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83화


그러자 역천은 활짝! 웃었다.

“오오! 역시, 내 제자로다. 우헤헤헤! 장하다. 자.. 도연이 갈 길을 안내해 줄 터이니 어서 가서 물을 채우도록 해라.”

“예…”

동천은 쥐죽은 듯이 대답하고는 물통을 들고 걸어 나갔다. 도연은 역천에게 인사를 한 후 얼른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역천은 재빠른 도연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도연이 있기에 자신의 제자가 수련을 착실히 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두어 번 왕복해서 물을 퍼오는 동안 동천은 네 번의 유혹을 겨우 떨쳐냈다. 두 번 왕복해서 네 번 유혹을 느꼈다면, 동천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심지(心志)가 약한 인간인지 감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으아-아! 힘들어!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네..”

팔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고, 조금 심하게 저린 정도였지만 동천은 온갖 푸념 섞인 말을 해댔다. 아까 두 번째에서 도연에게 넌지시 꺼낸 말이 있었다.

“야, 그냥 옛날에 사형이 물을 펐다는 데에서 물을 푸면 안될까?”

그 말에 도연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네가 왠일이냐는 듯이 쳐다보고 이내 신이 나서 물을 푸려던 동천은 “저는 전주님께 경과(經過) 보고만 할 뿐입니다.”라고 도연이 말하자 열받아서 도연의 뺨을 후려친 다음에 투덜대며 다시 물통을 들고 갔다.

“헉헉… 에구….. 동천 죽네.”

여섯 번을 왕복하자 동천의 입에서는 단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말이 아니었고 팔다리는 후들거려서 마치 풍(風)에 걸린 인간 같았다. 특히, 팔이 떨려서 물먹은 솜마냥 움직이질 못했다. 잠깐 동안 들어봐서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알 수 있었던 도연은 그런 주인의 모습에 아무 말 없이 옆에 서있었다.

“좀 쉬시지요.”

동천은 도연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돌아볼 힘도 없기에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다.

“헉.. 헉..! 나.. 잠깐 쉰다.”

“예.”

바닥에 드러눕자 마치 꿈결인 양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몸속 구석구석에 박혀있던 피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천은 문득, 항광이 생각났다.

‘그 할배 누워서도 내공을 잘 운용하던데… 나도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자 호기심이 동한 동천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운기조식을 취할 때 편안한 마음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단전에서 퍼져나가는 내공들은 무난히 몸을 돌고 돌았다. 어느 정도 내공을 돌리자 온몸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천은 감았던 눈을 떴다.

“으그그그..! 아.. 시원하다.”

동천이 깨어나니 어느새 해가 산마루로 내려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운기조식을 취했는지 몰랐던 동천은 생각해보니 저녁이 돼서 더 이상 수련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킬킬거렸다.

“좋아. 좋아! 야! 도연아! 어서…. 엥? 야! 너 거기서 뭐하냐?”

주위를 둘러 도연을 찾던 동천은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쓰러져 있는 도연을 볼 수 있었다. 저 자식이 자나? 하는 생각에 도연에게 다가간 동천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도연은 괴로운 표정으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었는데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는 게 위험해 보았다.

“엇? 얌마! 너 왜 그래?”

도연을 거칠게 흔들던 동천은 도연의 몸에서 희미하게 역한 냄새를 맡았다. 인상을 절로 찡그리던 동천은 영문을 몰랐지만 어찌되었든 이렇게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들쳐업고 약전으로 달려갔다. 신법을 익혀서 그런지 굉장한 속도였다. 그러나…..

“으아악!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동천의 소리를 들었는지 왠 하인이 자신의 방에서 기어나왔다. 동천을 일별한 그 하인은 기겁하며 문을 닫았다가 동천에게 직살나게 얻어맞고 길을 안내해주었다. 피멍이 든 얼굴을 부여잡고 약전에 도착한 그 하인은 온 김에 치료를 받으러 한 의원을 찾아갔다. 사부는 없고 다행히 부전주가 있어서 부전주에게 도연을 맡긴 동천은 진맥을 하는 부전주에게 다급히 물어보았다.

“그 녀석, 괜찮은 건가요?”

부전주는 동천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어디서 보았습니까? 아주 지독한 독에 당했군요.”

