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황소에서 뛰어내린 길시언은 먼저 칼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칼은 눈이 보이지 않아서 허둥거렸다. 길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제레인트가 먼저 치료에 들어갔다. 잠시 후 칼은 눈을 비비다가 길시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길시언!”
“반갑습니다. 칼.”
칼은 길시언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야말로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원의 목욕탕으로 향했다는……………, 이거 봐! 에, 영원의 숲 방향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 한잔 술을 그대 에게…………, 그만해!”
칼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칼. 우리는 스카일램 트리키 대장의 연락을 받고 여러분들과 합류하기 위해 영원의 숲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영원의 숲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요?”
“엑셀핸드께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엑셀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던 운차이는 싸늘한 얼굴 그대로 시무룩하게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다시 눈이 보이게 된 샌슨은 그에게 다가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운차이는 샌슨의 손을 쳐다보더니 핏 웃으며 그 손을 잡고는 정다운 말을 건네었다.
“아직 살아 있구나.”
“교수대는 어떻게 피했냐?”
샌슨과 운차이는 곧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반가운 얼굴로 아프나이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젠 괜찮아요?”
“예. 이젠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은 모두 법석을 떨면서 그를 안고 흔들어대었으며 이루릴은 웃으며 엑셀핸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요. 엑셀핸드.”
엑셀핸드는 의아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그 손을 잡았다. 훤칠한 이루릴이 허리를 숙인 채 엑셀핸드와 악수하는 모습은 참으로 볼 만했다. 엑셀핸드는 이루 릴의 손을 적당히 흔들고는 말했다.
“자네 많이 바뀌었군.”
“제가요?”
“그래. 이젠 먼저 손을 내밀 줄도 아는군.”
어라? 그랬나? 그러고 보니 이루릴이 악수를 청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루릴은 조금 당황해서는 엑셀핸드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 다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시간은 만인의 교사니까요.”
“허흠. 흠. 괜찮은 교사로군.”
칼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길시언은 레니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감탄한 얼굴로 길시언을 마주보고 있었다. 칼은 웃으며 그들을 소개시켰다. “견실한 테페리의 지팡이를 뵙게 되어 길시언 바이서스의 커다란 영광입니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이 그럴듯한 인사(게다가 왕자가 하는 인사다. 비록 황소를 타고 있는데다가 조화를 대담하게 무시한 갑옷들을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는 제레인트를 크게 기쁘게 만든 모양이다. 제레 인트는 정중함을 다해 인사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테페리의 지팡이 제레인트 침버가 바이서스 왕가의 정화를 뵙습니다.”
“왕가의 정화라니요. 왕실의 수치에 가깝습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고가고 난 후 칼은 레니를 길시언에게 소개했다.
“레니 양입니다.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자 길시언의 얼굴엔 커다란 빛이 떠올랐다.
“크라드메서의…..?”
“그렇습니다.”
그러자 길시언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레니에게 인사했다. 우리는 놀라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레니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치마를 살 짝 들어올리면서 인사했다.
“길시언 바이서스가 대륙의 희망을 뵙습니다.”
“아, 저, 네. 과분한 영광입니다.”
뭐야, 이건? 제레인트는 찬탄이 담긴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난롯가의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이군. 그러니까 세피아파인 고개에서 방랑 왕 자와 드래곤 라자 레이디의 만남인가? 갑자기 우리 일행의 품격이 한 세 배는 올라간 것 같군 그래.
·솔직히 그 동안 너무 무식하게 여행했어. 그래도 대륙의 희망을 호송하는 여행인데 말이야.
“암살 기도라구요?”
칼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를 삘 뻔했다. 샌슨은 마시고 있던 술병의 주둥이를 씹어버리고는 이빨이 아파서 죽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모닥불에 발을 집어넣을 뻔했다.
길시언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의 이야기대로라면 그 시오네라는 뱀파이어는 델하파에서의 공작 이후 넥슨과 헤어져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온 것 같군요. 그러고는 궁성에 잠입하여 국왕 시해를 기도한 것입니다. 간악한!”
물론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서 상당한 협박을 해놓은 다음이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었다. 칼은 얼떨떨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프나이델이 그녀를 막았습니다.”
