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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62화


“이럴 수가! 마, 말도 안돼요!”

그녀가 예상했던 3일의 거리를 하루 반나절만에 주파한 동천의 활약 덕분에 그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혹 등골이 서늘해지면 예지력으로 믿고 엉뚱한 방향으로 틀었다가 다시 복귀하는 방법을 택해서 그런지 위험천만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도착하고 나서야 벌어졌다. 완만한 협곡을 지나 곡내로 들어가자 놀랍게도 주둔지가 파괴된 상태였던 것이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혈전은 일어난 것 같았는데 간간이 흥건한 핏물은 보여도 사람의 시체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치웠다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누군가조차 보이질 않았으니 기괴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도착한 시간이 대낮이어서 그런지 소름은 끼칠지언정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흑흑, 어떻게 해요. 이곳에 계셨던 분들이 전부, 전부…….”

‘전부 뒈진 것 같다고? 일리는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걸?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질 않거든.’

적들이 죽이고 죽인 자들을 전부 수거해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련이었다면 기습을 당해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곡내(谷內)에 위치해있다. 침입이 가능한 곳은 입구로 통하는 길 하나 뿐이다. 이럴 땐 기습을 당해도 전력이 한곳으로 모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난전(亂戰)이 일어난다.

필시 양쪽 다 사상자가 엄청났을 텐데, 그런 적들이 오련의 사망자들과 죽거나 다친 동료들까지 책임지고 날랐다는 가정을 했을 때 상당한 시간과 인적자원이 추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굳이 그런 짓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냐. 신비한 척하는 무리들이 무언가의 이유로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게끔 시간을 벌 목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어. 하지만 무법지대로 변한 대파산맥에서 죽고 죽이는 게 뭐 대수라고 숨기려고 했을까? 되려, 이런 곳에서 힘으로 누르면 오련의 실력을 폄하하여 끽소리도 못하게 만들 수가 있을 텐데? 혹시… 적들은 이번에 기습할 전력 외에는 더 충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흐음, 그거 신빙성 좀 있네?’

평상시의 무림이라면 아무리 마도라 할지라도 함부로 적대세력을 칠 수는 없다. 위기감을 느낀 주변의 정파세력들이 소위 정의구현이라는 명목 하에 다굴을 시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 대파산맥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그 제재가 상당히 완화된다. 어차피 무림은 힘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이상과 사상이 다르면 충돌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었다.

즉, 이곳에서만큼은 이기는 자가 명분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천의 경우도 오련에게 당했던 것을 만회하려고 출동했다가 이러한 상황으로까지 흘러왔던 것이었고 말이다.

“연 소저, 진정하십시오. 이곳에 살아 계신 분들과 시신이 없는 이유는 아마도 가까스로 적들의 침입을 막긴 했지만 남은 인원으로는 도저히 이곳의 방비가 불가능하다 여기고 죽은 동료들을 모아 세평능선인가 하는 곳으로 옮겼기에 그런 것일 겁니다.”

“흑! 하지만 적들의 시신도 없는 것은 왜죠?”

“에? 에에, 그건 뭐…….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니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겠죠 뭐. 하하하!”

동천이 얼렁뚱땅 넘어가기는 했지만 제갈연 자신도 해결책이 없다고 인정했기에 따지듯이 물어본 것이었다. 자신의 말투가 지나쳐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 그녀는 잠시만 더 흐느끼기로 양해를 구했고, 이어 반각 정도 후에 울음을 그쳤을 때 의외로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가요!”

“예? 어, 어딜요?”

“세평능선이요!”

그녀의 변신에 놀란 동천은 원래 여기까지 바래다 준 후 되돌아가야 했지만 명문무가의 여식으로 뒤바뀐 그녀의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러니까 설라무네……, 그러죠 뭐. 하하, 하……. 업어드려요?”

그녀 자신의 입으로 가자고 해놓고 당당히 서 있어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이게 혹시 진짜 성격인 거 아냐?’

찰나간 그녀와의 혼인 후에 매맞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하니 매까지 맞겠는가 만은, 이런 그녀의 변신 아닌 변신은 위기가 가중되자 본능적으로 제갈세가의 핏줄이 작용한 것이리라.

“동 공자님, 서둘러 주세요!”

“아, 예에.”

냉큼 업힌 그녀가 다급한 어조로 부탁했다. 동천은 대답을 하면서도

‘이게 아닌데……’

하고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신법을 전개하는 자신의 두 다리를 저주했는데, 혼란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몰라도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듯한 느낌이 살짝 전해져왔다.

