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57화
서장(序章).
메마른 대지를 딛고 서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해본다.
그러다 문득 나는 웃는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제…….
돌이킬 수는 없음이리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다.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아악!”
“사, 사람 살! 커헉?”
금면마제(金面魔帝) 상관이약(上官利若)은 굳은 안색으로 전방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전투를 바라보았다. 약소전주의 발자취를 따라서 온 곳이 이곳이었다. 그러나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약소전주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난감하군.’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수하 중 한 명이 적도(賊徒)를 끌고 와 그의 앞으로 떠다밀었다. 피 칠을 하고 끌려오다시피 한 사내는 금면마제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자 두려운 눈빛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아는 것은 죄다 불겠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하가 제법 수월한 놈을 데려온 듯 싶었다.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쓸모가 없는 놈이었지만 그가 알게 뭔가.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오늘 이곳에 잡혀온 소년이 있을 것이다.”
사내의 기억에 소년은 없고(동천은 제 발로 걸어들어 왔다.) 청년이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았다.
“아! 예, 있습니다. 저기 끝 쪽으로 들어가 보시면 쉽사리 찾아낼 수 없는 작은 통로가 나오는데 그곳에 감금해놓은 상태입니다. 예예.”
간이라도 빼어 줄 듯한 사내의 태도는 금면마제의 표정을 절로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내심 역겨워진 그는 대꾸도 없이 사내의 턱을 걷어차 올렸다.
퍼걱, 소리와 함께 이가 옥수수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간 사내는 그대로 절명했다. 무심한 눈길로 잠깐 죽인 사내를 내려다보던 금면마제는 명령을 내렸다.
“옆에서 들었다면 가서 찾아오너라.”
“존명!”
수하 둘이 서둘러 움직였고 그들은 잠시 후 여섯 명의 사내들을 끌고 왔다. 헌데, 그들 중에 동천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여 금면마제는 낮게 깔린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어째서 약소전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냐.”
딱히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다녀왔던 수하들의 안색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만일 어두운 동굴이 아니었다면 확연하게 드러났으리라.
“소, 송구하오나 이들이 전부였습니다.”
“뭐라고?”
기어코 안면을 실룩거리는 금면마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낸 약소전주를 어떻게 대할까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약소전주는 없고 별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만 데려왔으니 분노할 만도 했던 것이다.
“이, 이익!”
치솟는 분노에 감방에서 꺼내왔다는 것들을 쳐죽이고자 손을 치켜든 금면마제는 머리를 식힐 필요성을 느꼈던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트렸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기에 이놈들의 문제는 차후에 결정짓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대신에 그는 직접 감방으로 찾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꺼져있던 횃불은 이미 켜져 있었고 어슴푸레한 불빛 사이로 비추는 철창들 너머에는 차가운 빈 공간만이 가득 차 있을 따름이었다.
콰작!
철창 하나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철창을 휜 주인공은 당연히 금면마제였고 그는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한쪽 어깨를 파르르 떨더니 이내 되돌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제갈연이 갇혀 있던 철창 안의 동굴 벽면이 살짝 움직였다. 동천과 제갈연은 은형포단 안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흐미! 걸린 줄 알고 내심 뜨끔했네.’
내심 가슴을 쓸어 내린 동천은 제갈연을 바라보며 형식적인 안부를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제갈연은 개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예, 예에. 그, 그보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죠?”
원래는 ‘언제까지 이런 자세로 있어야 하죠?’ 였지만 그녀는 괜히 동천까지 어색해 할까봐 차마 그런 질문은 하지 못했다.
은형포단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동천이 그녀를 안고 바닥에 앉았기 때문에 제갈연으로서는 외간남자와의 밀착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심경을 반영했던 것일까? 동천은 그제야 제갈연의 부끄러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니 심정을 이 몸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안고 있는 나도 고역이니까 심성 고운 니가 이해해라. 니 상처에 내공을 쏟아 부으랴 바깥에 신경 쓰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정작 이 몸은 별 감흥이 없다구.’
