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6권 19화 – 안명후, 눈을 뜨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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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6권 19화 – 안명후, 눈을 뜨다… 그리고…….

안명후, 눈을 뜨다… 그리고…….

-누명-

남자는 어둠 속을 헤매며 달리고 있었다.

한시도 지체 없이 상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화산이 위험합니다.”

“대장님,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대신 술 산다는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크악!

크악!

크아아악!

남자는 귀를 막은 채 어둠 속을 계속해서 달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데구르르르르!

무엇인가 자신의 눈앞으로 굴러왔다. 남자는 발을 멈추고 자신 앞에 굴러온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것은… 부하 개코의 목이었다. 번쩍!

옆으로 누워 있던 수급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 눈동자 안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텅 빈 동공 속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대장님… 원한을… 원한을…….?

그 텅 빈 어둠 속에서 수천만 마리의 지네와 구더기가 꾸물꾸물 기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안명후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처음에는 망막에 엷은 막이라도 낀 것처럼 희뿌옇기만 했다. 한참을 눈을 껌뻑이고 나서야 사물의 상이 또렷이 맺히기 시 작했다. 여긴 어디지? 낯선 천장이었다. 둥글고 거친 돌로 된 천장, 여기는 방 안이 아니라 동굴이었다. 식은땀을 흘렸는지 등이 축축했다.

“내가 왜 여기에…..

몸은 납이라도 매단 듯 무거웠다. 자신의 몸이 자기 게 아닌 것 같았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딜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깨어나셨군요. 정신이 드나요?”

들어본 적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화장을 단정하게 한, 화려한 옷을 걸친 여인이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웃고 있었다. “누… 누구…….”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교옥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명후는 자신을 간호하고 있는 여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뜬 지 일다경(茶頃)은 족히 된 듯했다. 그제야 그는 여인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화산지회 시험장인 어느 산속 한 동굴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여기가 화산이란 말입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요. 하지만 보통 화산이라고 부르는 곳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요.”

“화산은… 천무봉은 무사합니까?”

심각한 얼굴로 다그치듯 묻는 그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예, 일단은 무사합니다.”

그 박력에 놀랐던 여인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사람을 불러주십시오.”

“사람을요?”

“예! 화산이 위험합니다!”

“그냥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인이 소곤거리듯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명후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

“안됐지만, 다시 잠들어주셔야겠어요.”

여인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안명후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얼마 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아, 보시다시피 몸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사람을! 시급히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전해야 할 말?”

“네, 거대한 음모에 대한 것입니다.”

“음모라뇨?”

안명후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에 대해 빠른 속도로 이야기해 나갔다. 맨 처음 여인은 무척이나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진정한 듯 안색을 회복했다. 여인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번져갔다.

“정말 고생하셨군요. 그렇다면 더욱더 몸을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자, 잠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아닙니다.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먼저 이 건을 해결하고 난 후에…….”

안명후의 말을 끊으며 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안 듣는 아이를 전 싫어하죠. 자, 제가 자장가를 불러드릴게요. 장송곡이라는 이름의 영원한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주는 자장가를!”

“예?”

서걱!

그의 목의 경동맥을 뭔가 예리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푸화아아아악!

움찔할 틈도 없이 그의 목줄기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왜 이러지? 빨리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왜?”

눈앞은 검은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새까맣게 변했고,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말을 하려 했지만 혀가 마비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감각은 박탈당하고 정신은 부유하는 듯했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뭔가 부조리한 일이 자신의 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간힘을 써서 겨우 한마디를 토해낼 수 있었을 뿐이다. 

“왜… 왜…….”

흐릿흐릿 어두워지고 좁아지는 시야 안에서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데다 입까지 가벼우시니 저승 갈 이유로 충분한 듯싶군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푹 쉬세요.” 이토록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붉은 피보라 사이로 마지막으로 본 사신의 미소 어린 입술은 석류처럼 농염한 붉은 빛깔이었다.

꺄아아아악!

