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28화
헌데, 눈빛이 흐리멍덩한 것이 마치 너무도 오랫동안 잠을 자서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며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으하아아암! 아, 잘 잤다. 응? 동천, 왜 여기에 누워 있어?”
동천은 상체를 자신 쪽에 기울인 그녀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약간 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화정이…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가 화정이지 누구야? 나 말고 화정이 또 있어? 어디? 어디?”
좌우로 휘휘 둘러보는 그녀의 행동에 화정이가 맞다고 생각한 동천은 내심 안도하며 말했다.
“아아, 됐으니까 고개 그만 돌려. 정신 사나워서 안 그래도 아프신 이 몸이 머리까지 어지럽잖아.”
화정이는 큰주인의 어지럽다는 말에 이마를 살짝(?) 검지 하나로 건드렸다.
“여기가 어지러운 거야?”
“끄에에엑!”
어떻게 보면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 몸에 더 무리가 갔지만 일단 발동한 비명은 그 후속타까지 포함된 것이었으므로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화정이가 맞느냐고 다시 한번 물어본 강소홍은 제정신을 찾았다가 다시 강시로 돌아간 상황이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대법이 깨지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제련에 들어가야 강시가 되는 것이지, 제약에서 풀린 몸이 스스로 강시화가 되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미, 믿을 수가 없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으으! 화정이 너 다시 한번 이 몸을 건드리기만 해봐. 볼 살 잡고 이리저리 당기며 꿀밤 3740대를 때려줄 테니까. 알았어?”
“우웅, 알았어. 헤헤, 안 그럴 게.”
굳이 3740대를 언급한 이유는 ‘그냥’ 이었으니 새겨들을 필요는 없었다. 여하튼, 화정이의 다짐을 받고 나서야 다른 쪽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동천은 놀라워하는 강소홍에게 물었다.
“누님, 뭐가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동천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달 해 주었다. 그러자 동천은 설명해주기엔 난해한 문제가 끼여 있어서 대충 둘러대었다.
“아아, 그건 말이죠. 화정이의 대법이 깨진 것이 아니라 거의 깨질 뻔했던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 쟤가 몇 번의 제련을 거듭한 끝에 겨우 강시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럼에도 대법이 불안정한 상태라서 예전에도 한번 이번과 유사한 일이 있었거든요.
아마도 제가 기억은 못하는 상황이지만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쟤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가 운 좋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죠. 휴우! 예전에 이어 이번에도 어떻게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다음에 또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
무거운 분위기로 마무리를 유도한 동천은 간접적으로 이건 자신과 화정과의 문제이니 더 이상 타인은 끼여들지 말라는 눈치 아닌 눈치를 주었다. 그의 의도대로 강소홍은 힘내라고 말해준 뒤 은근슬쩍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아, 갑자기 여러 일들이 겹쳐서 잊고 있었는데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뭔데요?”
“네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후 어떻게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 오른쪽 석실의 상자들을 뒤져보았는데 거기에서 영약 몇 가지를 발견했어.”
번쩍!
영약이라는 소리에 눈에서 광채가 튀어나온 동천은 재빨리 물었다.
“그래서요? 그 영약들의 종류가 뭐죠?”
“모두 3가지야. 하나는 공청석유(空淸石乳)였고, 다른 하나는 금선수(金仙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철각사(鐵角蛇)라는 뱀의 내단이야. 나도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아까 말해주었던 그 서책에 기재가 되어 있더라고.”
공청석유는 인세에서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영약으로서 천지간의 특별한 조화가 서린 동굴에서 지정(地精)이 응집하여 우윳빛 액체의 형상으로 고이게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석유(石乳)라고 했다.
이 석유는 잘해야 100년에 한 방울씩 고이게 된다는 설(說)이 일반적이었지만 가끔 50년에서 30년 사이로 한 방울이 생성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은 무병장수를 하게 되며, 무공을 익힌 자는 내공을 속성으로 높여주는 공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보통 영약과는 달리 복용하면 할수록 공력이 계속 증가하게 되니 천고에 보기 드문 영약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또한, 금선수는 그 유래가 분명치 않은데 신선들이 가끔 하계에 내려와 불치의 병에 걸린 불쌍한 이들을 구제하고자 선계의 성수(聖水)를 퍼트렸다는 속설이 가장 유력했고, 내공의 증진에는 그다지 효험을 보긴 어렵지만 불치의 병이나 다친 몸을 회생시키는 데에는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물론, 극악한 불치의 병이나 회생할 수 없을 지경으로 다친 상처에는 아무리 금선수라 할지라도 회복엔 무리가 있었지만 어지간한 것들의 경우엔 사람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빠른 치료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각사는 100살이 넘기 전까진 몸집이 큰 독사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로 매 100년씩 허물을 벗을 때마다 이마에서 뿔이 자라게 되며 그와 동시에 내단이 형성되는 특이한 성장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 내단이 제몫을 하려면 최소 5백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어린아이 주먹만큼 키워진 내단은 극독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으므로 복용을 하려면 따로 중화제를 만들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이때 독공 고수라면 화후에 따라 그것만 복용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것들 중에 네가 실신했을 때 금선수를 먹여주었어. 그때 네 몸은 전체가 붉은 피로 흥건히 흘러 내렸고 기식이 엄엄 했기에 가장 효과적인 영약은 금선수라 판단하고 먹여준 거야. 후우, 그랬음에도 고작 약간 호전된 것으로 끝난 것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놀라고 지랄이고 그럼 나머지 두 개는?’
