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2화 – 어둠 속에 남면(南面)한 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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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8권 2화 – 어둠 속에 남면

어둠 속에 남면(南面)한 지배자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

얼마나 오랫동안이었는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 몸을 어둠으로 감싸고 이 자리에 앉은 이후 아득히 긴 시간이 흘렀다. 강호(江湖)라 불리는 하잘것없는 세계는 기실 ‘그들이 약간의 변덕을 가미해 베푼 하해와 같은 은혜의 후유증으로 유지되는 곳이거늘, 근래에는 그런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만에 가득 차 있 었다. 그처럼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하찮은 세계를 굳이 계속 존속시킬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요즘 들어 부쩍 회의가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 금이나마 손을 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고여서 썩느니 물그릇을 깨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잔재를 깡그리 불태워 버리는 게 최고였다. 갈팡 질팡, 우왕좌왕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 아니겠는가. 깊디깊은 어둠 속에서 남면(面)하여 거(居)하고 있는 지배자, 이곳의 모든 것을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주관하 는 자의 뇌리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남면.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다는 것. 그곳은 오직 천자(天子)에게만 허락된 상징적인 자리였다. 황제 아닌 자가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됐다. 물 론 그의 직업은 황제 같은 심심한 직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주관하는 영역 안에서는 천자가 발한 영(令)도 날개 잃은 새처럼 땅바닥으로 추락해 유명무실해지 고 만다. 이곳의 모든 결정은 설령 그것이 운명이라 해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어둠 속에 머물면서 빛의 세계를 지켜보았다. 때론 그의 목소리가 형태가 되어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곳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때도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둠의 끝[極]에서 빛이 나온 탓일까? 어둠 속에서는 빛을 볼 수 있지만 빛 속에서 어둠을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대(古代)로부터 북쪽은 황제가 거하는 자리였다. 황제는 어두운 북쪽에 자리하여 밝은 남쪽의 백성들을 살피는 자인 것이다. 어둠 속에 그 모습을 감춘 채. 예로부터 가장 훌륭한 황제는 백성들이 그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였다. 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잊게 해주는 자는 둘 중 하나다. 가장 뛰어난 지배자이거 나, 아니면 누구보다도 가장 무서운 지배자이거나.

때문에 오래전부터 지배자들은 자신들을 감추려고 했다. 그리하여 금기(禁忌)가 만들어졌다. 백성들이 결코 자신들을 볼 수 없도록, 눈치챌 수 없도록. 왕이 지나 는 길목엔 좌우로 나무들이 심어졌다. 금(禁)이란 나무들을 보이게[示]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무 뒤의 것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가(御駕)가 지나갈 때면 백성들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어느새 광명(光明) 속에서 어둠 너머를 보고자 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 피지배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시답잖은 의문 따위를 품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라는 점을 엄중히 각인시켜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일까? 그와 삼장 밖에서 부복하고 있는 젊은이 사이에는 단절(斷絶)을 상징하는 거대한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검었지만 얇기에 안이 비친다. 그러 나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 칠흑처럼 검은 장막에는 크게 하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滅劫.

보이는 것은 ‘멸겁’. 오직 이 두 자뿐이었다. 아니,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검정 일색이었다.

장막 너머에 일렬로 길게 늘어선 횃불이 파르르 일렁거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모습이 드러날 일은 없었다. 횃불이 일렬로 길을 내며 밝혀져 있는 곳은 오직 남쪽뿐. 그가 거한 북좌(座)에는 여전히 어둠만이 숨 쉬고 있을 따름이다. 그곳에 가득 찬 어둠을 몰아내기엔 그 빛은 너무나 가냘프고 미력했기에, 검은 장막 삼 장 밖에서 부복하고 있는 청년의 눈에는 오직 검은 어둠만이 비칠 뿐이었다.

청년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비록 그 떨림이 눈에 잡히지 않을 만큼 미세하다고는 하나, 그를 아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놀라 자빠지고 말았으리 라. 대공자라 불리며 때때로 경외의 대상이 되어온 자, 마천각 ‘최고의 기재’라 불리던 과거의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 탓이다. 오만하기까지 했던 당당 함과 높은 자존심은 어둠에 형체도 없이 녹아들어 가버렸는지 그 찌꺼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밝은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곳에 가득 찬 어둠 때문일까? 고개를 수그리고 부복하고 있는 청년. 그는 바로 화산에서 ‘화진’을 발동시킨 후 홀연히 사라졌던 대공자 비였다. ‘화산겁화’의 원 흉으로 지목되어 전 무림의 추적을 받고 있는 그 장본인이, 지금은 맹금(猛禽)에게 꽁지를 잡힌 작은 새처럼 공포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장막 저편에 자리하고 있던 자는 자신이 그동안 하잘것없다고 여기던 벌레들이 감히 어떤 식으로 꿈틀거렸는지를 막 전해 들은 참이었다. 입을 열 마음은 들지 않 았다. 무거운 침묵은 비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후우…….”

