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4화 – 진홍(眞)으로 불타는 밤의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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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8권 4화 – 진홍(眞)으로 불타는 밤의 어둠

진홍(眞)으로 불타는 밤의 어둠

-청룡은장의 참화

화르르르륵!

달도 뜨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의 어둠에 저항이라도 하듯 붉은 불꽃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밤을 몰아내고 있었다. 이 광포한 저항에 밤의 어둠은 희미한 회색으 로 변했고, 한 채의 장원은 휘몰아치는 불꽃의 폭풍에 검은 재로 화해 열기에 흩날리고 있었다. 어둠을 밝힌 대가는 검은 숯과 검은 재, 그리고 죽음이었다. “크윽! 놈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았지?!”

청룡은장주 유재룡의 입에서 침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수라장(修羅場)을 헤쳐 온 그의 검은 이미 십여 명에 이르는 괴한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 나 그 혼자의 힘으로 괴한 모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외원(外苑)에서 내원까지의 거리는 채 십 장도 되 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다면 짧은 거리를 지나기 위해 유재룡은 생명을 걸어야 했다. 그의 도망을 돕기 위해 이미 수십 명의 무사가 유명을 달리했다.

대전(殿)인 청룡전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이로써 잠시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길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도 자각하고 있었다.

이미 은장의 전력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였다. 그가 여태껏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한 남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그것’의 보관자로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지켜온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두 아이는 두려움에 떨면서 단 하나뿐인 의지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금의 사태는 아이들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버거운 운명이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더 큰 업 보를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아비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영아야, 선아야, 여기까지구나. 이 아비는 더 이상 너희들을 지켜줄 수가 없구나. 오 년 전에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엄마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너희들을 지 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무래도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미안하다. 다 이 아비가 못난 탓이다.”

“아버지!”

아들 유경영이 외쳤다.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아빠!”

딸 선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와락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철부지 어린애였다. 펑펑 울고불고하지 않는 것만 해도 대견 했다.

재룡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으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

“…예, 아버지!”

소년은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지독히 두려울 텐데도 아이는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직 어리지만 자신이 앞으로 겪어야 할 운명에 대해 이미 깨닫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려서부터 조숙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커서 분명 강호에, 금융계에, 고리대금업계에 이름을 떨치리라 확신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광경은 보지 못 할 것 같았다. 멀리서 울려 퍼지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이걸 받거라!”

그가 품 안에서 꺼내준 것은 두 개의 금낭(錦囊)이었다.

“이건…….”

“열어보거라.”

부친의 명에 유경영은 지체없이 금낭 하나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꼬깃꼬깃 네모나게 접혀진 종이가 수십 개나 들어 있었다. 소년은 그중 하나를 들어 펼쳐 보았 다. 마치 뱀이 수천 번 몸을 꼬고 또 꼰 듯한 복잡무쌍한 글씨가 그 안에 휘갈겨져 있었다. 일반인은 절대 알아볼 수 없는 글씨. 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문인도 이 글자 를 읽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년은 한눈에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종이에 쓰인 글자는 바로 “당자체(當字體)’였다.

“이… 이건……!”

당자체란 전당포(典當鋪)에서만 쓰는 특별한 글씨체로 초서(草書)를 변형시킨 복잡하고 변화가 심한 글자를 일컫는다. 업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무엇보다 위조(僞造)가 어려웠다. 그런 만큼 익히기도 힘들고 빨리 쓰기도 힘들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글 자를 익혀야만 했다. 당표, 즉 전표뿐만 아니라 은장의 제반 서류 모두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유경영도 어려서부터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수십 종류의 당자체를 습득해 오고 있었다. 각 전당포나 은장마다 쓰는 서체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서체 를 습득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 종이에 쓰인 당자체는 청룡은장의 것이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모아둔 얼마간의 전표와 은자다. 도망치려면 돈이 필요할 게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펼쳐 보이지 말거라. 너는 청룡은장주의 아들

이니 돈을 보관하고 사용함에 있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리라 믿는다.”

전표에 적힌 액수는 무척이나 놀라운 숫자였다.

“오늘 청룡은장이 멸문당하면 우리 청룡은장에서 발행한 전표는 내일부터 휴지조각이 될 터! 그 전표를 자본 삼아 네가 언젠가 다시 가업을 일으키리라 믿는다. 너는 비록 아직 어리지만 소싯적부터 내 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왔을 것이다.”

