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6화
6
샌슨은 롱소드를 뽑지 않은 채 말했다.
“너희들은 나의 주인을 모멸했으니 내가 결투로 상대해 주겠다. 한 놈이 덤빌 거냐, 모두 덤빌 거냐?”
병사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많은 인원이 한 사람에게 덤빈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들 중 아까 내게 핼버드 를 빼앗겼던 자가 다른 병사의 핼버드를 받아들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자가 우두머리인 모양이다. 그놈은 계단 위에 서 있는 날 힐끗 보더니 말했다. “야, 너도 싸울 거야?”
“내가 왜? 아, 너와 함께 싸워달라는 거야?”
그놈은 콧방귀를 뀌더니 그대로 검도 뽑지 않은 샌슨에게 핼버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샌슨은 상대의 발을 보고는 상대가 팔을 움직이기도 전에 벌써 움직임을 간파했다. 그는 뒤로 슬쩍 물러나더니 뒤로 뺀 발로 그대로 땅을 차며 균형을 잃은 그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의 주먹이 뻗었다. 쾅! “아이고!”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그놈은 눈앞이 어지럽다는 시늉을 하며 물러났다. 샌슨은 혀를 찼다.
“눈을 감아? 이거 완전히 기본도 안 된 놈일세?”
그리고 샌슨은 롱소드를 뽑았다. 우리 영주님이 재산을 탕진해 가며 장만해 주신 검으로, 라이칸스롭을 상대하기 위해 은으로 코팅까지 되어 있는 멋진 롱소드다. 상대는 당황해서 핼버드를 찔렀지만 샌슨은 롱소드를 수평으로 든 채 비스듬히 핼버드에 마주 대면서 그대로 휘리릭 휘둘렀다. 핼버 드와 롱소드가 뒤얽힌 채 마찰음을 내다가 그대로 튕겨났다. 무거운 핼버드를 다시 똑바로 드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샌슨은 앞으로 한 발자국 들어 서며 슬쩍 찔렀다. 당장 그놈의 손이 멎어버렸다. 샌슨은 그놈의 목젖에 롱소드를 들이댄 것이다.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결판이 났다.
“아, 아.”
놈은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목에 닿은 롱소드를 쳐다보았다. 샌슨은 롱소드를 좌우로 조금씩 흔들면서 말했다.
“사과하면 안 죽인다. 죽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될지 알겠지?”
“이 자식!”
옆에 있던 다른 놈이 핼버드를 휘둘렀고 샌슨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사이에 목을 찔릴 뻔한 놈도 다시 핼버드를 들어올리더니 덤벼들었다. “이 새끼!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나머지 병사들도 모조리 달려들었다. 정말 더럽기 짝이 없군. 난 바스타드를 든 채 앞으로 뛰어올랐다. 계단 위에 서 있어서 상당히 높이 뛸 수 있었 다. 나는 공중에서 바스타드를 뽑아들고는 양손에 검과 검집을 들었다.
“아하앗!”
뛰어내리는 힘까지 이용해서 핼버드 두 개를 단숨에 박살내었다. 바스타드로는 베어버렸고 검집으로는 부러뜨렸다. 그리고 땅에 발이 닿자마자 곧 허리를 뒤틀었다. “일자무식!” 양손에 들고 있으니 원심력으로 훨씬 쉽군. 다시 두 개의 핼버드가 박살났다.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몸에 바스타드를 쑤셔박고 싶진 않았다. 놈들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 그래서 왼손의 검집으로 후려 쳤다.
“으아악!”
뺨을 호되게 맞은 병사는 곧 이빨을 튀기며 나가떨어졌다. 나는 다시 바스타드를 검집에 꽂아넣고는 검집 째로 휘둘렀다. 다시 두 명의 병사가 팔을 맞고는 자지러지면서 물러났다. 도끼 찍듯이 팔을 내리쳤으니 아마 꽤 아플 게다. 부러졌을까? 그럼 한 달은 좋은 교훈 속에 살겠지.
