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5화
“아직도 멀었냐?”
이 늙은아.. 그건 내 대사야. 그리고.. 여기에 한두 번 와보냐? 알면서 왜 물어? 응? 으악.. 저 늙은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곰방대를 치켜든다… 방금 전의 생각이 얼굴에 다 나타났나? 비굴하지만…
“헤헤.. 다 왔어요. 아주 금방인데요 뭘…”
휴.. 다행히 늙은이가 곰방대를 내렸다. 흑흑… 내 인생이 불쌍하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어저께 나한테 찾아왔던 보영이라는 시녀가 보였다.
“봐요. 다 왔잖아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그럼…”
“어디 가냐?”
꿀꺽… 왜 또 부르는 거지?
“어디 가냐니요? 당연히 준비가 잘 되고 있나 알아보러 가죠.”
“이놈아. 너도 방금 전에 왔잖아. 그런데 네 사부도 안 보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말이냐?”
귀신 같은 늙은이.. 내가 방금 전에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하? 그렇구나.. 어서 가요.”
진짜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나이 동천. 오늘이 고추 떨어지는 날이구나.. 크윽.. 이 굴욕적인 기분을 간직하면서 오늘을 굴욕의 날이라고 방에 가서 적어 둬야겠다. 방안에 들어서자 사부님이 반겨주었다.
“오.. 잘 왔다. 어떻게 내 제자하고 만나서 왔구나?”
“그래.. 네 제자 녀석이 친절하게도 날 안내해 주더군.”
오잉? 이 늙은이가 왜 나를 좋게 얘기해주는 거지? 혹시, 무슨 꿍수가 있는 거 아냐?
“그래. 제자야.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부르려고 했다.”
“어? 왜요?”
“하하.. 다름이 아니라 이제부터 오늘 하룻동안 까불지 말고, 얌전하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라고 말해주려고 했었단다.”
윽! 까분다고? 끄응.. 그래.. 사부님의 말인데 참자. 그런데… 왜 귀옹이 늙은이는 재수 없게 옆에서 웃는 거지? 정말 신경 쓰이네?
“흐흐흐.. 그건 걱정 마라. 내가 연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옆에서 착실히 지도를 해주마.”
사부님이 웃는다…
“정말이냐? 헤헤! 그래주면야 나는 좋겠다만…”
늙은이도 웃는다…
“하하! 걱정 붙들어 매라. 동천아… 너도 좋지?”
내 가슴은 찢어진다…
“하.. 하…. 하.”
나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사부님은 나의 웃음이 허락의 웃음인 줄 알고, 혈귀옹 할아범에게 오늘 잘 부탁한다고 손을 잡아 흔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오늘 내 방에 가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옆에 덧붙여서 써야 할 것 같다…
점심이 돼서야 사람들이 다 참석하고 넓찍한 공간에서 몇몇 여자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축하합니다..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등등 웃으면서 말해줬지만 나는 겉으로만 웃을 뿐, 속으로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흑흑흑… 이 곰방대 늙은이.. 진짜로 내 곁에서 안 떠나네? 내가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쓰고 있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소전주님.. 그간 안녕 하셨습니까?”
낯이 많이 익은데…?
“누구,,?”
그자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남들이 그렇게 웃었다면 나를 비웃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눈앞의 인간은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흐음..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며칠 전에 소교주님과 만나셨을 때, 뒤에 서있었던 철소(鐵召)라고 합니다.”
이제야 알겠다…
“어.. 그렇지? 그래, 나도 반가워.”
“감사합니다..”
예의도 바르고.. 음.. 좋다. 나도 저런 하인이 있으면 좋겠는데? 처음에는 여자 하인이 좋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예 질려버렸다. 그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사부님에게 선물 대신에 남자 하인을 새로 얻어달라고 하면 되겠구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철소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뭐지? 할 말이 있어?”
