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17화 – 태양관 월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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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17화 – 태양관 월음관

태양관 월음관

숙소 배정

“자, 그럼 모두들 숙소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하게!”

혁중이 노인답지 않은 시원스런 걸음으로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사람들은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단상을 내려가자 왼쪽 소매에 다섯 개의 검은 띠가 둘러져 있는 묵선 오본의 율령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나직하지만 모든 이의 귀에 똑똑히 들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이제 공식적인 화산규약지회의 막이 올랐으니 임시 숙소에서 머무는 것을 끝내고 정식 숙소를 배정하도록 하겠네!”

그동안 그들은 정파 사람은 정파 사람끼리, 흑도 사람은 흑도 사람끼리 임시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곳은 원래대로라면 참가자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화산 규약지회가 열리는 동안 내빈이 방문했을 때 사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남자는 저기 보이는 붉은색 건물인 태양관, 여자는 그 옆에 있는 푸른색 건물인 월음관에 머물게 되네. 매우 구분하기 쉬우니 헷갈리는 일은 없을 걸세.” 두 채 모두 무척이나 특이한 이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색이나 모양새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건물 같았다.

“이번 백주년 화산규약지회를 맞이하여 ‘특별히, 새로 지은 건물일세! 모든 것이 새것이니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것이네.”

친절한 율령자의 설명이 뒤따랐다. 무척이나 간단한 설명이었다.

“새로 지었다고 해서 불편함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오히려 새로 지은 건물일수록 여러 가지 잡다한 불편사항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비류연은 굳이 이 사실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방 배정은 어떻게 됩니까?”

장홍이 손을 번쩍 들더니 물었다.

“필요 없네.”

묵선 오본 율령자의 단호乎) 명쾌(明快)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 그건 어째서입니까?”

“안으로 들어가보면 이유를 알게 될 걸세. 자, 그럼 다들 이동해주게!”

율령자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제각각 임시 숙소로 돌아와 각자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 두 채의 정식 숙소가 어떤 곳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숙소는 그저 잠을 자고 쉴 수만 있으면 되는 곳이라는 안 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우르르르.

율령자의 지시에 따라 수십 명의 인간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가운데 한쪽 구석에서 차가운 눈을 빛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이가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군! 하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잘될까?”

잠자코 지켜보던 대공자 비가 조용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그 말의 참된 의미를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편히 쉬시지요.”

안내를 맡은 율령자는 그 말만 하고는 이들을 방치해둔 채 사라져버렸다. 의외의 상황에 던져진 수십 명의 남자 측 참가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율령자의 그림자와 발소리가 건물 저편으로 사라지자 노학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편히 쉬어?”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노학은 욕설이라도 마음껏 터트리고 싶었다. 다른 이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의 심리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엿 같은 상황에 우리를 처박아놓고 편히 쉬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지?”

숙소가 헐거나 비가 새거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웬수 같은 놈들이 그들의 바로 옆에, 그것도 같은 건물 같은 방 안에 함께 있다 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이들의 심리상태를 못내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사기!”

“우린 당한 건가?”

그것은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침실이었다. 가운데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여섯 자 정도 되는 통로에 돌이 깔려 있었는데, 그 양쪽에 나무로 긴 편 상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부자리가 열을 맞춰 서른 개 정도 놓여 있었다. 차곡차곡 갠 이부자리 뒤에는 개인의 짐을 넣어두는 장이 보였다. 한쪽에 서른 개씩, 양쪽을 합하면 육십 명이 한꺼번에 머물도록 그 숙소는 설계되어 있었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방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칸막이나 발처럼 타인의 시선을 막을 만한 기본적인 것도 이곳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재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니깐. 그러나 다른 한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노인네들이 머리를 많이 썼군.”

거대한 공동 숙소, 태양관 안을 둘러보며 비류연은 그 안에 담긴 의뭉스런 의중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수법이 상당히 거칠지만 확실히 강한 충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니면 아예 철천지원수 사이로 만들든가. 무척이나 극단적인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이 분노와 짜증을 터뜨린 것은 지금부터 이 안에서 흑백도의 모든 이들이 앞으로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흑 백의 출신과 소속 구분 없이 몽땅 한곳에 몰아넣어진 것이다.

