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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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3화

3

“그것도 별로 세련되진 않아.”

길시언은 이렇게 평했지만 어쨌든 오크들 대부분은 그 몸을 땅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모두 쓰러져 누운 모습은 마치 거대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쓰러진 오 크들이 모두 아무런 상처도 없다는 점이 전쟁터와는 달랐지만. 그 동안에 계단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올라왔다. 그들 중 허연 턱수염과 허연 백발이 허 연 구레나룻으로 멋지게 연결되어 마치 늑대의 갈기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지골레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거 진짜 가짜입니까?”

진짜 가짜? 가짜 가짜도 있나? 칼은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짜 가짜입니다. 그리고 저는 칼 헬턴트입니다.”

“아, 보, 본인은 칸 아디움의 시장 카를로스 안티고어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시장님은 우리들 모두가 평온한 얼굴인 것을 보고는 안심하면서 칼과 악수를 나누었다. 칼은 안티고어 시장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시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저 오크들부터 먼저 처리해야 되겠군요.”

“아, 예, 부디.”

그러자 칼은 다시 아프나이델에게 몸을 돌려서 조용히 속삭였다. 칼의 속삭임은 지골레이드의 우렁찬 목소리로 증폭되어 황야 곳곳에 울려퍼졌다.

“지금 당장 이 도시에서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도시는 내가 차지할 것이다! 드래곤의 침소에 접근하는 녀석은 두 발 달린 녀석이든 네 발 달린 녀석이 든 가리지 않고 죽이리라!”

그때 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설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크들 가운데서도 완전히 미친 오크가 한둘은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 런 오크는 많은 세월이 지나면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어쨌든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현실은 웬 정신나간 오크 하나가 육중한 글레이브를 들어올리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오크는 다른 오 크들보다 월등히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어 거의 사람만한 녀석이었고 머리엔 새까만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 오크는 온 들판이 울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취이이익! 새빨간 거짓말! 넌 드래곤이 아니야앗! 취이이익!”

농담이 아니다. 비록 가느다랗긴 했지만 성벽 위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충분히 들려왔다. 저 오크가 서 있는 장소와 성벽까지는 직선 거리로 일이백 큐빗 정도 되는 것 같으며, 따라서 저 오크 녀석은 의심할 여지 없이 괴물이다. 곧이어 그 정신 나간 오크의 어깨는 부풀어 터져버릴 듯이 팽창했다.

“맙소사!”

엑셀핸드의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오크는 온 힘을 모아서 공중의 지골레이드를 향해 글레이브를 투척했다. 그 어떤 영웅이라도, 설령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중의 라인버그가 내 OPG를 끼고 던지더라도 저 높이의 드래곤에게 던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높이는 둘째 치고 눈앞을 완전히 가로막아 버리는 저 위용에 짓눌려 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저 검은 투구의 오크는 그렇게 했다! 글레이브의 쇠날이 검은 들판을 배경으로 번뜩였다.

쐐애애애액!

섬광처럼 날아간 글레이브는 그대로 지골레이드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물론 지골레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글레이브는 허공을 날아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 에 떨어졌다. 쟁그렁!

잠시 후 공중에 떠 있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환상은 사라지는 법. 땅에 쓰러져 있던 오크들은 천천히, 하지만 맹 렬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황야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환성이 들려왔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무슨 말인지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들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취이이익! 취익, 취이익!” 하는 소리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칼은 씁쓸한 얼굴이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아프나이델 역시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그 소란스러운 환성이 소용돌이 가운데서 검은 투구의 오크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크우우우우! 크아아아아!”

“녀석들, 기분 좋겠군.”

제레인트는 아주 단순한 즐거움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크가 기분 좋으니 자신도 기분 좋다는 식으로. 그래서 샌슨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입매를 씰룩거렸다. 그런데 그 검은 투구의 오크가 다시 고함을 지른 순간 샌슨의 입술은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아프나이델의 마법이 깨진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취잇취이이익! 화렌차와! 오크의 친구인 성자 핸드레이크가 나를 돌보신다! 취익! 지저분한 속임수 따위, 치워랏! 취이이익! 내려와서 칼과 칼로써, 피와 피로써 싸 우자앗! 취이이익!”

“샌슨.”

“응?”

“내가 들은 말을 샌슨도 들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해.”

“………미안해. 나도 들었어.”

“그럼 우리 둘 다 정신이 이상한 거로군?”

“그런 것 같아. 사실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샌슨과 내가 이런 넋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칼은 성벽 바깥으로 투신 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맹렬히 앞으로 달려갔다. 칼은 성벽 위로 상반신을 거의 다 내밀고는 오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앞으로 달려갔던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내 목소리가 저기까지 울리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아니오. 지금 그런 마법은 없습니다.”

“이런! 어디 보자. 저 친구를 여기로 불러들이려면.

그때 운차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칼에게 말했다.

“할말이 있습니까?”

“예? 아, 예. 저 오크 친구가 지금 핸드레이크의 이름을 거론………….”

운차이는 칼의 이야기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전해 주지요. 뭐라고 물어볼까요.”