감사하는 마음보다 나머지 두 영약의 행방에 더 관심이 쏠렸던 동천은 속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여과 없이 험한 말을 내뱉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입에서 나머지 두 개를 꿀꺽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기라도 하면, 아픈 서방 챙겨줄 것을 대놓고 가로채는 악덕 마누라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홍아. 난 네가 그런 싸가지 없는 부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 너도 좀 눈이 있으면 봐봐. 이 몸이 이렇게 몸이 말이 아니셔서 죽을 만큼 고생을 하시는데, 고거 맹물 한 잔 먹여줘서 어디 낫기를 하겠니? 안 그래?’
결론은 지 혼자 다 먹겠다는 소리였다. 욕심을 부려도 너무 욕심을 부린 동천은 내심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둘러 물었다.
“어쩐지 깨어나 운기를 해보니 미약하나마 내공이 불어났다 싶었는데 그것 때문이었구나. 아참! 그럼, 나머지 영약들은 어디에 사용할 계획이세요?”
강소홍은 신중한 문제에 직면하자 다소 굳은 신색으로 대답해주었다.
“네가 계속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아무리 만년온옥 위일지라도 생명이 위급해지기에 공청석유를 먹이려고 했어.”
‘했어? 그럼 뭐야. 먹여주려고 했는데 이제 깨어났으니 니가 알아서 몸을 회복하라는 거야? 아나, 얘가 또 착하신 분 화를 내시게 만드네? 야! 그런 말은 옆에 있는 화정이도 할 수 있겠다! 어우 씨!’
그때 화정이가 입을 열었다.
“동천,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화가 난 상태인 동천은 저게 뭔 헛소리를 하나 생각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왜 동천이 방금 속으로 말했잖아. 에에, 뭐라고 했더라? 그럼 뭐야. 먹여주려고 했는데…….”
“그마아안! 윽? 아고고. 그, 그만!”
기겁을 한 동천은 고통을 인내하며 서둘러 화정이의 말을 막았다. 자신이 속으로 생각했던 부분을 알고 있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한 그는 자신이 실수로 그녀에게 전음을 흘린 것은 아닐까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윽, 그러니까 말이지. 이 몸이 네게 전음으로 말했던 거니?”
화정이는 동천을 빤히 쳐다보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동천이 생각하는 게 갑자기 들리던데?”
꿀꺽!
“그, 그게 그냥 들린 거야?”
“응.”
잠시 멍해진 동천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하하, 얘가 또 사람 웃게 만드네? 야야, 그만하면 됐으니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참, 누님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강소홍은 급히 말꼬리를 돌리는 동천의 모습이 석연치 않았지만 이 문제는 차후에 언급해도 될 사안이었으므로 당장에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고자 했다.
“아? 그러니까 원래의 의도는 공청석유까지 복용을 시켜주려고 했는데 네 상태를 보니까 다는 아니더라도 절반만 복용하면 될 것 같아. 호호, 어떻게 들릴지는 몰라도 엄연히 절반은 내 거라고 말할 수 있잖아.”
순간 동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발견한 사람은 그녀가 맞지만 떨어지는 그녀를 살려준 것이 그였고 이곳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도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떨까? 그녀가 금선수를 섭취시키지 않았더라면 동천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었고 화정이까지 돌봐주며 숨길 수도 있었던 영약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문제의 소지를 없애고자 정확히 반으로 가르자는 이야기까지 했으니 스스로가 떳떳할 수 있었다. 양쪽 다(?) 나름대로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뒷북이지만 동천의 귀에는 사가지 없는 소리로 들렸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 이 통로를 발견한 사람이 저라는 것은 아시죠? 영약은 양보를 해드릴 테니 보물들은 포기하세요.”