실제로 유재룡은 고리대금업자가 되기 위한 많은 소양을 가르쳐 왔었다. 이쪽 업계는 직원을 채용하고 훈련시키는 데 공통적으로 강력하고 폐쇄적인 관습과 전통 에 입각한 도제(徒)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직원들은 모두들 어려서부터 가게에 들어와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치는 게 전통이었다. 신뢰와 신용은 하루 아침에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직원도 대를 이어 채용하거나 친인척이나 지연을 고려해서 채용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때때론 능력보다 오히려 지연, 혈 연, 학연이 더욱 중요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었다. 대를 이을 장남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유재룡은 지금이 마지막 가르침을 내려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돈이란 무엇이냐?”

유재룡이 물었다.

“돈은 야생마와 같은 것입니다.”

유경영이 즉시 대답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해온 것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돈을 말에 비유하기를 좋아했다. 유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그 의미를 알고 있느냐? 이 아비가 왜 돈을 말과 같은 것이라고 했는지 말이다.”

“그건….”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돈은 말이다’라는 입버릇은 익히 들어왔지만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저의(底意)까지는 읽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뜻[意]을 모른다는 것은 돈이 말이라는 ‘말 쪼가리’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교(下敎)해 주십시오.”

“네가 말한 대로 돈이란 사나운 야생마와도 같다. 제어하지 못하면 너 자신을 해(害)하고 만다. 그러나 잘 길들이기만 한다면 너를 태우고 만 리(萬里)를 달려 천하 를 안겨줄 수도 있다. 예전에 진(秦)나라가 말[馬]로써 천하를 일통(統)했듯이 말이다. 이 아비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그러니 가슴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깨우침이었다. 그 깨우침을 가슴에 새기고 어떻게 자신의 양분으로 삼을 것인지는 이제 전적으로 아들의 몫으로 넘겨 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유경영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절대 잊지 말거라. 이 가르침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유산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금낭은 무엇일까?

유경영은 호기심에 매우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는 두 번째 금낭을 흔들어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아들이 무심결에 두 번째 금낭마저 열어보려 하자 유재룡이 황급히 이를 제지했다.

“그만두거라! 절대 그걸 열어서는 안 된다. 또한 궁금해해서도 안 된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 좋다. 다만 반드시 지켜야 할 물건이라는 것만 명심해라. 절대 그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첫 번째 금낭 안의 것을 모두 잃어버리더라도 이 두 번째 금낭 안의 것만은 지켜야 한다.”

그 단호한 태도에 유경영은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뼛속까지 전당포 사람인 아버지로 하여금 돈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걸 가지고 한곳으로 가거라.”

“어디로 말입니까?”

유재룡이 말했다.

“남창!”

***

“너무 늦군!”

불타오르는 전각과 시체를 뒷배경으로 깔고 지옥의 한가운데 서 있는 혈의인의 목소리에 못마땅함이 묻어 나왔다. 저 앞에서 병장기의 격렬한 격돌음과 단말마 비 명이 혼돈 속에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작업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청룡은장에 몸담은 자 중에 숨 쉬고 있는 자가 나와서는 안 되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가장 큰 적이었다. 아미파가 개입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했다. 늦으면 늦을수록 아미파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는 가장 큰 적이었다. 그전에 끝장을 봐야 했다.

문제는 외원과 내원의 경계(境界)였다.

청룡은장에는 담이 두 개 있었다. 원래부터 두 개인 건 아니었다. 이 청룡은장이 전당포로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여느 기업들처럼 자그마했다. 어느 정도였느 냐하면 코딱지만 하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정도였다. 앉을 자리나 있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다가 사업이 번창하면서 조금씩 건물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마 침내 자그만 담을 허물고 새 담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안에는 일반적인 전당포처럼 여러 장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업이 커지다 보니 그것을 운용할 사람이 필요했고, 사람을 고용하다 보니 건물을 더 늘릴 필요가 생겨났다. 그래서 은장을 지키는 호원무사들과 상주 직원들을 위한 숙사도 몇 채 짓고 비좁아 터졌던 마구간도 더 크게 확장했다. 물론 수레 놓을 곳도 필요했다. 창고도 늘어났다. 그러나 새 로 쌓은 지 삼 년도 채 안 된 담을 헐고 다시 짓는 것이 낭비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미 지어놓은 데 들어간 자금도 아까웠다. 게다가 이 정도까지 커졌으니 경계를 하나 더 늘리는 것도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리하며 자연스럽게 외원과 내원이 생겨났다. 그때의 새로 쌓은 담은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제는 내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 하나만 남았을 뿐이었다.

