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19화 – 조 추첨 (1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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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19화 – 조 추첨

조 추첨

– 의지와 믿음

남자 숙소든 여자 숙소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잘한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조 추첨의 날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의외로 감성을 통제하 는 이성의 힘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맥없이 지나고 운명의 그날, 조 추첨의 날이 밝았다.

과연 누구랑 한조가 될 것인가? 그것은 누구에게나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일부의 얼굴에는 타 출신의 사람들과그것도 거의 데면데면하게 보고 있던ᅳ 한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평생을 정반대의 입장에 놓여 살아온 이들이었다. 한순간에 그 격차가 메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대화하며 서로를 알아보라던 지난 일주일 동안도 결코 조용 하고 평화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사고의 연속 대행진이었다. 개와 원숭이를 한우리에 집어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정사흑백 구분 없이 한조가 되어 호흡을 맞추라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그 때문인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형체 없는 귀신처럼 좌중의 머리 위를 떠돌고 있었다.

하얀 통에는 백도 참가자들의 이름이, 검은 통에는 흑도 참가자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색깔 구분이 명확해서 헷갈릴 염려는 없었다. 잠시 후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만큼 치밀한 모의도 드물 것이다. 이들 율령자들은 정말로 철저하게 연구하고 준비했음이 분명 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할 만큼 지독했다. 율령자들의 본의야 순수하든 아니든 참가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조를 짜게 되면 누구나 자연스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한조가 되고 싶은 욕망에 불타오른다. 그리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는 죽어도 한조가 되고 싶지 않아 한다. 인간인 이상 그것은 기본적인 욕구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때로는 그렇게 되지 못한 상황이 질투와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비류연은 이때 효룡과 함께 무리들 틈에서 율령자들이 조 추첨을 준비하는 모습을 강렬한 눈빛으로 지켜보며 서 있었다.

“룡룡, 이런 추첨에 임할 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비류연의 물음에 효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건 바로 부동(不動)의 동인(動因)이 될 만한 확고한 의지와 절대적인 믿음. 이 두 가지일세!”

그의 목소리는 그 내용만큼이나 강력한 확신에 차 있었다.

“으음…, 믿음만으로 과연 될까?”

미심쩍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비류연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쯧쯧, 그러니깐 자네는 안 되는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벌써 절대적인 믿음이 부족한 상태거든. 그런 상태에서는 정말 운에 맡길 수밖에 없지. 적어도 그 운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만큼의 절대적인 의지력이 필요한 거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다는 의지력과 믿음,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를 필요가 있지.”

“그런가?”

효룡으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정신상태로는 결코 그녀랑 한조가 될 수 없을걸?”

비류연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 그런가?”

“그럼 결과를 두고보라고. 난 반드시 그녀와 한조가 되니깐!”

효룡은 물론 이 친구가 지칭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아마 자신의 친구 이외에도 거의 모든 남성들이 한조가 되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 상이 아닌가. 정말 그녀와 한조가 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운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되짚어보면 서술형이 될 테니깐’도 아니고 ‘되니깐’이었다. 정말로 그는 자신의 추첨결과에 대해 한점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인간의 의지에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이, 설마…….”

여전히 신용은 가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만만치가 않다.

비류연이 그 기색을 읽은 모양인지 핀잔을 주었다.

“쯧쯧.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구만, 자네!”

당연한 것 아닌가! 하마터면 효룡은 소리 내어 외칠 뻔했다.

“하지만 자네 이외에도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한조가 되고 싶어할 걸세. 누가 뭐래도 천무학관 제일의 미인 아닌가! 물론 별호 그대로 얼음 깃털을 지닌 봉황처 럼 차갑지만 말이야.”

“으이그, 그러니깐 자넨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부동의 동인이 될 만한 의지력이 필요한 것이지. 노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많은 의 지의 합을 이길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렇게 듣고보니 상당히 그럴 듯한 말이었다.

“이봐, 지금 방금 ‘상당히 그럴 듯한…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이미 의심이 잔뜩 들어간 거라고!”

“헉! 자네, 내 머리통이라도 열고 안을 들여다봤나?”

효룡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 그럴 필요까지 있겠어? 밖에서 봐도 훤히 다 보이는데 말이야.”

뚜껑 열고 들여다봤다는 것보다 더 가혹한 말이었다.

“그러니깐 룡룡 자네는 의지박약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모든 일에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된다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도 실패하는 판국에 확신도 없이 행 동하면서 실패했다고 징징 짜는 게 가당키나 한가?”

비류연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당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날이 날카롭게 선 비수가 되어 효룡의 심장을 후벼파는 말이기도 했다.

“좋아, 자네의 눈을 개안시키기 위해 내가 대신 선심을 써주지. 자네는 안심하게. 자네도 그 이씨 아가씨랑 한조가 될 테니깐 말일세. 미리미리 나한테 감사하라 고.”

그 일은 이미 일어난 거나 다름없다. 비류연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어…, 그건 너무 과한 호언장담이 아닌가?”

평소 무모한 인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세상에는 호언장담해도 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런 경우는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하 기보다 무모하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은 여전히 안색이 말짱하고 태연자약했다.

“어쨌든 두고보면 알게 되겠지!”

“저런 게 가능하면 그야말로 반칙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확고부동한 장담에 효룡은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그, 그래.”

“어…, 어!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숨죽인 가운데 조 추첨이 시작되었다.

<『비뢰도』 1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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