뒤늦게 그 문제가 생각난 강소홍은 동천의 주장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녀가 아니었고, 그저 여느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소유욕이 웬만큼은 있는 여인이었다. 그냥 몽땅 빼앗기기엔 보물의 양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음, 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보물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워서야 되겠니? 많은 양을 원하진 않을 테니까 본문의 재정에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로만 내 소유로 인정해 줘.”
이만하면 그녀로서도 많이 양보한 셈이었지만 동천에게 있어서 많지 않은 양이라면 딸랑 두어 개의 보물만 주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음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동천에게는 두루뭉실하게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다 욕심을 부린 것 같아 민망하네요. 그렇게 하죠, 뭐. 어차피 이곳을, 이곳을…….”
갑자기 굳어 버린 동천의 모습에 강소홍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가 뒤늦게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을 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아? 내가 널 너무 오랫동안 붙잡았었네? 그럼, 쉬어. 여기 반만 담은 공청석유를 놓고 갈 테니까.”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화정이었다.
“가려고? 잘 가!”
어감상 아주 가라는 소리로 들렸던지 강소홍은 낮게 웃으며 잘못된 점을 집어주었다.
“호호, 화정아. 아예 가는 게 아니라 잠시 다른 곳에서 쉬고 있으려는 거야.”
“아? 그랬구나. 그래, 잘 가!”
말로 해서는 결론이 안 날 것 같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그녀는 그냥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갑자기 조용해진 실내는 화정이를 심심하게 만들었고 마치 석상처럼 굳어있는 동천을 바라보며 그녀는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동천, 그러고 있으면 재밌어?”
“조용해라.”
“응.”
“…….”
동천은 가끔 그녀가 너무 말을 잘 들어서 짜증이 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점이자, 움직일 수도 없음을 한탄하매 그저 이마에 굵은 핏대만을 세웠다. 하지만 그 짜증을 넘어서는 중대한 문제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뭐지? 어떻게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길이 떠올랐던 거지?’
그렇다. 강소홍이 탈출할 길이 없어 절망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그때 동천은 너무도 세세한 탈출로가 떠올라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미이! 이거 혹시 꿈인가? 내가 빠져나갈 곳을 애타가 갈망해서 꿈이니까 바로 탈출로가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인가?’
그는 천사가 4할의 공명율로 그의 기억을 흡수할 수 있었듯, 그 또한 뒤바뀐 위치에서 4할의 공명율로 천사의 기억을 흡수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그러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있을 턱도 없었고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무언가 있는 것은 같은데 파고들려고 할수록 머릿속이 헝클어지니 몸이 다 회복되고 나면 언젠가 날을 잡아서 신경 써보지 뭐.”
지금의 생각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천사가 동천의 기억을 흡수했을 때 뒤죽박죽이 되어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자 했듯, 동천도 당장에는 아무리 용을 써도 천사의 기억을 원하는 대로 끄집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험, 화정아. 이 몸의 옆을 보면 벽 쪽에 끼여 있는 허리띠가 보일 것이니라. 그걸 꺼낼 때 이 몸을 건드리지 않게 특히! 조심해서 이 몸의 단전 위에 올려놓도록 하거라. 참고로 단전이란 배의 약간 아래쪽이다.”
심심해서 따듯한 만년온옥에 얼굴을 비비며 놀고 있던 화정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 대답했다.
“그거? 에헤, 쉽지. 잠깐만~! 쓔웅!”
동천의 위를 팔딱 뛰어 넘어간 화정이는 행여나 자신이 밟힐까 싶어 기겁을 하는 주인님의 심장이 철렁하든 말든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쓱 한번 훑어보았다.
“아? 찾았다! 동천, 이거 맞지?”
혈압이 갑작스레 상승하기 시작한 동천은 이런 상황에서 혈압까지 오르면 화기가 치솟아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었으므로 다급히 화를 억누른 채 대꾸를 해주었다.
“오, 오냐. 이제 그걸 이 위대하신 주인님의 단전 위에 올려놓고 조신하게 내려가거라. 참고로 한번 더 이 몸의 위를 뛰어오르고 지랄했다간 꿀밤이 8750대다.”
꿀밤을 맞는 게 싫었던지 화정이는 의미가 없는 숫자였음에도 바로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맞는 숫자가 아니라 일단 맞는다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안 그럴 게. 이제 화정이는 동천의 위로 안 뛰어 다녀. 자, 여기다 올려 놓으랬지?”
“그래, 착하다. 이제 다시 너 혼자 놀거라.”
화정이는 어쩐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동천의 명에 따랐다.
“으응, 그러지 뭐. 동천도 혼자 잘 놀아.”
그녀로서는 별 생각 없이 해준 말인데, 이상하게 짜증이 나는 가운데 동천은 허리띠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긴장한 모습으로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