높고 가느다란 여인의 비명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동굴 쪽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에 동굴로 돌아온 비류연은 진한 피 냄새에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입구에서 만난 나예린은 소매로 불쾌한 피 냄새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내 소용이 없다 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독고령과 대공자 비의 모습도 보였다. 한순간 비류연과 대공자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라 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피바다 속에서 두 명이 쓰러져 있었다. 한 명은 보호하고 있던 의식불명의 환자였다. 서둘러 살펴보았지만 이미 경동맥이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어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었다. 또 한 명은 그를 간호하던 혈심란 교옥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채 피웅덩이에 쓰러져 있었다. 그래도 이쪽은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상처 도 없었다. 그냥 기절한 것뿐인 모양이었다.

“끔찍하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원통한 듯 부릅떠진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분했으면 눈을 감을 수도 없었을까? 그의 부릅떠진 눈 안에는 아직도 죽기 전의 그의 비통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정말 나무랄 데 없이 깨끗한 솜씨로군.”

안명후의 경동맥을 자르고 지나간 그 절단면은 면도날로 그은 것보다 더 매끄러웠다. 필시 평범한 솜씨를 지닌 자의 소행이 아니었다.

“쳇, 당하다니! 너무 방심했어! 분명히 자신의 생명이 잘려 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아차 하는 순간에 당했겠지.”

비류연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솔직히 입맛이 썼다. 요즘 자신이 조사하고 있는 발로 뛰는 대부분의 노동은 그의 사제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일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는 기회였다. 잠시 잠깐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분명 이곳이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적절한 조치를 취 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자신의 시야가 미치는 분야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는 꿈자리가 뒤숭숭할 터였다.

“아무래도 술래잡기 시간이 시작된 것 같군.”

비류연이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비류연과 효룡 그리고 장홍은 길게 침묵하며 안명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죽기 전의 충격 때문일까, 그는 원통하고 분통한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동굴 안을 진동하는 피 냄새에 효룡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은 정말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끔찍하군. 누가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왜? 무슨 이유로?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효룡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품고 있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현재 장홍이 풀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의문의 난마였다.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있군.”

“그게 뭔가?”

비류연의 말에 장홍과 효룡이 되물었다.

“그가 품고 있던 비밀이 암살이라는 극단의 수법을 써서까지 봉해야만 하는 중대한 것이었다는 거지.”

일리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할 말이 있던 자는 이제 두 번 다시 입을 열 수 없잖은가! 유일한 실마리가 끊어지고 말았어.” 장홍이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렇게 단정할 수만은 없지! 아직 섣부른 결론은 이르다네.”

말을 받은 사람은 놀랍게도 대공자 비였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군!”

어느새 동굴 안에 들어온 대공자 비가 안명후의 시신을 여기저기 훑어보며 말했다. 비류연은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상하단 말이지?”

비류연이 물었다.

“그럼 자네는 이상하지 않단 말인가?”

그런 것 하나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느냐고 비웃는 듯한 어투였다. 비류연은 대꾸의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 입을 다물었다.

“이자를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자가 왜 교옥은 살려두었을까? 입을 막으려면 둘 다 막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무의미한 살생이 싫어서?”

장홍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로 솜씨가 깔끔한 범인이 그런 자상한 마음의 소유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그럼, 당신은 뭔가 집히는 게 있다는 건가?”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온 이후 계속해서 상황을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다들 그의 입을 쳐다보기만 하는 방관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 다.

“그’는 그녀가 죽으면 무척 곤란해지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너무 쉽게 범인을 남자라 단정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대공자는 비류연의 말을 개무시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는 분명 어떤 이유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네. 즉 그녀가 필요했다는 뜻이지. 아마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수혈을 짚고 이자를 베었겠지. 그녀 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그자는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는 뜻이네. 혹은 그녀가 안심하고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인지도 모르지.”

“그건 말이 안 돼. 그녀와의 친분을 이용해 접근했다면 그녀의 입도 막았어야 해. 그녀가 눈을 뜨면 금세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테니깐.”

비류연은 그의 추리가 지닌 허점을 간파한 후 지적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럴 경우는 둘 다 죽어 있어야 정상이다. 대공자는 사사건건 토를 다는 비류연에 대해 잠 시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약을 썼는지도 모르지. 그녀 몰래 접근해 그녀가 먹는 물이나 음식에 약을 섞는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먹고 잠이 들거나 기절하는 것을 보고는 유유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거지.”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인지라 몇몇 사람이 그럴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녀가 죽으면 곤란해진다는 건 무슨 말인가?”