“예?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저 친구가 말한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인지 좀 물어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는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곧 흉벽 위에 섰다. 운차이는 크게 숨을 들이키면서 두 팔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자세를 취했다. 안티고어 시장은 불편한 얼굴이 되어 칼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헬턴트 공. 이곳의 책임자는 나인 줄 알았는데.”

흐음. 조금 전 지골레이드가 있을 때만 해도 칼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다는 식으로 행동하시더니. 난 불쾌한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칼은 점잖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이 질문만 좀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전 다른 병사들이나 이 도시의 지휘 체계에 대해 간섭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전사는 제 동료이고 제 부탁에 의해 오크들에게 질문하는 것이니…………”

“하지만 당신은 우리 도시의 손님이고 주인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더욱이 전시 상황인 도시 내에서라면 말이오.”

안티고어 시장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안티고어 시장의 이야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더니 고함을 지르기 시 작했다.

“이봐아! 오크들아아아!”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뭐라고 말하려던 입을 그대로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허, 허어어…………억.”

“아이고, 내 귀!”

엑셀핸드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서 물러났다. 엑셀핸드는 귀가 퍽 민감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시장과 다 른 수행원들, 그리고 라스 대장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좌우로 물러났다. 성벽 위라서 뒤로는 물러날 수 없었으니까.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물러나면서도 미소를 떠올 리는 칼의 얼굴이 보였다.

운차이가 그렇게 성벽이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저 아래에서 오크들의 소란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놈이 고함을 질렀다.

“취이엑! 노린내 나는 인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아앗!”

미약하지만 정확한 목소리. 샌슨은 기막힌 얼굴로 말했다.

“웃기는 일이군. 1200큐빗 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더 웃기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야.”

샌슨은 투덜거렸지만 난 이것이 좋은 노래 소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짙푸른 새벽 하늘, 광막한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 그리고 운차이는 푸른 새벽 하늘을 머 리에 이고 흉벽 위에 당당히 서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휘휘 젓더니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때 운차이가 다시 외쳤다.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이냐아아!”

“네 이놈! 취이이익!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이냐아앗!”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마음대로다! 대답햇! 네가 말하는…………….”

그때였다. 안티고어 시장은 자꾸 자신의 말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해 짜증이 난 것처럼 운차이의 허리를 붙잡아 아래로 잡아당겼다. 운차이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안전하게 뛰어내렸지만 노한 얼굴이 되어 거칠게 시장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자 시장 역시 몸을 긴장시키며 방어 자세를 취했고 그의 수행원들이 재빨리 시장의 주위 를 둘러쌌다. 운차이는 손을 칼자루로 가져갈 듯했지만 다시 손을 내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무슨 짓이오?”

시장은 잠시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시장님. 운차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군요? 시장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얼굴을 떨구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칼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헬턴트 공.”

“예. 시장님?”

“당신도 지각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저 목청 좋은 작자가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저런 이야기를 해대 는 것 말이오!”

“예? 아니,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이런 제기랄!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가장 소중한 뿌리이자 긍지요! 그의 이야기에 오크 따위가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오. 아시겠소? 지금까지 오간 이야기만 해도 도대체 무슨 소문이 퍼질지 모르겠구먼 그래.”

칼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안티고어 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희귀한 종류의 인간을 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딱딱한 얼굴이 되어 말했 다.

“그 두 분의 이야기는 모든 종류의 의혹과 불쾌한 시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된다, 이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소! 이 나라는 지금 전시요. 온 국민이 단결해야 되는 시점이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전설은 그러한 단결의 근간이오. 도대체 우리나라 사 람으로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데 저 오크 따위가 오크의 친구 핸드레이크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다는 말이 퍼져보시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핸드레이크가 오크들과 뒷거래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먼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뭐요? 웃기지 마시오!”

“웃기는지 아닌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정말 핸드레이크가 오크의 친구였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시장님도 아시겠지만 핸드레이크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은 드 물지요. 그리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전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핸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여행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 저도 저 이야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런 사실은 필요없소!”

“예?”

“사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소. 알아야 할 사실과 알 필요가 없는 사실, 아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사실 말이오! 어린 아이에게 독극물의 지식을 가르치면 안 된다 는 것쯤은 당신도 알 것 아니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저 멀리 오크들이 내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칼과 안티고어 시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눈에는 그것은 두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인간형의 대립처럼 보였다. 한쪽은 국가나 역사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진실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 칼은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라는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만족시킬 차가운 진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과거의 모든 것을, 설령 거짓과 가식을 동원해서라도 소중히 지키려는 사람. 안티고어 시장은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에 커다란 애정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정 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누가 올바른 거지?

그러나 칼은 곧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사죄하겠습니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전을 주고받느라 상당히 긴장했던 모양인지 어깨를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는 헛기침을 좀 하고 나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도시에 들러주신 이상 나는 이곳의 주인으로서 여러분들의 안전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다하겠소. 여러분들이 위험한 이곳에 계실 필요는 없으니 시청 으로 가시지요.”