우리는 입을 쩍 벌리고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으며 아프나이델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길시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아프나이델은 위중한 상태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스승인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치료를 받기 위해 우리들은 궁성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오네로서는 정말 불운한 일이었지요. 하하. 드워프의 노커와 톱메이지 아프나이델이 궁성을 지키고 있을 줄.
“길시언!”
아프나이델은 톱메이지라는 말에 질겁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당황해서 운차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는 그저 운차이 씨의 말을 듣고 싶어했을 뿐입니다. 모든 공은 운차이 씨의 것입니다.”
칼은 팔짱을 낀 채 웃으며 말했다.
“정황을 확실히 들어본 다음이라면 누구의 공인지 판단할 수 있겠지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프나이델은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아프나이델은 책에서 눈을 들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황금빛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는 패밀리어의 죽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입은 상태였지만 그의 스승인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치료로 어느 정도 상태를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치료를 제대 로 받기 위해 그는 지금 궁성 임펠리아에 들어와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노을에서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의 화병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수더분하게 꽂혀 있었다. 이 계절에 꽃을 본다는 것은 임펠리아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환자를 위한 데미 공주 의 선물이다. 아프나이델은 꽃잎에 부서지는 노을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화로운 기분이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봐, 스카일램인가 하는 그자가 돌아왔다는데?”
엑셀핸드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책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들도 돌아왔겠군요?”
“아니, 이상해.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예?”
엑셀핸드는 팔짱을 낀 채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워낙이 꽁무니에 사고를 달고 다니는 친구들이니, 또 무슨 사고를 만났겠지. 조금 전 길시언과 만났는데 잠시 후에 와서 설명해 주겠다던걸.” 그리고 잠시 후 길시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와 마법사의 얼굴을 보고는 먼저 웃음을 머금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어차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 푸른 하늘에 뜬구름과도 같은…………, 아냐!”
길시언은 성난 몸짓으로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두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프나이델은 침대에 걸터앉았고 엑셀핸드는 두 다리를 딱 벌린 채 서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말했다.
“일스에서 그들은 드래곤 라자로 추정되는 소녀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역시! 그 친구들답군.”
엑셀핸드는 만족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조급하게 질문했다.
“그럼 그들은 바로 갈색 산맥으로 달려간 겁니까?”
“아니오. 그들에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넥슨 휴리첼이 일스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야?”
엑셀핸드는 기겁해서 수염을 잡아뽑을 뻔했다.
“넥슨 휴리첼이 그들에게서 소녀를 납치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트리키 공과 헤어져 넥슨을 추적하기 시작했답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인간 녀석은 곳곳에서 해악만을 불러일으키는군!”
엑셀핸드는 그러고 나서 드워프어로 몇 마디 욕설을 내뱉었다. 드워프어의 욕설을 알지 못하는 나머지 두 사람은 그저 찬성의 의미로 고개를 좀 끄덕였다. 아프나이 델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좀더 정확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어디 보자……………, 트리키 공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보고를 마치고 자택에 돌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 어디 보자. 호위에 나섰던 병사들도 다 돌아갔으니 지금은 안 되겠군요. 아, 그렇지. 운차이가 있 습니다.”
“운차이? 그 간첩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궁성 감옥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그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 좋은 생각이시군요. 지금 가볼까요?”
“음. 저녁 식사 후에 만나보도록 하지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궁성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의 간수장은 전하의 명령 없이는 죄수의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길시언은 간단히 처리했 다.
“형제는 한 몸이오.”
간수장은 그들을 운차이에게 안내했다.
간수장이 든 횃불이 감옥의 음침한 돌벽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보여 아프나이델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엑셀핸드는 가소롭다는 듯이 주 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허엇, 돌 다듬은 솜씨하곤. 이건 어린애 나무집인가?”
간수장은 불퉁한 얼굴이 되었지만 길시언의 면전이라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감옥의 통로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곳의 통로도 그렇게 넓지 않은데다가 굽이굽이 꺾 이는 길이 많았다. 어쨌든 꽤 아래로 내려가고 나자 삼엄하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간수들이 엄청난 불신감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간수장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지를 받지는 않았다.
“그 간첩은 국사범이기 때문에 최하층에 있습니다. 엄중한 경계를 받고 있지요. 돌벽에도 땅굴을 팔 줄 아는 드워프가 아닌 바에야 달아날 수 없습니다.”