“곤란? 자네가 이 화산규약지회 오행관의 규칙을 아직 잊지 않고 있으면 좋겠군.”

대공자 비의 날카로운 시선이 비류연의 얼굴을 훑었다.

“각 조원 중 한 명이라도 낙오자가 발생하면 그 조는 실격 처리된다.”

추명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그럴듯한 말이 중인의 공감을 얻고 있음이 분명했다.

‘약은 놈!’

비류연이 속으로 그를 욕했다.

“서… 설마 그 얘기, 우리 7조에 범인이 있다는 말?”

대공자 비가 가볍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헛소리! 무슨 증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어차피 당신이 주장하는 건 여러 가지 가설 중 하나가 아닌가? 범인이,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어! 혹은 그녀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르지!”

세차게 쏟아진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비가 싸늘하고 무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리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싶다고 해도, 그렇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약한 여성을 범인으로 몰아서야 쓰겠나?”

이제는 아주 비류연을 범인으로 단정 짓는 듯한 어투로 비가 말했다.

“동기가 없잖아? 그리고 증거도 희박해.”

비류연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럼 비명소리가 들렸을 때 자네는 어디에 있었나? 자네와 함께 있던 사람이 있었나?”

“그… 그건…….?”

일이 꼬이려면 끝까지 꼬인다더니 당시엔 혼자였기에 그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네, 혹시 죽은 사람도 때때로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의 꽉 움켜진 오른손 안에 뭔가가 쥐어져 있는 것 같더군. 그게 단서가 될지도 모르지!” 대공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죽은 자의 주먹으로 향했다. 과연 그는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끈이 빠져나와 있었다. 몸을 숙인 비가 그 주먹을 억 지로 열었다. 사후경직이 진행 중이라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의 손에 걸리자 무척이나 쉽게 해결되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조그만 크기의 목패였다. 비는 무척 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들어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한 바퀴 빙 돌렸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 중 그 물건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처… 천율패…….?

사람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범인은 우리들 안에 있었단 말인가! 세찬 동요가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자, 그럼 여기 적힌 이름을 보면 누구 것인지 알 수 있겠군. 직접 확인해보게!”

비가 피에 젖은 그 패를 비류연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무관심의 달인인 비류연이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화산규약지회 중토관 7조 천무학관 비류연 男

“자, 이래도 할 말이 있나?”

대공자 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의아해하던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경계와 적의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를 쏘아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물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비류연으로서는 할 말이 많았다.

“그건 저번에 잃어버렸던 거야!’해봤자 믿어주지 않겠지?”

자신이 해놓고도 한심할 정도로 궁한 대답에 비류연은 스스로 낙담하고 말았다. 자신도 믿지 않을 변명을 남들은 믿어야 한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 리 사실이라고 해도 그딴 변명을 믿어줄 사람은 마음씨 좋은 바보뿐일 것이다.

“당연하지! 그런 눈에 빤히 보이는 변명을 누가 믿어주겠나?”

그렇겠지……. 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론 간단한 진실보다 과장된 거짓이 더 현실감을 띠게 마련이다. 진실이 란 때론 공기와도 같아 그것이 없어지기 전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천율패를 빼앗긴, 혹은 잃어버린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은가면들이 기절시켜놓고 아무 패나 하나 뽑아 그 손에 쥐어줬을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지. 그때 재수 없게 걸린 게 내 거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잖아? 일종의 속임수지. 별다른 동기도 없는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현실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류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몇 사람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은가면에게 당한 사람들이 그 당시의 악몽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또 몇몇 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대공자 비만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냐, 그건 틀리지. 자네는 그자들에게 당한 적이 없잖은가? ‘패’를 빼앗긴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게 당해 정신을 잃은 자들뿐이야!”

“옳소! 옳소!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렇군. 그녀석들에게 쓰러지지도 않은 주제에 어떻게 천율패를 빼앗길 수 있겠어?”

잠시 비류연 쪽으로 기울던 일부마저도 다시 대공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석들에게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가 목숨을 구걸받은 게 그렇게 큰 자랑인가? 목숨 대신에 나무패 하나만 빼앗긴 게 그렇게 자랑스럽고 기쁜 일인가 말이다?”