달리다 말고 고개를 홱 돌린 동천은 느낌이 왔던 곳을 지그시 바라보았지만 왜 그러냐는 제갈연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해준 뒤 다시 신형을 움직였다. 그가 순식간에 장내를 벗어나 사라지자 잠시 후 진영지 안의 제일 안쪽이 일렁이더니 공간을 격하고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진법 안에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허허, 감이 좋은 아이로군. 자네는 저 아이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백삼에 부드러움을 머금은 듯한 신선(神仙) 풍의 노인이 섭선을 살살 부치며 같이 걸어나온 중년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마치 칼을 벼려놓은 듯한 차가운 기세의 중년인은 대답해주었다.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글쎄요. 오련의 중요인사들의 가족관계는 전부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저로서도 기억에 없는 아이입니다.”

적어도 오련의 인물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자 노인은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다. 순간 중년인은 노인의 몸에서 은은하고도 따스한 기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흐음, 4년 전이었나? 멀리에서 바라봤을 때만 해도 젖살이 채 빠져있지 않은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자라나서 제 짝을 찾아내다니. 역시, 세월이 빠르긴 빠른 모양이로군.”

중년인은 말했다.

“그 둘이 친분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그 정도 사이까지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성급한 결론은 아니냐는 뜻이었다. 노인은 뜻 모를 웃음을 동반한 채 중년인을 바라봤다.

“이런이런, 역시 자네는 나이만 찼지 천상 노총각이로구먼. 어디를 봐서 그 둘이 친분만 있어 보이던가?”

“그럴 리가요. 그럼, 속하가 잘못 보았다는 말씀입니까?”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는 중년인의 얼굴 때문인지 껄껄 웃고 난 노인은 그만두자고 말했다. 눈앞의 상대는 다 좋았는데, 자신이 보고 생각했던 것이외에 것은 아무리 다른 사람이 지적해주어도 옹고집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마음이 넓은 노인이 먼저 논쟁을 파(破)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런 꽉 막힌 성격임에도 화경에 도달한 고수가 되었다는 것이 노인이 생각하는 3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고 말이다.

“그런데……. 속하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기도가 바뀐 중년인은 비장한 각오가 서린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노인이 대답했다.

“허락하네.”

주군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먹을 꽉 말아 쥔 중년인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막으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일수도 있었으나 진작에 상대의 심중을 꿰차고 있었던 노인은 다시 한번 이 답답한 친구를 납득시켜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모른 척 해준 뒤 질문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인데 역시나 그 문제를 거론하자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를 질책하는 것인가? 내 자식 같은 녀석들이 고작 혈사교 수준의 놈들에게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노인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더할 수 없는 슬픔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느낀 중년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죽을 죄를 지은 듯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 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감히! 죽여주시옵소서!”

본래의 기운을 회복한 노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중년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본련은 이번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네. 그저 기본적인 방어를 고수한 채 지키고만 있다가 천마동의 소재지가 발견되면 한번쯤 찾아 들어가 보는 정도?”

그때 중년인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얼굴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무언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 있자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리라. 저 짓도 열정이라면 열정이라고 봐줘야 하는지 노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이기에 이내 날려버렸다.

“허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예! 속하가 생각하기에는 본련이 이번 일을 절대로 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본련의 모든 이목을 사천에 집중시키고 근 4할에 가까운 인력을 투입시켰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4할이라……. 허허허!”

재미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중년인은 그게 왜 웃을 만한 이야기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것은 그때그때 물어봐야만 속병을 앓지 않는 법! 그런 신념 하나로 이제껏 버텨왔던 중년인이었기에 그는 즉각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왜냐하면 주군의 대답이 한발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 4할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2할이네. 허허, 4할은 맞아. 맞긴 맞는데 숫자만 4할일 뿐 하급 무사들이 대다수여서 전력 면에서는 2할이라는 말일세.”

“그, 그렇긴 하나! 본련은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과 협력하여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놀라운 발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른 문파들과는 달리 본련의 인명피해도 덜 수 있었고 말입니다!”