‘엥? 지독한 독(毒)? 도오옥? 여기서 독이 왜 나오지?’

“왠 독이요?”

동천이 황당해서 묻자 부전주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제가 독은 얼른 빼내긴 했지만 며칠 동안 요양은 해야겠군요. 그리고.. 그 독이라 함은 아직은 잘 모르지만 꽤 수준 있는 독들을 섞어 놓은 것을 이 아이가 공기로 흡입한 것 같습니다.”

부전주는 독을 빼냈다는 대목에서 자신의 소매를 들추어 보여줬다. 거기에는 시커먼 물질이 분말 가루처럼 묻어 나 있었다. 그걸 보고 동천은 만져보려 했지만 부전주는 위험하다며 소매를 뒤로 젖혔다.

“어디서 독에 당한 걸까..?”

동천이 혼자 중얼거릴 때 부전주가 다시 물어왔다.

“소전주.. 이 아이를 어디서 데려왔습니까.”

자신이 있던 곳은 기초 체력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연이 독에 중독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같이 있었던 동천은 멀쩡하고 도연만 독에 중독된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왠지 찜찜했다.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꺼내려던 동천은 뒤에서 사부가 오는 것을 보고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어? 사부님! 여기예요.”

약전에 들어와서 요리조리 둘러보던 역천은 제자가 손을 흔들어주자 알아보고는 동천에게 다가왔다. 역천이 오자 부전주는 이 사건을 말해주었다. 보고를 다 듣고 난 역천은 동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잘 모르겠다고?”

모르니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예. 제가 잠시 누워서 운기조식을 하는 사이에 어떻게 된 것 같은데 깨어보니까 다 죽어가더라고요.”

아직, 다른 사람들이 제자가 내공이 높다는 것을 알면 안 되기에 역천은 생각하는 듯하다가 자연스럽게 말했다.

“음.. 부전주. 이만 가보게. 여긴 내가 처리하겠네.”

“그러겠습니다.”

전주의 명령에 부전주는 군말 없이 나갔다. 동천은 가는 부전주에게 잘 가라고 해주었다. 마침내 부전주가 나가자 역천은 그 당시의 상황을 다시 자세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힘이 들어서 누워서 운기조식을 했는데 깨어보니 다 죽어가더라?”

자세히 들어봐도 역천이 들은 말은 아까 동천이 해준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제자의 말로는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역천은 도연을 깨우기로 했다. 도연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불어넣어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도연의 얼굴을 살살 쳐댔다. 그 모습에 동천은 만약에 자신이 깨운다면 주저 없이 얼굴을 후려쳤을 텐데.. 하고,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얼마 안 가서 도연이 깨어났다. 도연이 깨어나자 역천은 그제서야 손목을 놓고 말했다.

“깨어났느냐?”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사태를 깨달은 도연은 재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부상을 당한 게 아니었으므로 역천은 그런 도연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전주님..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도연의 의문 섞인 말에 역천은 그간의 일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네가 왜 독에 당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내가 너를 깨운 이유이기도 하고.. 자, 말해보거라.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역천이 말해줄 동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도연은 전주님의 질문에 지체 없이 대답해주었다.

“그 당시 저는 주인님께서 누워서 쉬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주인님의 몸에서 푸른색의 공기가 퍼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뭔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하고 주인님께 다가갔는데 그 푸른 공기를 마시자 숨이 턱! 막히고, 구토가 치밀어 오르며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놀란 저는 뒤로 황급히 물러섰는데 별 소용이 없었는지 잠시 후에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보니 여기였습니다.”

도연의 말을 다 듣고 난 역천은 자기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동천은 사부가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을 않자 궁금해했다. 역천도 그걸 느꼈다. 그는 제자를 보고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주위의 이목(耳目)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동천은 얼른 따라갔다. 약전을 나온 동천은 인내심이 다했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어째서 제가 내공을 운용했는데 독무가 뿜어져 나온 거예요?”

주위를 두리번거린 역천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말을 해주었다.

“제자야. 이건 순전히 이 사부의 생각인데.. 아마도 항광이 너를 환골탈태 시켜준다고 깝죽거렸을 때 본문의 귀의흡수신공과 항광의 만독혼원공이 섞여져서 변종(變種)을 일으킨 것 같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