간수장은 그런 식으로 엑셀핸드에게 복수했지만 엑셀핸드는 콧방귀를 뀔 뿐 상대하지 않았다. 깊숙한 감옥으로 들어서자 간수장은 단단해 보이는 철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입니다.”
그는 철창 안으로 외쳤다.
“이봐, 면회다!”
그러자 어둑어둑한 감옥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잠시 후 모포를 걷으며 운차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모포 속에서 얼굴을 반쯤 내밀었을 뿐 그대로 누워 있었 다. 그러자 간수는 당장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 일어나지 못해?”
운차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다시 모포를 뒤집어썼다. 간수장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는 검을 뽑아들려고 했지만 길시언이 그를 말렸다.
“내가 이야기하겠습니다.”
간수장의 뒤에 있던 길시언은 앞으로 나서서는 감옥 안으로 말했다.
“보시오. 나 길시언이오.”
그 바보 왕자로군.”
엑셀핸드는 키들거리기 시작했지만 간수장은 입에 거품을 물고는 철창을 향해 돌격 자세를 취했다. 길시언은 다시 그를 말리고는 말했다. “그렇소. 칼 일행에 대해 정겹게 악담이나 좀 나눔시…………, 젠장! 그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좀 일어나 주겠소?”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잠시 후, 운차이는 일어나 앉아서는 이마에 손을 붙이며 말했다.
“눈이 부신데.”
운차이는 간수장이 든 횃불의 불빛을 가리며 말했다.
“왜 그러지?”
“말했잖소. 칼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그건 트리키인가 하는 해파리가 이야기를 했을 텐데.”
“해파리? 바다 생물이오? 우리는 그 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당신의 인용은 넘어갑시다. 정확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운차이는 바닥에 앉아 무릎을 모은 채 우울한 눈으로 철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바라보기만 했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속이 탔다. 그가 뭐라 고 말하려고 한 순간 운차이가 입을 열었다.
“당신, 국왕의 형이지?”
길시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차이는 말했다.
“그 옆의 병신을 좀 치워주지 않겠소?”
그 옆의 병신은 이제 열쇠 꾸러미를 바쁘게 뒤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철창을 열고는 운차이를 검으로 꿰어놓을 태세였다. 길시언은 좋은 말로 그를 말려서 조금 떨어지도록 명령했다.
“위험합니다. 저의 입회가 없는 상태에서 죄수와 단독 면담을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가 정말 날 위협할 정도라면 당신이 있어도 소용 없소. 당신은 설마 내 검의 위명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간수장은 이후로도 한참 떠들었지만 결국 길시언에게 횃불을 넘겨주고는 물러나게 되었다. 간수장이 멀어지고 나자 길시언은 말했다.
“자, 그는 갔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운차이는 철창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는 그러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 그 이야기를 해줘 봤자 나에겐 도움될 것이 없어. 당신이 사식이라도 넣어줄 건가? 고맙지만 지금 배를 곯지는 않아. 난 지금 식사가 아니라 다른 것에 대 해 굶주리고 있으니까.”
“자유?”
“제기랄. 일스까지 갔던 이유는 자유 때문이야. 결국 헛고생만 한 셈이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정보를 하나 주지. 대신 날 석방시켜 주지 않겠나.”
그러자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당신이 내놓을 정보가 당신의 자유를 보장할 만큼 값진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요?”
“그래. 난 바보가 아니야. 내 정보의 가치를 잘 알아.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말해 주면, 날 석방시켜 주겠나?”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다시피 그건 불가능하오. 난 일개 모험가일 뿐이니까.”
그러자 운차이는 차가운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용무는 없어. 이만 꺼져주시지.”
길시언은 침울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이거 보시오. 그 정보를 듣지도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함부로 당신의 자유를 보장한단 말이오? 그러니 먼저 말해 보시오. 그리고 당신 말대로 그게 정말 당신의 자 유를 보장할 만큼 중요한 정보라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당신은 자유로워지지 않겠소?”
운차이는 어두운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피곤함이 물씬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간 몸이야.”
길시언은 가만히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피곤한 듯이 말했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시간도 별로 없으니 내가 배짱을 부릴 계제도 못 되는군.”
“시간이 별로 없다니?”
“오늘 밤 안에 닐시언 국왕의 암살이 저질러질 거요.”
