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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32화


“살릴 수 있겠어?”

심각한 표정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살펴보던 초철산은 조용한 아가씨의 물음에 대꾸했다.

“내상은 없고 외상뿐이어서 살릴 수만 있다면 문제는 아닙니다. 허나, 상처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할 정도로 많고 피를 너무 흘려서 악재가 겹친 상태입니다. 그나마 살아있는 자들이 고수들이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나머지는 희망이 없다고 보셔야 할 듯 싶습니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사경을 헤매는 자들을 바라본 사정화는 약왕전의 의원들을 대동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무공도 모르는 자들과 함께 왔더라면 그나마 이들조차 살릴 수 없었을 것이 뻔했기에 무거운 마음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응급조치가 끝나기를 기다린 그녀는 서둘러 살아 남은 자들을 산채로 이송시킨 뒤 무심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위를 수색해.”

“존명!”

초철산의 신속한 대답이 끝나자 3명으로 짝을 이룬 대원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반원으로 퍼져나갔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살펴보는 것에 동참한 그녀는 동천이 발견했던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둔덕 위의 목조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시기에 발견한 듯 되돌아오기 시작했지만 사정화가

‘계속 수색해.’

라고 말하자 움찔하더니 다시 신형을 돌렸다. 다만 초철산만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여쭈어 볼 따름이었다.

“저 위의 목조건물을 보신 겁니까?”

사정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갑자기 허리를 굽힌 초철산이 그녀에게 청을 올렸다.

“아가씨! 소신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단숨에 달려가 저곳을 점거해 보이겠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사정화는 말했다.

“동천이 잡혀있을 수도 있어. 서투른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명백한 거절이었으나 초철산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약소전주께서 위급한 상황에 놓여진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포위라도 해놓는 것이 그분의 안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틀린 말은 아니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바뀐 그녀는 초철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좋아. 하지만 상대를 정확히 모르는 만큼 확실하지 않은 도발은 피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초철산은 수하들을 이끌고 목조건물을 향해 날 듯이 달려갔다.

차분하게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사정화는 갑자기 뒤쪽에서 소란이 일자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멈춘 곳에서는 여섯 명의 사내들이 한 여인과 숨가쁜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정화는 차갑게 눈을 번뜩였다.

‘저들은…….’

여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녀가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다섯 명은 암흑마교 내에서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던 호위대 중 일부였고, 나머지 한 명은 이번에 혈각주의 명으로 그녀를 호위하게 된 수천희란 자였다.

상황은 중년여인의 실력이 대단하여 한치의 밀림도 없이 팽팽하게 싸우는 중이었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사정화는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로 다가가 그들에게 명했다.

“그만.”

나직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격을 가하던 여섯 명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중년여인을 경계하며 사정화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사정화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준 후 싸늘하게 말했다.

“언제부터지?”

그녀는 자신의 직속 호위대에게 뒤따르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의 명을 불복한 상대들에게 분노했다.

그것을 감지한 호위대는 안색을 굳혔지만 대답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그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아가씨께서 사천으로 떠나실 때부터입니다. 아가씨의 신변을 염려하신 주군께서 저희들이나마 은밀히 뒤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노려본 사정화는 자신의 문제를 대놓고 떠들어댈 생각이 없었는지 고개를 돌려 중년여인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누구지?”

중년여인은 대답했다.

“버릇이 없구나.”

“감히 아가씨께! 무례하다!”

호위대가 눈에 불을 켜고 살기를 뿌리자 사정화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중년여인을 똑바로 직시했다.

“내 말투에 신경 쓰지마. 나는 상대가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전까지는 나도 모르게 이러니까.”

그 말에 분노를 느낀 중년여인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사정화를 쏘아보았다.

“밖에서 잘못하면 부모가 욕을 먹는 법이라는 것도 모르느냐?”

꿈틀.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을 건드린 중년여인은 사정화의 신형이 순식간에 좁혀오는 것을 발견하곤 급히 피리를 들어 응수했다.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까앙!