“저 오크들은 저희들의 뒤를 쫓아온 것입니다. 저희들도 책임을 져야겠지요.”

“걱정 마시오. 칸 아디움의 성벽을 믿으시고 그 경비대의 힘을 믿으십시오. 우리들이 친구이자 동포로서 여러분들의 어려움을 돕도록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칼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별 의견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곳에서 오크들을 더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성벽에 남게 되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 께 안티고어 시장의 뒤를 따라 성벽을 내려갔다. 흐음. 시청에서의 아침 식사와 식후의 차 한잔이 기대되는군.

국왕전하를 친견하고 거기에 덧붙여 직접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은 몰랐어. 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엑셀핸드의 말마따나 후치 네드발이란 인물에 대한 존경심은 날 오랫동안 사귀어보고 난 다음에 표현해 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지금 우리들은 따스한 아침 식사를 대접받고 거기에 덧붙여 시청의 시장님 사무실에 모여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사무실은 대단한 특징은 없이 그저 공 무원의 사무실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테이블 상석에 앉은 안티고어 시장께서는 자못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참 곤혹 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네드발 군. 전하를 친견했을 때의 기분이 어땠나?”

뭐라고 대답하지? 훈장 수여식의 기억이라고는 장엄의 홀인지 뭔지,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 무진장 애먹이는 그런 장소, 지독하게 졸리는 문서 봉독자의 화려 취미의 미사여구……. 훈장을 받게 되었을 때는 정말 기뻤지.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면서.

“어, 서툰 표현으로 그 감동을 함부로 표현하고 싶지 않군요.”

이 정도면 내 혀에 대한 칭찬도 아깝지 않지. 핫하하! 엑셀핸드는 너 그때 반쯤 졸고 있지 않았느냐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뻔뻔스럽게 무시했다. 길시언은 그런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칼은 커피(그렇다, 커피! 그것이 이 도시에도 있었던 것이다. 안티고어 시장의 기호품인 모양인데 그는 칼이 커피를 마신다고 하자 퍽 좋아했다. 음. 나라도 내가 저런 괴상한 음식을 좋아한다 면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쁠 거야.)를 한 모금 삼킨 다음 찻잔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시장님.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커피 맛은 퍽 좋군요. 하지만 전운이 감도는 도시에서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그 향취에 깊이 빠져들 수가 없군 요.”

성밖에선 충만한 살의를 불태우는 오크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어서야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속뜻이 담겨 있지요, 칼? 그러나 안 티고어 시장은 칼과의 언외언 문답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는 푸근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아, 불안을 떨치십시오, 헬턴트 공. (칼은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여러분들이 저 흉악한 오크들에게 쫓기면서 심신이 많이 피로해지셨을 줄은 익히 짐작합니다. 이제 나의 도시에서 그 피로를 잊으시고 심신의 활력을 되찾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보다 충만한 여행이 되도록 대비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더없이 감사한 말씀입니다. 시장님.”

높은 의자 위에서 체면 떨어지게시리 다리를 흔들고 있던 엑셀핸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보시오. 시장. 여기 계속 있어도 되겠소?”

엑셀핸드의 보다 직접적인 말에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했다. 그러자 아프나이델이 재빨리 말했다.

“아, 엑셀핸드 님께서는 시장님께서 저희들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실까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밖에선 병사들이 시장님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 습니까?”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얀 턱수염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염려 마시오. 오크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바에야 저 단단한 성벽을 어떻게 하겠소?”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록크로스 해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뭐라구?”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당황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팔짱을 끼고 있느라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여유 있게 말했다.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록크로스 해변에서 300여 마리의 오크들을 대적했던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해변이지요. 성벽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때 루트에리노 대왕이 의지했던 것은 굳건한 성벽이 아니라 핸드레이크라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자신의 굳건한 우정이었습니다.”

안티고어 시장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물론 그렇지. 길시언 군.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덧붙여 굳건한 성벽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길시언은 김빠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문득 길시언이 바로 길시언 바이서스, 국왕 전하의 형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길시언 은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지? 길시언이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도 모두 암묵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긴 우리가 국왕 전하께 칭호를 받은 명예의 기사라는 이야기만 듣고도 라스 대장은 심장 마비를 일으킬 정도로 놀랐었다. 만일 길시언이 왕자라는 사실까지 밝힌다면? 음. 귀찮은 일 이 되겠군.

결국 샌슨이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 시장님. 그럼 우리들은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어? 어. 그렇소, 퍼시발 공.”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왕자인 길시언 바이서스는 길시언 군이고 우리 고향의 경비 대장, 성밖 물레방앗간의 처녀에게 코를 꿰인 샌슨 퍼시발은 퍼시발 공인가? 길시언을 훔쳐보자 그는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샌슨 역시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꾹 참고서 말했다.

“그럼 친절한 대접에 감사를 표한 다음 이만 떠나고 싶군요. 저희들의 여정이 몹시 바빠서요.”

샌슨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해 버렸다. 칼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늦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아, 그런가? 이런. 여러분들의 급한 여정이 나 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 되겠지. 헬턴트 공. 혹시 여정에 필요한 물자나 기타 등등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내 손 닿 는 것이면 모두 다 준비해 드리리다.”

