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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51화


아마도 삶의 본능이 유달리 강했던 강진구가 아니었다면 도주의 시기를 놓친 그녀는 지금쯤 금면마제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인질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여하튼, 설명은 길었지만 찰나의 순간에 그 모든 생각들을 정리한 강진구는 이내 모용상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용세가의 수하 넷에 외부의 무림인 한 명이라…….’

오련이 외부의 무림인들과 공조체제를 확고히 하고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거점 내부로 아무나 들여보내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이 그렇게 했다가는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바글거리게 되는지라 통제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작전의 시행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자들의 기준은 첫째가 정파 계열이었고 둘째가 명망이 높아야 하며 셋째가 적어도 1갑자의 내공을 소유한 무림인이어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뒤따라오는 무림인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전력에는 꽤나 보탬이 된다는 뜻이리라.

“강 표두는 본 공자의 말을 알아들었는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강진구는 알아들었다는 듯 모용상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의 의견에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산채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우리가 다라는 보장이 없고, 또 빠져나간 사람들 중에 반드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만 간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모용 공자님의 말씀대로라면 여기에서 한 두 사람이 더 빠져나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되면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 적들에게 쫓기게 될 시에 상당히 위험해질 것이 분명하니 재고하여주십시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자 모용현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미흡했다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별거 아닌 표두 놈이 의외로 논리 정연하게 반박하자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가리에 똥만 찬 도련님들이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다행이 적어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음! 듣고 보니 그렇군. 허면 그쪽은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대답 대신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부스럭!

“헉? 누, 누구냐?”

강진구는 갑자기 앞쪽에서 튀어나오는 사람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검을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비단 강진구뿐만이 아니라 무기를 쥔 일행들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늦었어도 피바다가 될 뻔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동천은 일단 급해서 튀어나오긴 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하나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씨! 아는 척해? 아님 말어? 으으, 왜 진구 아저씨는 표사 주제에 이런 곳까지 와서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아참! 표두로 승진했다고 했었나? 어쨌든 내가 정말 저 아저씨만 아니었어도 꾹 참고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애도의 묵념이나 해주려고 했는데 이거 사람 미치겠네? 그리고 제갈연 쟤도 그래. 집에서 난초나 기르고 있지 아녀자가 어디에서 겁도 없이 이런 곳에 와 가지고는…….’

바로 그때 동천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약소전주님!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황한 살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가운데 허겁지겁 기척을 숨기며 다가온 섬살대주 을목평이 꾸짖듯이 물어왔다.

그러자 동천은 대뜸 눈썹을 꿈틀거렸다.

『짓? 자네 지금 이 몸에게 짓이라고 했나?』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그 상황에서도 챙길 것은 다 챙기는 동천이었다.

『되었네. 상황이 급하니 자네는 살수들을 물리게. 금면마제님께는 이 몸이 차후에 사정을 말씀드리겠다고 전하고.』

『예에? 약소전주님! 그게 무슨!』

동천은 을목평이 놀라서 소리치건 말건 자신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는 강진구에게 급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쪽으로 더 들어가면 매복이 있으니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흠칫 놀란 강진구와 일행들은 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동천을 바라보았고 그때 누군가 그에게 되물었다.

“너는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모용현상이었다. 그는 여차하면 검법을 쏟아낼 듯한 기세였는데 하인 시절에 그를 본 적이 있었던 동천은 그가 이 무리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판단했는지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지금 그런 거 따지실 시간이 없습니다! 신분은 확실하니까, 여유를 되찾은 뒤에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하자니까요?”

“그럴 순 없다! 네 정체부터 밝혀라! 또 이곳에 너 같은 어린애가 있을 수 있는 이유도!”

모용현상이 답답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의 대처가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적들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소년을 어찌 쉽게 믿고 따를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상황은 동천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인 것이었다.

‘짜증나네. 아니, 이 몸처럼 순진하게 생긴 분이 또 어디에 있다고 끝까지 의심을 털어 내지 못하는 거야? 가만! 저 새끼 혹시 의처증(疑妻症) 있는 거 아냐?’

거기에서 의처증이 왜 나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동천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왜 말을 않느냐! 정말 수상하구나!”

이렇게 나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동천은 전음으로 소리쳤다.

『섬살대주! 그냥 공격해! 단, 저 새끼를 집중적으로!』

『알겠습니다.』

스슥, 취리리릿! 파악!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 중이었던 10여명의 살수들이 수리검을 내던지며 일순간에 튀어나왔다. 덕분에 거리가 4장여 정도 되었음에도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용현상은 바쁘게 뒤로 물러서며 수리검들을 쳐냈다.

“이, 이런! 역시 속임수였구나!”

“아이고, 그러게 내가 도망치자니까! 이제 난 모르니까 살고 싶으면 도망쳐요!”

동천은 그가 뭐라고 하던 간에 시치미 뚝 떼고 옆으로 돌아서 줄행랑을 쳤다. 이렇게 되자 사람의 심리가 묘한 것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머지 사람들은 동시에 동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만 살수들에게 둘러쌓인 모용현상과 그의 수하들만이 뒤로 빠지는 것이 여의치 않을 따름이었다.

“자, 잠깐만요! 모용 공자를 도와줘야 해요!”

뒤늦게 마법(?)에서 풀린 제갈연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친 꼴이 되자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것은 강진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현실을 무시한 제갈연의 의협심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이 철부지 아가씨가 자기 죽는 것은 생각 않고 사지에 뛰어들 생각부터 하고 있구나!’

하지만 강진구의 본심 또한 도와주러 가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의 가치관에서 보자면 정말 압도적인 차이가 아닌 다음에야 죽기 살기로 동료를 구출해내야 하는 것이 인정이었고 그것이 사람의 도리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강진구의 이런 결심은 채 빛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수그러들었다. 분명히 물샐틈없이 에워쌌던 살수들이었는데 모용상현을 위시한 그의 수하들이 살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자신들 쪽으로 도망쳐왔기 때문이었다.

“쫓아라! 반드시 척살 해야한다!”

을목평은 분하다는 듯이 소리치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쫓아! 쫓으라고! 쫓으라니까? ……쫓거나 말거나.”

어느 정도까지만 뒤쫓는 척을 하면서 천천히 속력을 늦추기 시작한 살수들은 마침내 쫓는 시늉을 포기하고 하나 둘씩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의상 제일 뒤쳐졌던 모용세가의 무사를 한 명을 잡아서 모가지를 꺾어버린 을목평은 부단주에게 따로 끝까지 쫓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정말 일이 꼬이는 자신을 느꼈다.

‘크윽, 저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이것 참 난감하군! 그래도 본교에서 영악하기로 소문난 소악마였으니 마냥 실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은 제자리로 돌아가서 본분에 충실하는 수밖에!’

힘없는 게 죄라고, 그는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으며 또 그렇게 믿고 싶을 따름이었다.

“쩝…….”

을목평은 내심 입맛이 쓴 것을 느꼈다.

엉뚱하게 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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