피리와 사정화의 검이 부딪히자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사정화의 검이 약간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지체 없이 미끄러지며 중년여인의 손을 노렸다.

코웃음을 친 여인은 손목을 가볍게 돌리는 것으로 사정화의 검을 밀쳐내고는 피리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거칠 것 없는 찌르기에 인상을 찌푸린 사정화는 검을 잡고있던 오른 손을 떼고 팔목을 내치며 피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팔목이 시큰해졌다. 그와 비례하여 투지가 치솟아 올랐다.

중년여인은 하얗게 웃는 듯한 사정화의 표정에서 찌르르한 전율을 느꼈지만 그녀 역시도 묘한 흥분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록, 내공의 회복이 완전치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은신을 들켰다고는 하나, 애송이 계집애 정도는 상대할 여력이 충분했다.

더욱이 상대 계집애가 이곳에 침입한 자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자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석추양이 오거나 자신의 내공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인질로 붙잡아두면 충분히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헉? 진짜 아가씨도 오셨네?”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사정화가 뒤로 물러섰다. 다름 아닌 동천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동천의 안전을 확인한 그녀는 흥이 깨졌는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동천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미리부터 겁먹은 동천은 움츠러든 모습으로 대꾸해주었다.

“에에, 그게 그러니까요. 갑자기 깨달음이 와서 저도 모르게 달렸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여기여서 어리둥절하다가 쥐 떼를 만나서 다 퇴치했는데 저기 저 아줌마가 나타나서는 저한테 관심이 있는지 이것저것을 캐묻다가 잠시 기다리라고 했는데 제가 또 탐구심이 뛰어나다보니 저 아줌마의 집으로 가서 혼천부원들이 잡혀있는지 확인하러 들어간 사이에 아가씨가 오게 된 건데 아수전 1당주가 찾아와서 나와보니 본교의 식구들이 장렬하게 산화되어 어쩌구 저쩌구…….”

영약이나 비급이 없자 혼자서 길길이 날뛰고 있다가 초철산의 등장으로 나오게 된 동천은 산처럼 쌓인 동물들의 시체와 수십에 헤아리는 교도들의 죽음을 보고 이제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고의든 아니든 이게 다 자신으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정화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계속 중얼거린 것이었는데 별 소용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들어준 다음에 입을 열었다.

“동천, 네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니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구나. 일단 그 문제는 돌아가서 마저 하기로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켁! 돌아가면 또 죽도록 얻어맞겠구나. 저년 혹시 마음이 순수한 사람을 때리면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천이 돌아가면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틀리지 않으리라.

사정화는 동천이 두려움에 떨건 말건 중년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 번 묻겠어. 같은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니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누구지?”

재차 질문을 받게 된 중년여인은 동천의 등장으로 인해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애초에 제압할 걸…….”

하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을 벌었고 그것으로 기회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본녀는 이곳 향화곡의 주인이다.”

두루뭉실한 대답에 사정화는 주위의 시체를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이들을 죽인 이유는?”

“첫째는 허락 없는 계속적인 침입. 둘째는 사악한 마도인. 그것뿐이다.”

“3일 전부터 들어왔던 자들도 모두 죽었나?”

“그렇지 않다. 살인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내쫓았을 따름이다.”

앞뒤가 맞지 않자 사정화가 스산하게 노려보았다.

“그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어. 단 한 명도.”

중년여인은 눈 하나 깜빡 않고 사정화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럴 수밖에. 계속적으로 석추양이 손을 썼으니까.”

그 말이 결정타였는지 주위에서 무거운 신음들이 흘렀다. 유일하게 반응하지 않은 사람은 동천과 사정화였는데 동천은 원체 생각이 없어서

“그 새끼 못됐네.”

라고 중얼거렸고 사정화는 의외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역시 석추양이 관련되어 있었군. 무슨 관계지?”