“우리가 왜 저런 질 나쁜 놈들과 함께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천무학관의 누군가가 외쳤다.

“저런 샌님들하고 같은 공간을 써야 한다니. 몸이 솜처럼 노곤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구만.”

그러자 마천각에서도 지지 않고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누가 할 소리! 저런 질 나쁜 놈들하고 함께 생활해야 한다니 정말 짜증이 나는군! 뭘 믿고 저 녀석들과 같이 살 수 있지?”

다시 천무학관 쪽에서 험악한 말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상당히 극단적인 의미를 동반하고 있었다.

“잠자다가 우리 숨통을 끊을지도 모르는 저런 사도의 녀석들과 말이야!”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화와 싸움은 이미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야, 분위기 좋구먼.”

남들은 다들 폭풍전야의 기운을 풍기고 있는 가운데 비류연이 발랄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함! 그럼 이만 한숨 자볼까!”

비류연이 한껏 기지개를 켰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오나?”

효룡이 하도 신기해 물었다.

“쯧쯧쯧! 아직 멀었군, 멀었어!”

비류연이 오른손 검지를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말했다.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지. 나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결과 지금은 드러누워서 잠이나 자빠져 자라고 말하고 있군. 그런고로 난 잠을 청하겠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침상 위로 훌떡 몸을 내던졌다. 그는 이 살 떨리는 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지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쿨쿨쿨…….

사지를 뻗은 채 벌써 잠들어 있는 비류연만이 이 모든 불편함과 긴장의 도가니 속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듯했다. 더없이 편해 보이는 얼굴로 그는 잠들어 있었 다.

본인은 인식하고 한 일인지 모르고 한 일인지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수면욕이 첫 번째 충돌을 막는 데 상당 부분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찌이이익!

반질반질한 바닥 위로 길게 선 하나가 그어졌다. 숙소를 정확히 반으로 양분하는 붉은 선, 서로의 영역을 표시하는 적대적인 분계선이었다. “이 선 절대 넘어오지 마! 넘어오면 주~거어!”

그 선을 그은 자는 마천각 참가자 중 한 명인 마철랑 ‘이규’였다. 이리처럼 눈매가 사납고, 그 더러운 눈빛만큼이나 성격이 거친 사내였다.

“흥! 네 녀석들이야말로 넘어올 생각 말라고. 너희들과 스치기만 해도 우리 피부가 썩으니깐 말이야!”

그 선 바로 건너에서 흉악한 시선을 쏘아보내고 있던 노학이 마구 지껄여댔다.

“그리고 넘어가면 어쩔 거야? 이렇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살짝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붉은 선 위를 푹푹 찔렀다. 손까지 자연스레 그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스릉!

누가 뽑았는지 모를 전광석화 같은 쾌검이 그의 손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 같은 검광이 나뭇가지를 쓸고 지나갔다.

“허걱!”

질겁한 노학이 급히 손을 빼냈다.

톡!

검은 정확하게 붉은 선 뒤로 남은 부분만큼을 나뭇가지로부터 잘라냈다. 깨끗이 절단된 나무토막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무, 무슨 짓이야!”

노학이 분노의 일갈을 내뿜었다.

챙챙챙챙챙!

한 사람이 검을 뽑아들자 상대도 지지 않고 무기들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병장기를 뽑아드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려퍼졌다. 흉흉한 살기가 숙소 전체를 감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치는 오래 갔지만 다행히 유혈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태연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것은 비류연과 대공자뿐이었다. 대공자는 들어오자마자 조용히 한쪽에 자리를 잡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잠에 취해 있는 비류연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무시했다.

병장기들은 곧 거두어졌다. 하지만 살기나 악의마저 깨끗이 거두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사람들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아침 조례를 시작했다. 서로를 믿을 수 없었기에 불안한 마음에 걱정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것이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속으로 밤새 외치고 있었다.

