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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719화


그는 기분이 더러워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더러워도 아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마치, 시궁창의 물을 들이킨 듯한 기분이로군.’

절로 상상이 되었던지 그의 인상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러면서도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검의 손잡이를 잡아가던 그는 어느 순간 손에 무언가 걸리는 듯싶더니, 이내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약간 좌측으로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그는 애초에 자신이 검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내가 고작 저런 것들을 앞에 두고 긴장을 하였는가?’

내심 당황한 감이 없지 않았던 무안신군은 찰나간 검을 쥐고 있는 손을 향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자 본능적으로 정말 검을 쥐고 있는지 확인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앞의 상대에게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다.

『화정아. 제압해.』

“응? 으응.”

화정이는 조금 위축된 상황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무안신군에게 달려드는 속도가 약간 늦게 되었다. 성격이 변한 동천에게 기죽은 감이 있었기에 반응속도에서 뒤쳐진 것이다.

덕분에 동시에 공격하려던 동천이 되려 먼저 공격한 꼴이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뛰어난 도약력으로 벌어진 차이를 단숨에 회복했다.

휙!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동천을 따라 붙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동천보다 먼저 수장(手掌)을 내치기까지 했다.

“음!”

동천의 공격을 방어하려다 눈썹을 꿈틀거린 무안신군은 신속하게 신형을 움직여 화정이의 손 그림자를 막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시간차 공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파라락! 까강!

화정이의 손과 부딪힌 그는 생고무와 철이 버무려진 곳을 내려친 듯한 기묘한 감각에 눈가를 실룩거렸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진기를 일으킨 탓에 6성의 전력이었지만 살과 검이 부딪혔는데 검이 튕겨졌다는 사실이 자못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깊게 생각할 사이도 없이 어린놈의 도가 옆구리를 파고들자 검로를 바꾸어 재빨리 쳐냈다. 강시의 묵직한 공격과는 달리 가볍게 밀려나는 것을 느낀 무안신군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애당초 동천은 도법을 다시 전개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굳이 무안신군의 수비에 저항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정신을 분산시키는 정도로만 치고 빠질 생각이었으니, 그것을 모르는 무안신군으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이미 치우도법을 한번 시전한 상태라 지금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하기엔 무리한 감이 없지 않다. 이번 공격까지는 어떻게 버티겠지만 그 후에 다시 위기가 찾아와 치우도법을 재차 시전 했을 시 중간에 부서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강수로 괴롭히기엔 화후가 낮아 화정이처럼 싸우다간 손이 걸레가 될 것이 자명할 터.’

단강수의 화후가 최하 6성은 되어야 검기에 버틸 수 있기 때문에 아직은 무리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환영혈과 이명호월들의 잡다한 무공과 만독혼원공뿐이었는데, 환영혈의 무공들은 딱히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끌어올리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명호월의 무공은 그저 신법만을 참조했을 따름이었다.

결론은 만독혼원공 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동천은 만독혼원공을 섣불리 사용할 태세가 아니었고 역의 성격인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모습까지 살짝 내비쳤다. 무언가 고충이 있음이 자명했다.

‘흐음! 엎친대 덮친 격으로 만독혼원공까지 골치를 썩히고 있으니 곤혹스럽군.’

무슨 말인가 하면, 아까 만독혼원공을 계속 시전하면서 그는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한창 독공을 뿌리고 있는 와중에 어느 순간 위력이 약해진다 싶어 내부를 점검해 봤더니 독공의 태반이 사라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다행히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하여 외부의 기운을 빨아들이자 소실되었던 독공이 서서히 다시금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독혼원공을 능력껏 끌어올린 적은 있어도 한계 이상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동천으로서는 위급한 상황이 아닐 때 미리 경험을 함으로서 위기를 잘 넘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하튼, 만독혼원공까지 섣불리 낭비할 수 없었던 동천은 그런 이유로 간간이 도를 휘둘러가며 무안신군의 정신을 분산시키는데 주력했다. 효과가 있긴 했지만 이번 싸움으로 무기를 이용한 다른 도법이나 검법의 부재를 절감한 동천은 차후 암흑대서고에 들려 신법을 참조하면서 그 와중에 최소한 일류급의 도법까지 찾아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피리리릭!

그 순간 방어에만 치중하던 무안신군이 반격을 시도했다. 동천이 도를 휘두른 후 뒤로 물러나 다른 무공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노련한 고수답게 그 사이를 파고든 것이었다.

이때 약간 의외였던 것이 그가 한눈을 판 동천이 아닌 화정이를 공격했다는 것이었는데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그 이유가 간단함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막건 막지 못하건 물러섬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목표로 삼게 된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하여, 기회를 노려 내공을 끌어 모았다가 한 번에 터트린 무안신군의 공격은 화정이의 전신을 제대로 난도질했다.

빠바바방!

“아, 아야! 히잉, 아프잖아 이 영감아!”

가늘고 예리한 실선들의 공격을 거침없이 받아들인 화정이의 의복은 가죽 부대가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조각나 너덜너덜해졌으며 그녀의 신체 곳곳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와 빨갛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강호로 나와 처음으로 낭패를 본 순간이었지만 정작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오히려 무안신군 쪽이었다.

‘허! 고작 살갗만 베였단 말인가?’