칼은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여정이 그렇게 급하지는 않습니다. 퍼시발 군. 우리 때문에 곤경에 처한 도시를 뒤로 하고 우리가 어떻게 달려갈 수 있 단 말인가.”

“시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퍼시발 군.”

샌슨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평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런. 퍼시발 공의 말씀이 옳소, 헬턴트 공. 칸 아디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아니, 여러분들의 여정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저 오크들은 우리가 처리해 드리지요.”

아이고 맙소사. 그거 정말 감사한 말씀이군요. 더 이상 우리들을 쫓지 못하게 해주신다고? 저 녀석들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시장 나으리. 헷!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도의상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오크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책임을 져야지요.”

“오, 천만에요.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고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안티고어 시장은 그렇게 웃었고 칼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한 시장님이군. 밖에 300마리쯤 되는 오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 리고 싶은 것이 당연할 텐데 도리어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거절하다니. 호탕하게 보이고 싶은가 보지? 샌슨은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시장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 호의를 받아들이시지요, 칼?”

칼은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며 유유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칼이 다시 안티고어 시장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달려 들어와서는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고 잠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들에게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안티고어 시장이 밖으로 나가자 칼은 곧장 샌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려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시장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마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를 재현해 보고 싶은 모양인데요. 칸 아디움 성에서 안티고어 시장과 삼백 오크의 혈전.”

“그래서? 그냥 이 도시에 맡겨두고 달아나버리자는 말인가?”

“시장은 그러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난 안티고어 시장에겐 관심 없네.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저 밖의 오크들은 바로 우리들을 쫓아온 것인데 그 때문에 이 도시의 시민들이 불행한 사건을 겪게 만들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손 들고 나간다고 해서 오크들이 물러날 리는 없습니다.”

칼은 샌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샌슨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해 나갔다.

“저놈들이 저만큼 조직된 바에야 뭔가를 얻기 전에는 흩어지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는 어차피 구실일 겁니다. 아마도 노리는 것은 겨울 식량일 가능성 이 더 높겠지요. 정말 우리를 노리는 거라면 이런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를 앞질러 간 다음 적당한 곳에서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것이 낫지 요.”

샌슨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우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옳은 말일세, 퍼시발 군. 아마도 우리를 쫓던 오크들이 이 근방의 오크들을 규합한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겨울 식량을 위해 노략질을 준비하던 오크들이 있었 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가든 말든 오크들은 여기를 공격할 거란 말입니다. 우리를 불러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성에 있으면 귀찮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까요?”

“귀찮다고?”

샌슨은 나와 운차이를 힐끗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의 위명은 오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이거 자랑스러워해야 되나? 칼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오크들에게로 나가겠다고 말한 적 없네. 저 녀석들의 편지를 그대로 믿고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가 나왔으니 이 도시는 공격하지 않으시겠지요?”라고 물어볼 정 도로 순진하지는 않네. 저 친구들의 계획이 자네가 말한 대로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저만큼이나 모였으니 한번 휩쓸어 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 것은 어 느 부대의 지휘자라도 아쉬울 거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네.”

“됐네요! 그럼 우리는 책임감을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도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시장은 우리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습니까? 칼이 몇 번이나 그렇게 말 했는데도 말입니다.”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면 상대가 뭐라고 하든 도와야지! 어린애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어린애가 싫어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듯이.”

샌슨은 입을 다물고 다시 불평 불만이 가득한 헬턴트 남자의 표정을 지었다. 헬턴트 남자들은 스스로를 던져 스스로의 도시를 지키는 법이지. 아무래도 나 역시 불평 섞인 표정을 짓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칼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환상이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아니, 아프나이델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요.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완전히 괴물이었습니다. 그런 용맹한 오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제레인트와 네리아, 그리고 레니가 나타났다. 제레인트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서는 흥분해 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 다.

“야, 굉장하더군요.”

“예?”

“녀석들이 공성추를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고, 공성추요?”

제레인트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곧 마구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예. 황야 저편에서 오크들이 거대한 나무를 운반해 오고 있습니다. 이 근처 어디에도 나무 같은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세피아파인 고개에서 무 리를 두 개로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두 무리는 이 도시로 진격하고 후방 부대는 나무를 해서 끌고온 모양입니다. 지름이 사오 큐빗은 될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인데 녀석들이 거기에 십자형으로 나무 두 개를 묶어서 바퀴축까지 만들었더군요. 아, 바퀴는 둥근 방패 여러 장을 겹친 다음 가운데 구멍을 뚫어 만들었습니다. 오싹하고 멋지더군요.”

제레인트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일이 아니냐는 듯이 신나게 설명했고 그러자 칼은 이마를 딱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오, 맙소사. 퍼시발 군. 자네에게 경의를 표해야 되겠군. 자네 말이 맞았네. 아무래도 놈들은 제대로 결심하고 온 모양이군.”

“예? 무슨 말입니까?”