샌슨도 내 모습을 보더니 알았다는 듯이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아넣고는 통째로 휘둘렀다. 지금까지는 그 손에 매운 맛이 없었지만 검을 꽂아넣고 나자 샌슨은 당장 포악해졌다. 인정사정 없이 목이나 명치 등의 급소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검집을 씌웠다 해도 병사들은 숨막히는 비명을 지 르며 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샌슨은 쓰러진 병사들이 거치적거리자 걷어차거나 그대로 밟고 지나가며 휘둘렀다.
우리 둘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잠시 후 여관 앞 대로에는 몸 한두 군데 부러지지 않은 병사가 없게 되었다. 나는 아까 샌슨을 기습했던 놈을 걷 어차며 말했다.
“이 자식들아. 난 오거 슬레이어다. 어디서 함부로 덤벼?”
일루전이긴 하지만 분명히 난 오거나 가고일, 퓨리아와 싸웠고 오크나 우르크, 트롤과는 실전도 겪었던 사람이다. 기본이 엉망인 것은 이 병사들이 나 나나 마찬가지지만 내겐 그런 끔찍한 경험들이 있다. 아마 그 경험 덕택에 이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 난 기고만장해서 그놈들을 다그쳤 다. 샌슨은 그런 나를 말렸다.
“그만해라, 후치. 이거, 좀 비슷하게 싸웠다면 상관없지만 너무 기본도 안 된 녀석들이군. 때린 내가 가슴 아플 지경이다.”
쉐린은 멍청한 표정으로 계단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유스네는 하인들을 다그쳐 그 사병들을 부축하게 했다. 하지만 유스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그것은 샌슨도 마찬가지였다. 샌슨은 찌푸린 얼굴로 자신과 나의 위업의 증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야 떠나면 그만인 사람이지만 쉐린과 유스네는 계속 여기서 장사를 해나가야 할 사람이죠. 마무리는 해야겠습니다. 모두 홀 안으로 데려가 주 십시오.”
유스네는 고맙다는 듯이 샌슨을 바라보았다. 하인들은 병사들을 부축하여 안으로 옮겼다.
홀 안으로 들어오자 샌슨은 그 리더로 보이는 놈을 테이블에 앉혔고 칼과 쉐린도 그쪽에 함께 앉았다. 다른 병사들은 좀 떨어진 테이블에 앉히고 나 와 이루릴이 그들을 감시했다.
유스네는 일단 맥주 한 잔씩을 가져와 병사들과 우리들 모두에게 돌렸다. 마치 그 싸움이 동네 청년들의 혈기에 의해 벌어진 단순한 것이며, 이제 원 만하게 웃으며 끝나야 될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사실 아무도 치명적으로 다치진 않았으므로 유스네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적절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당차고 요령 있는 계집애네. 병사들은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맥주잔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칼과 샌슨은 그 리더(이름은 한스덱이라던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스덱은 처참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계속 화를 내고 있었고 샌슨도 무지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칼과 쉐린이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듯했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홀의 벽에 기대서서 병사들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릴도 내 옆에 똑같이 비스듬히 서 있었 다. 병사들은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고, 아무리 적이라도 술잔을 앞에 놓고 저런 표정 짓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두 손 모두 테이블에 얹고 일어서지만 않으면 간섭하지 않겠어요.”
병사들은 내 말을 듣더니 미소 비슷한 것까지 지었다. 병사들은 복부를 쓰다듬거나 뺨을 문지르거나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중 하나가 나에게 말 을 걸었다.
“야, 꼬마야.”
“왜? 그리고 후치라고 불러요.”
“후치라고? 웃긴 이름이군. 난 켈리다. 어쨌든 너 무슨 힘이 그렇게 좋냐? 그리고 오거 슬레이어라고? 그 말은 네가 오거를 잡았다는 뜻이야?”
“오거, 가고일, 퓨리아, 호브고블린, 미노타우로스와 싸운 적도 있고, 우르크 아홉 마리와 싸우기도 했고, 트롤과는 오늘 아침에 싸웠지. 트롤이 제 일 귀찮던데요. 자꾸 재생해서.”