길시언은 순간 철창을 콱 움켜쥐었다. 아프나이델은 놀란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중 그래도 안정을 유지하던 엑셀핸드가 말했다. “무슨 근거로?”
길시언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엑셀핸드가 대신 하자 말없이 운차이를 쏘아보았다. 운차이는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
“짜릿한 살기가 느껴진다. 바이서스에는 살기를 감지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암살자들은 살기를 지우지도 않고 있어. 살기에 대해선 길시언 당신도 알 테지?”
길시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기의 방향은 모두 닐시언 국왕의 침실로 집중되고 있어.”
“네가 국왕의 침실을 어떻게…………, 그렇군.”
운차이는 쌀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난 간첩이었으니까. 난 최소한 당신만큼은 이 궁성의 지형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국왕의 침실 위치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살기 중엔 익숙한 것 도 있군. 시오네가 이곳에 와 있어.”
“그 뱀파이어!”
아프나이델이 기겁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자신의 입을 가렸다.
“시오네가 거기로 갔군! 그래서 영원의 숲이나 대미궁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느긋한 얼굴로 하늘만 쏘아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 랑스러운 기분은 아닐 거라는 점이다. 네리아가 무심코 그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했어?”
충분히 비난으로 들릴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네리아는 그저 별 의미 없이 순수하게 물었던 것이다. 운차이는 네리아를 쏘아보다가 우물거리듯 말했다.
“일스의 일이 엉망이 되었으니 뭐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전해 줘. 후치.”
샌슨은 입을 쩍 벌린 채 운차이에게 말했다.
“히야, 너 정말 제법이다. 그게 느껴지냐?”
그러자 운차이는 평정을 되찾고는 피식 웃었다.
“난 누구 같은 곰이 아니니까.”
샌슨은 으르렁거렸고 아프나이델은 계속 이야기했다.
운차이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해서 궁성에 잠입하지는 않았겠지. 어쩌면 서류나 다른 걸 노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군. 그런 거라면 살기를 뿜어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 암살 이다. 이 정도가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전부야.”
길시언은 잠시 뚫어지게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그걸 간수장이나 다른 자에게 말하지 않았지?”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었다.
“난 간수를 믿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 국왕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자이펀에게 넘어갈 테고 나 역시 자유를 되찾을지 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데 아무래도 너희들이 나에게 보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국왕이 암살된다면, 과연 궁성에 갇혀 있던 자이펀 간첩이 안전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리고 당신이라면 말귀가 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 당신은 살기에 대해서도 알고, 또한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나와 함께 여행했지. 무엇보 다…………….”
“무엇보다?”
운차이의 눈에 잠시 신비한 미소가 지나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
“우린, 같은 사람들을 친구로 알고 있지.”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운차이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그 친구들이라면 내 말을 믿어줬을 거다.”
길시언은 마음을 굳혔다.
“좋아. 알겠어. 이봐요, 간수장!”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간수장은 길시언의 부름에 달려왔다. 길시언은 곧장 말했다.
“이 죄수를 오늘 밤 동안만 풀어주시오.”
“예?”
갑자기 길시언은 두 다리를 쫙 편 채 크고 고압적인 자세로 간수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낮지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말하진 않겠소. 대신 설명을 할 테니 내 설명이 끝나면 즉각 철창을 여시오. 첫째, 당신은 왕족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을 거부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소. 내 가 원하는 것은 방면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가석방이고 그 정도는 나에게도 요구할 권한이 있소! 따라서 만일 당신이 거부한다면 당신은 왕족에 대한 반역을 일으키 는 셈이오. 둘째, 이 죄수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 길시언 바이서스가 지겠소. 이것은 왕자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이며 당신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 맹세에 대해 거론 함으로써 당신의 무죄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오. 셋째, 당신이 만일 거부한다면 난 당신을 무력화시키고 열쇠를 회수하여 저 죄수를 꺼내겠소. 난 급하다는 말의 의미 를 잘 알고 있고, 이곳엔 내 행동을 도울 톱메이지와 드워프 최고의 도끼잡이가 있소.”
운차이와 엑셀핸드는 놀란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 긴 말을 정확하게 했을까! 간수장은 뭐 씹은 얼굴이 되었지만 동시에 질려버렸다. 그는 길 시언의 위엄에 상당 부분, 그리고 그의 협박에 적당 부분 굴복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체면을 아는 자였다.