전력으로는 애초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와 살인의 전문가였고 저들은 책상에 앉아 돈이나 세면서 주판이나 튕기던 놈들이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전문성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원과 내원의 경계에 설치된 보이지 않는 함정과 여러 가지 기관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정 면 승부가 안 되면 곧바로 우회 전법으로 전환하면 된다. 상인에게 관심있는 것은 정정당당함보다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가 하는 경제적 문제였다.

“상인의 집요함이란 건가…….”

은장업이 비록 현물보다는 금전을 회전시켜 이문을 남기는 고리대금업이지만 이윤을 남기는 이상 상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익을 내기 위해 온갖 방 법을 동원했던 그들이 지금은 보다 효율적으로 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변칙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전진이 너무 느 렸다. 더 이상 기다려 줄 수는 없었다. 부하들을 조금 다그쳐 줄 필요가 있었다.

“조장들에게 전해라! 우리는 무능한 인간을 조장으로 데리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반 각을 준다! 그 안에 길을 뚫지 못하면 모조리 강등이다! 변소간 청소 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주지!”

“예!”

혈의인의 무시무시한 명을 받든 전령이 뛰어간 뒤 잠시 후 그는 칼부림 소리가 눈에 띄게, 아니, 귀에 띄게 커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남창이요? 파양호 옆에 위치한 그 남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유경영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그래, 그 남창이다.”

소년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남창이라면 이곳 사천 땅에서 멀어도 너무 멀었다. 아직 나이 어린 남매 둘이서 가기에는 너무나 험난했다. 성(省)의 경계를 몇 개나 넘어야 했다. 두 달이 걸릴지 석 달이 걸리지도 불분명했다. 한 달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그것도 도중에 아무런 위협도 만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님!”

여기서 가장 피신하기 좋은 곳은 아미파였다. 하루면 충분했다. 그런데도 저 멀고 먼 남창이라니?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 부분의 괴리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유재룡은 너무도 확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미파로 가서는 안 된다!”

그도 자신의 아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쯤은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쉬운 길보다 험난한 길을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안 되죠?”

“징그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우리를 습격한 놈들이다. 우리와 아미파의 관계를 모르고 왔을 리는 없을 터, 아마 지금쯤 아미파로 가는 길목은 모두 봉쇄(封鎖)되어 있을 것이다. 너희 둘이 움직여서는 금방 들통나고 만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곳에 기어들어 가는 짐승은 없는 법이다. 아무리 그들이 영악하고 치밀하다 해도 설마 너희 둘이서 어린 몸으로 남창으로 갈 거라고는 생각 못할 것이다. 그 사고의 의표를 찔러라. 알겠느냐?”

그제야 소년은 아버지의 숨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 아버님. 이제 이해했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평탄한 길이 아닌 험한 길밖에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살길은 그곳뿐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견뎌내야 한다.”

유경영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창까지 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금낭을 가지고 철권 마진가 대협을 만나거라.”

“마진가 대협이라 하시면? 일권무적(一拳無敵) 이권불요(二拳不要)의……?!”

아직 나이는 어려도 그 이름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도 무림의 남아인만큼 모든 이들의 꿈인 천무학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 대협을 칭하는 것이다.”

유재룡이 품 안에서 옥패를 하나 꺼내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이 증표를 지니고 관주를 만나거라. 천무학관의 그늘이 너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우리 집이 그렇게 높고 유명한 분과 교분이 있었던가? 전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고, 아버지는 그 의문에 답해주지 못했다. “아참, 그리고 이것도 너에게 주마.”

유재룡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벗어 아들에게 걸어주었다. 목걸이 가운데는 황금으로 빛나는 큼직한 열쇠가 하나 걸려 있었다.

“이 열쇠는…….”

유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청룡은장의 비밀 은고를 여는 열쇠 ‘황룡시(黃龍匙)’다.”

그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열쇠를 손에 쥐더니 내공을 주입해 비비기 시작했다. 푸스스 연기가 나며 열쇠를 덮고 있던 도금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금 은 너무 물러 열쇠로 쓸 수 없었기에 그 안에 든 것은 당연히 철(鐵)이었다. 황룡시는 단숨에 철룡시가 되었다.

“황금은 때때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 아직 너에게는 그 황금빛을 지킬 힘이 모자라다. 힘을 키우거라. 너의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그래서 언젠가 청룡은장을 재건하도록 하거라. 그때, 이 열쇠는 다시 황금빛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크르르르릉!

유재룡이 벽에 걸려 있는 촛대 하나를 좌로 돌리자 뒤에 있던 서가가 좌우로 열리며 비밀 통로 하나가 나타났다. 소년과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런 고가(高價)의 물건이 우리 집에 장치되어 있었다니…….”