병사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켈리가 말했다.
“새끼…………, 허풍치는 것 아냐?”
“트롤 죽인 건 봤을 텐데, 켈리, 다른 것도 다 사실이지요. 내가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거짓말을 해?”
켈리는 할말이 없는 표정이다. 그들은 마치 내가 줄줄 불러대는 몬스터들 중에서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다. 나는 의아해졌다.
“당신들은 사병이라며? 뭐 한가락 하는 게 있으니 사병으로 뽑힌 거 아녜요?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을 텐데.”
켈리는 기분 나쁜 듯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새꺄, 너희 같은 촌놈들이 아니라면 아무도 우리에게 덤비지 않아. 그래서 우린 누가 감히 덤빌 거라는 생각을 못한단 말이야. 그래서 방심했지.”
“그러셔? 샌슨과 내가 충분히 주의를 주었을 텐데 방심씩이나 하셨어요?”
“……너희들은 지금 기고만장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편이 모두 출동하면 너희들은 곧 끝장난다. 좋아할 수 있을 때 좋아해 둬.”
나는 욱했다. 하지만 이루릴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그럼 하나 묻겠는데, 왜 트롤이 도망쳤을 때는 당신 편들이 모두 출동하지 않은 거지요?”
“우린 자고 있었어! 이른 시간이었잖아?”
병사는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기가 막혔다. 그때는 해가 뜨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나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영지를 구보하며 훈련을 시작하는 우리 고향 경비 대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니, 초병은 있을 거 아냐? 그리고 우리들이 싸우기 시작한 건 트롤들이 설치고 나서도 한참 후였어요. 그리고도 또 한참 동안 싸웠고. 그 정도면 얼마든지 출동할 수 있었을 텐데?”
켈리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막사는 시장에서 좀 멀다.”
그 말에 유스네가 피식 웃었다. 병사들은 험악하게 유스네를 바라보았지만 유스네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실리키안 저택은 시장 바로 옆에 있어. 꽤 멀지. 한 1분 거리.”
말도 안 나오는군. 난 맥주잔을 비워버렸다.
“돈다, 돌아! 레이디 유스네. 한 잔 더 부탁해요.”
유스네는 빙긋 웃으며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이루릴이 나를 말렸다.
“그만 마셔요. 당신은 아까도 많이 마셨고 지금도 많이 마셨어요. 6파인트는 마셨을 거예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스네가 먼저 말했다.
“아니, 이분이 드시고 싶다면 드시는 거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엥? 와, 대단한 상인 정신일세. 그렇게 팔아먹고 싶나?
“아니, 괜찮아. 유스네. 그만 마셔야지. 그리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상인 정신을 드러내서야 쓰겠어?”
유스네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긴 왜 놀라. 갑자기 유스네의 얼굴이 확 구겨지더니 외쳤다. “바보! 누가 팔아먹고 싶어선 그런 줄 알아!”
유스네는 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속셈을 들켰으면 얌전히 물러나지 바보라니. 정말 성격이 독 오른 독사 같은 계집애로다. 병사 들은 히죽 웃었다. 뭘 웃는 거야?
나는 벽에 기대어서서 바스타드를 꺼내어 그 날을 살펴봤다. 트롤을 베고 핼버드와 부딪히고 그 난리를 치느라 이가 빠진 부분이 없나 살펴봤지만 날은 발랐다. 흠, 그러고 보니 쇠붙이와 직접 부딪힌 적은 없었지. 하지만 그 병사들은 내가 바스타드를 바라보고 있자 모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켈리가 다시 기분 나쁜 소리로 말했다.
“이 꼬마야, 너 잘난 힘이 있다고 까불지만, 네가 마법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수 있겠어?”
“당신 마법 쓰나?”