“국왕이 임펠리아의 주인이듯, 이곳의 주인은 나입니다.”
길시언의 얼굴이 잠깐 험악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간수장은 말했다.
“따라서 이곳의 죄수는 내 소관이오. 길시언 왕자님께 내어드리겠습니다. 맹세까지 요구하지는 않겠으니, 명예를 아는 기사답게 내일의 해가 뜨기 전까지 이 죄수를 다시 데리고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 가슴 앞에 세워들고 말했다.
“당신은 왕자에게 대한 예의로 맹세를 요구하지 않았겠지만, 난 이곳의 주인인 당신에 대한 경의로써 맹세하겠소. 저 죄수는 내일 아침까지 이곳으로 돌아와 있을 거요.”
그러자 간수장은 두말없이 철창을 열었다. 운차이는 음울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어쩌려는 거지?”
“도와주려면 완전히 도와줘. 너의 그 감각으로 암살자들의 위치를 찾아라.”
암살자라는 말에 간수장은 대경실색했다. 운차이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제기랄. 알았어.”
“자, 잠깐! 지금 암살이라고…………….”
길시언은 황급히 간수장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조용히 하시오! 지금 궁성 안에 국왕 시해의 음모가 있소. 그리고 우리는 저 자이펀인의 감각을 이용하여 그들을 잡아낼 생각이오.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겠지요?”
간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명령하실 것은?”
“평상시처럼 행동해 달라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명은 황급히 감옥을 빠져나왔다. 가파른 지하 감옥의 계단을 오르며 아프나이델은 헉헉거렸고 엑셀핸드는 투덜거렸다. 길시언과 간수장, 그리고 운차이들 은 바람처럼 달려 올라갔다. 중간중간 궁성 경비 대원들이나 감옥의 경비병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간수장이 나서서 함구령을 내렸다. 계단을 다 오르 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자 아프나이델은 숨을 고르고는 궁금함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이런 질문이 어울릴진 모르겠지만, 도대체 아까 간수장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까?”
길시언은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말했다.
“프림 블레이드가 불러준 대로 말한 거요. 나였다면 그렇게 거만하고 고압적인 말을 할 자신이 없지요.”
“….그랬군요.”
네 사람은 황급히 궁성의 본관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은지라 궁내부원들의 움직임도 드물었다. 1층의 홀로 들어서자 길시언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바깥에 있는 몇 놈은 별것 아니야. 신경 쓸 필요없어. 침실 주위의 세 놈이 문제로군.”
길시언은 다급하게 말했다.
“궁성 경비대에 연락을…………….”
“아니, 좋지 않아. 침실 주위의 놈들이 문제라고 그랬잖아. 소란을 일으키면 즉각 닐시언의 목을 베어낼 것이다. 당신 동생이니 잘 알겠지. 자기 몸을 지킬 만한 남자 인가? 그것도 밤중의 기습으로부터.”
“어렵겠지. 그럼 어떻게?”
“조용히 올라가자.”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에 걸린 장식용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검과 방패를 운차이에게 내밀었다.
“맨손으로 암살자와 싸울 순 없지.”
운차이는 의아함 반, 감탄 반의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치고 달아나면 어쩔 건가?”
“해볼 텐가?”
“관두지.”
네 명은 조용히, 그러나 신속하게 국왕의 침실로 향했다. 길시언에겐 자신의 집이었고 운차이 역시 별로 거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그들 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2층 중앙 복도로 들어서기 직전, 운차이는 계단에 멈춰 서서 길시언에게 말했다.
“말해 두겠는데, 계단을 올라서서 만나는 자는 모두 베어버려. 알았지?”
“알았다. 가도 되나?”
길시언과 운차이는 셋을 센 다음 광포한 태도로 중앙 복도로 돌진했다.
“꺄아아악! ……왕자님?”
“이런, 빌어먹을!”
길시언은 산통 다 깨진다는 생각이 들어 부지불식간에 혀를 찼다. 하필이면 그들의 앞에 시녀 하나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은 것이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채 일행들, 무장한 두 전사와 험악하게 생긴 드워프와 무시무시한 마력을 숨긴 톱메이지라는, 정말 공포스러운 모습의 일행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지를 태세였고, 그러자 길시언은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황급히 검을 치우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멍청한 왕자!”
