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45화
나에게 쓰는 편지.
“으하암! 쩝!”
실컷 자고 일어난 동천은 임시 막사를 나와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상쾌한 숲 속의 향기는 그의 등장을 반겨주는 듯 시원하게 그의 전신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때문인지 더욱 기분이 좋은 동천이었다.
“으그그그극! 아하! 좋은 새벽이네? 조금 둘러보다가 운기조식을 취하러 다시 돌아가 볼까나?”
헌데, 가볍게 몸을 풀며 걸어가던 동천은 십여 발자국을 채 걷기도 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추어 섰다.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엥? 좋은 새벽?”
분명히 자신은 낮잠을 자고 일어났던 것인데, 역의 성격이 깨어난 뒤 오밤중까지 영향을 받다가 현재의 성격으로 되돌아왔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만도 하리라.
“뭐지? 이거 꿈인가?”
생생한 느낌으로 보건대 꿈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근처 막사로 들어가 자고있는 사람의 다리를 있는 힘껏 꼬집어보았다.
“으앗, 따거! 뭐, 뭡니까?”
동천은 다리를 비비며 물어오는 사내에게 근엄하게 물었다.
“아픈가?”
사내는 잠결에 당한 일이라 짜증이 솟구쳤지만 굳은 얼굴의 약소전주가 물어보자 어쩐지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예에, 아픕니다만…….”
동천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그렇군. 다시 자게.”
다 깨워놓고 뭘 자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그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사내는 힘이 없는 게 죄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말 잘 듣는 사내를 뒤로하고 막사를 빠져 나온 동천은 골치가 아파 옴을 느꼈다.
“설마 그때 잔 뒤에 지금까지 내리 숙면을 취했던 건가?”
못 잘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저녁을 거른 채 그냥 잤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다시피 먹는 것에 인생을 걸 수도 있었던 동천이었기에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속설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그때 문득 자신의 가슴 쪽이 묵직하다는 것을 느꼈다.
“뭐지?”
품속에 들어있는 것을 꺼내자 손바닥 크기의 돌덩이가 나왔다. 그것을 본 동천은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헉? 혹시 몽유병?”
인정하긴 싫었지만 자고 난 뒤의 기억이 한참 동안이나 없고, 품속에서 돌까지 나오자 의심이 가는 부분은 몽유병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질 것만 같았던 사건은 돌덩이에 가로로 묶여진 얇은 천 조각을 발견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여러 겹으로 접어진 천을 펴들자 곧 깨알같은 글씨들이 동천의 망막을 파고들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네가 이것을 본다면 당황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밝히는 것이지만 나는 네 안의 또 다른 너이다. 역심무극결의 나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음, 이렇게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그 동안 네가 저녁에 잠을 자면 나는 줄곧 깨어났다. 그리곤 조용히 수련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제 내 존재를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나는 그들에게 약간의 거짓을 섞어서 자기최면으로 잠재된 성격을 끌어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후 사정화에게만 전음으로서 좀더 많은 정보를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을 아래에 적는다.
-중략- 어제 벌어진 일들을 비교적 쉽게 적어주었으니 네가 잘 대처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왜 너에게 존재를 드러냈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종의 공정한 비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에게 글을 남겼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비록 지금의 내 성격이 마음에 든다지만 너도 나고 나도 너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만, 네가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음을 바꿀 용의가 있다. 너는 너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는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리고 늘 깨어날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해본다. 왜 본래의 나는 있는 재능을 썩혀두는 것일까. 왜 본래의 나는 매사에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 왜 본래의 나는…….
거기에서 이야기가 끊어졌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동천의 내부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유발되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안색이 굳어진 동천은 독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치이이이.
손안의 천은 스멀스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씹쌔끼! 감히 이 몸에게 도전장을 보내? 그리고 뭐? 공정한 비무? 근 6개월이 넘도록 밤마다 혼자 깨어나서 별 짓을 다 해놓고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공정해? 참나, 이 새낀 내 성격이지만 살인을 하고도 공정했다고 떠들어댈 놈일세?”
그 부분이라면 지금의 동천도 마찬가지였다. 즉, 남을 욕할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으으,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쩌지? 이러다가 고귀한 이 몸이 먹히는 거 아냐? 젠장! 이놈의 역심무극결, 그냥 확 소멸시켜 버릴까?”
희망사항일 따름이었다. 1갑자 반의 내공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또 그것을 차후에 합친다면 단숨에 중간급 문파의 문주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동천도 무림인인 이상 맨 정신으로는 소멸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군!”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겨우 차선책을 마련한 동천은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동천은 이후로 말을 아꼈다. 잠을 자면 또 다른 자신이 깨어나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또한 그 때문에 충격의 여파가 남아서 할 말을 잊은 것인지, 그는 아침을 먹는 내내 말이 없었고 마차에 올라타서도 눈만 부릅뜬 채 팔짱을 끼고만 있었다.
“…….”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같이 동승한 사람들이었다.
‘저 새끼가 폼 잡는 것에 맛을 들렸나, 어제 같은 자연스러운 기도도 흘러나오지 않는데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저러는 거지?’
그랬다. 아무리 그가 폼을 잡는다 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도는 절대 흉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동천은 역의 성격을 흉내내는 중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혐오하고 싫어하는 성격을 뭐가 좋다고 그가 흉내내겠는가. 지금의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안자! 절대 안자! 시팔, 누가 나 재우려고만 해봐. 아주 죽여버릴 테니까!’
