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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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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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었다.

에델린은 해가 지고 나서야 기도를 멈추었다. 해가 지고 나면 헬카네스의 영역은 끝난다. 따라서 게덴도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급성 환자들은 거의 치료가 끝났고 시민들은 모두 약을 먹거나 음식을 먹은 다음 편히 누워 있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지만 기진맥진한 칼은 그런 인사도 받아줄 힘도 없는 모습이었다. 거의 강제로 칼에게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해놓고는 내가 그와 교대했다.

환자들의 잠자리를 살펴보고 혹시 심각한 예후가 있는지 본다. 그리고 물수건을 갈아준다. 할머니 한 분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쥐었 다. 검버섯이 피어난 가느다란 손가락에 아무 힘이 없었다. 내 손을 쥔다기보다는 그저 그 위에 얹어두는 모습이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할머니.”

그러자 그 할머니는 더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나는 뭘 실수했나? 잘못한 게 없는데? 그 할머니는 서글프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여요? 난 스물세 살이에요.”

난 기절할 듯한 심정이었다. 아니, 이 주름살은? 그리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거지?

“조로증(早老症)…………. 죽고 싶어요…………, 으흑!”

그 할머니 처녀는 펑펑 울었다. 나도 눈물이 솟구쳤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가장 아름다워야 될 나이에 노인이 되어버린 처녀에게. 나는 목메인 목 소리로 말했다.

“나, 나으실 거예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처녀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보이기도 싫다는 듯이 시트를 덮어썼다.

너무 잔인한 병이군. 너무, 너무 처참하군. 나는 눈물을 닦으며 다른 환자에게 걸어갔다. 더 처참한 모습이 기다릴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난 그들을 돌보고 있으니, 불안한 표정은 안 되겠지. 난 되도록 밝은 표정으로 거식증에 걸린 남자에게 저녁을 먹이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그 남자에게 먹인 양보다 그 남자가 내 옷에 토한 양이 더 많았다. 쉬운 일이 아닌걸.

환자들을 대충 살피고 돌아왔다.

칼은 지쳐서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기도를 하고 있던 에델린도 거의 혼절할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신전 한쪽 벽에 기대어 앉 아서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이루릴도 마찬가지로 지쳤겠지만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이외에는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수프 를 접시에 담아 에델린에게 가져다주었다. 에델린은 말도 제대로 안 나와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들게 스푼을 들었다. 그러나 스푼을 놀릴 힘이 없자, 에델린은 그냥 접시째 마셔버렸다. 입이 크니 유리한 점도 많군.

터커는 크라일이라는 그 전사를 일으켜 앉혀 음식을 먹이고 있었다. 산욕열에 시달리던 부인께 음식을 먹이는 남편? 왠지 ‘수고했어요, 부인.’이라 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 크라일은 역정을 부렸다.

“음식 정도는 먹을 수 있으니 신경쓰지 마.”

“알았어. 어, 그런데 펠레일은 어디 갔지?”

내가 대답해 주었다.

“부엌에서 먹겠다던데요.”

터커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부엌 쪽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 펠레일은 터커에게 귀를 잡힌 채 끌려왔다. 터커 는 펠레일에게 호령했다.

“자, 어서!”

펠레일은 처참한 눈초리로 터커를 바라보았지만 터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펠레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그 둘을 바라보기만 했다. 펠레일은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 듯한 걸음걸이로 벽에 있는 에델린과 이루릴에게 다가갔다.

“이, 이루릴 세레니얼 양이시죠? 전 펠레일입니다. 마, 마법사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저, 말을 건 까닭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부, 불쾌하셨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가, 감사합니다.”

펠레일의 얼굴은 쥐어짜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많이 놀라신 것 같더군요. 아까 비명을 지르시길래.”

“아, 제, 저의 그, 실수입니다, 그것은 너무 당황해서………….”

“그런가요. 이해하겠습니다. 이제 당신과 전 친구인가요?”

“예?”

펠레일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해했고 난 미소를 지었다. 펠레일은 잠시 당황하다가 대답했다.

“어, 저, 예. 친구라는 게 그러니까………… 저, 은혜를 입었으니 당신은 제게 소중한 분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친구라 할 수도 있겠 지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거라면, 예.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참. 성기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난 뒤에 환자가 누워 있어 뒤로 쓰러지진 않았다. 샌슨은 수프를 엎지르고 말았고, 크라일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있던 칼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에델린은 갑자기 몸을 뒤로 빼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불쌍한 펠레일은 괜찮다는 뜻으로 적당히 우물거린 다음 다시 부엌으로 달아나버렸다. 터커는 그 뒷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번엔 멍한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경악에 휩싸인 우리를 보더니 질문했다.