“흥! 남작님은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을 고용하시고 계시단 말이야. 아프나이델은 너희들쯤은 죽기도 전에 혼을 뽑아놓을걸? 네가 우리한테 한 짓을 안다면 아프나이델은 반드시 그럴 거다!”
“어라, 마법사라・・・・・・ 좋지 않은 소식이네.”
정말 좋지 않은데. 난 트롤들을 하늘로 날려버리고 악마 발러를 불러내어 미노타우로스들을 박살내고 온갖 해괴한 몬스터들의 환상을 만들어내던 타이번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작자들이 말하는 사람은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대마법사라고?
그때 샌슨이 나를 불렀다.
“어이, 후치! 가자.”
“어딜 가?”
“그 남작을 만나봐야지. 부하들과는 이야기가 안 돼.”
“어, 어? 적진으로 걸어들어가는 거야?”
“원 녀석도. 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탈출한 트롤을 처치해 줬는데 병사를 보내다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 사례를 요청하고 싶은 생각은 없 지만 사리는 따져봐야겠어. 게다가 우리가 이 병사들을 조용히 돌려보내 주면 그쪽에서도 뭐라 못하겠지.”
“잠깐, 잠깐! 거긴 마법사가 있대! 아니, 대마법사!”
샌슨은 당황했지만 곧 평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저렇게 물어오면 할말 없지.
“빨리 가자고, 대마법사가 기다리잖아.”
쉐린은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샌슨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꼭 거길 찾아가겠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이 찾아가면 그가 사과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바보 같지 않습니까? 그냥 이대로 떠나는 것이 나을 텐데요. 우리 때문이라면…………. 그리고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은 잔혹한 사람입니다. 남작이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것도 그 아 프나이델 때문입니다.”
“위험할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이렇게 그 사람의 병사들을 데려다주면서 대화를 하자고 하면 그 사람도 우리를 심하게 몰아세우지는 못하겠지요.” 쉐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간단할 것 같습니까?”
어떻게 갈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결국 우리는 말을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샌슨은 그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와 칼은 지금 말을 타고 레너스 시의 대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으며 우리들 사이로는 여덟 명의 사병들이 2열 종대로 걷고 있었다. 흠, 말에 앉은 채 이들과 함께 걷고 있으니 이 사병들을 묶은 것도 아닌데 확실히 무슨 포로 인솔하는 듯이 보이는군. 아마 샌슨은 그런 효과를 노린 모양이다.
흘깃 쳐다보니 사병들도 얼굴을 붉히고는 주위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 하지만 레너스 시의 시민들은 우리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야, 저거 실리키안 남작의 경비병들 아냐?”
“그러네? 그런데 왜 저렇게 상한 거야?”
“저기 말 탄 꼬마는 아침에 그 꼬마야! 트롤 목을 베어내던.”
칼은 주위의 사람들이 쳐다보며 수군거리자 얼굴을 붉히며 투덜거렸다.
“이거, 원. 포로 교환이라도 하러 가는 장군이나 된 것 같아.”
“헤? 맞아요! 칼. 좋은 지적이군요.”
나 또한 위엄 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면서 대답했다. 나는 제미니가 무릎을 쭉쭉 들어올리면서 걸어가기를 바랐지만, 제미니는 그저 밭 가는 말 처럼 털레털레 걸어서 날 언짢게 만들었다. 에라, 관둬라. 제미니는 제미니지. 말이나 사람이나
그리고 샌슨은 그 병사들 뒤에서 걷고 있었다. 자신의 말 슈팅스타에는 이루릴을 태우고 자신은 말고삐를 붙잡은 채 땅에서 걷고 있는 것이다. 이루 릴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함께 타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샌슨은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사양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쉐린이 여관의 하인들과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사양했지만 쉐린은 자기 손님이므로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혹시 여러분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그 남작이 강짜를 부릴지 모릅니다. 당신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울걸요. 우리가 당신들을 보 호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면 남작도 함부로 당신들을 감금하거나 하지는 못할 겁니다.”
쉐린은 그렇게 말하고 하인들과 함께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다. 대로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 중 하나가 고함을 질러왔다. “보쇼! 그 사람들은 왜 그 모양이오?”