비류연이 냉소했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행위였다. 순식간에 그를 향한 적대감이 세 배 정도 증폭했다. 장홍과 효룡은 그런 친구의 행동에 관자놀이를 감싸쥐어야 했다. 그나마 눈곱만큼 남아 있던 우호적 의견까지도 단숨에 반대편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다들 비류연이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상상하는 게 더 어려운 듯했다.

“이건 안 좋아…….’

장홍이 몸을 잔뜩 긴장시키며 생각했다. 제반 정황이 너무나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네보다 내 의견을 더 믿는 듯하군.”

정신이 번쩍 든 비류연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어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눈에 경계의 빛을 띤 채 차갑고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눈빛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주작단 중에는 대공자의 말을 믿는 얼간이가 없는 듯했다. 만일 저런 단순 꼬임에 넘어갔다면 단순한 특훈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누명부터 벗어야겠지만.

이미 중인과 자신 사이에는 거대한 의심의 벽이 세워졌다. 어쩌면 대공자 비는 자신이 범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그의 목적은 단지 의심의 씨앗을 심 어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심어놓은 의심의 씨앗은 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불평불만과 천대, 비하를 양식으로 무럭무럭 자라 나 금세 열매를 맺었다. 줏대도 머리도 없는 놈들…

“이게 소위 말하는 왕따란 건가?”

비류연은 내심 고소를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선천적인 성격상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그는 낙관적인 편이었다. 겨우 이 정도에 무릎을 끓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리석은 중생을 탓하기만 하는 영양가 없는 짓거리도 할 생각이 없었다.

“대공자 비…….?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는다면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이 누명은 반드시 벗고야 말겠어!”

게으르던 그의 심신에서 오랜만에 투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갑자기 대공자 비의 미간을 향했다.

“경고해두지, 당신! 나를 귀찮게 만든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

그러고는 몸을 돌려 한때 동료였던 자들의 싸늘한 시선을 헤치며 동굴 밖으로 향했다.

“잠깐! 멈춰라! 너 미쳤냐? 함부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샤샤삭!

장정 여섯 명이 포위진을 형성하며 비류연의 앞길을 막았다. 모두들 각자의 병기를 든 채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범인을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비류연이 범인 으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공통된 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외쳤다.

“순순히 오랏줄을 받아라!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리고 낱낱이 자백하게 만들어주마!”

비류연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어깨는 조금 앞쪽으로 추욱 쳐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숙여져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지금… 시방 날… 막겠다는 거냐?”

평소의 목소리와는 한참 다른, 두 번 꼬이고 세 번쯤 비틀린, 잔뜩 심사가 꼬인 목소리였다.

“물론이다!”

사내들이 분개해서 외쳤다. 낮게 울리는 조소가 그들의 분노에 화답했다.

“큭큭큭, 난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러워.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진 것도 참 오래간만이야. 그러니 경고하는데, 다치고 싶지 않으면… 비켜.”

여기까지는 나직했다. 하지만…….

“감히 네까짓 것들이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순간 비류연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장마철에 범람하는 황하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이 농후한 살기는 단숨에 여섯 명의 심장을 관통했다. 여섯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이 느낌… 기억에 있었다. 은가면과 검을 마주 대고 섰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고 뱀 앞의 개구리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던 바로 그 느낌, 사람들이 공포라 부르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지 비류연은 입을 닫고 침묵한 채 그들 여섯 명 사이를 지나갔다. 아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움직이면 죽는다!”

식은땀에 흥건한 여섯 명의 창백하게 탈색된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역시 그녀인가…….?

역시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은 혈심란 교옥이었다.

부풀어오른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쭉 뻗은 미끈한 다리. 남자라면 누가 봐도 육감적인 몸매에(이건 인정한다) 교태와 색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런 흉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상상력 빈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들로서는 보기만 해도 침이 질질 흐르고 아랫도리가 불끈 서는 염태를 소유한 묘령의 여인보다 출신도 불분명하고 신분도 확실치 않은 데다 사문은 별 볼일 없는 것 같고, 권위에 복종할 줄 모 르며, 주제를 모르고 사회의 틀을 부수려 하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매우 못마땅하고 눈엣가시 같은 놈팽이를 용의자로 지목하여 비난의 화살과 의심의 창날을 갈아 세우는 것이 훨씬 합당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상당히 그럴듯한 남들에게는 결정적인 증거품까지 나왔는데 그들로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사회가 보장하는 허접한 권위의 단맛에 푹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의 뇌는 설탕물에 절인 것처럼 야들야들해진 터였기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데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눈은 장식품이나 다름없는 맹인 얼간이들에게 품을 기대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놀이는 끝난 건가??