“저, 왜들 그러시죠?”

사만다는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와서 질문했다.

“저분, 원래 저러시니?”

“그런가 봐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시 우리는 환자들에게 흩어졌다. 에델린은 종일 기도했으니 쉬라고 말하는 우리를 물리치고는 다시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확 실히 에델린이 나서니 간단했다. 에델린은 큐어 디지즈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이 대충 치료해 둔 환자들을 거의 완치시켰다. 하지만 조로증에 걸린 그 처녀를 치료할 때는 에델린도 악전고투를 했다.

“이런 끔찍한 병이…….”

칼의 지식으로도 이런 병에는 무슨 처방을 써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간다. 더 빠르게 늙어가는 것은 쉽지만, 거 꾸로 돌릴 수는 없다. 젊음을 되돌릴 수 있는가?

과연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가?

에델린은 시간을 되돌렸다.

“전능한 신의 손길로 유피넬의 저울대에 걸린 헬카네스의 추를 내린다. 법칙 안에서 만물을 감싸 포용하라. 포용함으로 법칙을 이겨내라.” 우리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에델린과 그 처녀를 바라보았다.

처녀의 얼굴에 주름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에는 다시 통통하고 보기 좋은 살이 오르고 있었고, 시트 아래에서 실팍한 가슴이 솟아오르고 있 었다. 처녀는 자기 얼굴을 만져보았다. 처녀는 눈물을 쏟았다. 나도, 칼도, 샌슨도 눈물을 쏟았다. 터커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고 크라일은 거 칠게 눈을 닦았다.

“허 이것 참. 눈물 흘려본 게 얼마만이지?”

“에라이, 곰 같은 놈아. 이럴 땐 울어도 돼………….”

터커의 말이다. 처녀는 펑펑 울면서 에델린에게 안겼다. 에델린은 그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처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등 뒤에 이루릴이 서 있었다. 이루릴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루릴의 미소는 좀 당황스러운 미소다. 난 의아 스러웠다.

“이루릴, 뭐가 잘못되었나요?”

“저 주문………., 위험한 주문이군요.”

“예?”

“법칙을 깨는 주문이군요. 하지만 유피넬의 저울대는 길고, 끝이 없는 법. 처녀의 젊음이 되돌아왔다면, 어디의 누군가가 젊음을 잃었겠지요.”

이루릴의 평온한 설명을 듣다가, 나는 느닷없는 경악을 느꼈다. 누군가가 젊음을 잃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트롤의 얼굴 에 나타나는 노쇠의 증거는 무엇일까? 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루릴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밤이 꽤 깊었을 무렵, 마지막 환자의 치료가 끝났다. 에델린은 기진맥진하여 나의 부축을 받아 잠자리로 걸어갔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에델린의 거 구를 부축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지만, 샌슨은 에델린을 부축하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참 짓궂어 보이는 미소다.

에델린을 눕히고 나는 칼에게 돌아갔다. 칼은 램프 하나를 마치 모닥불처럼 가운데 놓고는 다른 사람들과 모여 있었고, 그 무릎 위에는 슈가 잠들어 있었다. 램프 주위에 앉아 있던 터커가 말했다.

“저희들도 어디에 빠지지 않는 모험가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분들은 더 놀랍군요. 어떤 모험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모험가’라고? 허. 샌슨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린 모험가가 아니라 여행자일 뿐입니다. 우연히 이 영지 앞에서 에델린을 만났고요.”

그러자 사만다가 말했다.

“겸손하시네요. 저 소년이 가진 것은 OPG잖아요? 보통의 모험가라면 구경도 하지 못할 아티팩트인데.”

모험가라. 음. 그 낭만적이고 짜릿한 단어가 나를 지칭한다니. 이거 기분은 요절할 듯이 좋은데. 그러나 칼은 우리가 잡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칼 은 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네드발 군, 퍼시발 군. 힘이 좀 남았나?”

“시킬 일이 뭐지요?”

“신전 주위를 경계해야 될 것 같아. 밤이 되었으니 헬카네스의 기운은 이제 사그라들었지만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흠, 난 그게 뭔지 알겠다. 샌슨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 말씀이죠?”

