있었다. 동천은 미소를 짓는 강시를 뒤로한 채 용독경을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강시.. 강시.. 옳지? 여기 있다.. 에.. 이 부분은 읽었고, 저 부분도 읽었고.. 찾았다. 강시의 특징(特徵). 강시는 기본적으로 언어 능력을 상실한다.. 역시, 내 머리는 똑똑해.. 히히! 생각한 대로잖아?”

자신은 머리를 칭찬한 동천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에.. 또한 강시의 지식(知識)은 거의 유아(幼兒)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면 어느 정도까지 배울 수 있지만 그것도 급수에 따라 학습 능력(學習能力)이 다르다. 혈혼강시는 최대로 3세 정도의 학습이 가능하고 초혼강시는 최대로 5세까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오래된 자료(資料)를 근거로 알아낸 불사 강시는 최대한으로 8세까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라……… 흐응.. 재미있는데? 처음에는 언어 구사를 못하지만 배우면 가능하다고?”

거기까지 읽은 동천은 책을 덮어놓고 강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계속, 강시라고 부르기가 좀 그러네?”

강시에게 말을 걸어보려던 동천은 계속 강시라고 부른다는 것이 어색하기에 이름을 하나 지어줄까? 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음.. 뭐가 좋을까? 너 내가 이제부터 이름을 나열해 볼 테니까 그게 좋으면 끄덕여 봐. 알았지?”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강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자, 그럼 말한다. 강옥봉.”

강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엉? 마음에 들어? 야. 하나만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 어떻하냐? 다른 것도 말해줄 테니까 잘 생각하고 끄덕여 봐. 음.. 강요홍.. 냉여상.. 단소소.. 단옥설.. 매약란.. 묘소소.. 부금진.. 서능하.. 소교홍.. 소진진.. 염교교.. 은소소.. 자운혜.. 천옥련.. 허난설.. 화설군.. 화운빈.. 헥헥.. 응? 야! 내가 말할 때마다 끄덕이면 어떡해?”

그러나 강시는 계속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에 열불이 난 동천은 강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이그… 이 멍충아!”

그래도 강시는 웃었다. 이건 완전히 벽 보고 말을 나누는 것 같기에 몇 번 쥐어박던 동천은 이내 포기하고야 말았다.

“음.. 안 되겠다. 강시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아야겠는데?”

강시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은 동천은 다시 용독경을 펼쳐들었다. 한참을 읽어본 동천은 어저께 자신이 읽다만 부분을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과연, 강시는 진화(進化)할 수 없는가..-중략(中略)-이에 관하여 본좌는 오랫동안 고심(苦心)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강시를 진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하면 새로운 차원의 강시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여기에 본좌의 30여년간 연구 결과를 써놓는다. 진화의 첫 번째 조건은 강시에게 주어진 학습 능력의 한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강시는 평생 동안 잠을 안 자는 것이 가능한 존재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방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기에 가장 강한 신빙성(信憑性)을 가진다. 두 번째 조건은 같은 맥락으로서 글자를 익힐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강시의 사고력을 확대시켜주는데 꼭, 필요한 조건이다. 세 번째 조건은 강시와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어서 강시가 말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내야 한다.

왜냐하면 강시는 정상인에서 강시가 되는 순간, 입안이 퇴화되어 대화 능력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네 번째 조건은 강시와의 접촉(接觸)이다. 꾸준한 신체 접촉은 강시와 주인과의 유대감(紐帶感)을 형성하는데 진보적인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사항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조건은 아무리 화가 나도 칭찬을 해줘야 한다. 감성이 풍부한 강시는 좋다는 느낌과 싫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칭찬을 해주면 해줄수록 좋아할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가 본좌가 그동안 연구해온 사항이다. 이 글이 후대의 제자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거야.. 원… 강시 진화도 꽤 골치 아프겠는데?”

쉽게 생각하고 읽어본 동천은 강시의 진화에 대하여 읽고 나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화를 시켜주려면 중노동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동천은 심심할 때마다 행하는 걸로 생각을 정리시켰다. 일단 그것에 관한 생각이 정리되자 다른 곳으로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소연이 어떻게 됐지?”