철소는 나의 말에 품속에서 조그마한 옥피리를 꺼내주었다. 연두색이 빛을 발하는 그 피리는 주위가 순간적으로 환해질 정도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내가 놀라운 마음에 말을 하려는 순간, 귀옹이 할아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쳇..
“그건 뭔가?”
“소교주님께서 중요한 일이 계셔서 못 오시고 대신, 이것을 소전주님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준다는 걸 마다할 리가 없다. 미쳤어? 준다는 걸 마다하게?
“그래? 소교주님께 고맙다고 말해줘.”
“예.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철소가 가고, 내가 받은 것을 갑자기 빼앗은 귀옹이 할아범은 요리조리 만져보고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나에게 다시 주었다. 휴.. 난 또, 저거 지가 꿀꺽! 하는 줄 알았네…
“하하하! 우리 미천한 제자놈의 연회에 오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점심이 지나자 사부님이 나를 이끌고 나오셔서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전부 다 내 쪽으로 쏠리니 짜릿짜릿한 게 기분이 좋았다.
내가 보건대 앞줄에 앉은 인간들은 이곳에서 신분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앞줄에 내가 아는 거물급의 인물들이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앉아있는 정도에 따라서 말하는 폼들도 다 달랐다. 제일 앞줄은…
“하하. 별말씀을…”
이라고 말했고, 중간 줄은…
“당연히 와야 하는 거죠.”
라고 말했고, 뒷줄에 앉아있던 인간들은…
“초대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라고 고개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나하고 뭔 상관이람? 나는 그저, 배운 대로 예의를 차리면서 웃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연회는 대체적으로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였다.
저녁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하나는 엄청난 분량의 선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부님께서 며칠 내로 남자 하인을 보내주겠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지긋지긋한 혈귀옹 할아범이 드디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게 제일 기뻤다. 한가지 좀 찜찜한 건 수련이 나한테 천자문을 선물했는데, 내가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쳤다는 것이다. 내가 바보야? 천자문도 모르게? 그 계집애는 울면서 돌아갔다.
음..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 동천은 사부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와서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역천이 웬 아이와 같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동천은 확신했다. 그 아이는 동천의 새로운 하인일 거라고..
“오셨어요?”
동천의 말에 역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아이에게 눈치를 보냈다. 그 아이는 눈짓을 받자 동천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도연(挑淵)이라 합니다.”
도연의 행동에 동천은 더욱더 확신했다.
“그래, 그래.. 사부님 얘가 그 하인이에요?”
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그렇다. 이 정도면 되겠지?”
동천은 기분이 좋아서 소리 높여 대답했다.
“예!!”
제자의 활기찬 대답에 같이 웃어주던 역천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순간적으로 안색을 굳혔다.
“좋다. 시간이 예정보다 늦춰지긴 했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수련을 하러 가야 한다. 준비됐느냐?”
동천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예? 예에…”
“그래? 그렇다면.. 어서 가자.”
역천이 앞서 걸어가고 동천이 뒤따라가자, 도연은 뒤에서 끝까지 남았다가 마지막으로 뒤쫓아갔다.
“근데, 어디로 가요?”
“별로 안 멀다. 네 집 뒷마당이다.”
역천이 동천을 데리고 간 곳은 동천의 뒷마당이었다. 집 모퉁이를 돌면 바로 나오는데 세로로 오장 정도이고, 가로로 근 십오 장 정도가 되는 비교적 큰 뒷마당이었다. 역천은 뒷마당 초입에서 오른쪽 구석에 있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기준으로 멈춰 섰다.
“에.. 여기가 오늘부터 기초 체력을 단련(鍛鍊)할 단련장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과도 같은 곳에서 체력 단련이라니… 동천은 여기서 죽어라고 뛰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흐흐흐.. 잠시만 기다려라. 곧있으면 연장 도구가 올 테니까..”
이에 깜짝 놀란 동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봤다.
“예? 연장 도구요? 무슨 연장 도구요?”
“아. 글쎄, 기다려 보라니까..”
역천의 말대로 조금 후에 두 사람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