중년여인은 상대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자신이 기력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기에 기분이 나빠도 참고 대답해주었다.

“관계라……. 대단한 것은 없다. 다만, 십 몇 년 전에 의부께서 그자를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향화곡 근처에서 머물고 있는 자일 뿐이다.”

사정화는 계속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보이질 않지?”

안 그래도 이제 곧 석추양 나타날 시간이었다. 그는 점심을 먹고 나서 한 번,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 또 한 번. 이렇게 하루에 두 번씩 꼭 향화곡 근처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년여인은 대놓고 가르쳐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짐짓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자가 오는 시간이 제각각인 것을 난들 어찌 알겠느냐.”

그때 동천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저기, 아가씨. 제가 나서는 것은 좀 그렇지만…….”

“그럼 나서지마.”

“아, 예에.”

동천은 속으로 이년 저년 욕하며 멋쩍게 물러섰다. 아울러 그따위로 자신을 무시하고 얼마나 잘 사나 두고보자고 생각했다.

사정화는 잠시동안 울컥하는 동천을 노려보다가 그가 계속되는 시선에 꼬리를 내리자 중년여인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어. 순순히 포박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자 중년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구나.”

그러나 그녀가 웃기던 말던 사정화의 일방적인 결단이 이루어지자 그녀와 손속을 겨루던 호위대와 수천희가 약간 넓혔던 포위망을 다시 좁혀 들어갔다.

중년여인은 이자들을 물리칠 정도의 내공은 충분히 모았으나 그 뒤의 공격에는 다소 벅찰 것만 같자 무언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름 아닌 그녀는 석추양을 떠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오던 자가 오늘따라 늦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보 같은 자 같으니라고!”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석추양은 혼천부와 마주친 3일 전부터 12시진 항시대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아도 막아도 스며드는 날파리들을 신경 쓰느니 차라리 상대의 중심부를 까부시는 편이 속 시원할 것 같아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러는 와중에 사정화의 일행과 길이 어긋나서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고 말이다. 아마도 고수들이 대거 빠진 산채의 상황은 석추양으로 인해서 말이 아니리라.

각설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석추양을 바보로 전락시킨 중년여인은 사정화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그녀의 곁에 빌붙어(?) 있는 동천을 스쳐지나가듯 바라보게 되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동천이라고 했지?”

동천은 중년여인이 난데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에? 아아, 그렇습니다.”

중년여인은 갑자기 느끼하게 폼을 잡는 동천의 모습에서 심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계획을 위해서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짐짓 여유 있는 척 가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그 이름이 맞구나. 특이한 이름이라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네 모친은 잘 계시느냐?”

쿠웅!

묵직한 무언가가 동천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그 충격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듯한 뜨거움과 어지러움이었다. 전신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하체는 촛농이 녹듯 흐믈거리며 그를 땅속으로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어지간해서는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던 동천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아로 성장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휘청거리는 상체를 바로잡기 위해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사정화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동천의 충격을 이해했음인지 사정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동천을 한 번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마침내 동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의 모친도 아니고 내, 내 모친이라고 했습니까, 지금?”

지극히 만족스러워진 중년여인은 어린것이 자신에게 당신이라고 말했음에도 전혀 불쾌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반응에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것만 같았다.

허나, 약간의 의문이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그 계집을 거론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놀라지? 혹시, 저 녀석……. 현재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계집과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닐까?”

찔러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남편을 앞세우려고 했던 중년여인은 애송이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그럴 필요조차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연히 모든 것을 다 알려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네 모친도 아닌, 본녀의 모친을 뭐 하러 네게 거론하겠느냐.”

심장이 마구 벌렁거려서 도무지 진정을 할 수 없었던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사정화의 어깨를 꽉 쥐었다.

“동천, 아프잖아.”