터커 일행이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터커가 말했다.

“어, 뱀파이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제 저녁, 영지 바깥에서 만났습니다. 우릴 쫓아내려 하더군요.”

“아, 그래요.”

칼은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터커에게 질문했다.

“그 뱀파이어에 대해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희도 잘 모릅니다. 아마 이곳이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자 질병 중의 질병인 뱀파이어가 생겨난 것 같은데요.”

“꽤 신빙성 있는 말이오. 당신들은 어디서 그녀를 만났소?”

“저희들이 이 영지에 들어서던 첫날 밤, 그 뱀파이어가 공격해 오더군요. 펠레일이 간신히 막아내었습니다만 그때 펠레일이 너무 힘을 써버린 까닭 에 그 다음날 바로 우리들도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런 것이었군요.”

“예. 다음날부터 먹구름이 끼어 우리는 간신히 병이 더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들을 옮겼습니다. 영주나 고관들은 이미 다 죽었더군요. 어떤 책임자도 만나볼 수 없어서 우린 산 사람들만 일단 이곳으로 모았습니다. 바깥에 방역을 위해 구덩이를 파고 기름을 부어둔 것 보셨습니까? 아마 우 리가 오기 전부터 이곳으로 환자들을 모은 모양입니다. 환자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터커는 말하다가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시체를 모아 소각하는데 그 뱀파이어가 공격해 오더군요. 낮에 뱀파이어를 만나서 너무 놀랐습니다. 간신히 물리치고 나서 사만다가 설명 해 주더군요. 먹구름 때문에 낮에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맞아, 사만다? 응. 그래. 그 다음에는 보지 못했는데, 아마 여러분을 공격하러 갔다가 크게 당한 모양이죠?”

“예. 싸우다가 물리쳤는데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 밤 다시 올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온다고 보아야겠군요. 우리는 완전히 그녀의 안마당에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요.”

우리는 대충 의논을 끝내었다. 내일은 반드시 조사를 해서 이 마을이 세이크럴라이즈된 이유를 밝혀내야 된다. 그래서 이루릴과 펠레일은 내일 아침 의 기주를 할 수 있도록 일찌감치 잠들었다. 그리고 칼과 사만다는 안에서 환자를 돌보기로 했고 에델린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그래 서 밖으로 나온 것은 나와 샌슨, 터커, 크라일이었다.

“결국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만 남았군.”

터커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난 크라일이 걱정되었다.

“크라일 씨.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쉬시지요?”

크라일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야, 나도 염치가 있지! 죽어가는 것을 살려줬는데 어떻게 드러누워 쉬라는 말이야?”

산욕열로 죽기도 하나? 뭐, 크라일의 기분을 생각해서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산후 조리가 안 좋으면 산모가 죽을 수도 있지. 그런데 산부(産父)는 어떨까? 킥킥킥.

우리는 건물 앞 정원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모여앉았다. 신전 건물 뒤쪽은 산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쪽으로는 문이 없다. 따라서 어디로 오든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릴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신전 안에서 찾아온 커튼을 마치 망토처럼 몸에 두르고는 모닥불을 등지고 앉아서(눈이 밝은 데 익숙해지면 어둠 속의 적을 볼 수 없다는 샌슨의 설명이 있었다.), 어두운 바깥을 바라보았다.

크라일은 샌슨에게 꽤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었고 샌슨도 여유 있게 웃으며 그 눈빛을 받아내었다. 양쪽이 다 기골이 장대하다 보니까 서로 일종의 호승심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크라일은 좀 난처한 병으로 쓰러져 있다가 구출당한 입장이라 위세가 약했다.

그는 두툼한 눈두덩이 아래에 작은 눈을 가졌고,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는데, 미소를 지을 때 볼에 보조개가 피는 점이 왠지 익살맞아 보이는 인 상이었다. 저런 얼굴에 보조개라니. 그는 그 보조개가 살짝 드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우습겠지만, 미드 그레이드에선 왼손의 크라일이라면 제법 이름이 있지. 그쪽은 어떤 모험을 하셨소?”

샌슨은 우아하게 웃었다. 샌슨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렇게 유쾌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 우우욱.

“말씀드렸다시피 전 모험가가 아니라 헬턴트 영지의 경비 대장일뿐입니다. 그리고 영지의 일로 수도에 보고차 여행하는 길이지요. 모험가라는 것과 는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러시오? 흠. 당신 손놀림은 시골 영지의 경비 대장 정도가 아닌데? 그 롱소드도 제법이고. 은제요?”