운차이가 낮게 외치며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길시언이 말릴 사이도 없이 운차이는 쓰러진 시녀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순간 시녀는 주저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솟구쳤다. 아프나이델이 숨막힌 탄성을 질렀다.
시녀는 뒤로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넘고는 치맛자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튀어나온 그녀의 손엔 롱소드가 들려 있었다.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시녀를 베어 들 어갔다.
챙챙챙챙챙!
순간적으로 불꽃의 폭포가 복도를 환히 비추었다. 운차이와 가짜 시녀는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 셀 수도 없는 공격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복도 의 명암이 바뀌었다. 파파파팟! 자이펀의 병영이나 전쟁터에서 겨우 볼 수 있는 무섭도록 빠르고 경쾌한 자이펀식 검법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길시언은 감탄했지만 그 감탄보다 빠르게 앞으로 돌격했다.
“암살자!”
운차이의 빠른 롱소드에 몰리고 있던 가짜 시녀는 길시언의 묵직한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시녀는 이를 악물면서 뒤로 빠져나갔다. 그때 아프나이델이 외쳤다.
“그리스!”
시녀는 뒷걸음질치던 자세 그대로 다리를 하늘로 솟구치더니 나가떨어져 버렸다. 길시언과 운차이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지만 시녀는 뒤통수를 부딪히고는 뇌진탕 을 일으킨 모양인지 기절해 있었다. 길시언은 이마의 땀을 닦다가 운차이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차이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것 봐. 내 목숨과 자유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어. 당신이 죽어넘어지기라도 하면 내 제안도 모두 소용이 없단 말이야. 그러니 칼자루와 검신도 구분 못하는 견 습 기사처럼 일일이 돌보게 만들지는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길시언은 얼굴을 붉혔다. 운차이는 앞서 계단에서 만나는 자를 모두 공격하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길시언은 솔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해, 조심하지.”
순간적으로 운차이의 눈에 이채가 지나쳤다. 운차이는 잠시 길시언을 바라보더니 곧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명소리가 들렸을 거야. 강행 돌파다!”
“제기랄! 다리 짧은 자에게 돌파를 요구해?”
엑셀핸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잘도 달려왔다. 길시언은 이 긴박한 순간에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였다.
콰광! 그들이 지나가던 복도 옆의 문이 열리면서 궁내부원 하나가 롱소드를 들고 뛰어나왔다. 사나이는 두말없이 엑셀핸드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아프나이델이 비명 을 질렀다.
“엑셀핸드!”
엑셀핸드는 옆을 흘긋 바라보고는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카리스 누멘!”
바우웅! 거대한 곡선을 그린 도끼는 그대로 짓쳐 들어오는 롱소드에 맞았다. 절그렁! 길시언의 행동은 빨랐다. 궁내부원이 롱소드를 떨어뜨리자마자 재빨리 그의 팔 을 붙잡아 들어올리며 벽에 밀어붙였다. 쾅! 그는 프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로 남자의 복부를 찌르곤 곧장 목에 검끝을 겨냥했다.
“한 놈은 어디 있어!”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얼굴에 경멸을 담고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는 그대로 검을 내려 남자의 다리를 베었다.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길시언은 그를 내버려두고는 국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침실 앞에는 이미 운차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꼼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 채로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길시언이 이상하게 여겨 말을 걸려고 한 순간, 문 안에 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한다. 한 놈이라도 들어오면 국왕의 목숨은 없어!”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운차이는 신음을 흘렸다.
“시오네…….”
“운차이! 네놈이군?”
운차이는 괴로운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고 전해 주시겠소? 아니, 관두지.”
길시언은 말없이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안쪽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시오네의 말이 저렇다면 국왕은 아마도 시오네에게 인질 로 잡혀 있을 것이다. 길시언은 입천장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요가 지나가고 나서 안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서 모두 물러나.”
길시언과 운차이는 모두 물러났다. 그런데 길시언은 물러나면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엑셀핸드가 복도에 놓여 있던 작은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는 모습이었 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작은 테이블이었지만 엑셀핸드가 들어가자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은 다시 한번 입술을 적셨다.