그러자 그 사병들의 리더 한스덱이 고함을 질렀다.
“돌대가리 같으니! 이놈들이 트롤을 죽였으니까 그 보상금을 받아야지. 그래서 남작님께 압송하는 것이다!”
나는 말에서 고꾸라질 뻔했고 칼과 샌슨, 이루릴은 웃어버렸다. 말을 건 그 남자는 침을 탁 뱉더니 머리를 좀 긁적이며 말했다.
“퉤! 글쎄. 누가 누굴 압송한다고요?”
주위의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말을 타고 있으니 여러 모로 좋군. 한스덱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었지만 맨손이라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핼버드는 내가 부러뜨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더럽게 불안하네. 나는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자일까? 타이번은 발러를 불러냈으니 그 대마법사는 혹시 드래곤이라도 불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봐요, 한스덱. 아프나이델은 어떤 사람이지요?”
한스덱은 날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사람 같지 않은 놈이야. 너무 무서워.”
“그렇게 무서워요?”
“나라면 죽고 싶어질 때만 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릴 거야. 그 사람은…………….”
한스덱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무서운 마법사의 부하들을 두드려 팬 다음 이렇게 데리고 가고 있다 고? 으으, 불안해.
실리키안 남작 저택이 보였다. 저택은 웅장했지만, 그것을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 저택보다 더 관심을 끄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택 앞의 정원에는 지금 차양이 쳐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붉은 카펫을 깔아두고 있었다. 그 카펫 위에는 화려한 의자를 가져다놓고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남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전갈을 받았는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는데, 도대체 음식 튈까 겁나서 밥도 못 먹을 그런 옷이다. 그는 옆에 있는 하인이 무릎을 꿇은 채 들고 있는 사발에서 뭔가 과자 같은 것을 계속 주워먹고 있었다. 역겹군.
그리고 그 옆에는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젊은 남자가 서서 지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로브를 본 순간 나는 타이번의 로브 를 떠올렸다. 타이번의 로브는 밤에 잘 때 좋을 정도로만 기능적인 옷이지만 저 옷은 완전히 ‘나 마법사요.’하고 고함을 지르는 듯한 옷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별 모양의 장식과 불꽃 모양의 무늬를 넣었겠는가. 아마 저 남자가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인가 보군.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 었지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라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젊은 얼굴이었다. 대마법사라길래 아주 늙은 사람을 생각했는데.
그리고 좌우로는 역시 체인 메일을 걸치고 핼버드를 든 사병들이 쫙 펼쳐져 있었다. 30명 가량이었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대로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뒤로는 쉐린과 여관의 하인들, 그리고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시민들이 서 있었다. 시민들은 남작과 그 대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우리가 데려온 사병들에게 말했다.
“자, 저기 당신 편 있어요. 가서 옆에 서는 것이 어때?”
하지만 그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어라? 이거 왜 이래? 리더인 한스덱은 울상이 되어 더듬더듬 말했다.
“주, 죽었다!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이………….”
그때 의자에 앉아 있던 그 남작이 하인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손님들, 내 집에 어서 오시게.”
나는 칼과 마주본 다음 말에서 내렸다. 뒤쪽에서 이루릴도 말에서 내렸으며, 샌슨과 이루릴은 앞으로 나왔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셋, 엘프 하나. 맞군.”
“당신이 실리키안 남작이라는 그 투기장 주인이에요?”
나는 궁금해서 물었지만 남작은 관자놀이를 꿈틀거렸다.
“투기장 주인? 그래, 내가 실리키안 남작이니라.”
“가짜라며?”
남작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워낙 입에서 진실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기분 나쁘셔도 어쩔 수 없지. 실리키안 남작은 내게 고함을 지르는 대신 내 뒤를 쳐다보았다.
“한스데엑!”
한스덱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앞으로 나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실리키안 남작은 말했다.
“보상금을 받아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놈이 이렇게 오만 방자한 게냐?”