“은도금입니다. 저희 고향엔 라이칸스롭도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모두 이런 롱소드를 가지고 있지요.”

“허! 라이칸스롭이 심심찮게 나타난다고? 예끼, 여보쇼. 잘하면 트롤 몇 마리쯤은 아침 운동삼아 잡는다는 말까지 나오겠소.”

“어떻게 아시죠?”

당장 샌슨은 허풍을 마구 섞어가며 고향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에 대한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자랑이냐? 몬스터 많이 나타난다는 것도 자 랑이야? 정말 순진한 나의 친구 샌슨이여, 그대는 역시 물레방앗간에서 마음 졸이며 동네 처녀나 기다려야 할 운명이야. 껄껄껄. 내가 레이디 제미니 의 나이트가 될 운명…………, 나 아무 말도 안했어!

크라일과 샌슨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서로가 잡은 몬스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고는 커튼을 목에 두른 채 신전 정문으로 걸어갔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괴기스러웠다. 암흑, 아무런 불빛도 없이 암흑 속에서 암흑의 윤곽이 보인다. 달빛은 하늘을 물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희한하게도 땅은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푸르스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의 마을 모습이 내 마음을 음 울하게 만든다.

터커가 다가왔다.

“너, 제법이더구나. 오늘 환자들 돌보는 모습. 나, 전쟁에도 나가봤지만 네 나이 두 배나 되는 전사들도 썩어들어가는 상처를 보고 달아나버리는 것 을 많이 봤지.”

“설마 그럴 리야.”

“아냐. 아까 네가 피부병 걸린 남자의 몸에서 살갗에 달라붙은 붕대를 떼어낼 때 난 정말 놀랐지. 넌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하고 있었어. 전혀 불쾌 해서가 아니라 혹시 그 환자가 아프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어.”

누굴 말하는 거지? 워낙 많은 환자들의 뒤치다꺼리를 했더니 누굴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내가 아플 때 누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니까요.”

“그래? 그래. 간단한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결국 대화가 끊어졌고 나와 터커는 나란히 담장에 팔을 기대고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신전의 담장이라는 게 전혀 외부 의 침입을 막겠다는 의도는 없는 것이다. 신전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다 그러하듯이 이 담장도 상징적인 의미가 더 많은 것이며, 그래서 나와 터커는 간단히 팔을 기대고 그 위에 턱을 얹고는 아래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나는 어렵사리 질문할 것을 생각해 내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나요?”

“아, 우린 레너스 시로 가던 길이었어. 수중에 돈이 달랑거려서, 거기 투기장에서 돈이나 좀 벌려고.”

가슴이 뜨끔했다. 그 투기장 주인인 실리키안 남작은 우리에 의해 재산이 완전히 거덜났다. 투기장은 시의 소유니까 그대로 있겠지만.

“그 투기장, 말만 들었는데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던데요?”

“요령 있게 하면 죽진 않아. 그리고 모험가라는 것은 어차피 목숨 내놓고 돌아다니는 거니 특별할 것도 없고. 죽기 싫으면 집에서 농사나 지으면 되 는 거잖아.”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일부러 위험을 찾아다닐 이유는 없잖아요?”

“아니, 있어. 위험이 많은 곳에 보상도 많기 때문에 위험을 찾아다닐 이유는 충분하지.”

“그래요?”

“응. 너 아비스의 미궁에 대해 들어봤니?”

아비스의 미궁 타이번이 발러를 불러내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러가 산다는?”

“응. 우리가 지난달에 거기 들어갔었지. 아비스의 미궁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하지만 우리가 거기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말 야, 거기에 발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 아비스의 보물에 대한 그 믿기 어려운 이야기보다는, 발러라는 위험 때문에 확실히 보물이 있을 거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곧 엄청난 예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터커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도 끔찍스러워. 어떻게 반도 못 들어가서 길을 잃고 발러를 만났지. 크라일과 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고 펠레일도 자신의 마법이 전혀 통 하지 않아서 좌절했지. 그때 생각만 하면 요새도 등골이 섬뜩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지.”

터커는 정말 무섭다는 듯이 이마를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살아 있네요?”

