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재해(害)
-전설의 현현, 아미신녀 경악하다
사내는 자신이 맡은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매우 성실한 자였다. 비록 그가 어두컴컴하고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쓴 채 두 눈만 빼꼼이 내놓긴 했어도 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속한 곳의 사람들 역시 옷 입는 감각이 형편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가 입은 옷은 신축성이 뛰어나 움직이기 편리 하고 통기성이 좋다는 이유 때문에 공식 작업복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장시간의 임무 수행시 발생하는 불쾌감을 덜어주고 비가 와도 쉽게 젖지 않기는 했다. 피부에 닿는 촉감으로 미루어볼 때 상당히 좋은 안감을 사용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은밀하게 암기를 숨겨 유사시의 상황에 매우 적절하게 대비할 수 있 도록 하는 치밀함마저 겸비하고 있었다. 더 훌륭하고 끝내주는 장점은 이 작업복이 전적으로 조직의 부담으로 지급되는 보급품이라는 점이었다. 너무 속물스러울 까봐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공짜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훌륭한 장비를 무료로 지급해 주는 조직에 몸담은 자라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만 하는 법. 그런고로 그는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매 우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임무에 임했다. 비록 그 일이 반드시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거나 혹은 반영하지는 않으며, 때로는 몇몇 사람들의 사지 중 일부를 신체에 서 분리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더라도 그랬다. 일을 하다 보면 좀 심하다 싶게 날카로운 쇠붙이로 불특정 다수의 살을 조심스럽게 열어 안을 확인해 보는 일도 매우 자주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가 자신이 맡은 일에 성실하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성실할 뿐만 아니라 유능하기까지 했다. 이 둘을 겸비한 자는 있을 수 없다고 모함하는 이들은 많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수석 조장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오늘도 자신의 임무인 요인 추격에 열중하고 있던 그는 쉽사리 대상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도주의 달인이라도 그의 손에 걸리면 끝장이었다. 어디로 도망쳐 숨든지 소용없었다. 그와 그의 수하들은 그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매우 능숙했다. 그 능력은 증거 인멸 능력만큼이나 뛰어났다. 그는 일하는 도중 인명을 살상해도 업무상 과실치사를 적용받지 않는 모종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장애물과 목표물은 언제나 예외없이 자신들을 사신(死神)처럼 두려워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뭔가 달랐다. 표적이 숨어들어 간 표행을 가로막았건만,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반겼다. 약간의 오해를 해소하고 부하들을 불러내 위협했는데도 두려운 기색은 전혀 없지 않던가. 그의 노련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는, 겁도 없이 다가오는 애송이 두 명을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실추됐던 위엄을 다시 한 번 되살려 보려던 그의 시도는 끝내 생각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뜨거운 바람과 함께 왔다.
새하얀 질풍과 함께 하얀 뇌광이 번쩍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는 돌풍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무력하게 하늘을 향해 날려 졌다. 분명 대지를 디디던 그의 발은 어느새 이별의 흙먼지를 땅에 뿌리고 있었다. 눈부신 하늘이 눈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뜨뜻한 훈풍과 동시에 차갑고 날카로 운 무언가가 그의 목을 물어뜯었다.
혈표가 마지막으로 본 하늘은 무척 붉었다.
휘이이잉!
사나운 질풍이 휩쓸고 지나간 여파로 강한 바람이 몰아닥쳤다.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돌풍이 안면을 여지없이 강타했다. 다음 순간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복면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으잉?”
장우양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국주님!”
강 대표두도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 대협, 보셨나요?”
진소령의 물음에 유은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얀 형체만 잠깐 확인했을 뿐입니다.”
점창제일이라는 그의 안력을 피할 만큼 그것은 벼락처럼 빨랐다.
“그게 뭐였죠?”
“글쎄요. 하지만 곧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어느새 숲은 다시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전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환상이었다고 우기는 듯한 무거운 적막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툭!
목이 기역자로 꺾인 시체 하나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이미 삼분의 이 이상 뜯겨 나간 이후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인정사정없는 숨통 끊기였다.
크어어어어어어어엉!
태산마저 부르르 몸서리치게 만드는, 태산의 묵직한 안위마저 뒤흔들 것 같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어어어어엉! 크어어어어엉!