“기, 기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관에 도착하자 저들이 여관 주인 쉐린과 공모하여 우리를 덮쳤습니다! 그, 그래서 우린 무장을 해제당하고…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대단하군. 거짓말도 어느 정도 통할 가능성이 있을 때 해야지, 저런 닭대가리가 있단 말인가? 의자에 앉아 있던 실리키안 남 작은 볼을 씰룩거리며 한스덱을 내려다보았고 한스덱은 결국 못 견디게 되어버렸다. 한스덱은 땅에 이마를 박았다.
“날 속일 생각인가?”
“주, 죽을 죄를…….”
“그럼 죽어야지.”
한스덱은 눈을 들어 절망적인 표정으로 남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남작은 한스덱에게서 눈을 돌려 옆에 있던 그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이라는 사람 을 바라보았다. 나는 전율해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아프나이델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눈을 내려 한스덱을 내려다보았다. 한스덱의 얼굴이 초주검이 되었다. 그는 그만 몸을 젖히고는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 살려주십시오!”
아프나이델은 로브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근엄한 동작으로 꺼낸 그의 손에는 검은색의 밧줄이 들려 있었다.
“살 가치를 보여주고 살려달라고 해라, 한스덱.”
아프나이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는 밧줄을 그 한스덱에게 집어던졌다.
“으아아아!”
한스덱은 마치 같은 크기의 뱀이라도 날아온 것처럼 질겁을 하며 비명을 지르고 팔을 휘둘렀다. 뭐야? 밧줄을 보고 기겁하다니? 아프나이델은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타이번처럼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다가 빠르게 말했다.
“애니메이트 로프! 휘감아 얽혀라!”
한스덱의 몸에 던져진 로프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한스덱의 목을 감더니 목 뒤에서 한 번 엉켜서 묶였다. 한스덱은 목을 졸리지 않기 위해 양쪽 끝을 있는 대로 잡아당겼지만, 간신히 졸리는 걸 막았을 뿐 몸에서 떼어내지는 못했다. 한스덱의 얼굴은 시뻘겋게 되어버렸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품속에서 뭔가 가루를 꺼내어 한스덱에게 집어던지더니 또 스펠을 캐스트했다.
“로프 트릭!”
그러자 곧 한스덱의 목을 감고 있던 로프는 한쪽 끝이 하늘로 올라가고 다른 쪽 끝은 땅으로 꼿꼿하게 섰다. 그러자 그 중간에 목이 묶인 한스덱은 당장 자신의 몸무게로 목이 졸리게 되었다.
“크억, 케켁!”
이런, 죽겠어! 아무리 무서운 마법사라도 못 참겠다.
“이익, 무슨 짓을!”
내가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먼저 이루릴이 움직였던 것 같다. 내 눈에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물결치는 것이 보였으니까. 이루릴은 한스덱에게 달 려들더니 망고슈로 로프를 쳤다. 탱!
뭐야? 예사 밧줄이 아닌가? 이루릴은 낭패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한스덱의 몸을 끌어올려 목이 졸리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밧 줄은 위아래로 잡아당겨지고 있는 것이라 한스덱의 몸을 들어올린다고 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프나이델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건 보통 밧줄이 아냐. 어리석은 엘프. 그건…….”
아프나이델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옆으로 일자무식을 사용해서 그것을 잘라버렸으니까.
한스덱이 털썩 떨어지고 나서 나는 일단 그자의 숨이 붙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바스타드를 옆으로 내리 며 말했다.
“이것 봐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실리키안 남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고함을 질렀다.
“이놈! 감히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바뀌면서, 그는 다시 품속을 뒤졌다. 이런, 또 뭐하려는 거야? 그런데 타이번은 아무런 도구나 가루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았는 데 저 친구는 뭐가 저렇게 복잡해? 대마법사라 그런가?