‘크오오오, 잠이 안 와! 젠장! 호굴에 들어가서 잠을 청해도 이보다는 편하겠다.’

그들이 얼마나 심적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모두들 병장기를 왼편 허리춤에 두고(오른손으로 뽑아야 하니까 뽑기 쉽게 잠을 청했다. 어떤 이는 그것도 부족한지 베개 밑에 소도까지 넣어놓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느긋하게 잘 수 있는 게 이상한 놈이었다. 애석하게도 비류연은 그 애석하고 이상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대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나서야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흑도와 백도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합의,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잠 좀 자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들은 동의했다. 그리고 방법을 제시하고 서로 수용했다. 오늘부터 서로 불침번을 세우기로 약조하고서야 그들은 비로소 안심하고(완전히 는 아니지만) 잠들 수 있었다.

홍매곡 심처 노야 혁중의 방

호롱불이 흔들리자 주위의 경물 위로 그림자들이 춤을 춘다.

노인이 보고 있는 책은 바로 이번 화산규약지회 참가자들의 신상을 적어놓은 명부였다. 자세하게 신상을 적기 위해 정보부가 움직인 것을 빼면 무척 평범한 책자 였다.

흰 것이 종이, 검은 것은 글.

지금 노인의 눈은 한 지점에서 굳은 듯 멈춰서 있다.

비류연(飛流連)

그 밑에 함께 적힌 출신문파는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일인전승이나 은거기인으로부터의 전수일 경우, 함부로 사문에 대해 떠들고 다닐 수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 에 강호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원보증인란에 염도 곽영희가 적혀 있는 것은 역시 의심스러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인은 염도의 사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과연 정체가 뭘까…….”

분명히 숨기고 있는 게 있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이렇게 자신의 흥미를 끌게 해준 인물은 요 수십 년 동안 한 명도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좀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노인이 한 가지 일에 대해 결정을 내렸을 바로 그때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갑자기 세 개의 기척이 생겨났다. 조금 전만 해도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언제부터 그들은 그곳에 있었을까?

아주 사소한 공기의 진동에도 반응하는 호롱불에서는 아무런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귀신도 흉내 내지 못할 깜짝 등장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전혀 놀란 기색 이 없었다.

“왔는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노인이 말했다.

척! 털썩!

세 명의 그림자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사대암천(四大暗天)이 부름을 받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극진한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 세 사람 모두 일파의 종사를 능가하는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대암천이라는 이름과 달리 기 척은 넷이 아니라 셋뿐이었다.

“아무래도 자네들의 힘이 필요할 것 같네!”

담담한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노인의 등뒤에서 흠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저희들 셋씩이나 말입니까?”

그 중 가운데 선 그림자가 말했다. 젊음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듯 노회한,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나이가 적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우측 끝에 서 있던 그림자도 약간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웬만한 문파 하나를 멸문시킨다 해도 저희 중 하나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셋이나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그들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리고 이 노인도 그들의 그런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직 그 하나만의 명을 받들며 다른 어떤 권위에도 복속하지 않는 존 재다.

“미안하네, 번거롭게 해서. 하지만 그만큼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해주기 바라네.”

그들은 주종을 뛰어넘는 그런 관계였다. 때문에 사과하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존명!”

그림자 셋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천(天)으로부터의 소식은 아직 없나?”

“아직 없습니다.”

“그렇군! 야속한 그 친구는 여전히 소식 두절이군! …그럼 편히 쉬게나. 자세한 계획은 이곳에 있으니 잘 읽어보고 그대로 시행해주게. 다른 부탁이 있으면 나중에 연락하도록 하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는 노인이었다. 그것 역시 무척 드문 일이었다.

“물러갑니다, 주군!”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기척도 없이 방안에서 사라졌다.

주군이라 불린 노인, 혁중이 오른쪽 어깨를 툭툭 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바빠지겠군!”

그가 그렇게 말한 이상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깊어가는 밤의 물결 속으로 달이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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