전혀 감흥이 없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상처가 심각해서 감히 다른 마음을 먹고 있을 시간이 없었으며 동시에 탈출에 관해서도 머리를 굴려야 했는지라 남녀간의 즐거움을 생각할래야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언제 상대가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고 제가 또 제갈 소저를 치료하자면 이 자세가 가장 무난하기에 피곤하실 지라도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피곤하다니요. 아, 아니에요. 저는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요.”
동천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상대의 부동심(?)을 확인한 제갈연은 내심 안도하며 한 손을 내저어주었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의 상처 위에 올려진 동천의 손이 부끄러웠지만 상대가 전혀 이상한 마음을 먹고 있지 않는데 자신이 유난을 떨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편안하게 치료에 몸을 맡겼다. 한편으로는 무언가 서운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잡혀간 모용 공자님과 나머지 분들은 어떻게 되실 지…….”
걱정스러움이 한껏 묻어난 제갈연의 중얼거림에 동천 또한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모용현상이 아니라 강진구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진구 아저씨는 든든한 배경도 없어서 데리고 다니기 귀찮아지면 바로 제거할 텐데 어쩐다지? 그렇다고 이 몸이 나서자니 얘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으악! 짜증나!’
제갈연을 어디 다른 곳에 숨겨 놓고 나선다고 해도 동천이 잠시라도 없으면 그녀는 죽은목숨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신분을 드러내자니 구출해 준 보람도 없이 그녀까지 인질이 되는 것이니 동천의 똥고집 상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었다.
그래도 꼴에 고민은 되었던지 제갈연을 안고 있던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고, 공자님. 아파요.”
퍼득 정신이 든 동천은 짜증이 나서 손에 힘을 줬다고 하기에는 뭐한지라 급히 상대가 듣기 좋게 둘러댔다.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된 것 소저만이라도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제갈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가슴이 떨려서 차마 입술을 떼지도 못했다. 그랬다간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 연하는 취미가 없는데……. 몰라∼!’
깨어졌던 난초소녀의 첫사랑은 다시금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 놈만 아혈을 풀어라.”
금면마제의 심기를 모를 리 없었던 수하는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 짐짝처럼 한곳에 뭉쳐놓은 자들 중 제일 귀티가 나는 인물을 골라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상대가 바로 입을 열었다.
“큭, 당신들은 누구이시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나는 모용세가의 3남 모용상현이외다!”
금면마제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모용상현이라고? 그놈은 잘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쯧쯧, 오죽 부실했으면 흑마궁(黑魔宮)의 졸개들에게 잡혔을까. 어쨌거나 좋다. 네놈들을 피신시켜준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그 아이라면……, 동철이라는 그 소년 말이오?”
“동철? 뭐… 그렇다고 쳐두지. 맞을 게다. 어디에 있느냐.”
모용상현은 동천이 이름을 속였던 장면을 기억했기에 금면마제의 행동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금면마제는 이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약소전주인지라 어쩌면 가명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눈치 빠르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모용상현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제압 당했을 때 상대방이 고의적으로 의식을 잃게 하여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깨어났을 때 철창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 그 외에는 무지한 상태였다.
자신이 납치한 자들이 흑마궁의 소속이었다는 것과 이들은 또 새로 난입한 다른 적들이라는 것도 방금 전에야 눈치로 알아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었고 되려 제갈연의 행방까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거센 발길질로 돌아왔다.
퍽!
“그딴 계집이 어디에 있는 지 본좌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크으! 저, 정말 모르오?”
짜증이 치솟아 오른 금면마제는 모용상현의 얼굴을 걷어차 기절시킨 뒤 애꿎은 바닥만 쾅쾅 내리쳤다.
“도대체 그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냔 말이다!”
약소전주를 그놈이라고 막되게 부르는 것은 상당한 잘못이었지만 누구 하나 부당함을 드러내며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감히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고, 또한 교도들 사이에서 신용 받지 못하는 인간이 동천이었는지라 되려 통쾌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게 모든 인과(因果)의 법칙은 뿌린 대로 걷는다는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