짧은 침묵 뒤로 이어진 나직한 한숨 소리에 어둠 속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던 등불들이 파르르 떨렸다. 틈만 있다면 그 공간이 얼마나 미세하든 상관없이 어디든 스 며든다던 바람도, 이 어둠 속으로는 사방 어느 곳에서든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지금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

가끔 잘못 듣는 일도 있다. 가끔 잘못 말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한 번 정도의 말실수는 용서해 줄 아량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틈은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었다.

“요, 용서를…….?”

비는 괴로웠다. 고통스러웠다.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완벽해야 했을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강철 갈퀴가 되어 그의 심신을 무자비하게 할퀴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만일 그에게 시간의 결을 더듬어 그 도도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주 어졌다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된 과거에 다시 한 번 수정의 손길을 댈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꿈은 꿈, 현실은 현실이었다.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그 기대

를 무참히 박살내버렸다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그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침묵의 철퇴가 비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온 세계가 그를 향해 매섭게 질책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구나. 네가 오늘 나에게 익숙지 않은 일을 하라고 강요하고 있구나.”

그는 자신이 주관하는 일이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 일을 직접 지휘했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일은 더욱더 그 러했다. 가장 신뢰했던 자가 그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패를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던 탓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분명 천무봉에서 홍염(紅)의 겁화(劫)가 타올랐다는 보고를 들었느니라.”

그래서 분명 성공 이외에는 상상할 수 없다고 예감했던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다고 믿었던 예감이 틀렸다?

“그 보고는 완전치 않았습니다.”

비가 침통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그 뒤에 추가되어야 할 누락된 보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그 후 화룡이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 역시 천무봉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망막 속에 아로새겨진 그 광경은 어떤 물에도 씻겨지지 않은 채 아직도 그 의 두 눈 안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냐?”

비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그 역시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보조를 투입해 당시 ‘화산지회’에 참석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최우선적인 정 보 수집을 지시했지만 그다지 쓸 만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다들 자기 한 몸 지키기에도 급급했던 터라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 는지 제대로 사태 파악을 하고 있는 이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그런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정신력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을 찾 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어와 시계(視界)를 가렸습니다. 제 몸뚱어리를 단방에 날려 버릴 듯한 강풍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요.’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증언이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지요. 다시 눈을 떠보니 모든 일이 끝나 있었습니다’와 같은 형편없는 놈의 쓸모없는 증언도 있었다. 당연히 이 정도 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가설(假說)을 세우는 정도뿐이었다. 그러나 빈약한 증언을 토대로 해서는 허약한 가설밖 에 나올 수 없었다.

“아직은 추측일 뿐이지만 구 할 이상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모종의 방법을 사용해 거대한 상승 기류를 만들어냈던 것 같습니다. 본래 화기(火氣)는 갈 곳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며 홍매곡을 가득 메울 태세였습니다. 하나 공기를 달구고 대지를 불태우며 하천(河川)마저 끓이려던 그 참에, 빠져나갈 곳을 만나자마자 일순간 위로 분출한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팽팽한 공을 바늘로 찔렀을 때처럼 말입니다.”

비의 추측은 매우 논리 정연했다. 그러나 현상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수레 열 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용린’이 일순간에 폭발한 화력이었다. 그 파괴력은 구대문파도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 만큼 위력적이었을 터! 너는 그 거대한 힘 의 급류를 다스릴 만한 무공을 소유한 이가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현실은 때때로 엄청나게 변덕스럽고 황당하게 변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종종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버젓이 현실화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현상 그 자체보다는 그 현상을 가능하게 만든 원인이 더 중요했다.

“저희는 삼성(三聖)의 존재를 너무 무시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가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회오리바람의 중심지는 천무삼성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확실합니다.”

비영들이 물어온 정보 중에 있던 증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그러나 비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천무삼성에 대해 저희가 가진 정보는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비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늙은 사자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지적은 비가 지금껏 간과한 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 사실이었다.

“서, 설마……!”

비는 ‘늙은 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한 존재감을 지닌 존재를 제가 못 알아봤을 리가……..”

비의 말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구나. 너한테 쉽사리 정체를 간파당해서야 어찌 신마(神魔)라 불릴 수 있겠느냐. 그가 숨기고자 한다면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낼 수 없 다. 나는 이 무림에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한 명, 그 노인만은 예외다.”

비는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미 백 년… 역사는 흐르고 새로운 인물이 출현할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비는 자신의 속내를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뭐… 조금은 발전했다고 칭찬해 줘야겠지?”

비릿한 조소를 깃들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진동했다. 무풍지대를 밝히던 등불이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흔들렸다.