느닷없이 소연이 생각난 동천이 소연의 방으로 들어가 보니, 소연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가위에 짖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은 은은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도 참.. 안됐다. 오늘 같은 날에 아프다니…”

지만 신나는 날이고, 소연에게는 신나는 날이 아니었지만 그런 걸 따진다면 동천이 아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소연의 땀에 절은 이마를 손으로 훔쳐주던 동천은 소연의 이마가 생각 외로 뜨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이거, 의원을 불러와야 하는 거 아냐?”

의원을 부르려 밖으로 나온 동천은 잠깐 멈춰서고는 다시 소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의원을 부르고, 어떻냐.. 나으려면 오래 걸리냐.. 그런 일들을 거치기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너, 정말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직접 간호해 주는 건 아주 드물다구…”

물에 젖은 물수건을 꽉 짜서 소연의 이마에 올려놓은 동천은 일다경 동안 이마에 놓인 물수건을 몇 번 갈아준 뒤 밖으로 나왔다.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 동천은 두 팔을 높이 들고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응…. 아! 기분 좋다.. 쟤는 저러다가 좀 있으면 다 나을 거고.. 중노동을 해서 배가 고프니… 밥이나 먹어야겠다. 히힛!”

웃으며 하늘을 쳐다보던 동천은 서천(西天)에서 천천히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으악-! 안돼!! 이건, 말도 안돼!!”

동천의 목소리에 뭔 일인가.. 하고, 밖으로 나왔던 몇몇 하인들은 동천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끼고는 얼른, 방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걸었다간 어떠한 봉변(逢變)을 당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동천의 더러운 성격은 이미 약왕전에 널리 퍼진 지 오래였다.

“으으으…. 설마.. 하늘님이 나를 버린 건가?”

말아쥔 주먹을 부르르.. 떨던 동천은 평소와는 달리 이성을 금방 되찾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제 내가 소원을 빌 때, 잠시 뒷간에 가셔서 못 들었을 거야.. 좋게 생각하자. 쳇!”

동천의 예상대로 비가 쏟아져서인지, 보영이란 시녀가 찾아와서는 연회가 내일로 미뤄졌다고 알려왔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동천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알았다고 말했다. 동천의 악명(惡名)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던 보영은 아무런 해도 안 당하자 의아함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돌아갔다.


아아.. 내 바람이 이루어져서인가? 역시, 엊그저께는 하늘님이 뒷간에서 응가를 보고 있었나 보다. 랄라랄랄라… 오메.. 기분 좋은 거.. 소연은 내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저녁이 다 되서야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내 강시를 보더니 다시 기절해버렸다. 휴.. 덜떨어진 하녀를 둔 내가 불쌍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강시의 이름을 아직도 지어주지 못했잖아?

“야.. 강시야. 네가 지금은 대가리가 나빠서 내가 어떠한 이름을 불러줘도 고개를 끄덕이니까 내가 그냥, 이름을 지어줄게. 알았지?”

역시나 고개를 끄덕인다. 쟤를 가르칠 걸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천재인 내가 짊어져야 할 전생의 업인 것을… 음.. 업이고 지랄이고, 지금은 어떤 이름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겠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음.. 응? 킬킬킬…! 좋았어!! 그렇게 좋은 이름이 있었다니.. 역시, 나는 천재라니까?”

좋았어..!! 사정화(死精華). 고년의 이름을 막 부를 수가 없었는데, 이 기회를 통해서 마구마구 불러야겠다.. 히히! 이름의 순서만 바꿔서 지으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걸리면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지.

“좋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화정(華精)이야. 성은.. 음.. 그래. 너에게는 과분하게도 내 성을 주마. 이름하야.. 동화정(冬華精). 우히히히! 역시, 내 성이 들어가니까 거지 같던 이름이 빛나는구나!!”

강시가.. 아참? 화정이는 내가 웃자, 같이 웃어주었다. 그래.. 웃어라 계집애야. 네가 뭘 알겠냐? 이름은 해결됐고… 그 다음은 강.. 화정이만 보면 기절하는 소연이건을 해결하러 가야겠군.. 나는 아까 기절해서 잠들어있는 소연이를 찾아가서 흔들어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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