삐이걱.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앞쪽은 잠옷 차림의 닐시언 국왕이었고 시오네는 그의 등 뒤에 붙어서 닐시언 국왕의 목에 대거를 들이대고 있었다. 닐시언 국왕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져 있었지만 위엄을 잃지는 않았다.
“형님. 불민한 동생의 모습을 보여드리는군요.”
길시언은 이를 갈면서 고개를 숙였다.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늦어서 옥체에 이런..
시오네는 킬킬 웃더니 말했다.
“뜨거운 형제애의 발출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어서 비켜!”
길시언은 시오네를 쏘아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시오네는 안정을 되찾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이 아프나이델에게 닿자 아프나이델은 찔끔했지만 잠시 후 적의를 가득 담은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다. 시오네는 차갑게 웃더니 운차이를 쏘아보았다.
운차이는 우울한 얼굴로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시오네는 매서운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스에서는 제법 잘 떠들었더군………….”
운차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시오네는 지금 운차이가 일스에서 행한 고발, 그러니까 자이펀이 행한 세이크리드 랜드에 대한 고발을 거론하는 것이다. 시오네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타입은 아니었는지 그대로 말했다.
“뒤로 물러서라. 복도에 등을 붙여.”
세 사람은 뒤로 물러났다. 길시언은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 테이블로 향하려 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고는 뒤로 물러났다.
시오네는 세 명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흘긋 복도 끝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낭패다! 만일 시오네가 창문까지 갈 수 있다면 그녀는 국왕을 죽이고 박쥐로 변해 도망가 버릴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속이 바작바작 타는 것을 느꼈다.
한 걸음, 한걸음. 이제 잠시 후면 시오네는 그들의 앞을 완전히 지나치게 된다. 길시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시오네의 대거가 사나운 움직임을 보여주자 꼼짝 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엑셀핸드가 테이블 아래에서 천천히 기어나오는 것이 아프나이델의 눈에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질겁하면서 시선을 다시 시오네에게 향했다. 지금 들키면 만사 끝장 이다. 시오네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시오네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카아압!”
엑셀핸드는 기합과 함께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그러나 시오네는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그때 닐시언 국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세차게 흔들며 팔꿈치로 시 오네의 복부를 찍었다.
“커헉!”
시오네는 숨막힌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시오네는 간신히 엑셀핸드의 도끼를 피했고 닐시언 국왕은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길시언의 프림 블레이드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씨융! 갑자기 시오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호핑!”
시오네는 프림 블레이드로부터 2큐빗 떨어진 위치로 간신히 호핑했다.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 많은 공격을 당하면서도 호핑에 성공했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운차이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Colkodachi, K’nmaii!”
채챙! 시오네의 레이피어와 운차이의 롱소드가 부딪혔다. 그러나 운차이는 그대로 시오네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야아아압!” 시오네가 벽에 닿기 직전, 그녀의 입술 이 달싹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운차이는 앞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콰당! 시오네가 희미한 안개로 변해 버린 것이다. 길시언이 이를 갈았다.
“이 뱀파이어!”
프림 블레이드가 무서운 속도로 안개를 향했다. 프림 블레이드는 마법검이며, 만일 맞았다면 시오네는 그대로 세상 구경은 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개는 간 신히 프림 블레이드의 공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흘러가 창문을 향했다. 길시언은 그 뒤를 쫓아가려다가 멈칫하면서 닐시언에게 다가갔다. 그는 닐시언의 팔을 잡아 일 으켰다. 안개는 이미 창 밖으로 날아가 버렸고 창문까지 달려간 엑셀핸드는 허공을 향해 드워프어로 갖가지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닐시언 국왕은 헐떡거리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길시언의 두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영원히 형님께 폐만 끼치는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하. 제가 미욱하여 전하를 이런 곤경에 빠지게 한 죄,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시오네는 사라져버렸고 복도에 남은 것은 기절한 가짜 시녀와 다리를 베이고 끙끙거리는 가짜 궁내부원뿐이었다. 길시언은 먼저 닐시언 국왕을 침실로 모시고는 황 급히 궁성 경비대를 출동시켰다.