조용하지만 삼엄한 살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살기는 어둠 속에 녹아들어 사방으로 그물처럼 빽빽하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소 짓고 있었다. 태양도 얼려 버릴 만큼 스산한 미소였다.

“흡….”

비는 살짝 몸을 떨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들은 목소리건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런 목소리였다. 아직도 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공포가 요동치는 것 이 느껴졌다.

“조금 더 재미있어진 걸로 치겠다. 그런데 열쇠는 어찌 되었느냐?”

그가 다시 물었다.

“……”

때론 침묵도 유효한 답이 된다.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대답할 말보다 대답하지 못할 말들이 더 많았다.

“열쇠도 얻지 못하고 강호에 기생하는 늙다리들을 처분하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이냐?”

‘화룡계획’은 그가 이 사실을 알기 전부터 준비되어 온 계획이다. 십 년 전부터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었던 계획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터져 나올 분노 에 대비해 비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분노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허, 이것도 저것도 다 실패라… 이거 멋지게 한 방 먹고 말았구나.”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낡은 역사책을 계속 써야겠구나!”

새로운 무림의 역사, 신무림기를 쓰겠다며 호언장담한 비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 일을 빗대고 있음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비는 밀려드는 수치스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렇게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느냐?”

질문이 던져졌다.

“난 너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널 만들었으니 말이다. 천무삼성에 대한 대비책은 완벽했을 터! 설령 이길 수 없다 해도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 에도 네가 감당하지 못할 자가 거기에 있었단 말이냐?”

“그들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상 못한 변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측해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짜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을 진행시키는 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그것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틀림없이 ‘한 집단’도 아니고 ‘한 사람’이라 말했다.

“예. 단 한 명, 저의 척도로 잴 수 없는 자가 있었습니다.”

비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코까지 드리워진 긴 앞머리, 항상 냉소적인 미소가 걸려 있는 입,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어이없는 행동력.

“그자의 이름은?”

“비류연이라고 합니다.”

“물러가라!”

어두운 장막 뒤의 공기가 무겁게 울렸다.

“물러가겠습니다.”

비는 공손히 읍하며 정중하게 대답한 후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잠깐!”

허리를 숙인 채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던 비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

비는 연이어 내려올 명을 기다렸으나 그런 것은 오지 않았다. 잠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비의 이마로부터 한줄기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묵묵히 타 오르던 촛불들이 다시금 세차게 요동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쨌든 실패는 실패! 행동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 아무리 너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비는 일언반구없이 다음에 떨어질 선고를 기다렸다.

“너에게 실패의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

드디어. 오히려 무겁게 짓눌려 있던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입니다. 예외 따윈 되고 싶지도 않고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의 과신과 무능으로 인해 십년적공(十年積功)을 무(無)로 돌렸습니다. 늦어져서는 안 될 대계(大計)가 늦어졌으니 시답잖은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구차해지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었다.

“좋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니 내가 잘못 가르치진 않았구나. 우선 가서 근신해라. 처분이 결정되면 알려줄 것이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읍하며 공손히 예를 표한 후 비는 조심조심 뒷걸음질을 쳐서 방에서 물러나왔다. 그는 앉아서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하는 마찰음과 함 께 육중한 철문은 가늘게 새어들어 오던 빛을 삼켜 버렸다. 또 한 번 어둠이 사방에 드리워졌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중압감에서 해방되자 폐 속에 짓눌려 있던 공기가 한숨으로 변해 단번에 외부로 빠져나왔다.

“후우…….?”

조금 전에 머물렀던 밀실 안의 공기는 단 한 줌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듯 길게 내쉰 한숨이었다.

“하아, 정말 무시무시한 위압감이구나.”

천 근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를 때에나 느낄 만한 중압감(重壓感).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칭해지는 천무삼성을 적대(敵對)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긴장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들 세 명이 자신을 얕보았던 관계로 방심하고 있었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시퍼런 얼음 갈고리가 심장 거죽을 긁는 것 같은 이 서늘함에 견줄 수는 없었다.

천무삼성 때는 이미 그런 종류의 위압감에 면역이 되어 있어서였을까. 그런데 정작 이쪽은 여전히 전혀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훨씬 더 오랜 시 간에 걸쳐 접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 익숙해지질 않는구나. 전혀…….”

혹자는 타성에 젖는 것이라고 비판해 마지않으나 모든 인간은 익숙해지는 능력, 즉 적응력이라는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라 일컬어진다. 이 평가는 상당 부분 옳다. 그러나 모든 법에는 예외가 있는 것이니, 여기에도 예외가 존재했다. 태어날 때부터 봐왔는데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경험의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는 바로 그의 등 뒤 철문 너머의 어둠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절대로 메울 수 없는 까마득한 단절(切)의 간격이 그의 뒤에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절대(絶對)란 저런 것인가…….”

