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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33화


“호위대는 물러서.”

“존명!”

“그리고 당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그녀가 결단을 내리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알다시피 약소전주는 고아로 알려져 있었고, 상황을 계속 지켜본 그들로서는 감히 부당하다며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위기에서 벗어난 중년여인은 사정화가 착하게도 자신의 집에서 이야기를 마저 나누자고 제의하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목조건물 쪽으로 신형을 틀었다.

“따라오너라.”

침착한 사정화는 중년여인의 뒤를 표정 없이 뒤따랐다. 그 뒤를 동천과 호위대 순으로 움직였고 마지막 순서인 초철산과 그의 수하들은 단계별로 사람을 나누어 주위를 경계하며 목조건물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여유가 생겼는지 중년여인은 차까지 대접할 정도로 표정을 풀었지만 그것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각기 마주보며 탁자에 앉은 사정화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끌 생각은 하지마. 여기 동천의 모친과는 어떠한 관계지?”

이제 중년여인은 사정화의 말투를 탓할 생각이 없어진 듯 유일하게 차를 마신 후 태연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한 배를 탔지만 참으로 편치 않은 관계지. 그렇다고 죽일 듯한 사이는 아니고…….”

말끝을 흐린 그녀는

‘죽어주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하지.’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녀는 사정화의 뒤에서 나란히 도열해있는 호위대들을 바라보다가 눈동자를 움직여 동천에게로 향했다.

“네 어미가 나에 대해서 말을 않더냐?”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아주머니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데 누구인 줄 알고 들었느냐 아니냐를 물어보는 겁니까?”

중년여인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낮게 웃었다.

“호호, 그렇구나. 본녀의 이름은 자인설(滋認雪)이다. 이제 들어보았는지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여인은 동천에게서 상당한 반응이 튀어나오리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무반응을 보였다. 당연한 것이 자기 모친의 이름도 모르고 자라왔는데, 생판 남인 그녀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어봤겠는가.

“글쎄요……. 처음 듣는데요.”

“뭐라?”

자인설은 분노했다. 감히 첩년 주제에 본 부인인 자신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 따위는 염두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웃기게도 이것은 오해였는데 그녀는 동천이 장소하와 함께 지내는 줄 착각했고, 동천은 그녀가 모친의 행방을 알고 있는 줄 착각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기, 제가 아주머니의 이름을 모르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동천을 바라 본 자인설은 생각해보니 의혹이 일어났다. 그녀의 자식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엉뚱한 아이를 붙잡고 농간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편의 아이가 아니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검사를 해보면 알 터…….’

생각을 마친 자인설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미소지었다.

“아니다. 별 일도 아닌데 흥분했구나. 그보다 아까 네 손을 진맥해봤으면 싶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느냐?”

떨떠름해진 동천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잘 되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허면, 허락해주겠느냐? 이는 네 신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으로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마주본 상태에서 그저 손만 내밀어주면 된다.”

그 정도라면 아무리 그녀라지만 동천을 인질로 잡는다거나 위해를 끼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동천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자신의 옆에는 사정화와 뒤쪽의 든든한 호위대가 있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그리고 동천의 흔들림은 툭 내뱉듯 입을 연 사정화의 말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당신. 허튼 수작이라면 죽어.”

내심 어이가 없어진 자인설은 나직이 한광을 뿌렸으나 순식간에 거두고는 슬그머니 웃었다.

“훗! 본녀는 암수(暗手) 같은 치졸한 짓은 할 줄 모르니 걱정은 접거라.”

순식간에 방안의 공기가 냉랭해졌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지켜본 동천은 사정화의 단호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 정화야 너 참 멋지구나! 쩝, 화정이나 소연이 같았으면 이 몸이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며 참으로 예뻐해 줬을 텐데…….’

사정화에게 대놓고 말했다간 방금 전 그녀가 말했던 죽어가 동천에게 해당되는 말이 되었을 테지만 혼자 생각한 것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내심 쩝쩝거리며 아쉬움을 표현한 동천은 뒤늦게 자인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서둘러 허락해주었다.

“그럼 믿고 진맥을 맡기겠습니다.”

자인설은 흡족한 듯 미소지었다.

“잘 생각했다.”

조심스레 내미는 동천의 손목을 잡아챈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더니 천천히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곤 팔을 거쳐서 왼쪽 다리까지 내려갔다가 부드럽게 되돌아온 진기를 음미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역시…….’

라는 말을 중얼거린 뒤 이 기회에 동천을 한 번 찔러 보았다.

“치우도법은 몇 성까지 익혔느냐.”

“……!”