“응. 이유를 모르겠는데, 우리를 다 죽여버리려던 발러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아마 우릴 살려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발러가 그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어쨌든 발러가 사라지자마자 도망나와서 간신히 살았지. 입구를 찾아나왔을 때는 정말 태양이 너무너무 고맙더군. 하지만 치료하느 라 돈을 다 날려버렸어. 그래서 레너스로 찾아가던 길이었지.”

난 탄성을 지를 뻔했다. 그때였구나! 타이번이 발러를 불러내었을 때, 발러는 모험가들을 박살내다가 불려왔다고 투덜거렸다. 그럼 이 터커 일행이 그때의 모험가들이구나. 참 세상이 좁기도 하군. 터커는 계속 말했다.

“발러가 우릴 살려준 것일까? 사만다도 그 점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해.”

“발러는 악마잖아요.”

“늑대다.”

“예? 발러가 늑대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저기 늑대가 나타났다. 칼이라는 그 양반은 선견지명이 있구나.”

터커는 말하면서 재빨리 핼버드를 고쳐잡았다. 나는 앞을 보았다.

언덕 아래에는 창백하게 번쩍거리는 불꽃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안광이었다. 수효는 대단했다. 어느새 언덕 아래에 늑대들이 모여 있었다.

늑대들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놈들은 마치 한가로운 듯이 여기저기로 오가고 있었지만 그 중간중간 우리들에게 섬뜩한 눈길을 보내었다. 터커는 주 의 깊게 정문 쪽으로 걸어가서는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저 빈약한 나무판은 몇 번만 걷어차도 간단히 부서져버릴 것이다. 터커는 입술을 깨 물었다. 샌슨과 크라일도 자기 자랑을 잠시 멈추고는 담장 쪽으로 걸어왔다. 각자 담장 뒤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내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늑대들은 우리 모습에 흥분한 것인지 어깨의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오가는 늑대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열네 마리. 모두 덩치가 예사롭지 않다.

“저놈들도 쉽게 달려들긴 어려울걸. 저 아래로 달려오려면 완전히 몸을 노출시키게 되니까.”

터커는 경험 있는 모험가답게 정리하고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석궁을 들어올렸다. 허리 뒤 혁대에는 작은 가방이 있었고 그는 그 안에서 쿼럴을 뽑 아들었다. 석궁을 밟고, 시위를 당겨 걸고, 신중하게 쿼럴을 장전했다. 그는 그대로 장전한 석궁을 허벅지쯤에 방만하게 내려놓고는 늑대들을 둘러보 았다. 마치 손에 든 것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안 쏴요?”

“흥분시킬 필요는 없잖아.”

늑대들은 지속적으로 으르렁거리기만 했지 함부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들은 천천히 한 발짝씩 언덕 위로 다가왔다. 터커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무래도 덤빌 모양인데.”

그는 석궁을 들어올려 겨냥했다.

“늑대란 놈은 말이지, 인간과 섬뜩하리만큼 비슷해. 지휘관은 촐랑대지 않아. 그는 전투의 모든 상황을 고려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갑자기 터커는 석궁을 쏘았다. 탱! 하는 경쾌한 소리.

“캥!”

늑대 무리의 약간 뒤쪽, 오만하게 앉아 있던 놈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몸을 뒤집었다. 그놈은 그대로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즉사했나? 터커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놈들이 배가 고프다면 좋겠는데.”

늑대들은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이없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 마리씩 쓰러진 놈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앞발로 툭 쳐보는 놈이 있는가 하 면, 주둥이로 슬쩍 건드려보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쓰러진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흠, 이제 식사 시작인가?

그 생각은 늑대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늑대들은 하늘을 보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 우우우우…… 크아악!”

늑대들은 미친 듯이 육박해 왔다. 언덕 아래와 신전 사이의 거리는 단숨에 사라지고, 놈들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도약, 놈들은 단숨에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샌슨과 크라일은 뛰어오른 놈들을 후려쳤다. 처음 두 마리는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밖에 나뒹굴 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놈들이 담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일자무식!”

뛰어오른 놈의 몸이 조각났다. 하지만 늑대는 열 마리나 남아 있었다. 놈들은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왔다. 지극히 열띤 싸움이 시작되었다.

“문 걸어 잠가요!”

고개를 빠꼼히 내민 이루릴에게 내가 외쳤다. 하지만 이루릴은 내 말을 거부했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오더니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양손엔 어느새 에스터크와 망고슈가 들려 있다.

“도와드릴까요, 후치?”

“아니, 그 문이나 막고 있어요!”