제레인트는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칼은 저놈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이 도시에 대한 노략질일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러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이나 아넨드 씨도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요?”

“예. 후방 부대는 수레나 짐꾸러미 같은 것에다 기치 같은 것도 몇 개 들고 왔더군요. 크레블린 대장이 낙담한 어투로 설명해 주길, 선두를 맡은 부대는 빠른 이동을 위해 무기만 들고 돌격해온 것이며 후방 부대가 식량이나 기타 지원 물품을 가지고 이제 도착한 거랍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온 것이며 그 렇다면 놈들의 목적은 우리 일행이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해 주더군요.”

“그래요. 음. 후방 부대의 수는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예에 전 숫자를 세는 데는 자신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선두부대와 거의 같은 숫자인 것 같습니다.”

칼은 얼굴이 노랗게 바뀌었다. 샌슨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 시장님께 찾아온 병사가 무슨 소식을 전했는지 짐작하겠군요.”

칼은 자신의 심정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망할…….”

칸 아디움의 시내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날은 이미 밝았지만 짙은 구름 때문에 태양은 따스함이란 전혀 없는 동그란 구슬이 되어 있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흉흉한 느낌을 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는지 모르면서 목이 터져라 우는 꼬마, 이리저리 부산하게 달려가는 병사와 사내들, 왜 모두들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것일 까. 그리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아낙네들과 그 아낙네들에게 귀를 붙잡힌 채 끌려가는 머리가 좀 굵은 사내아이들. 사내아이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엄마는 항상 재미있는 것은 못하게 해!’ 하는 식의 말을 외치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잔치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뿐인 것 같다. 제레인트는 코를 쓱 닦으며 말했다.

“흐음.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군요.”

“당신은 불안하지 않소? 이방인이라서?”

길시언의 질문에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것이 테페리의 뜻대로. 전 여기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떠날 필요를 느끼기 힘들군요.”

“예?”

우리 일행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크게 놀란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 남겠다는 말입니까?”

“예. 떠나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레니 양의 호송은 시급한 일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성벽은 안전하다. 그리고 내가 있어 봐야 오크들과의 전쟁 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성벽 위에 서서 이런 이유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떠나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저는 이런 마음이 언제 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테페리의 뜻이군요.”

“예! 그리고 테페리의 뜻을 따르는 것이므로, 전 불안하지 않군요.”

나도 테페리의 신자가 되어볼까? 어느때라도 불안감은 없을 것 같은데.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마디만 하지요.”

우리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자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세레니얼 양이 자의로 떠난 것은 잘 기억하실 겁니다. 그 렇듯이 우리는 서로를 강제할 아무런 권한도 없는 집단이지요. 물론 그랜드스톰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들은 그 책임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긴 합 니다만, 전 지금 그 책임을 잠시 잊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전 다른 사람이 저에게 부여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군요.”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임무를 이행하지 못한다고요? 일스 공국의 사절건 말씀입니까?”

“예. 그리고 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지금 갈색 산맥을 향해 달려가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도시의 위험을 수수방관하고 싶지는 않습 니다.”

“칼 아저씨는 멋져요! 이대로 달아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이 도시의 시장님도 우리들보고 가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미혼이시죠? 어떻게 아직 미혼이세 요?”

네리아의 이상한 질문에 우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칼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성분들의 안목이 정확한 때문이겠지요. 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좀 하지요. 우리 책임도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갈색 산맥으로 갈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무리를 나누자는 말씀입니까?”

길시언의 질문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먼저 여러분들의 찬성이 있어야겠지만, 여러분들이 찬성한다면 저로선 우리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한 무리는 이 도시를 돕고 다른 무리는 레니 양 을 갈색 산맥으로 데리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나쁜 의견처럼 들리지는 않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손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도끼자루를 힘 있게 쥐어보였다.

“난 이곳에 남지! 오크놈들의 머리가 600개야. 골라가면서 벨 수 있겠군.”

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미소는 난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엑셀핸드를 필두로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남겠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그 각자의 이 유를 들어보자.

“이미 말했죠? 테페리의 뜻대로. 제가 신의 뜻을 거부해야 될 만한 이유가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아, 그런 이유야 없지요.”

“미력한 마법이지만 엑셀핸드 님을 돕고 싶습니다. 아, 저, 물론 전 풋내기 마법사이고 풋내기 마법사가 감히 전쟁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아닙니다. 누가 아프나이델 씨가 풋내기 마법사라고 그러겠습니까. 아까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지요.”

“프림 블레이드는 무기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품…… 칵! 무기입니다. 뭐야! 네가 무기가 아니고 그럼 뭐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어, 흠! 어쨌든 무기가 있을 곳은 적이 있는 곳입니다.”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헬턴트 전권 대리인을 보호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칼 곁에 있겠습니다.”

“퍼시발 군. 그건………….”

“어? 샌슨. 내 임무와 같네?”

“……네드발 군.”

“장래의 아들을 돌봐야 돼요.”

“예?”