눈을 부릅뜬 동천은 모공이 오그라들 정도로 온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찰나간 눈빛이 이지러진 그는 마치 얼음 굴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인설은 순식간에 사람이 바뀐 것처럼 보이는 동천의 모습에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사람이란 비밀스러운 부분을 건드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더군다나 자인설은 동천과는 다른 이유로 분노를 느끼는지라 더욱 동천의 변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으득! 치우도법은 그냥 던져준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그 당시에 그이가 그 계집의 행방을 모르겠다며 발뺌을 하여 믿었거늘, 그렇다면 그 동안 나를 속이고 은밀히 만나며 저놈을 가르쳤다는 말인가? 아니, 내가 이곳에서 지냈으니 은밀이고 자시고 할 필요조차 없었겠지!’

으스러져라 말아 쥔 그녀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달라진 동천 때문에 그녀를 그다지 주시하지 않았다. 또한, 보았다고 해도 그녀 역시 동천 때문에 놀람을 참고 있는 줄 착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는 사이에 호흡을 가다듬게 된 자인설은 당연한 것이지만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어미와 알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치우도법은 오직 동천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동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치우도법을 익힌 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노사와 장노삼. 그리고 문정과 도연. 마지막으로 민묘희와 중소구뿐이었다. 이들이 소문을 내고 다니지 않는 한 상대가 자신이 치우도법을 익혔는지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역천의 존재가 빠진 것이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내막은 이렇다. 일전에 제갈세가에서 치우도법이 그 위용을 드러냈을 때 역마대가 견식하고는 역천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지만 때마침 산재한 일들로 바빴던 역천은 대단한 도법이어서 경악을 했다는 역마대의 보고에

‘그 대단하다는 기준이 뭔지를 알아야 나도 놀랄 거 아녀…….’

라고 중얼거린 뒤, 그저 제자만 무사히 지낸다면 다행인 거라며 가볍게 넘어간 적이 있었다.

그 정도의 문제는 제자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와 수련을 받게 된 동천은 새롭게 배운 무공들의 존재를 알려주면 그것까지도 수련항목에 들어갈 까봐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고, 그새 잊고 있었던 역천 또한 자신의 눈앞에서 제자가 시전해 보인 적이 없었기에 까맣게 잊고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사정화의 앞에서 수공을 펼쳤던 것은 확실히 동천이 미숙했다고 볼 수가 있었는데, 만일에 그녀가 수공에 관심을 보여 역천에게 거론이라도 했더라면 동천으로서는 참으로 곤욕스러웠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 부인의 말인즉, 내 어머니가 치우도법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다. 만일 저분이 내 어머니를 최소한 몇 년에 한 번씩은 만나는 사이라면, 나를 잃어버린 사실을 저 부인이 모르고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우도법의 존재와 내가 익히고 있는 것까지 알아냈다는 것은 거짓말이되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라는 말! 그렇다면 저 부인은 내 어머니가 나를 낳기 전까지 만났을 뿐이고 그 이후로는 왕래가 없었다는 뜻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동천은 차츰 긴장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강제적으로 튀어나왔던 역의 성격이 사라져버렸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동천은 뒤늦게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는 자신 스스로 성격을 꺼낼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계속되는 놀람에 한순간 의지가 흐트러지자 그 사이에 성격이 뒤바뀌었던 것이었다. 이는 안 그래도 역의 성격을 꺼리는 동천에게 있어서 크나큰 충격이고 말이다.

‘이럴 수가! 아무리 이 몸이 심기가 흐려졌다지만 어떻게 역심무극결의 운기도 없이 다른 성격이 나올 수가 있었던 거지? 으으, 이거 이러다가 잠잘 때 의식이 흐려지면 나도 모르게 또 다른 성격이 튀어나오는 거 아냐?’

그게 또 어째 믿음이 가자 동천은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 젠장, 안 그래도 몇 달 전부터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찌뿌둥해서 이상했는데 이거 어째 기분이 더럽네? 어휴! 어디서 도연새끼 방긋 웃는 개 같은 경우가 생겨 가지고는…….’

그동안 동천의 몸이 찌뿌둥했던 것은 낙후된 시설에서 잠을 청하다 보니 잠자리가 불편하여 그랬던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동천은 지금의 이 횡설수설이 향후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천. 동천!”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던 동천은 어디에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에에, 예? 저 부르셨어요?”

사정화는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 기선을 잘 잡아놓고는 다시 예전의 동천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실망한 그녀는 내심 칭찬해준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한동안 말이 없어서 불렀어.”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제야 자신을 실책을 깨닫고 사정화에게 사과한 동천은 화풀이를 하듯 자인설을 다그쳤다.

“방금 제 어머니를 알고 계셔서 아셨다고 했는데 거짓말 마십시오! 분명 아주머니는 제가 태어난 이후에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이 틀렸다면 이의를 제기해 보시지요!”

제법 분위기를 잡고 쏘아 부쳤지만 자인설은 싸늘해진 얼굴로 반응했다.

“흥, 웃기는군!”

별안간 코웃음을 친 그녀는 그동안 거의 사라졌다고 여겼던 질투심이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믿었던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었던 만큼 그녀의 질투심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더욱이 동천이 침묵하는 사이에 첩년과 남편이 다정하게 웃고 지내는 모습들을 떠올린 것이 결정타였다. 그녀는 일단 이성이 마비되자 논리적으로 풀어나갈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분노를 어찌한단 말인가! 믿었던……, 호호! 믿었던 남편이란 작자의 배덕함을 나보고 어찌 감당하란 소리냔 말이다!’