나는 그 와중에도 이루릴이 안에 있는 환자들은 자신의 친구가 아니므로 도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할 줄 알고 기겁했다. 이루릴이라면 왠지 그 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터커는 야수처럼 핼버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너무 길고 묵직해서 날렵한 늑대들을 상대하기엔 힘들었다. 그저 엄청난 솜씨로 몸 주위에 빈틈을 만들지 않는 정도였다.

크라일은 ‘왼손의 크라일’이라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의 팔치온을 오른쪽 어깨에 둘러멘 채 싸우고 있었다. 늑대가 뛰어 오르면, 크라일은 왼손 주먹으로 늑대를 후려친다. 늑대는 튕겨오르거나 땅에 처박히거나 한다. 어쨌든 그렇게 몸의 균형을 잃어버린 늑대는 단숨에 크라일의 오른손에 쥔 팔치온에 박살난다. 즉, 크라일은 왼손으로만 싸우며 오른손의 팔치온은 마지막 순간의 결정타에만 쓴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 렇게 싸우지? 크라일은 왼손 하나라 방어는 포기하고 발놀림으로 몸의 위치를 항상 늑대들의 사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샌슨을 보라! 저것이 헬턴트 사나이다. 몸 주위로 셀 수도 없는 검이 춤을 춘다. 내 일자무식과는 비교하기가 불가능하다. 저 오거 같은 다리가 늑대 를 걷어차면, 늑대는 네 다리를 휘저으며 솟구쳐오른다. 그리고 공중에서 샌슨의 롱소드에 베이는 것이다.

땅에 나가떨어진 늑대는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네 다리로 마구 땅을 긁으며 나뒹굴었다. 꼭 덫에 치인 늑대 꼴이네? 샌슨은 의아한 표정으로 늑대 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샌슨에게 허리를 베인 늑대의 상처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샌슨의 무기는 은도금 롱소드였지? 이루릴이 말했다. “은은 달의 힘, 유피넬의 힘. 따라서 보통 늑대가 아니군요.”

이루릴은 정말 태연자약한 태도로 설명했다. 내 바스타드를 피한 늑대 하나가 그런 이루릴을 보았다. 늑대는 맞으면 검날보다는 그 파괴력에 박살날 것 같은 내 바스타드를 피해 이루릴에게 달려들었다. 샌슨이 비명을 질렀다.

“이루릴!”

어느 순간, 가만히 서 있던 이루릴이 옆으로 흘렀다. 그 손은 비스듬히 망고슈를 앞으로 뻗고 있었다. 레너스 시에서 트롤과 싸울 때 본 그 모습이다. 나라면 이름을 이렇게 붙이겠어. ‘사과 깎기’. 늑대는 순전히 자신의 힘에 의해 공중에서 가죽이 벗겨지고 근육이 들렸다. 피가 쏟아졌으나 이루릴은 가볍게 그것을 피했다.

“캐애앵!”

허리가 너덜너덜해진 늑대가 땅에 떨어졌다. 이루릴은 그것을 걷어차 버리고는 다시 점잖게 문으로 돌아가 기대어섰다. 혀를 깨물 지경이군. 내가 멍하니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자, 이루릴은 말했다.

“조심하세요. 후치. 뒤.”

나는 소스라쳐서는 바스타드를 뒤로 돌려쳤다. 뒤에서 날 노리던 늑대가 물러났다. 그러나 그 늑대는 물러나다가 터커에게 꼬리를 밟혔다. 터커는 늑대의 꼬리를 밟고는 핼버드를 내리쳤다. 늑대는 머리가 쪼개져버렸다. 그러나 핼버드를 후려친 터커의 등에 늑대가 뛰어올랐다.

“으악!”

터커는 등에 매달린 늑대를 떨어뜨리기 위해 빙빙 돌았으나 늑대는 터커의 등 부분의 갑옷을 물고는 놓지 않았다. 나는 달려들어 늑대의 뒷다리를 잡아당겼다.

“카릉!”

늑대의 이빨이 허공으로 튕겨나며 그 늑대는 터커를 놓았다. 난 늑대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늑대의 뒷다리를 쥔 채 빙빙 돌렸다가 그대로 나무로 집 어던졌다. 속속들이 썩은 나무는 간단히 늑대에 맞아 쓰러졌다. 콰광! 나무가 쓰러지는 육중한 소리는 늑대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한 놈이 질린 동 작으로 달아나자, 나머지 놈들도 꼬리를 말고 담장 밖으로 튀어버렸다. 이윽고 신전에 뛰어든 늑대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터커는 입을 쩍 벌린 채 날 바라보았다.