내가 생각을 정리할 사이도 없이 아프나이델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작고 하얀 이상하게 생긴………… 뼈다귀? 그는 그 뼈다귀를 나에게 집어던졌다. 이런! 기분 나쁘게? 하지만 이걸로 날 어쩌겠다고? 아프나이델은 빠르게 캐스트했다.
“스케어!”
뭔가 끔찍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난 당황해서 아프나이델과 땅에 떨어져 뒹구는 그 뼈다귀를 한 번씩 바 라보았다. 내가 무슨 마법에 걸렸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던 한스덱이 갑자기 미칠 듯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으아! 저, 저리가! 으웨엑!”
한스덱은 달려가다가 데굴데굴 구르며 땅에 고꾸라졌다. 그러더니 그대로 머리를 싸매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쪽 방향에 있던 병사들이 한스덱을 붙잡았으나 한스덱은 질겁하며 그 손들을 쳐내었다.
아프나이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꼬마, 너, 너 아무렇지도 않냐?”
“글쎄, 기분이 좀 나쁘군. 뼈다귀를 맞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그런데 이거 무슨 뼈야? 당신이 아침 식사 때 먹다가 감춰둔 닭뼈야?”
아프나이델은 나와 이루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에, 엘프야 사자(死者)의 공포를 느끼지 않지만, 너, 넌 사람인데?”
그때 칼과 샌슨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칼이 침착하게 말한 다음에야 나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악한 마법을 쓰는군요. 죽은 자의 뼈로 일으키는 마법.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무서운 공포를 주는 고약한 마법이지. 하지만 당신 앞에 있는 그 소년은 죽은 자에게 별로 공포를 느끼지 않아요. 워낙 죽은 사람을 많이 봤거든. 그리고 그건 우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경향이지.”
아프나이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지러지듯이 말했다.
“너, 너도 마법사냐!”
“아니, 독서가요.”
이게 죽은 자의 뼈라고? 에이, 찝찝해. 나는 그 뼈를 걷어차 버렸고 아프나이델은 그런 나를 못 믿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 뼈를 구하려면 틀림없이 무덤을 팠다는 말이겠지? 나는 아프나이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하, 이거 굴 같은 놈일세. 무덤을 파서 이걸 손에 넣은 거야?”
칼이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건 아닐세. 네드발 군. 언데드 몬스터에게서 얻는 거라네.”
“그래요? 어, 흠. 어쨌든 괜히 겁먹었군. 그런데 이 사람 대마법사 맞아요? 난 마법사라면 리버스 그래비티로 하늘과 땅을 뒤집고 공간 이동으로 악 마를 불러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밧줄 가지고 장난치고 가루를 뿌리고 뼈다귀를 던지네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딱 벌렸다.
“이, 이놈! 날 모욕하느냐!”
“어,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아는 마법사란 그런 것인데. 좀 시시하네?”
아프나이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허겁지겁 다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또 밧줄이네? 아프나이델은 곧장 밧줄을 집어던지며 외쳤 다.
“애니메이트 로프!”
“엇, 위험해!”
나는 가까이 있던 이루릴과 칼을 밀어버리면서 앞으로 나섰고, 그러자 밧줄은 나에게만 감겼다. 아프나이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우리 넷을 한 꺼번에 잡을 생각이었나 보다. 어쨌든 아프나이델은 샌슨과 칼을 노려보았다.
“이 입이 더러운 꼬마는 천천히 처리하기로 하고, 이제 네놈들 차례군. 어떻게 해줄까?”
샌슨은 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그거 언제까지 감고 있을 생각이냐?”
“그렇게 오래 감고 있을 생각은 없어.”
난 팔에 힘을 주었고 곧 밧줄은 토막토막 끊어지면서 떨어져 나갔다.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이 탄성을 올렸고 아프나이델은 기겁했 다. 그는 그제야 내 장갑을 보았다.
“그, 그것은 OPG! 네놈이 뭔데 그런 보물을!”
“선행에 대한 대가로 선물받았지.”
실리키안 남작은 노호하기 시작했다.
“아, 아프나이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신 마법이 통하지 않는가?”