크어어어어엉! 크어어어어엉!
사방에서 공명이라도 하듯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진소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소리는… 설마…….’
그것은 의식적이라기보다 무의식의 심저에서 그녀를 떨게 만드는 근원적인 공포를 품고 있었다.
아미파의 어린 여자애들이라면 이 소리를 절대 잊을 수 없다. 야수의 왕, 아미산에 군림하는 전설적인 야수 백호. 때때로 밤마다 그 포효가 울릴 때면 여자 아이들 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벌 떨거나 울음을 터뜨리고, 서로 꼭 끌어안고 자거나 사부를 찾아가기도 했다. 심하면 오줌을 지리거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아미파의 제자들이라면 이런 경험이 적어도 열 번 이상 있을 것이었다.
“백무후(白武后)의 탄식(歎息)…
만수를 조복시키는 지고의 위엄, 산봉우리 위에 우뚝 선 하얀 유성, 순백의 긍지, 타오르는 황금빛 위엄, 하얀 뇌광. ‘그녀’를 지칭하는 명은 수없이 많다. 이백 년 의 오랜 세월이 그녀에게 그 많은 이름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만큼 많은 전설이 그녀의 명성 뒤를 따라다닌다. 그중에서도 최근 들어 가장 유명한 이름은 백 무후란 명칭이었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지녔던 것과 같은 칭호로 불리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감을 지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이 벌벌 떠는 게 재미있는지 잔뜩 이야기를 부풀려 겁을 주었다.
“말 안 들으면 백무후가 찾아와서 너희들을 냉큼 잡아갈 거다. 백무후는 어린 여자 아이들의 야들야들한 살을 아주 좋아하거든.”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말은 곧 사실이 되었고, 이 여아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순간 백무후가 되었다. 아직 사실과 허구를 구분할 판단력이 미비한 아이들이 어 떻게 어른들이 심어준 공포심에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 아이들은 깊은 밤 포효가 울릴 때마다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어른이 되었기에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가끔 들리는 포효 소리도 이제는 웃으면서 흘려들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었던 것은 그저 저 멀리 아득한 산의 저편에서 흘러나온 여운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지척에서 무시무시하게 들려온 여황의 포효는 어린 시절에 새겨진 정신적 외상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위축되어 두려워졌다. 육체에 새겨 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무신경함에 의해 새져진 정신적 상처였기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 흉터는 아물지 못한 상태로 영혼 깊숙한 곳에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유은성은 경악했다. 언제나 당당했던 진소령이 저토록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미 검의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그녀가 이토록 눈에 띄게 두려움을 드러내 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자신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백호의 포효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든 이후였다.
짙은 혈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르르르륵!
양쪽의 풀숲이 바람도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모두들 움직이지 마세요!”
진소령이 긴장하며 모두에게 외쳤다. 검집을 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헉!”
모두들 숨을 죽이는 가운데 그것들은 나타났다. 자신이 이 산의 주인이라고 뽐내는 것 같은 당당한 발걸음, 눈처럼 하얀 모피, 녹색의 눈동자. 풀숲을 뚫고 나온 것 은 거대한 백호였다. 그것도 양옆에서 백호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덩치가 말보다 더 컸다. 그런 것들이 하나뿐인 길의 양쪽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고 상상해 보 라! 그때의 느낌이 어떨지를!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그리고 여덟.”
아직 혼이 덜 빠진 누군가가 숫자를 세었다. 모두 여덟 마리였다. 덩치가 산만 한 백호 여덟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오니 길이 꽉 차 보였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이 공포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팔섬풍!”
진소령이 탄식하듯 말했다.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진짜 현존할 줄은 상상도 못한 존재들. 그러나 직접 눈앞에 나타났으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길을 가득 메우던 하얀 산이 아무 소리 없이 좌우로 갈라졌다.
“왜 저러죠?”
유은성의 의문에 진소령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정한 여황께서 등장하실 차례니까요.”
곧 전설과 조우하게 되기 때문일까? 가벼운 전율이 그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난 오십 년 동안 그 전설의 실체를 직접 체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벅저벅저벅!