비류연은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그들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사 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 얼굴의 주인은 나예린이었다.

“어딜 혼자 가려 그래요?”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엷은 미소까지 지으며 그녀는 그를 맞이했다.

“어, 기다려준 건가요? 아니면 작별인사?”

비류연이 물었다.

“뒷말은 틀렸네요. 같이 가야죠. 혼자서 가면 못써요. 우린 동료잖아요.”

“우리?”

그러자 반대편 풀숲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몇 명이 걸어나왔다. 장홍, 윤준호, 효룡, 이진설(그녀는 자신보다 효룡 때문에 따라온 듯했지만, 넘어가고!) 그리고 모용 휘까지 있었다. 조금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로 말을 꺼낸 사람은 장홍이었다.

“우린 자네를 믿어! 그래서 자네를 따라가기로 했네.”

모용휘는 같은 조도 아니었는데 그와 동행하려 하고 있었다.

“따라와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텐데? 저쪽 주류로부터 완전히 배척받을 수도 있어. 게다가 같은 조도 아니잖아? 우승의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비류연이 말했다.

“어리석은 다수가 만드는 것을 주류라고 하는 게 아냐. 어느 게 주류가 될지는, 아니 어느 게 옳은 방향이 될지는 역사가 정하지. 게다가 우승이라면 이미 물 건너 갔어. 은가면에게 된통 당해서 거의 대부분 천율패를 빼앗겨버렸거든. 그걸 되찾지 않는 이상 우승은커녕 등수 안에 들기도 힘들어.”

장홍이 대신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아무래도 이번엔 궁지에 단단히 몰린 듯해. 이번 누명은 벗기가 쉽지 않겠는걸?”

장홍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뇌가 설탕물에 절여진 인종들과는 다른 인종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유가 사촌동생 십이랑의 죽음을 두고 쓴 ‘천고의 절문'<제십이 랑문(祭十二郞文)>을 읽고 눈물을 흘릴 줄 알 만큼 우애가 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예로부터 공명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충신(忠臣)이 아니고, 이밀(李)의 <진정표(陳情)>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孝 子)가 아니며,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우애(愛)가 없다고 하였던가?

그래서 장홍은 자신의 친구인 비류연이 그런 귀찮은 일을 저지를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쳇, 이 몸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다니……. 방심하다가 한 방 먹고 말았어!”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일단 남이 억지로 입힌 누명이나 벗어야지. 나한텐 안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 쓸데없이 귀찮기만 한 건 좀 더 어울리는 사람에게 줘야지.”

“어떻게 말인가? 쉽지는 않을 텐데? 자네의 결백을 밝히는 게 어렵다기보다 저쪽에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줄까 그게 의문이네. 자넨 너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어!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구. 게다가 요번의 검후 대결 건으로 경계심도 높아졌고……. 다들 자네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네. 조금만 방심해도 독수리 떼에게 내장까지 말끔히 뜯겨 나갈걸?”

“바보들한텐 말로 해봤자 눈과 귀를 몽땅 틀어막고 자기 좋을 대로 상상하니 글렀고, 성과를 눈앞에 보여줄 수밖에.”

“어떻게 말인가?”

“일단 가장 의심 가는 놈들부터 족쳐봐야지.”

“설마 그자들 말인가?”

“그래, 그 은가면들. 일단 제일 의심 가는 건 그쪽이니깐.”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어디서 그들은 찾는단 말인가?”

“다 방법이 있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실을 하나 풀어뒀거든!”

“실?”

“그래, 실! 그들이 어디 있든 그 실이 길잡이가 되어 나를 인도할 거야!”

씨익!

비류연이 미소 지으며 들어올린 검지 끝에서 가느다란 은빛 선 하나가 투명하게 빛을 발했다.

“좋아! 그럼 친구들, 가볼까!”

“오우!”

힘찬 함성을 내지르며 그들은 길을 걸었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길을, 자신들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의지를 담아. 때문에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신앙에 가까운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붉은 석양이 그들의 뒷모습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끝내 중토관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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