중년인의 마음이 다소 흔들렸는지 변명하듯 말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노인은 그의 어깨에 올려놨던 손을 떼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섭선을 쓰다듬으며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본련은 말일세. 예전의 그 열정이 부족하다네. 선대가 이루어 놓은 피땀 어린 결과를 다음 세대가 만족하고 그만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지. 현 정파의 대세를 보게. 우후죽순 찬란하게 피어나고 지는 문파들 중에 최고의 정점에 놓여있는 문파로는 바로 본련과 무림맹을 중심으로 한 구파일방이네. 50여 년 전에 과연 어느 누가 무림맹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고 꿈을 꾸어봤겠는가? 그것을 가능케 만들었던 것이 바로 노부를 비롯한 아직도 일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정정한 금원세가(金院世家)의 금무(金無)를 위시하여 전대 가주들이었다네.”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처음 듣는 대목이 드러나자 중년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금원세가의 전대 가주님께서는 말 그대로 장남이신 금강연(金姜淵)님께 자리를 내어주시고 물러나신 분이신 데, 일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계시다니요?”

“허허, 자네도 참 우직하구먼. 그럼 자네는 우리의 일에 필요한 자금이 어디에서 흘러나오고 있다고 보는가?”

“그거야 금연장(金連莊)의 금적산(金寂山)님께서 힘들게 대어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로 인해 본 오련영(五蓮影) 또한 사명감을 더욱 고취시키며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탁!

노인이 섭선을 폈다 접으며 왼손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갑작스런 소리에 중년인이 움찔했으나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노인은 씨익 웃고는 말했다.

“이보게, 장환(長喚). 우리가 지금까지 음지에서 사용한 돈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는가? 물경 황금 20만냥일세. 이만한 금액이라면 한 성(省)의 경제권 정도는 손쉽게 전복시키고도 남을 만한 위력을 나타내지. 헌데 자네는 적산 그 아이가 그 정도의 능력이 있으리라고 보는가? 자네는 더 큰손이 그 아이의 뒤에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겐가?”

패도역검(覇刀逆劍) 장환은 그제야 깨닫는 것이 있었던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헉? 그렇다면 본영(本影)의 뒤를 금연장주님을 통하여 그분께서 봐주셨던 것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하지만 길게 나눠야할 사안이 아닌 고로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하지! 그런데 어디까지……. 아? 열정이 부족하다는 대목에서 끊겼던가? 음, 그래. 세대가 교체되었네. 그리고 그 시기가 아주 절묘했지. 자네는 아는가? 그때가 바로 오련의 성세가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였네. 더 팽창될 것도, 더 수축될 것도 없었던 아주 안정된 시기였지. 그것은 당대의 가주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고 있었네. 하지만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 되려 독이 되었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지. 차라리 몰랐다면 진취적인 성향이라도 드러났을 터인데, 이제는 안주하고 굳힐 때라고 여기자 소극적인 방향으로 내부정책이 고착되었던 것이네. 허허, 그리고? 그리고 그들의 열정은 수그러들었네. 그나마 당대의 황룡가주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다지만……, 안타까운 일이야. 실로 안타까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노인이었다. 그는 나왔던 곳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두어 곳의 기물을 살짝 건드려 제거했다. 순간 풍경이 변했고, 이내 거대한 시체처리장에 온 듯한 구역질나는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진법이 풀리자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시체들을 모아 놓았던 곳이 확연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문득 침울해진 얼굴로 변해버린 노인은 두 눈을 부릅뜬 상태에서 죽어있는 한 사내에게 다가가 천천히 눈을 감겨주었다. 노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들을 보게. 이들은 여기에서 죽고자 열심히 무술을 갈고 닦은 것이 아니라네.”

그러자 잊고 있었던 자신의 불만을 상기시킨 장환은 언제 수그러들었냐는 듯 피를 토하듯이 노인에게 외쳐댔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본련의 미래이자! 한 식구나! 한 형제나! 다름없는 이들을 우리가 살려주었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본 노인은 이제 표정이 없어진 얼굴로 뒷짐을 지었다.

“이런 말이 있네. 기회란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것이라고. 하지만 수뇌부가 나태해져 있다면 그 기회는 엉뚱한 자에게 넘어갈 수도 있지.”

장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급하게 생각말고 찬찬히 앞을 내다보게. 오련은 말일세. 이들의 죽음으로써 깨달아야만 하네. 자신들이 적극적이었다면 이곳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지금, 혹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말일세.”

“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을 아이들이었습니다! 꼭 이런 방법이 아닐지라도 충분히 수뇌부들의 각오를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허어, 자네는 잊었는가? 우리 오련영의 제일 원칙을?”