숲의 그늘진 음영 속에서 한 쌍의 황금 횃불이 불을 밝혔다. 이제까지 나타났던 백호들에 비해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앞선 여덟 마리를 사열하듯 느긋하고 여유로 운 위풍당당한 발걸음. 황금빛 눈동자,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모피, 기다란 털, 칠흑 같은 검은 줄무늬를 전신에 두른 ‘그것’은 웅장한 자태를 압도적인 박력과 함께 드러냈다.
만수(萬獸)의 왕, 하얀 뇌광 백무후의 현현이었다.
새하얀 얼굴에 달린 두 개의 눈동자는 마치 태양을 박아 넣은 것처럼 황금빛으로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진소령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두 개의 태양을 바라 보았다.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는 시간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스산한 살기. 평소 담이 크다고 자만하는 이라 해도 이 박력 앞에 서면 마주치는 순간 압도되어 심장 마비에 걸 리고 말 터였다.
야수 특유의 순수한 살기에 진소령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살이 에일 정도로 차갑게 와 닿는 살기에 손은 저절로 검을 뽑으려 날뛰고 있었다. 이미 새하얀 검신이 검집에서 일 촌 정도 뽑혀져 나와 있었다.
덜그덕덜그덕!
검집이 요동친다. 아직은 의지력으로 육체를 제어하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질풍처럼 빠른 저 움직임을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처음 움직임은 놓쳤다. 그 사실에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확률은 반반’
확실히 모험이었다. 그녀가 고민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만두거라. 그것을 뽑는 순간 저 아이가 널 덮칠 테니.”
귓가에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 그것은 입산할 때부터 계속 수레에 드러누워 잠만 자고 있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일생일대의 적을 눈앞에 두고도 진소령은 시선 을 돌리고 말았다. 평상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백호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틈탈 생각은 없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함~”
걸쭉한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노인이 일어났다.
정말 맛 좋은 잠을 잤는지 노인의 얼굴에는 아직도 나른함이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노인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하게 일어나더니 더욱 느릿느릿 수레에서 내려 땅에 섰다. 그리고는 태연스런 표정으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바로 하얀 호랑이가 무리 지어 있는 한가운데였다.
“노사부님. .!”
진소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노인의 발걸음을 저지하려 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자살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사부는 괜찮다는 듯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길 주위로 이二)열로 도열해 있던 백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소리 한 번 제대로 내쉬어보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참에 마침내 노사부의 발걸음이 백무후 앞에 멈추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호안이 노사부를 향했다.
캬르르르르!
백무후가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노사부가 웃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끔찍하고 충격적인 광경의 증인이 될 것을 강요받았다.
“헉!”
진소령이 기함을 터뜨렸다. 수양이 깊어져 함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이번만은 속수무책이었다.
노사부가 손을 들어 고양이 다루듯 백무후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무후, 그 하얀 뇌광이, 그 만수의 왕이, 이백 년 동안 아미산에서 군림한 여황이 화가 나 미쳐 날뛰기는커녕 기분이 좋은지 연신 갸르릉거렸다. 체통도 잃고 말이다.
“요 녀석, 하양아! 인사 온 거냐?”
백무후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편하라고 무릎까지 굽힌 채였다. 보통 사람은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백무후의 신체가 거대한 탓이다.
그 다음은 더 충격적이었다.
백호가 발라당 바닥에서 몸을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는 재롱을 떠는 것이었다. 중인들의 눈이 튀어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럴 수가! 바, 발라당이라니! 산의 지배자인 백무후가? 고양이도 아닌 것이…
노인은 백무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서는 가슴 털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감촉은 생각 이상으로 보드라웠다. 하긴 이렇게 보드라우니 옛날에 이불 대신 으로 쓰기도 했던 것 아니겠는가.
“걱정이 돼서 온 게냐?”
노사부의 말에 다시 한 번 백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새는 여전히 발라당 상태였다.
사실 노인이 걱정된다기보다 제대로 인사를 못한 자신의 안위가 더 걱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존의 영역권을 벗어나 이곳까지 온 것이다. “따라올 테냐, 하양아?”
백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세상 구경 나서는 것도 좋은 일인 듯싶었다. 세력권을 전국으로 넓힐 수 있다는 것도 꽤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다 함께 가기에는 머릿수가 너무 많구나.”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무후가 포효했다.
크허허헝!
그러자 여덟 마리의 백호가 백무후를 향해 돌아서더니 백무후와 노인을 향해 동시에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추었다.