고작 생각한 것이 잠을 안 자서 역의 성격을 깨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니……. 이 얼마나 무식하고 비생산적인 방법이던가!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다. 또 다른 나를 확실하게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분명히 있긴 있어! 이 몸은 그걸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잠을 자지 않으리라!’
동천의 눈이 오랜만에 뜨거운 의지로 불타올랐다. 비록 생각하는 짓이 좀 그렇긴 했지만 곰곰이 따져보자 현재로서는 그 이상의 방법도 없을 듯이 보였다.
툭툭!
“으응, 뭐야 씨이.”
“약소전주님. 곧 목적지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 전에 식사를 하셔야지요.”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나던 동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이런 젠장! 잤잖아?”
그렇게 안 자려고 노력했건만 반나절도 못 견디고 낮잠을 자버린 셈이자 동천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렇게 끈기가 부족했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를 깨운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건넸다.
“그리고 저기……, 깨어나시면 품속을 한번 뒤져보게 하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생각이 미친 동천은 서둘러 옷 속을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종이로 된 서찰이 들어가 있었다.
-사람은 어차피 자게 되어 있는 것. 애쓸 필요는 없다.
단순한 한 줄의 내용이었지만 동천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흐미! 이런 쳐죽일 놈을 봤나! 오냐, 너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내 어떻게 해서든 꼭 해결책을 마련해 줄 테다! 에잇, 에잇!”
씩씩거리며 서찰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동천은 아직도 안 내리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넌 뭐냐?”
“예? 뭐, 뭐냐뇨?”
“넌 뭔데 이 몸이 기밀문서를 보시는데 옆에서 빤히 지켜보냐고. 가만! 너 이 새끼, 혹시 첩자 아냐?”
순간 사내의 입이 쩍 벌어졌다. 행여나 다른 질문이라도 할까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데 때아닌 날벼락이 내려쳤던 것이다.
“커헉? 무, 무슨 그런 엄한 말씀을 하십니까요? 전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요!”
사내는 결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동천은 속이 타 들어가는 사내에게 가는 눈을 치떴다.
“아니야. 당황하는 것을 보니까 무언가 있어.”
‘씨, 씨팔 넘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다 당황하게 되어 있어!’
그래도 윗분이라고 예의를 차려줬을 뿐인데 자신이 첩자로 몰리게 되자 사내는 정말로 억울했다. 암흑마교에서 떠도는 이야기 중에 오래 살고 싶으면 약소전주와 엮이지 말라고 하더니, 정말 실감나게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내는 끌면 끌수록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일단 엎드려 머리부터 조아리고 보았다.
“어이구, 약소전주님! 주위사람들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정말 저는 하늘을 우러러 본교에 누를 끼칠 만한 짓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요!”
“그건 니 사정이고. 이 몸이 누누이 말씀하시는 거지만…….”
그때 천운이 따랐던지 다른 사나이가 다가와 동천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약소전주님, 아가씨께서 음식이 차려졌으니 식기 전에 오시라고 하십니다.”
“응? 음, 그래. 알겠다. 앞장서거라.”
“예, 약소전주님.”
사정화란 존재가 끼여들자 첩자로 내몰렸던 사내는 바로 동천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엎드린 사내를 지나쳐 마차에서 내린 그는 언제 심기가 불편했냐는 듯 사정화에게 다가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아침에는 그럭저럭 무게를 잡았는데 본색은 어쩔 수 없었던지 다시 활달해진 것이다.
“헤헤, 제가 좀 늦었지요?”
이미 먹는 중이었던 사정화는 잠깐 일별(一瞥) 한 후 음식에 시선을 고정하며 대꾸했다.
“됐어. 이제 곧 다 왔으니까 서둘러 먹어. 그리고 주위를 게을리 하지말고. 본교의 세력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예, 아가씨.”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언제나 그렇듯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몸은 앉아서도 천리를 내다보니까 너나 경계해. 하여간 애가 게을러 빠져 가지고 아랫것들에게 일을 전가시키는 데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다니까? 가만, 아랫것들?’
거기까지 생각한 동천은 자신이 정화를 씹어놓고도 ‘아랫것들’ 이라고 말한 대목이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아랫것들에 자신도 포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심 ‘일부 아랫것들’ 로 정정하고 있는데 청목신장 정원이 말을 걸어왔다.
“켈켈! 듣자하니 낮잠을 잤다던데 오늘은 자기최면을 안 걸었는가?”
웬만해서는 내면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동천이었건만 켈켈거리는 웃음소리에는 불가항력이었다. 바로 정신을 차린 동천은 서둘러 대답해주었다.
“아? 자기최면이 계속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할 때가 더 많죠.”
“그런가? 어쩐지 성품이 가벼워 보인다 했네. 켈켈켈!”
나름대로 시원한 비유에 기분이 좋아진 정원이 크게 웃었다. 어제 당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멀었지만 일단 시작은 좋았던 것이다. 역의 성격이 정원과의 마찰까지 적어놓지 않았기에 그런 속사정을 알 턱이 없었던 동천은 아까 아침에도 그렇고 오늘따라 유난히 걸고넘어지는 정원을 곱게 바라볼래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나, 미치겠네? 할멈, 늙으니까 주위에서 안 놀아 줘? 왜 이 몸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데? 아 진짜! 경로우대만 아니었어도 벌써 다리 몽둥이 한 짝은 뽀사버렸을 텐데!’
대꾸하기도 귀찮아진 동천은 대충 얼버무리고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정원은 그런 동천의 옆에서 성질 돋구는 말들을 간간이 내뱉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사정화가 다 눈치를 주어서 그나마 동천의 귀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그들은 채 1시진도 못 되어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동천은 아니다) 승봉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