찔끔한 장환은 금세 풀이 죽은 목소리로 읊었다.

“그, 그것은 보이지 않는 수호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인은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본영은 오련의 보이지 않는 수호의 존재가 되어야 하네. 아비가 아들의 자립에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밑까지 닦아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들 스스로가 실패와 좌절과 위기를 겪어봐야만 성장할 수가 있다는 말이 되지. 그리고 본영은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식이 무너지지 않게끔 만 도와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고……. 허허, 모자란 힘을 무림인들과 화합하여 충당한다고? 그래서는 안 되네. 비록 당장에는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오직 순수한 힘으로써 무림인들에게 오련의 강력함을 인식시켜주어야 하는 것일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정답이고 말이지.”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남게 되는 것이 영광뿐인 상처라면 실패한 작전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틀리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적어도 완전한 실패가 아닌,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하겠지. 그래서 우리의 의도대로만 흘러가 준다면 오련은 다시 예전의 그 진취적이고 강맹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가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말일세. 자네는 이 천마지가의 사건이 어느 정도의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가?”

장환은 뜬금없는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급기야는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적어도 몇 십 년 동안에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혈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봅니다만?”

노인은 나직이 웃었다.

“허허, 그렇지. 그럼 이 사건이 향후 몇 십 년 동안 최대의 사건으로 남게 될 것임을 가정했을 때 오련이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후세의… 아니 그때까지 갈 것도 없이 당대의 무림인들에게 ‘정파의 기둥을 꼽으라면 당신은 어느 세력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오?’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어느 곳을 먼저 떠올릴 것 같은가? 일선에 나서며 정예들의 피를 아낌없이 흘린 무림맹?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하급무사들을 동원한 뒤에 고작 무림인들을 끌어 모아 방패막이로 사용한 오련? 그것도 아니면 이번 일로 새로 급부상하게 될 운 좋은 또 다른 정파의 세력?”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장환은 머리에 둔기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깨달음을 주고자 노인이 많이 돌아왔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대로 그제야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군! 같은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직접 가르쳐주어 문제를 푸는 것과 스스로 알아서 문제점을 해결하라고 놔두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이곳에서 전사한 오련인들의 죽음은 현 시점에는 분명 의미 없이 방치한 죄악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본련의 수뇌부들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절대로 헛되이 쓰러져간 영혼들이 아니게 되는 셈이다! 크윽,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가 안 되었다. 이는 한 형제자매나 다름없는 자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윗분들의 나태함을 꾸짖고자 했던 것이니 나를 용서해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절묘하게도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천마동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본련이 무림맹보다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사람들은 새로운 정파의 지주가 누구인지를 그들의 가슴속에 보다 깊이 새겨 넣을 수 있을 걸세. 그래서 오련의 수뇌부들은 깨달아야만 하네. 적극적이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일세. 무림맹? 거대하지. 참으로 거대하고 말고. 하지만 그들은 파벌이 갈린 지가 벌써 오래일세. 겉으로 보기엔 하나이지만, 둘. 혹은 셋으로 나뉜 단체의 연합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야. 보는 시각을 달리해서 무림맹의 세력을 반으로 쪼개어 본련과 함께 삼각구도로 잡아간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다는 말이지.”

“…….”

장환은 그저 주군의 말씀을 듣기만 했다. 그는 모든 사물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성격이었으나 융통성이 없다는 의외의 단점이 있어서 미래의 찬란한 영광보다는 같은 편의 죽음을 지켜만 봐야 했었던 지금의 현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노인은 이 정도면 충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고지식한 녀석은 이번 일로서 의지를 더욱 불태울 것이다. 어차피 음지에서 화려하게 터트려 보고자 했던 모임이었던 만큼, 누군가의 피는 딛고 일어서야만 했다.

그래서 노인의 눈은 더욱 빛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 사천에서 벌어지는 피의 향연……. 그 회오리의 중심에는 바로 그 자신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나같이 늙은 자들의 시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련의 수뇌부들은 죄악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죄악은 바로 나 제갈여휘가 등에 업고 저승으로 가져갈 예정이니까!’

우연인지 몰라도 그의 시선은 동천과 제갈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시체들의 영향 때문인지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었다.

후우웅!

순간 세찬 바람소리와 더불어 공간이 왜곡되더니 이내 그들의 신형과 시체들의 무덤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이내 그곳은 정적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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