동천은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길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눈살을 찌푸린 사정화가 자신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천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흥분했던 자신이 상당히 침착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씨! 아아, 동천아! 너답지 않게 산골아줌마의 세치 혀에 휘둘려 추한 꼴을 보였구나!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에휴, 그건 그거고 고맙다 정화야. 어쨌거나 너 때문에 정신을 차렸으니까.’

그도 인간이었던지 쥐똥 만큼이긴 하지만 사정화에게 고마워했다. 그녀 덕분에 7할 이상의 정신을 회복한 동천은 먼저 사정화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았다.

“죄, 죄송했습니다, 아가씨.”

그제야 사정화가 싸늘함이 가신 목소리로 대꾸해주었다.

“됐어. 상관말고 궁금한 거나 계속 물어봐.”

“예, 예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중년여인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감히 수작을 부리는 것이오! 당신이 지금 내 어머님의 성함을 알고서나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것이오?”

중년여인은 짐짓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물론이다. 장소하(長炤霞)가 아니더냐.”

순간 동천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 한 게 어쩐지 아련하고 애잔하면서도 따스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울러 그 느낌은 작은 파문들을 형성하며 전신으로 골고루 퍼져나갔다.

그와 반대로 믿을 수 없다는 반발심이 튀어나와 개 같은 거짓말을 말라며 미친놈처럼 마구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던 욕들은 그에 의해서 꿀꺽 삼켜져버렸다.

‘지, 진정하자 동천아. 저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저 여자가 요괴일 수도 있으니 홀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헉? 그, 그러고 보니, 혹시 이 모든 현상이 요괴에 의한 장난이 아닐까? 눈을 떠보니 해골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거나 그러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던 동천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낸 뒤 엉뚱한 사정화에게 말을 걸었다.

“아, 아가씨. 죄송하지만 제가 아가씨의 팔을 좀 꼬집어봐도 될까요?”

“무슨 이유로.”

“예에, 이게 혹시 꿈인가 해서요.”

“그런데 왜 내 팔을 꼬집어.”

“제가 절 꼬집으면 아프잖아요.”

“…….”

“…….”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을 에이는 듯한 살기가 사정화의 눈에서 폭사되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동천은 다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하하! 혀, 현실이네요. 현실. 실은 아가씨의 반응을 살펴보려고 그랬던 것일 뿐이지, 제가 진짜로 아가씨의 팔을 꼬집어보려고 했을라구요.”

동천은 실없는 변명을 하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한심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천애고아였던 자신에게 어머니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바로 눈앞에 놓여져 있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뭔가 하나 빠진 듯한 인간처럼 핵심에서 벗어나고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천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리잡고 있는 공포라는 역린 때문이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다가온 존재로 인한 공포. 그것이 아닐 때에 확산 될 허탈감. 평온하게 지내왔던 일상생활의 균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확고한 신념 등등…….

애초에 천애고아라는 신념 덕분에 끈질기게 살아올 수 있었던 동천은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뿌리가 흔들리려고 하자 본능적으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솔직히 아까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부모형제의 행방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기겁을 했던 것뿐이지, 내 어머니란 사람이 지금 눈앞에 나타나도 이제는 별로 감흥이 오지 않을 것만 같으니까. 으음! 차라리 그냥 듣지 말까? 이제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존재를 알아서 무얼 하겠어?’

마음은 그런 쪽으로 흘러갔지만 나오는 대답은 그렇지가 않았다.

“맞…습니다. 어머니와는……, 어떠한 사이십니까?”

솔직히 감으로 맞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자신의 예지력을 굳게 믿었던 동천은 나중에 어머니라는 분을 만나도 아무 느낌이 없으면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해도 거짓말로 치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인연이 닿아 알고 있는 사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런 곳에서 하기엔 곤란하구나.”

중년여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을 계속 압박하면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동천은 살짝 입술을 비튼 후 사정화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명령이 없이는 진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동천의 시선을 애초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사정화는 깊고 투명해진 눈동자로 중년여인을 마주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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