저런 것마저도 절대가 아니라면 도대체 절대란 무엇이고 궁극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는 무쌍(無雙)의 경지. 그의 짧은 이해 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세계. 그것은 이미 그의 이해 영역을 벗어난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한숨을 팍팍 내쉽니까? 땅바닥이 폭삭 꺼지겠습니다그려.”

흠칫!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볼 뻔했다. 그러나 비는 고개를 홱 꺾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아무리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이 이제껏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열렬히 고백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추태(醜態)였고, 추태임을 알고도 행한다는 것은 굴욕이었다.

‘어느 틈에……!’

비는 최대한 태연을 가장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둘째냐?”

굳이 보지 않아도 날카로워진 감각만으로 그는 등 뒤에 있는 인물의 정체를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즉각 반응이 돌아왔다.

“에이, 이젠 뒤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사형? 섭섭합니다요.”

“섭섭? 냉혹하기가 한겨울 강물보다 더한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정(情)이 넘치는 인간이 되었느냐?”

“절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으로 생각하셨단 말입니까? 정말 너무.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잡은 채 고개를 과장되게 절레절레 흔들던 청년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헤플 정도로 얼굴 가득했던 웃음은 어느새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 다.

‘어느 틈에…….?’

그가 고개를 흔든 것은 정말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비의 몸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자신의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청년은 간담이 서늘해지 는 것을 느꼈다.

“이걸로 동점이라는 건가……?”

승부는 일단 무승부로 끝났다. 비의 대응은 청년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정신적 우위마저 싸그리 앗아가 버렸다.

“과연.. .!’

그러나 그는 회복이 빨랐다.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던 청년의 얼굴이 녹으며 다시 함박웃음이 돌아왔다.

“아이쿠,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사형!”

청년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거 안타깝구나.”

비가 심히 유감스럽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가 이 만남을 전혀 기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 면에서 비는 매우 정직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앞에선 웃고 뒤돌아서서 욕하는 표리부동한 행위를 그는 혐오했다. 분명 사형제지간일 텐데도 그의 눈은 매우 정직하게도 싸늘히 식어 있었다. 날카로운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의 눈을 찌르듯 바라본다.

은사로 수놓은 화려한 금의를 몸에 두른, 선이 가늘어 보이는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나이는 스물다섯 정도 되었을까? 걸을 때마다 일부러 꽃잎을 잔뜩 뿌려놓 고 그 위를 사뿐히 즈려밟으며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지독히 화려한 청년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커다란 녹옥 목걸이에 자색(紫色) 머리띠, 허리에는 비취 옥대.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데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을 전형적인 인간이 분명했다. 그 중에서 특히 목에 걸려 있는 녹옥은 그 크기가 손바닥 반만 해서 사람들이 그 가격 묻기를 저어할 만큼 컸다. 게다가 그의 왼쪽 귀에는 작은 고리 모양의 금색 귀고 리가 다섯 개나 걸려 있었는데 저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 귀가 아프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청년은 비의 찌르는 듯한 한광에 도 이미 내성이 생겼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절대 진심으로 섭섭해할 리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형, 오랜만입니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화려 무쌍한 청년이 화려한 미소와 함께 건성으로 읍하며 인사했다.

“이시건, 오랜만이구나. 무슨 용건이냐?”

아명이나 자를 부르지 않고 청년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암송하듯 부르는 비의 목소리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무미건조해서 일체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석문 너머에서 보였던 좀 전의 약한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냉철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예리한 한 자루 검처럼 한기(氣)를 발할 지경이었다. “딱딱하시긴. 그냥 편하게 ‘건아’라고 부르면 좋잖습니까? 사형제 간의 정도 더욱 돈독해지고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사형?”

시건이란 이름의 화려한 청년은 겨울 달보다 차가운 한광을 정면으로 받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춘풍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유들유들한 모습이었 다.

“거절한다.”

두둥~

칼로 자르는 듯한 대답에 청년은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야속하십니다요, 사형. 하나뿐인 사제가 아닙니까? 우린 이 세상에서 단둘뿐인 사형제지간이 아닙니까? 정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저한테, 하나뿐인 사제인 저의 가슴에 그리 큰 대못을 박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통탄스럽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이시건의 입에서 절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가 아니다.”

비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의 사제는 이시건 한 명이 아니었다.

“에이,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구요.”

좀 전의 구구절절한 호소가 무색하게 금세 신색을 회복한 이시건의 목소리는 발랄하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상큼 뻔뻔함 속에서 그 이외의 사제는 순식간 에 ‘사소한 것’으로 변했다.

“그보다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시건의 말을 끊으며 비가 매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 무엇에 대한……. 아아, 용건 말인가요?”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폐관에서 나온지라 사부님께 인사드리러 온 참이었습니다. 이미 보고는 마쳤죠.”