난 까무러치는 표정을 지었고 칼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네리아와 날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아직까지 대답을 하지 않은 운차이를 돌 아보았지만 곧 시선을 되돌렸다. 운차이는 조용히 검을 뽑아들고서 햇빛에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칼은 시무룩한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레니는 토끼 같 은 눈이 되어서는 말했다.

“저 혼자 가요? 길도 몰라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레니 양.”

칼은 두 팔을 축 늘어뜨렸고 우리들은 모두 웃었다. 길시언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여행자이며 서로가 서로를 간섭할 수 없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칼?”

칼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600마리의 오크들을 처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에 대해 논의해봅시다.”

작전명은 그랬다. ‘오크 600마리 최단 시간 격파 작전’ 독창성이나 참신함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작전명은 그렇게 정해졌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불려 지지 않은 채 사장되어버렸다.

그 작전의 수행 인원을 보자면, 먼저 자칭 독서가, 타칭 독서가를 빙자한 독설가 칼 헬턴트가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내가 왜 독설가인가, 네드발 군?”

“진짜 독설가는 독설을 내뱉을 때도 전혀 독설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법이라고 전에 가르쳐줬지요?”

“별로 할말 없네.”

그리고 작전 인원을 보자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착각될 수 있는 오거, 마법검에 시달리면서도 그 성능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전사, 신의 뜻에 따라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면서도 웃어버릴 성직자, 실제로 교수대에 걸릴 뻔했지만 다행히 풀려난 자이펀 간첩, 면도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예리한 도끼를 시도 때도 없이 휘둘러대는 드워프에, 아들 딸린 홀아비를 노리고 있는 시집가고 싶어하는 처녀가 하나요, 그리고…………

“후치. 톱메이지가 어쩌니 하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줘.”

“스스로가 거부하는 칭호를 받게 될 불운한 마법사.”

“…젠장.”

“난 뭐니, 후치야?”

“그 모든 인원들이 애정과 헌신으로 보호하는 항구의 소녀.”

“호호호.”

“이렇게 화려한 인원이라구요, 칼.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지금 어느 때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 화려한 인명록은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600마리의 오크를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자네 어투가 갈수록 화려 취미에 물드는 것 같군.”

“지금 내 어투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럼 중요한 문제를 풀어보세나.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먼저 작전 지휘소를 찾아야 되겠군. 그런데 이 도시의 작전 지휘소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직 설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저기 크레블린 대장이 있군요.”

샌슨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갤러리 저편에서 병사들에게 뭔가를 말하는 크레블린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황 급히 다가왔다.

“칸 아디움의 성벽 위에 몰려 있는 이 화려한 인원에게로, 지금 칸 아디움의 안보와 번영할 내일을 담보하는 막중한 책무에 시달리는 전사 라스 크레블린이 황급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만해!”

나는 샌슨에게 쥐어박힌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크레블린 대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기엔 웬일이십니까? 헬턴트 공?”

“칼이라고 불러요. 전황은 어떻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 바깥을 가리켰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녀석들의 1차 돌격은 사수들의 공격으로 격퇴시켰지만 놈들의 인원은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난 아래의 황야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선 레니가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어머나…….”

황야에는 곳곳에 오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숫자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시체라서 보기에 끔찍했다. 그리고 나 머지 오크들은 화살 거리 바깥에 장방형 진을 친 채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레인트의 말대로 오크들의 숫자는 두 배로 불어나 있었으며 그 중간중간에 바람을 받 아 펄럭거리는 깃발의 모습도 보였다. 깃발에 무슨 그림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분 나쁜 붉은색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제레인트가 말하던 공성 추의 모습도 보였다. 그것은 똑바로 성문을 향한 채 놓여 있었는데 굵은 통나무를 통째로 잘라 만든 것이었으며 오크들이 끌고 다닌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 한 것이었다. 샌슨은 그 광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성추는 오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수레바퀴 자국은 보이지 않는데요.”

“그렇소. 조금 전의 돌격은 그저 인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방패를 머리에 이고 돌격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들의 신경을 자극시켜 지치게 만들고 싶은 모양 입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면 화살을 낭비시키고 싶은 것이겠군요.”

“그래요.”

“돌이나 끓는 기름 등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얼빠진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 하지만 저기엔………….”

길시언이 가리킨 것은 흉벽 아래쪽과 갤러리가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투석구였다. 음. 그러고 보니 정말 도시의 외벽 치고는 굉장한 규모로군. 갤러리에 투석구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크레블린 대장은 길시언의 손을 따라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저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저기엔 투석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요?”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얼굴을 붉혔다.

“저게 투석구입니까? 난 빗물 빠지는 구멍인 줄 알았습니다.”

오, 맙소사. 빗물 빠지는 구멍이라구? 저렇게 커다란 구멍이? 길시언은 기막힌 얼굴이 되었고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여보시오. 이곳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도시란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내 지위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단 말이오. 우리 경 비 대원들은 그저 술주정뱅이들의 싸움이나 시장에서 상인들의 자리 싸움, 아니면 가장 위험한 싸움인 부부싸움을 말리는 존재였지 도시를 향해 쳐들어오는 오크 부 대를 막아내는 사람들이 아니었소.”