“저게 뭐죠?”
진소령의 물음에 유은성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절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팔섬풍의 조복을 받으며 노인이 말했다.
“됐다. 그만 가보거라!”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질풍이 불어닥쳤다. 사람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오직 한 마리와 한 사람만 남아 있을 뿐 팔섬풍의 존재는 그 어디에 도 없었다.
“네가 곁에 있으면 말들이 무서워하니, 안됐지만 뒤에서 따라오너라!”
노인의 말에 백무후는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다시 한 번 새하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 순간 거센 질풍이 다시 한 번 몰아닥쳤고, 백무후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노사부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진소령이 정중하게 질문했다. 그 대답은 지극히 짧았다.
“나 말인가? 나야 그냥 나지.”
“너무 짧군요. 제 이해가 그 짧음에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
진소령은 매우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추가적인 부연 설명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흠.”
노인이 짧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아리송한 소리를 발했다. 고민이라도 하는 것일까?
자기 자신에 대해 적절한 길이로 요약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한계는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만큼이나 명백하고, 존재의 모든 것을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신에 대한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밖에 쓸 게 없다는 게 인간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그러나 그만큼 훨씬 복잡했다.
“뭐, 부연 설명까지 하자면 무사무려(無思無慮)하고 무처무복(無處無服)하고 무종무도(無從無道)한 사람이라네.”܂
더욱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손을 들어 다음 질문을 막았다. 나머진 알아서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의 의문은 가중되면 가중되었지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사부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요?”
유란이 말했다.
“아, 저 알아요!”
그때 유운비가 나섰다.
이럴 때 한번 난 척해보지 언제 해보겠는가!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을 때 잠자코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다.
“네가 뭘 안단 말이냐?”
사백 유은성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사질을 바라보았다.
“..그걸 보고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고 하지요!”
쿠당당탕!
알 수 없는 효과음이 사람들의 정신 세계에서 두 번 울려 퍼졌다. 그러나 노인의 신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왕이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해라.”
유은성이 탄식하며 말했다.
“같은 것 아닌가요?”
“달라!”
‘뻑!’ 하니 뭔가 빠개지는 소리와 함께 사백인 유은성이 읍하며 나섰다.
“죄, 죄송합니다, 노사부님.”
그는 급히 사과하며 사질에게 눈을 부라렸다.
“넌 어디 가서 도가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라. 부끄러우니까.”
“……”
“노사부님께서는 도가 계통의 사람이신가요?”
“아닐세!”
진소령의 질문에 노인이 딱 잘라 대답했다.
“…..?”
“그건 분명 장자(莊子)에 나온 말로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유운비와는 다르게 그 말의 출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말이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을 가리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동의(同意)한다 해서 내가 도가(道家)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럼 불가(佛家)의 사람이신가요?”
“꽤 흥미는 있지만 아직 내 머리카락은 건재하다네.”
노사부가 자랑하듯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은발을 보여주었다.
“난 그 가르침을 추구하면서 얻는 가치가 내 머리카락보다 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설마 유가의?”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내가 무처무복(無處無服)하고 무종무도(無從無道)라고 하지 않았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어떤 것에도 끼워 맞추지 않으며 아무것도 좇지 않고 어디에 도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왜 내가 꼭 어느 한쪽 계통에 몸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몸담고 있지 않다 해서 내가 그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 역시 아니지 않겠나?”
“그, 그건..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반적 상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자네는 자네의 교의와 배치된다고 해서 진리를 배척할 건가? 그런 일이 하도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다 보니 그다지 별난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진 리를 빙자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또 없을 걸세. 그 행위 자체가 스스로의 덜떨어짐을 증명하는 짓이니까 말이야.”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어디에도 따르지 않으면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게 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글쎄, 도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노인이 대답했다.
“그래서 얻으셨나요?”
“흠, 글쎄?”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이 노인의 정체는 뭘까?
노인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면 알수록 더욱더 알 수 없어지는 그런 존재였다.
“이제 그만 나오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사부가 말했다.
“예?”
처음에는 장우양도, 강 대표두도, 유은성도, 진소령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셈이냐?”
사부가 다시 말했다.