“폐관? 그러고 보니 폐관(閉關)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군. 왜 한동안 모습이 안 보이나 가끔 궁금했었다.”

그가 한동안 모습이 보이질 않아도 폐관에 들었는지 아닌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 일을 알고 있든 아니든 전혀 상관없 었다. 요는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즉, 내 안에 너란 존재는 겨우 그 정도 위상밖에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이 화 려한 청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 따윈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가 다시 물었다.

“그래, 언제 나왔느냐?”

비밀 수련동은 이곳에서 날짜가 걸리는 모종의 비처에 위치해 있었다.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닐 터였다.

“……”

자신의 존재와 상태를 완전히 무시하고 진행되는 비의 질문에 이시건은 두 번 심호흡하고 나서야 일그러지려는 안면 근육을 가까스로 제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이 잘나신 사형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꽤 됐습니다. 어차피 사형은 관심없으시겠지만요. 사형께서 대업(業)을 위해 가셨다가 멋지게 실패… 아차, 이건 금구였던가요?”

자기 실수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허식이었다. 정색하는 가면 뒤에 숨겨진 조롱을 바라보며 비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제 이놈까지 나를 업신여기려 드는구나.’

“상관없다. 입을 다문다고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무척 기뻤던 모양이구나.”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요? 십 년 동안이나 벼르던 계획이었는걸요. 실패했다간 앞으로 있을 계획에 차질이 막대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어찌 제가 감히 실패를 바 랄 수 있겠습니까?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말아주세요. 남들이 오해할까 봐 무섭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이나 그 속에는 독이 섞여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저런 면이 무척이나 얄미웠다.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 칭할 수야 있겠지만 일신상의 득(得)이 될지 해(害)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오해가 아니라 간파하는 것이겠지.’

뭐, 어차피 크게 상관없었다. 본인은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사제가 자신을 창창한 인생을 가로막는 꼴 보기 싫은 방해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자신을 넘어서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일인자와 인연이 없을 것이다. 자신을 쓰러뜨릴 때가 유일하게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때였다. 그 이외에 다른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가 품고 있는 일그러진 감정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용납한다는 것은 아니다. 뛰어넘을 수 있다면 도 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만에 하나 넘어서지 못하면 영원히 사라지리라. 저쪽도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따로 행동 취하기를 주저 하며 말로 떠들기만 할 뿐인 것이다. 살살 남의 신경의 예민한 부분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그 비꼬는 말투, 아직 녹이 슬지 않은 걸 보니 무척 좋은 환경에서 폐관한 모양이구나?”

비가 비꼬는 투로 한마디 했다. 아직 순순히 정신적 우위를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긴장의 끈이 양쪽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런이런!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냉정하시구만요, 우리 사형은.”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느냐?”

“사형도 알다시피 그곳의 수련동은 습도와 실내 온도 정도는 완벽하게 제어되는 곳 아닙니까? 잘 지내다 왔습니다.”

그런 폐관수련쯤 별거 아니었다는 투로 이시건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일종의 허세라는 것을 누구보다 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지옥에서 잘 지내다 왔다고 말하다니… 지금까지의 말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말이구나. 너의 혀만큼 너의 성취가 빼어나길 바란다.”

“그거 기쁘군요. 뭣하면 지금 보여 드릴까요?”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이라고 했던가?

이시건의 화려하고 선이 가는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의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비를 더욱 거북살스럽게 했다. 그냥 이런 기분 상태로 끝낼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다면.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나한테 비웃음당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비가 웃었다. 이시건도 웃었다. 살의의 불꽃이 꽃을 피웠다.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미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움직이지 마세요. 만일 그렇게 되면 저도 보장할 수 없거든요.”

이시건의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이 일그러지며 더욱 비릿한 형태로 변했다. 순간 비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어느 틈에…….’

이걸로 오늘로만 벌써 두 번째, 두 번이나 연달아 허(虛)를 찔리다니…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살기의 그물을 민감하게 느끼며, 비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발을 디디게 되면 팽팽하게 당겨진 살기는 성난 폭풍처럼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기 위해 날아들리라.

사제는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자만심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 겨우 획득했던 정신적 우위가 무산으로 돌아간 터라 화가 나 있던 차에 다시 한 번 때 [時]의 우위(優位)를 점한 것이다. 통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시건이 웃으며 경고했다.

“가만히 계시는 게 이로울 겁니다, 사형. ‘자운(雲)’은 민감해서 조그만 움직임에도 반응하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사형을 해칠지도 모릅니다. 본.의. 아.니.게. 말.이.죠.”

침착함과 냉정함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비였지만 이 한 수에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터뜨렸다.

“이 기(技)는 설마…….?