그는 그 밤 동안 경비대를 지휘하여 경비 대원들에 대한 완전한 함구령을 실시하면서도 궁성에 잠입한 암살자들을 색출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전시의 국가에서 국왕 의 암살 소문은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하지만 길시언은 그들을 잘 단속했다. 그의 탁월한 지휘에 아프나이델은 혀를 내둘렀다. 궁성 경비대는 완전히 국왕의 직속이었지만 아무도 길시언의 지휘에 대해 정당성을 의심하거나 반대를 표시하지 않았다. 비록 지휘하는 도중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아 몇 번씩이나 헛소리를 하곤 했지만 길시언은 썩 위엄 있는 태도였다.
긴 밤이었다.
궁성 내에 잠복해 있던 암살자들의 다른 패거리는 경비대에 의해 대부분 체포되었지만 체포 과정에서 격렬히 저항하여 많은 수의 경비 대원이 사망했으며 암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성에서 비명소리와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던 그날 밤은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에게도 퍽이나 불안한 밤이었을 것이다. 길시언은 거 의 강제에 가깝게 귀족원 회의를 소집했고 귀족원의 귀족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왜 귀족들을 장악해야 하는데요?”
잠깐의 틈을 탄 내 질문에는 칼이 대신 대답했다.
“암살의 헛소문 때문에 왕가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의 맹세가 흐려질 것을 대비한 것이지. 아마도 길시언께서는 귀족들에게 닐시언 전하가 안전한 것을 확인시키고 는 왕가에 대한 귀족의 충성이 변함없음을 서약하도록 강요하셨겠지. 아마 겉으로는 국왕의 집에 어두운 손길이 미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식이었겠지만 말이 야. 어쨌든 그렇게 해두지 않으면 어느 야심만만한 귀족이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 그런 거예요?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길시언은 미소를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설명을 계속했다.
결국 길시언의 영웅적인 분투노력으로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과 귀족들 모두가 안정되었다. 길시언은 귀족원을 거의 완전하게 장악한 후 그랜드스톰에 재빨리 연락 을 취했다. 길고 긴 밤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애쓴 끝에 바로 그 다음날 그랜드스톰에서는 대규모 승전 기도회가 열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제레인트는 크게 감 탄했다.
“하루 만에요?”
“정확하게는 하룻밤 안이지요.”
그 기도회에서 닐시언 전하와 귀족들은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시민들을 안정시켰다. 그랜드스톰에서 호화스러운 대규모 기도회가 벌어지는 가운데에도 길시언은 드러나지 않는 궂은일을 마무리했다. 그는 왕실의 돈을 거리낌없이 끄집어내어서는 사망한 궁성 경비대원들의 가족들에게 전달했고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 전 씨는 울상이 되었다. 그는 감히 반항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왕실 유지비를 탕진했다가는 전하께서는 수프 한 접시와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하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길시언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난 그런 식사라도 세 끼만 먹을 수 있다면 만족이오.”
“기, 길시언 전하가 아니라 국왕전하 말씀입니다!”
“형제는 한 몸이오.”
리핏 트왈리전 씨는 결국 왕실 유지비의 가용 자금 전부를 길시언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후 며칠 동안 궁성에서는 리핏 트왈리전 씨가 궁성의 으슥한 정원에서 하늘 을 우러러 그 암살자들과 함께 길시언을 저주하곤 한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하긴 왕실 유지비를 모조리 내놓은 리핏 트왈리전 씨가 궁성의 살림을 어떻게 수행할지는 정말 의문이다.
그리고 길시언은 붙잡힌 포로들을 심문했다.
길시언은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베풀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포로들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고문을 묘사하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고 레니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들으실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간략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이루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포로들로부터 알아낸 사실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조무래기들이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알아낸 바에 의하면 시 오네는 거의 모든 계획을 단독으로 수행하며 필요에 따라 부하들을 모아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점은 운차이도 확인해 주었다.
“나도 당시 칼라일 영지에 거점을 마련하고 시오네를 기다리라는 지시 외에는 아무런 설명을 받지 못했다. 시오네는 항상 단독으로 움직이는 셈이지. 우리들은 그녀 의 도구일 뿐이고. 그 친구들도 아마 궁성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을걸.”
“진짜 거물이란 말이군?”
“그렇지.”
운차이의 확인이 끝나자 길시언은 더 이상의 무의미한 고문을 중단하고 포로들을 모두 감금시켰다. 시오네가 국왕을 암살하려고 한 시점으로부터 만 하루 동안, 길 시언은 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는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는 회의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