“너, 너, 너……”

“나무도 병이에요. 다 썩어서 그래요.”

“그, 그러냐? 그래도 그렇지, 원. OPG 그거 정말 대단하구나.”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샌슨과 크라일은 늑대들이 달아나고 나자 누가 더 많은 늑대를 잡았느냐는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저건 내가 잡은 거요! 상처를 보라고!”

“헛! 저 타고 있는 것 보이지 않아요? 내 롱소드에 맞아서 그런 거요!”

“그건 찰과상이고! 결정타는 내가 먹였지!”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군. 그때 신전의 정문을 막고 서 있던 이루릴이 걸어왔다. 이루릴은 날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의아해져 서 그녀의 뒤를 따랐을 때 이루릴이 혼잣말처럼 말하는 것을 들었다.

“늑대들이 너무 빨리 물러나서 저 여자의 계획은 실패군요.”

“예?”

“저기 있어요…………… 우릴 바라보고 있군요.”

난 소스라쳐서 바깥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조리 칠흑 같은 어둠뿐인걸. 그러나 이루릴은 정확히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허공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 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터커도 핼버드를 고쳐쥐면서 걸어왔고, 소란을 떨고 있던 샌슨과 크라일도 긴장한 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늑대들이 소란을 피워 혼란스러울 때 마법으로 공격할 생각이었군요?”

이루릴은 허공에 대고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루릴은 다시 말했다.

“꼭 그렇게 해야 될까요? 난 당신을 용서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요.”

난 당황한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안 돼요. 내가 준비하고 있어요.”

다시 잠시간의 고요.

“그럴까요? 시험해 보겠어요?”

난 의아해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터커는 눈을 매섭게 뜨고 말했다.

“메시지 주문인 것 같은데.”

이루릴은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밤이 되자 불기 시작한 미풍이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어지럽혔지만 이루릴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한 지점을 바라보 며 서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갑자기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팍! 저 멀리 떨어진 마을 어느 곳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우리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이루릴과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다시 다른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전히 소곤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다음 번엔 어디를 칠까요?”

이루릴은 다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갔어요. 거짓말을 했어요.”

난 얼빠진 표정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라고요?”

“예. 뱀파이어가 저기 있었어요. 늑대들을 통해 우릴 혼란시키고 공격할 모양이었는데 늑대들이 너무 빨리 물러가서 공격 시기를 놓쳤어요. 그녀는 내가 강대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는 공격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죠. 사실 난 아무런 마법도 기억하지 않았어요.”

“기주한 마법이 없었어요? 그럼 아까 불꽃은?”

“샐러맨더를 이용한 속임수예요. 아, 예, 속임수.”

그녀는 자기가 속임수라는 말을 썼다는 데에 당혹하고 있었다. 불쾌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즐거운 것처럼 말하지 않는군요?”

“예?”

이루릴은 멋지게 뱀파이어를 속여넘기고 위기를 넘겼으면서도 자신이 한 행동이 마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사건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루릴은 고 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가 즐거운 것이죠? 그녀와 난 거짓으로 관계지어졌어요. 후치는 항상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잖아요? 날 비난하지 않나요?”

무슨 말이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이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어떻게 통하는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마 이루릴은 나를 항 상 모든 존재와 친구가 되길 원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나 보다. 물론, 나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끼리 만났으면 친구가 되기 위해 상냥하게 대하는 것

이 옳다고 믿지. 그건 사람들이 살아가는 간단한 지혜 아냐? 하지만 뱀파이어에게까지 그렇게 해야 되나?

“뱀파이어와 친구가 되기 쉬울까요?”

이루릴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었군요…….”

“예?”

내 얼빠진 대답에 이루릴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친구와 적을 나누는 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죠. 그러나 처음 보는 상대에게는 먼저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민다고 했지요. 난 그 말에 퍽 감동했어요. 당신은 헬카네스의 율법에 따라 혼란스러운 이 세상을 살기 위해 분명한 선은 가지고 있지만, 유피넬의 뜻에 따라 먼저 손을 내밀어요. 그것이 아름다워 보였어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를 모두 따르는 인간이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세계는 모두 조화로워서 특별히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 줄 몰랐죠.”