이시건은 자신의 폐관의 성과가 보여주는 결과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설마입니다. 자운(紫雲)’이지요.”

“자운이라면 ‘그’ 자운을 말하는 것이냐?”

이번만큼은 비도 정말 놀란 것 같았다.

“그 자운 말고 또 다른 자운이 있나요? 사형의 ‘암뢰(暗雷)’와 쌍(雙)을 이루는 비기인 바로 ‘그’ 자운입니다.”

쌍을 이룬다는 것은 두 무공이 동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견줄 자가 없는 것을 일컬어 무쌍(無雙)이라 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것은 자신이 이제 비와 동등한 자격 과 힘을 손에 넣었다는 이시건의 암묵적인 선언이자 시위였다.

“드디어 완성한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본심과는 정반대되는 목소리로 비는 자신의 성대를 무뚝뚝하게 울렸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형의 ‘암흔뢰격(暗痕雷擊)’에는 아직 그 성취가 미치지 못하죠.”

무공의 급이 낮은 게 아니라 단지 수련의 성취 문제일 뿐이며,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곧 메워질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뭐, 그것도 이제는 필요없을지 도 모르지만 말이다.

“너답지 않은 겸양이구나. 그래서 이제 날 어쩔 셈이지?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

무덤덤한 어조로 비가 물었다. 무슨 기(技)인지 알았기에 그는 더욱 침착해질 수 있었다. 무지(無知)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다. 알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시건은 스스로를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약화시켰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시건이 대답했다.

“죽이다니요? 그런 끔찍한 말씀 하지 마세요. 이 정도에 당할 사형이 아니지요. 전 사형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건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우위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시험해 보겠느냐?”

이시건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비가 물었다. 그 형형한 눈빛에 이시건은 마른침을 삼켰다. 비의 도발은 효과가 있었다. 그의 내면은 지금 참기 힘든 심각한 유혹과 맞서고 있었다.

“…시험은…….”

당장이라도 ‘예, 시험해 보고말고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시험은… 다음으로 미루죠.”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러냐? 그럼 그런 걸로 해두마.”

찌를 듯한 시선을 거두며 무뚝뚝한 어조로 비가 대답했다.

딱!

이시건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비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살기의 그물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력시위는 이 정도로 족했다. 자신의 실력을 너무 많이 노출시키 는 것도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결착을 내기에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비록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였지만 아직 상황 판단에 눈이 멀 정도는 아니었다. “사형께선 여전하군요.”

자신이 펼친 기를 거둔 후 이시건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누구처럼 줏대없지는 않다.”

비의 대답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비판적이었다. 그 얄미운 말투가 다시 이시건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저 자신만만한 냉정함에 상처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 다. 어떻게든 그러지 않고서는 오늘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다시 봤습니다, 사형.”

“뭐가 말이냐?”

묘하게 과장된 어투가 비의 신경을 자극했다.

“에이, 모른 척하시기는. 이번 일은 실패했지만 전리품은 가져왔다면서요?”

“전리품?”

“예.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기억에 없다.”

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시건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편인데 그만둬서야 되겠는가. 완벽함이란 이름의 지루함을 깨뜨리는 즐거움은 지금부터 였다.

“왜… 그 여자 말입니다. 사형이 이번 작전에 나갔다가 데려왔다는…….?

그 순간 대공자 비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시건은 그 짙은 살기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무슨 이야기냐?”

‘과연…….?

천만 개의 바늘이 몸을 찔러댄다 해도 이보다 따갑지는 않을 격렬하면서도 농후한 살기였다.

“그, 그렇게 열 낼 건 없잖아요? 비난하는 게 아니라구요. 암, 그렇고말고요. 영웅본색(英雄本色), 아니,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잖아요? 전 오히려 사형에게 그런 낭만이 있었던가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만큼 특별하다는 의미이리라. 특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어지간히 미인이었던가 보죠?”

다시 한 번 비의 눈동자 속에서 검은 불꽃이 차갑게 번뜩였다.

‘정곡이란건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지독한 살기에 살짝 식은땀이 나긴 했지만 이 정도에 주눅 들 정도로 약해 빠져서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오히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만큼 숨김없는 감정을 드러내는 비를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자신의 평소 행동을 뒤엎을 만큼. 그것은 곧 약점 이 되기도 쉽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얼어붙어 있던 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시시한 일에 신경 쓰지 마라!”

그의 말투는 어떤 반론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그냥 단순하고 작은 호기심일 뿐입니다. 별다른 뜻은 없어요. 그래요. 그냥 궁금했을 뿐이라구요. 그 전리품, 아니, 그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저도 일 단 남자잖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형?”

항상 별다른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 청년도 역시 똑같이 반복했다.

“그녀는 죽었다.”

비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엥? 죽었어요?”