길시언은 동정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퍽 정연한 모습이군요. 사수들의 배치도 훌륭하고.”

“그래요? 아넨드가 들으면 굉장히 잘난 체를 하겠군. 지금 아넨드 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놈은 그래도 우리들 중 전쟁을 겪었던 녀석이고 아마도 유일 한 전쟁 전문가일 거요.”

그러자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한 일이군요. 저, 우리들도 여러분을 돕고 싶습니다만. 우리들은 전쟁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지요. 더군다나 저 오크들은 우리들을 쫓아온 것이니 우리들로서는 당연히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환한 얼굴이 되었다.

“아, 정말 도와주시겠습니까?”

“새벽에는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때의 무례함은 다시 한 번 사과를…………….”

“아니오. 괜찮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두고, 오크들을 물리칠 방도나 연구하지요.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셨으니 화살 보유량 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당장 처량한 얼굴이 되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일원화된 지휘 체계, 부대간 유기적 연결로, 하다 못해 보급 계획도 제대로 서 있지 않다. 사수들은 자신들이 언제 교대할 수 있는지 모르고 활이 없는 경비 대원들은 어디에 집결해서 뭘 준비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비 대원들이 밥을 먹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될 정도인 것이다. 칼은 한숨을 쉬었다. 아넨드 씨는 멋진 배치를 이루어 오크들의 급습을 대비할 정도까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이건 너무 심하군. 시장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답니까?”

“나도 그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크레블린 대장님. 절 당신의 임시 고문으로 좀 삼아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칼은 곧 부리나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명령이 너무 빨라서 내가 그의 임시 사서가 되어서 종이에 목록을 적은 다음 줄을 긋게 되었다. 칼의 명령에 따라 정신없

이 오가던 활 없는 경비 대원들은 경비대 건물에서 솥과 식량 부대, 취사 도구들을 옮겨왔다. 그것들은 성문에 가장 가까운 건물 하나를 징발하여 설치되었으며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성안의 아낙네들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잠시 후 칸 아디움에서 가장 용감한 아주머니들이 몰려와서 구수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 칼은 그 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전략적 거점은 결국 성벽 주위가 된다. 이 도시 바깥의 지형은 극히 평탄하고 경비 대원들의 무장은 빈약하므로 성 밖에서의 전투는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 안 쪽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칼의 지시에 따라 경비 대원들은 성문 안쪽에 옹성(城), 혹은 방책이라 불릴 만한 것을 설치했다. 음. 우리 헬턴트 성에도 저런 것이 있다. 헬턴트 성의 옹성은 성문 바깥에 있고 돌과 목책으로 된 훌륭한 건조물이었지만 칸 아디움의 옹성은 건초 수레와 물통, 가구 등으로 만들어진 볼품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에 의해 성문 이 돌파당할 경우, 성 안쪽으로 진입하게 되는 오크들은 옹성 너머에서 공격하는 경비 대원들의 창에 적지 않게 당하게 될 것이다. 칼은 활을 쏠 줄 모르는 경비 대원 들로 하여금 창을 들고 옹성 뒤쪽에 포진하게 했다. 그 옹성을 구축하는 동안 나는 수레를 밀어붙이고 물통들을 걷어차고 가구를 집어던져 쌓아올렸으며, 칸 아디움 의 경비대원들은 서부에서 온 괴물 후치 네드발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내었다. 으으. 어쩌면 수십 년쯤 지나고 나면 ‘우리들의 도시가 바람 앞의 양초처럼 위급한 시 기에 빠졌을 때, 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서풍을 타고 날아온 괴물 초장이 후치 네드발………….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칼은 가장 우수한 사수 몇 명을 골라서 성탑 위쪽의 원총안에 배치시켰다. 라스 크레블린 대장이 원총 안을 가리켜 쓸데없이 좁은 창문이라고 불렀다는 이야 기는 하지 말도록 하자.

“여러분들은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크들이 달려온다고 해서 화살을 쏘아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노릴 대상은 이렇습니다. 첫째, 가장 크게 고 함을 지르는 녀석들. 둘째, 깃발을 든 녀석들. 그 녀석들이 중요합니다. 가장 무서워 보이는 녀석을 고를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 외에 다른 녀석들은 달려오든 말 든 내버려두십시오.”

사수들 중에 하나가 질문했다.

“왜 그 녀석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녀석들이 전체의 사기를 좌우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당신들은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그런 녀석들이 사격권 안에 들어오면 자의에 따라 사격하시오.”

정선된 사수들은 성탑으로 올라갔다. 사수의 총수는 50여 명. 그리고 100명쯤 되는 경비 대원들이 성 안쪽의 방책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게 되었다. 모든 배치가 끝나자 우리 일행과 라스 크레블린 대장, 그리고 아넨드 씨는 성문 위의 성루에 모였다. 칼은 성루 너머로 오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150대 600이라. 공성전의 이상적인 비율이군.”

“이상적인 비율이라구요?”

“성은 세 사람 몫을 한다고 하지. 허즐릿이 말한 이상적인 성의 요건을 기억하는가?