그제야 표행의 저 뒤쪽 수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덮어두었던 거적이 들썩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꼬물거림이 점점 커지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 가 나왔다. 놀랍게도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여아였다. 다음은 이 여아의 오빠로 보이는 소년이 뒤따라 나왔다.
“이리 오너라!”
사부가 손짓하자 두 남매는 두려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는지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그 복면인들이 노린 것은 이 아이들이었다.
“불쌍하게도…….?”
진소령의 얼굴에 연민의 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노사부가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인 모양이었다.
“왜 저 수레에 숨었느냐?”
“표물을 실은 수레가 아니니까요.”
사내아이가 즉시 대답했다.
“허, 거참.”
장우양이 탄성을 터뜨렸다.
“꽤 용의주도한 아이들이군요.”
두 아이가 숨어 있었던 잡화 수레를 뒤돌아보며 장우양이 말했다. 그 수레는 표사들의 식량과 여행시 필요한 잡화들을 실어놓은 수레였다.
“어떻게 아세요?”
유란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원래 표행시 표물을 실은 수레에는 종이로 봉인을 해놓지요. 그 봉인에는 표행 책임자의 직인이 찍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뗄 수 없고 수레의 안을 확인하려면 반 드시 흔적이 남게 됩니다. 그 안에는 또 고객이 직접 해놓은 봉인도 있지요. 물론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웬만해서는 이 봉인을 떼는 일이 없지요. 만일 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반드시 표행 책임자의 감독 하에서만 시행됩니다. 그러니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면 금방 들키고 말았겠지요. 그런 반면 식료품 수레에는 그 런 봉인이 없습니다. 매일 써야 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이 정도로 큰 대규모 표행에서는 그런 수레가 하나가 아니죠. 이번 표행도 저런 수레가 세 개나 됩니다. 하 나를 다 쓸 때까지 다음번 수레를 열 일이 없지요. 저 아이들이 숨어 있던 곳은 현재 사용 중인 첫 번째 수레가 아니라 가장 맨 뒤에 있는 수레였습니다. 이게 과연 우 연일까요?”
“과연 그렇군요!”
유란은 장우양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감탄할 수 있었다.
“흠, 대단하구나. 그 어린 나이에 한 표국의 표행을 방패로 삼을 생각을 했다니 말이다.”
노사부의 말에 장우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사실이냐?”
“……”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 그 자체가 충분한 대답이기도 했다.
“허, 거참! 사천제일표국이 일개 어린아이의 방패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니…….”
장우양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로웠다.
“이름이 무엇이냐?”
“유경영이라 합니다.”
“유.. ?”
그도 아미산의 그늘에 있는 사람인만큼 그 지역 유지 중 하나인 청룡은장을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항상 업무차 만난 관계로 아이들의 얼굴을 못 보았을 뿐이었 다. 그래도 자식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뭣이라? 그럼 네가 청룡은장의 후계자란 말이냐?”
아이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을 예정이었던 그곳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년의 가슴속을 제외하고는.
이 이야기에 노인도 조금 관심을 가졌다. 그곳에는 노인도 아픈 기억을 두고 왔던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국주님?”
강 대표두가 물었다.
일단 이 표행의 책임자는 장우양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결정할 사항에 너무 개입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며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진소령과 유은성이 강호상에서
자리하는 위치상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 나서는 것은 피해야만 할 일이었고, 두 사람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하나, 우리 중양표국에서 이 아이들을 보호해야지. 이 아이들은 청룡은장 멸문의 중요한 단서가 될 생존자들이네. 또한 사천 상인의 의리이기도 하지. 그놈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하지 않으시더냐?”
“부친께서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흐흠, 어디까지 갈 셈이었느냐?”
“남창까지 갑니다.”
“남창엘? 그 어린 몸으로 그 먼 곳까지 갈 생각을 했단 말이냐?”
그 말에 진소령이 놀라 반문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도 휘둥그레져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학관의 마진가 대협을 찾아가라 하셨습니다.”
“유 장주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이제 걱정 말거라. 우리 중양표국이 너희 남매를 보호해 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장국주님!”
유경영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소년의 어른스런 행동에 장우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장우양은 다시 말에 올랐고, 노인은 다시 자신의 잠자리를 찾아갔다. “출발!”
장우양의 외침에 다시 대열을 갖춘 표행이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마침내 표행은 무사히 남창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