청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얼마나 미인이기에, 혹은 무슨 속사정이 있기에 저 얼음장 같은 냉혈한이 여자를 데려왔나 해서 조심스럽게 캐묻고 있는데……. 난데없이 죽었다고 그러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이다. 보물을 훔치려 계획까지 다 짜놓고 막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에, 그 보물이 이미 도둑맞은 것을 알고 허탈 감에 빠진 도둑 같은 심정이었다. 이걸 간단하게 줄여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고 했던가?

“그래, 그녀는 죽었다!”

확증이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비의 대답은 칼처럼 단호했다. 비의 이런 대응에 한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이시건이었지만 간단하게 ‘그것참,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하고 심심한 위로 따위나 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대로 입을 꾹 다물고 벙어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한 방 먹이 지 않으면 꼬일 대로 꼬인 그의 속은 풀리지 않을 듯했다.

“흐흠, 일단 그런 걸로 해두죠. 그 편이 더 나을 테니.”

좀 전에 들었던 말을 그는 그대로 되돌려주며 자그마한 희열을 맛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의 동요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는지 그의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이시건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제야 만 족한 이시건은 가볍게 읍을 하며 말했다.

“당분간 뵙지 못하겠군요, 사형.”

“어딜 가느냐?”

“잠시 심부름으로 남창엘 가봐야 하거든요.”

“남창?”

목적지가 남창이라면 볼일이 있는 곳은 한곳뿐이다.

“천무학관……..”

이번 거사 실패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곳, 백도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저력이 숨겨져 있는 곳, 정천맹과 함께 앞으로 있을 거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곳이 아니던가.

“예의 그 계획을 발동하시기로 했습니다.”

“서, 설마?!”

이시건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사형이 상상하고 있는 바로 그 계획이지요.”

“그 번천계의 계획은 폐기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느 때나 유비무환(有備無患)이죠. 설마 사형이 주관하던 화룡승천계가 실패로 끝날 줄은 몰랐지만, 실패했을 때의 대비책 한두 개 정도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 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렇게 안이한 대응을 해서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세상은 무뇌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뇌충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난 한마디도 듣지 못했지?”

“사부님으로부터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잠시 근신하시랍니다. 이번 임무는 저에게 맡기셨거든요. 호위로는 ‘십삼혈(十三血)’을 쓰기로 했습니다.” “십삼혈을?”

“예.”

“그 살인 기계들을 사용한단 말이냐?”

“일단 손을 쓰려면 가장 빠르게 상대의 숨통을 끊어야죠. 사형께선 제가 폐관하고 있는 동안 동분서주하셨으니 이제 좀 쉬시지요. 그 다음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 습니다.”

‘너 따윈 내가 폐관한 동안의 대용품에 불과하다. 그동안 이 몸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실패하느라 수고했다. 이제 내가 나왔으니 넌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라. 그 다 음은 내가 알아서 다 한다. 이참에 영원히 쉬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을 적당히 각색하여 대외용으로 변환시킨 말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물론이죠.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이시건이 얄미운 어조로 말했다. 항상 명령대로 해야 되는 입장에서 명령을 내리는 입장으로 격상되었으니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됐다. 부디 성공하길 빈다. 하나 먼 길을 떠나는 너에게 사형제 간의 정을 생각해서 한 가지만 충고해 주마.”

두 사람 모두 있지도 않은 정을 들먹거리니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어차피 그따위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 다.

“그들을 얕보지 마라. 그들은 강하다.”

그것은 직접적인 경험에서 얻은 지혜였다.

“고마운 충고, 마음 깊숙이 새겨두지요.”

어딜 봐도 건성인 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사족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몸뚱어리였기에.

“아참, 죽은 그녀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길.”

이시건은 마지막으로 가볍게 공수한 손을 두어 번 흔든 다음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르르르릉!

다시 육중한 음과 함께 바깥 세계로 향하는 석문이 닫혔다.

파바바밧!

‘그것’이 비의 어깻죽지부터 시작해서 팔꿈치를 지나 소매 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내달렸다.

그리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비의 오른팔이 부풀어 오르더니 펑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큭!”

그는 침음성을 터뜨리며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요란한 폭음과 달리 오른팔은 멀쩡했다. 다만 그 위를 덮고 있던 소매가 작은 세모꼴 모양으로 조각나 허공 속 에 산산이 흩어졌다. 마치 폭발한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소매 속에 새겨졌던 잠재된 경력이 폭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녀석이 그렇게 얌전히 물러날 리가 없다 했지!”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 경력을 완전히 상쇄시키지는 못했군.”

“너의 오른손은 내가 가져갔다’고 외쳐 댈 만한 무서운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도 답례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르르릉!

이시건의 등 뒤에서 석문이 닫혔다. 그는 빛의 세계로 향하는 기나긴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는 내려올 때만큼이나 똑같이 한참 동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의 머릿속은 조금 전 있었던 보이지 않는 공방(攻防)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직 정교함이 부족해!”