“어…………… 수직적으로 높을 것, 수평적으로 좁을 것, 그리고 자급 자족이지요?”

“그래. 이 성은 수직적으로 50큐빗쯤 되겠군. 충분한 높이야. 그리고 바깥의 길이 대책 없이 좁아.”

“잠깐만요! 저렇게 넓은 황야인데 좁다니요?”

“녀석들은 사다리가 없어. 설사 사다리가 있다고 해도 오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 따라서 몰려올 곳은 성문뿐이야.” “아, 예.”

“그리고 자급 자족은 되었으니, 따라서 이 성은 세 사람의 몫은 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병사들이 150명. 계산이 나오는가?”

“나오네요. 오크와 이 도시는 현재 막상막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이상적이라는 거야. 하지만 칸 아디움 쪽에 더 승산이 있지. 사람들이나 오크들은 지칠 수 있지만 성벽은 지치지 않으니까.”

“하지만 화살은 어떻게 하지요? 지금부터 열심히 만들까요?”

“그건 곤란하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받아쓰게. 아, 알아보기 쉽게 써야 되네.”

성루 위에는 테이블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쓸 준비를 갖추자 칼은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썩어빠진 이빨과 냄새 나는 콧구멍에 경의를 표하며, 사랑과 우정으로 조언하는데, 너희들이 이 성을 공격한다면 너희들 중 단 한 놈도 너희들의 지저분한 동굴 로 돌아가지 못한다.’ 안 쓰고 뭐하는가?”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쓰라구요? 킥, 킬킬킬.”

“물론이지. ‘그러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오크 가죽이나 오크 고기의 유익한 이용법을 알지 못하므로 파리들이나 즐거워할 오크 시체 더미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 다. 살아 있을 적에도 냄새를 풍기는 너희들이 죽고 나면 얼마나 지독한 냄새를 풍길지 잘 안다. 따라서 괜히 이곳에 돌격하여 죽어넘어지지 마라. 불쾌하다. 이 편지 를 받는 즉시 달아나라. 그대의 벗이..”

“오크들의 눈이 뒤집히게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난 평소에도 저 작은 눈이 뒤집힐 수 있는지 궁금했다네.”

난 칼이 불러준 말을 적당히 각색해서 더 심한 말로 만들어내었다. 길시언은 내가 쓴 글을 읽어보더니 폭소를 터뜨렸고 엑셀핸드의 경우엔 똑같은 글을 몇 장 더 쓰 라고 간청했다. 자신의 집 거실 벽에 걸어두고 싶은 명문이라는 것이었다.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보시오, 칼, 오크들을 도발해서 어쩌시려는 생각이오?”

“저 녀석들이 우리의 화살을 소모시키기 전에 먼저 우리가 저 녀석들의 인원을 소모시킬 생각입니다.”

“놈들이 이 편지를 보고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무턱대고 돌격해 오기를 바란단 말이오? 그거 너무 순진하지 않습니까?”

“전 대장님보다는 오크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맡겨주시겠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칼을 묵묵히 바라보았지만 칼은 자신감 있는 눈으로 그 눈길을 되받았다. 마침내 크레블린 대장의 고개가 움직였다.

“음……, 좋소.”

편지를 다 쓰고 나자 칼은 그것을 화살에 묶었다. 그러곤 성루의 난간에 발을 올리곤 태양을 쏘아버릴 듯이 활을 높이 들어올렸다. 피유웅!

하늘을 향해 날아간 화살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투덜거렸다.

“햇님을 쏴버린 것 같군. 저게 제대로 날아간 것 맞는가?”

“제대로 날아갔어, 드워프 친구.”

대답한 것은 운차이였다. 운차이는 도대체 눈이 얼마나 좋은 거야? 아무리 탁 트인 사막에서 자라났다지만 저렇게 좋다니. 나도 눈이 별로 나쁜 편은 아니지만 칼이 쏘아버린 화살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오크의 몸을 맞추거나 하지는 않았군. 땅에 떨어졌어. 오크들이 거기에 접근하고 있군.”

“좋아. 됐어. 크레블린 대장님! 병사들에게 단단히 대기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나 일제 사격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쏘아서는 안 됩니다.”

“알았소. 그룬!”

그룬 상병은 크레블린 대장의 명령을 하달받고는 갤러리 곳곳을 뛰어다니며 명령을 전달했다. 성루 양쪽의 성벽에서 병사들은 화살 하나씩을 흉벽에 기대어 세워놓 고 또 하나를 꺼내어 활에 걸고는 활을 느슨히 늘어뜨린 채 흉벽 너머를 주시했다. 모두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옆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아프나이델이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조그만 장난감 삽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아프나이델 의 주머니 안에는 얼마나 많은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는 거지?

잠시 동안 성벽 위의 인간들과 오크들 양편 모두에서 쥐죽은 듯한 고요만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터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예의 그 검은 투구의 오크 의 목소리였다.

“이 찢어 죽일 인간놈드으으을! 일제에에 돌겨어어억!”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고 칼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 손님께서 오시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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