전심전력을 다한 공격이어서 적어도 뼈가 드러날 정도의 타격은 입힐 줄 알았다. 그런데 뼈는커녕 살갗도 제대로 베어내지 못한 상황이자 그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그나마 베어낸 상처들이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건, 괴물의 수준이구나!”

그의 질린 듯한 외침에 화정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물? 괴물이 뭐야? 먹는 거야?”

대답은 동천이 해주었다.

“공격해.”

“으응. 아, 알았어.”

한번의 아픈 경험이 그녀의 심경을 변하게 했는지 자세를 바꾼 그녀는 손을 사용하는 대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거리는 맑은 쇳소리가 좁은 통로를 유린하듯 넓게 퍼져 나가자 무안신군은 왠지 모를 소름에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순간 무안신군을 바라보는 그녀의 기세가 달라졌고, 무안신군의 본능은 위험하다는 신호를 수없이 그의 뇌리로 전달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치는 제 3자들의 등장으로 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무안신군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역시 이런 곳에서 싸우고들 있었군!”

동천의 귀에 익숙한, 그러나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는 수 없어진 동천은 역심무극결을 풀었다. 상대는 바로 소교주인 냉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혼자가 아닌 흑혈이살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바로 뒤편에서는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거센 검풍을 몰아치고 있었다. 오대신군 중 1명이 그들의 뒤를 쫓아왔던 것이다.

“화정아! 넌 이 영감 계속 맡고 있어! 아니, 소교주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응! 동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씩씩해진 화정이는 재빨리 동천이 지나간 자리를 막았고, 냉현은 그와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질책했다.

“자네와 저 강시가 말도 없이 자리를 이탈하여 균형이 깨졌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생각이 없어!”

“네?”

무슨 소리인지 몰라 되묻는 모습이었지만 잔머리의 대가였던 동천은 듣는 순간에 바로 이해를 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왜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약간 허무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가 이해를 한 순간보다 말을 내뱉은 순간이 조금 더 빨랐을 따름이었다. 그것을 알 턱이 없었던 냉현은 버럭 화를 냈고 말이다.

“네 라고? 자네는 그 머리를 본진에다 두고 왔는가? 가뜩이나 어렵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주된 전력 중 하나가 빠졌는데 어떻게 안 밀리고 배기겠느냐는 말이야!”

동천도 적들을 상대한 공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구타를 빙자한 화정이의 막강한 살상력 앞에서는 빛 바랜 개살구에 불과했기에 냉현이 말하는 주된 전력 중 하나는 화정이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인지 천성적으로 추켜세워 주는 것을 좋아했던 동천은 기분이 팍 상했지만 냉현이 누구 좋으라고 동천까지 추켜세워 주겠는가? 하물며 이렇게 질책을 하는 상황에서.

‘썅늠의 새끼. 지 실력 모자란 걸 탓해야지, 누굴 탓하고 지랄이야?’

결론적으로 자신과 화정이가 빠지자 적들을 감당할 수 없음에 자신들도 내뺐다는 소리였으니 동천의 이런 투덜거림도 아주 근거 없는 불평만은 아니었다. 아무튼 동천은 돌아가는 정황으로 보아, 말씨름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자 재빨리 자신의 빠져나갈 구멍부터 마련하고자 했다.

“아니, 적들의 5대신군이란 자들 중 둘을 직접 처단하고 저기 화정이와 대치 중인 무안신군이란 자까지 이쪽으로 빼내왔는데도 고작 우리 둘이 빠졌을 따름인데 전세가 되려 밀렸다는 말씀입니까?”

동천이 놀랍다는 듯 과장 아닌 과정을 섞어 반문하자 어두워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냉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일그러진 얼굴은 내비쳤으니 그 정도의 짐작은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천의 말투는 적의 수뇌 셋을 전장에서 이탈시켜줬음에도 그 모양이면 날더러 어쩌란 소리냐는 비아냥거림에 가까웠기에 소교주인 냉현으로서는 수치도 보통 수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 못 본 사이에 담이 꽤 커졌군.”

살기가 스며든 냉현의 말을 동천은 쉬이 받아 넘겼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을 똥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하자 냉현의 살심은 극에 다다랐다.

‘이 보잘 것 없는 천민 출신의 새끼가 감히!’

냉현의 일그러진 안면은 인육이라도 씹어 삼킬 듯이 괴기스러워 졌지만 상황은 그저 느긋하게 흘러가지 만은 않았다.

『주군, 저희 둘로는 더 이상은 무립니다!』

“주군!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거의 동시에 터진 철소의 전음과 산관의 외침은 냉현의 정신을 퍼뜩 깨어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휘말리긴 했지만 고작 이런 놈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좋다! 아군이면 협공을 하고 적이라면 일단 조금 더 물러서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

대답을 하며 흑혈이살의 빈 공간을 차지한 냉현은 상대 신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약간 밀리는가 싶었던 흑혈이살 쪽은 그제야 평수 이상을 이루었고 동천은 얄밉게도 무안신군을 상대하겠다며 화정이 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냉현 일행을 상대하던 신군은 뒤쪽을 확인하고 싶어도 한눈을 팔 길이 없자 차라리 무안신군 쪽으로 강행돌파를 하려는지 거센 기합소리와 함께 정면의 공간을 갈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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