“이, 이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에잇, 병사들! 저놈들을 붙잡아라! 아니, 죽여라!”
아프나이델은 뒤로 물러났고 실리키안 남작도 당황하여 의자에서 일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30여 명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핼버드는 좀 끔찍스럽게 생겼군. 우르크의 글레이브보다 더 무서운데? 칼은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남작!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당신들이 놓친 트롤들이 사고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잡아준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오?”
남작은 맞고함을 질렀다.
“다, 닥쳐라! 네 놈이 감히 나의 트롤을 죽이고도 이렇게 뻔뻔하게 구느냐?”
칼은 대답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내게 고함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희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군. 그건 내가 연구용으로 쓰도록 바쳐야겠어. 병사들! 죽여도 좋다, 가라!”
이게 말인가? 이게 정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나는 욕설을 퍼부어주기 위해 나섰다. 그때 이루릴이 나의 앞을 막았다.
“어, 이루릴? 비켜요!”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후치, 우린 친구죠?”
“몇 번 물어도 대답은 똑같아요!”
“그럼 당신이 32명의 병사들을 상대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맞겠지요?”
32명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 맞긴 맞는데, 에,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요? 당신이 위험해지게…………….”
“난 위험하지 않아요.”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모았다. 병사들은 아름다운 엘프가 앞을 막자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루릴은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 했다. 어랏? 캐스트?
“그리스.”
“으악!”
사병들은 일제히 발이 미끄러지며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빠르게, 이루릴은 또다시 캐스트했다.
“페더 폴.”
곧 사병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병사들은 나가떨어지다가 그대로 둥실 떠올랐다. 균형을 못 잡고 쓰러지려고 하지만 느릿느릿하게 쓰러졌 다. 마치 물 속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병사들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몸을 똑바로 세우려 애썼지만 자기 몸이 잘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이다.
페더 폴이라.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마법인가. 이루릴이 마법사였나! 하지만 칼을 두 자루나 능숙하게 쓰는 모습은 마법사 같지 않았는데. 그런 데 마법을 쓴다면 왜 우르크들과 싸울 때는 쓰지 않은 거지? 아! 기주(記呪)다.
그렇군. 그날은 이루릴이 우리 대신 불침번을 섰다. 그래서 아침 일찍 마법을 암기하는 기주를 못했기 때문이겠군. 칼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마법사가 마법을 쓸 때, 그것은 목수가 못질을 하거나 나무꾼이 도끼질을 하는 것과 달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쓰지만 마법사는 자연의 힘을 쓰거든. 그런데 이 다르다는 점을 잘 봐야 해요. 정말 능숙한 목수는 중력을 이용하며 못질을 하지. 그리고 못과 망치가 부딪힐 때의 반발력도 자연스 럽게 처리해. 일반인은 몇 번만 휘둘러도 지쳐버리는 망치를 목수는 수백 번씩 휘두르는 것은 자신의 힘보다는 자연의 힘을 쓰기 때문이지. 결국 자 신의 힘을 쓰는 사람들도 그 기술의 정점에서는 자연의 힘을 이용하게 돼요. 하물며 원래부터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어떻겠어. 그 사람들은 매일매일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해 일부러 연습할 정도야. 그것이 기주의 목적이지. 네드발 군. 물론,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냥 그날 쓸 마법을 외 우는 것이지만, 원래는 복잡한 의미가 있어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이루릴은 숨쉴 사이 없이 계속 캐스트를 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지금 이루릴이 하는 말은 나도 알아들을 수 있 는 말이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춤을 춰요, 내가 바라보는 이 시간과 이 공간에.”
쉐애애애액! 쏴아아아아………… 까르르르르.
바람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허공 중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똑바로 바라보면 보이지가 않았다. 옆눈길로 바라볼 때만 흘깃흘깃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작은 사람 같 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똑똑히 볼 수가 없다. 균형을 못 잡고 애쓰던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얼빠진 얼굴로 공중을 바라보았다. 칼이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걸 볼 줄이야! 실프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