도저히 이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시급히 화풀이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만일에 그렇지 못한다면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화풀이의 대상이 그녀의 눈앞에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이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자인설은 마치 어린 날의 남편과 흡사하게 생긴 듯한 동천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거짓말이 들통나니까 해보겠다는 겁니까?”

이젠 아예 대놓고 살기까지 뿜어낸 자인설은 호위대가 눈에 불을 켜고 허튼수작하지 말라는 듯 위협 아닌 위협을 가했음에도 그 살기를 줄이지 않았다.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고 느낀 사정화는 미리 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동천은 갑자기 자신의 감지력에 잡히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잉? 쥐새끼들? 하나, 둘, 넷, 아홉, 열 셋……. 근데 저 숫자로 뭘 어쩌자고?’

내심 아까 전처럼 쥐 떼들이 쏟아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그였는데 고작 13마리에서 15마리 정도뿐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감지력이 발동 된 동시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듯해서 예감이 안 좋긴 했지만 막상 보고 나니 심각해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와 반대로 뒤늦게 쥐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뒤로 물러선 사정화는 있어야할 호위대가 뒤쪽에 없자 흠칫했다. 사방이 어두웠으며 오로지 눈앞의 자인설만이 그 존재를 밝히고 있었다.

“진법?”

“발칙한 것! 알아도 이미 늦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인설은 피리에서 파생되는 수십 줄기의 파도를 일으키며 사정화의 요혈을 찍어갔다. 다급해진 사정화는 질풍같이 검을 휘둘러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처음 손속을 겨루었을 때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맹렬함이자 안색이 핼쑥해졌다.

까까까까깡!

손목이 부러질 듯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피리의 줄기들을 하나 둘 쳐낼수록 검을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았다. 당연히 막는 것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하는 자인설도 느꼈는지 득의의 미소를 짓고 흩어졌던 피리의 그림자들을 불러들여 하나로 합일했다. 그것은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와 사정화의 가슴을 짓눌렀다.

퍼엉! 쨍강!

“아악!”

마냥 당할 수 없었던 사정화는 검을 회수해 기세 좋게 자인설의 공세를 흩날렸지만 2배 이상이나 차이나는 내공의 격차는 아무래도 극복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효과는 보았는지 자인설의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피를 토하며 나자빠진 사정화와 반 토막이 난 그녀의 애검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무슨 무공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의 공격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구나. 충분히 비웃으며 제압할 줄 알았는데 그러한 무공이 인세에 있었다니. 만일 이 계집의 내공이 조금만 강했더라면 양패구상이나 다름이 없었으리라.”

모골이 송연해진 그녀는 허리를 숙여 기절한 사정화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호위대 쪽을 힐끔 바라보자 그들은 쥐들로 이루어진 수형만변진(獸形萬變陣)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손을 쓰고 싶었지만 그녀는 잔챙이들에게 심력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한 동천 쪽을 바라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때를 맞춘 듯 진에서 벗어나 생문(生門)으로 들어섰다.

당연히도 그 둘은 눈이 마주쳤다.

“여기로 가는 게 맞는……, 헉? 아가씨! 이봐요,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창백하게 질려있는 아가씨의 얼굴과 피를 토한 입가의 흔적. 그리고 태연히 그녀를 안고 있는 자인설의 모습.

진 속에 갇혔다가 빠져 나온 동천이었지만 모든 정황이 바로바로 이해가 되어 소리쳤다. 그러나 정작 소리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인설이었다.

“네, 네가 어찌 그리도 쉽게 수형만변진에서 벗어난 것이냐!”

어떻게 빠져 나왔느냐고 물어본다면 그저 감(感)으로 빠져 나왔다고 이야기하리라. 앞서 말했듯 동천은 진법의 사문(死門)이 뭐고 휴문(休門)이 뭐고 생문이 뭔지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움직여 빠져 나왔던 것이었다.

“에? 별 것 아니던데요?”

만수존자 양극일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었던 수형만변진을 애들 놀이터 정도로 치부하듯이 이야기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진 자인설은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구나! 그이가 가르쳐준 것이로구나! 으으, 분명히 간이며 쓸개며 다 내놓았을 것이 틀림없어!”

‘그이? 그이라면 이 아줌마 남편? 그 아저씨가 언제 이 몸을 봤다고 이런 허접한 진법 따위를 가르쳐 줘?’

동천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소설을 쓰고 자빠졌던 자인설은 오해가 점점 깊어져만 가자 동천이 무엇을 해도 남편과 연결을 지으려고 들었다. 당연히 동천의 입장에서는 헛소리를 해대는 자인설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지만 그것에 비례해서 그녀의 수중에 안겨있는 사정화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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