그런가? 난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루릴의 말을 들었다.

“아마 우리가 드워프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우리는 왜 드워프와 관계가 나쁜지 몰랐죠. 하지만 난 알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보 고 알았죠. 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 줄 몰라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몰라요. 그것이 드워프들에겐 기분 나 쁘게 보였던 것이에요.”

이루릴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눈이다.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었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처음 보는 이 영지의 환자들을 돌보았어요. 그것이 기쁨일 거라 고 생각했지요.”

이루릴이 이 영지의 사람들을 성심껏 도왔던 이유는 그것인가?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을 엘프가 공유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루릴은 내 말에 감동 하여 친구가 되기 위해서 먼저 손을 내밀어 보았던 것인 모양이다.

인간이었다면,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인간이었다면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순진한 눈으로 아무런 의혹이나 은유 없이 평 범하게 말하고 있는 엘프다. 그래서 나도 완전히 긴장을 풀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기쁘지 않았어요?”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기뻤어요. 그들의 감사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손을 내밀게 됨으로써 예전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게 뭐지요?”

“손을 내밀어도 받아주지 않을 때의 슬픔.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어서 뱀파이어에겐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군요. 난 그것을 배웠어요. 고마워요, 후 치. 당신처럼 익숙하게 손을 내밀 줄 알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이루릴은 다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터커와 크라일은 대단히 희한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샌슨도 그렇게 평범한 눈길은 아니었다. 결국 샌슨이 물어왔다.

“이봐, 후치. 조금 전에 나눈 말들이 다 무슨 뜻이야?”

글쎄. 설명할 수 있으려나? 난 늑대들의 시체를 다 처리하고는 잠자코 모닥불을 한참 바라보았다. 샌슨이 결국 못 참고 다시 말하려 할 때, 나는 입 을 열었다.

“말을 한 건 나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엘프란 이상한 종족이야. 하지만, 엘프가 보기엔 인간이 이상한 종족이겠지. 만일 그렇다면, 이루릴은 엘프 들 중에서도 이상한 엘프인 것일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고 들었어. 그렇다면 그들의 세계는 조화뿐일 거야.”

“조화뿐이라고?”

“설명하기가 힘들어. 어쨌든, 이루릴의 말을 듣고 있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예의범절이라든가 훌륭한 문화 같은 것이, 모조리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없어서 불안한 인간 종족의 슬픔 때문에 생겨난 것 같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건네는 인사말, ‘좋은 아침입니다!’마저도 서로 원수가 되지 않기 위해 외치는 말 같다구. 젠장.”

“뭐? 원수?”

“그러니까…………, ‘나는 이 아침을 즐기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것을 즐기니 서로에게 화낼 필요가 없다. 되도록 유쾌 하게 지내보자.’이런 식으로. 그러면 상대도 똑같이 대답하지. ‘좋은 아침입니다!’ 사실 상대는 오늘 아침 변비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지만, 인 사를 건넨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기 싫어서, 서로 나쁜 관계가 되기 싫어서 그냥 타성적으로 대답하는 거지. 우린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래, 그거야. 우린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를 위해 타성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지…………. 나와 대단히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얼어죽을, 뭐가 좋은 아침이야?’ 따위로는 말하지 않는 거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의 상당 부분은 거짓말이 나 가식이 되지. 예의범절이란, 잘 조절된 거짓말. 그런 것 같아……….”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이루릴의 머리 색깔을 닮은 칠흑 같은 밤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터커가 빙긋 웃었 다.

“그럴 때가 있지. 후치. 늘 알던 사람도, 어느날 갑자기 ‘저게 나 알던 그 사람인가?’ 싶을 때가 있지. 우린 절대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 그 래서 항상 불안해. 그래서 예의범절을 쓰지.”

터커는 내 말을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루릴은 우리가 불안해서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마치 모든 피조물과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터커는 싱긋 웃으며 핼버드의 날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 것 같니? 흠. 후치. 걱정 마. 엘프는 느리게 익히지만 절대로 잘못 배우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요?”

“반면 인간은 빨리 배우기 때문에 잘못 배울 일이 많지. 뭐, 선입견이라든가, 그런 것 있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완전한 종족은 없나요?”

“완전한 종족은 없어. 하지만 어느 종족에서든, 완전한 개인이 나올 수는 있어. 자기 종족의 약점만 극복하면 되니까.” 나는 터커를 보았다. 터커는, 깊은 눈으로 먼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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