구름처럼 부드러운 자운을 다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어하지 못하는 힘은 언젠가는 자신을 상하게 하기 마련인 법. 어떻게든 제어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힘도!”

부드럽지만 강철마저도 찢어발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오늘은 그와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이나마 측정해 봤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그 남자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강화 해야하는지 윤곽을 잡은 것만으로도 수확이 있었다. 게다가 선물도 남겨놓고 오지 않았는가!

이제는 자신을 지금처럼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무시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무시당하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지닌 힘의 편린을 보여준 것이다. 나중에 불리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예상보다 비의 오른팔 반응이 늦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손쉽게 선물을 안겨줄 수 있었지만 석연치 않았다.

“마치 부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

너무 손쉽게 일이 이루어지니 영 찜찜했다. 너무 잘 풀려도 이상한 것은 비단 연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설마…….?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추론을 부정했다.

“그 남자는 꼼짝도 못했어. 나의 구름, 자운이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기류가 그의 존재를 포위할 때까지 말이야.”

투둑!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묶고 있던 머리 끈이 끊어지면서 검은 머리가 비처럼 흘러내렸다. 갑작스레 머리카락 세례를 받은 그의 시야가 한순간 캄캄하게 변 했다.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숙여진 고개 안에서 들려왔다.

“너의 목은 내가 가져갔다 이건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투둑!

비싼 녹옥으로 만든 그의 상징과도 같은 목걸이가 뚝 끊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어둠이 깔린 계단으로 떨어져 가는 값비싼 녹옥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서 깃털처럼 천천히 떨어져 내린 녹옥은 이윽고 바닥에 부딪쳐 수십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부서진 조각들이 요란한 소리 를 내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살기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아직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건가?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신체를 쓰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머리와 목에 칼을 들이대 놓았던 것이다.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경고가 분명했다.

“아얏!”

순간 오른뺨을 스치는 통증에 이시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무의식 중에 뺨에 가져간 손을 눈앞에 들어보았다. 피였다. 예리한 파편 하나가 뺨을 스쳤던 것이 다.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젠장~!!”

저절로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온다. 그런 쪽의 자제력에 그는 그다지 유능하지 않았다. 감히 내 아름다운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두고 보자, 비! 그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대공자란 칭호, 내가 떼어내 주마! 그 칭호에 어울리는 사람은 오직 이 몸 하나뿐이다!”

이를 갈며 이시건은 맹세했다. 반드시 그 두 눈에 피눈물이 쏟아지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고, 그 잘나신 뻣뻣한 무릎이 자신 앞에 무릎 꿇는 광경을 보고야 말겠다 고. 상상만으로도 파도 같은 쾌감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며 달콤한 황홀경에 빠뜨린다. 그의 눈은 이미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는 다시 한 번 맹세했다. 그 잘나신 면상, 언젠가 반드시 이 몸의 발아래에 무릎 꿇리고 말 테다.

비는 맨살이 드러난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이시건의 추론은 정확했다. 사나운 흑룡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흉측한 상처가 그곳에 드러나 있었다. 검은 상 처의 모양이 매우 선명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생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상처를 바라보는 비의 눈동자에 냉정 이외의 감정이 떠올랐다. 바로 ‘그녀가, ‘그녀 의 검’이 새겨준 것이었다. 가슴에 난 또 하나의 상처와 함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였다.

“이것이 대가인가…….”

비는 실소했다.

“만일 이것이 내가 한 행위에 대한 대가라면…….”

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려다본 오른 손바닥이 피에 젖어 있다. 장심을 누르는 묵직한 감촉. 붉은 눈물을 흘리던 왼쪽 눈, 부릅뜨던 오른쪽 눈동자. 여인의 두 눈 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그날의 영상을 억지로 가리던 장막이 갑자기 벗겨져 버리기라도 한 듯이. 불신과 경악, 그리고 절망. 그날의 세찬 빗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훗, 그렇다면 너무 싸게 먹혔군. 한 사람의 삶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 대가로는 말이야.”

절대로 등가(等價)가 성립할 수 없다는 불합리한 사실에 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던 고통과 동요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래, 그녀는 죽었다! 내가 이 손으로 죽인 것이다!”

아직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 주먹을 불끈 쥐며 비가 외쳤다.

“그날 모래사장에서 보았던 소녀는…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

오른 팔뚝에 난 흑룡이 날뛴 듯한 상처에 손을 올리며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은명이란 이름 아닌 이름을 지닌 청년의 삶을, 두 번째는 독고령이란 이름을 지닌 여인의 삶을 끝장낸 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절대로!”

그것이 그에게 남겨졌던 유일한 길이었다. 그 길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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