유경영은 상인의 아들다운 의견을 피력했다. 물건의 가치를 감정하는 훈련이라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배워왔다. 이 정도 물건이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니는지 대충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관(機關)으로 작동되는 비밀 통로는 만들기가 어렵고 그 공정이 까다로운 데다가 만들 수 있는 전문가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말은, 즉 한 번 만들려고 하면 돈이 억수로 깨진다는 소리였다. 이 위급함 중에도 소년은 그 일련의 사실에 대해 감격했다.

“자, 따라오너라!”

비명 소리가 멎었다. 격렬한 우렛소리를 내뱉던 병장기들도 어느샌가 침묵하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흑의를 입은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유재룡은 검을 손에 든 채 서가를 뒤로하고 귀기스런 안광을 발하고 있 었다.

“이게 누구신가? 청룡은장의 유장주님 아니신가? 수하들은 모두 어디 가고 혼자 쓸쓸히 외로이 집을 지키고 계신가?”

선두에 서서 들어온 복면인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일착着)했다는 사실에 무척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우선 통성명이나 합시다. 직업상 본명은 알려줄 수 없고, 그냥 ‘혈표’라 부르면 되오. 직함은 수석조장이오.”

“닥쳐라, 악(惡敵)! 가면 뒤에 얼굴을 숨긴 자의 가명 따위 듣고 싶지 않다. 우리 은장과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러는 거냐?” “원한? 그런 게 있을 리 있겠소? 원한 따윈 없소이다.”

혈표의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솔직 담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재룡의 기운을 빼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 원한도 없으면서 이런 잔인한 처사를 저지르는 이유가 뭐냐?”

“정말 몰라서 물으시오?”

혈표가 복면 뒤로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인간이란 원하는 게 없어도 충분히 이런 잔인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오.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을 보시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할 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거겠소? 그냥 우연찮게 약소국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었던 것뿐이오. 아~주 우연히! 그들이 내건 정의(正義) 같은 건 단지 사람 들을 충동질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에 지나지 않잖소? 유 장주는 상인이면서 이 간단한 이치를 모른단 말이오?”

혈표의 입에서 개탄인지 탄식인지 하품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돈이 필요한 게냐?”

혈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 따윈 관심없소. 있다 해도 그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칠 때 돈이 부족해서 치는 경우 봤소? 강대국이 원하는 것은 항상 돈이 아니라 앞 으로 수십 년간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적 가치라오.”

마치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설교조 말투에 유재룡은 부아가 치밀었다. 분명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그럼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 같군. 이런 작은 은장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은가?”

“시치미 떼지 마시오, 유 장주 다 알고 왔으니. 그러니 시침 뗄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요. ‘그것’만 내주시오. 그럼 얌전히 물러가겠소.”

그 얕잡아보는 말투에 마침내 유재룡이 폭발했다.

“뭐, 얌전히 물러나? 이 개새끼들아! 밖에 시체의 산을 쌓아놓고 그런 말이 그리도 쉽게 나오느냐?”

분노가 폭발하자 자연스럽게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쌍욕이 나올 만큼 그는 분노해 있었던 것이다. 그의 평정심은 이미 누각 꼭대기에서 떨어진 거울처럼 산산조각난 상태였다.

“그 일은 참 유감이오. 하지만 빨리 안 주는 걸 어쩌겠소? 게다가 한 방 먹었잖소. 설마 스스로 장원에 불을 지를 줄이야……. 봉화라도 올릴 셈이었소? 그러니 어 찌 우리가 마음이 급해지지 않겠소? 부득이한 일이었소이다.”

혈표는 여전히 열받을 정도로 침착했다. 하지만 갑자기 전각에 불이 났을 때는 혈표 자신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불은 저쪽에서 지른 게 아니라 이쪽에서 지른 것이었다. 비밀 임무에 투입된 자신들이었다. 야밤에 불이나 싸지르는 행위는 ‘나 여기서 일 벌인다’고 큰 소리 로 떠벌리고 다니는 꼴이었다. 그래서 불이 나면 오히려 달려들어 꺼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게 그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진화 작업은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 불이 삽시간에 이렇게 크게 빨리 번질 수 있었던 것은 모종의 장치가 평상시에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용의주도한 준비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정 외의 지체가 벌어지고 말았소. 희생자도 늘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그래도 덕분에 유재룡으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측 중에 빗나간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일 처리 솜씨가 지나치게 좋다는 점이었다. 이래 서는 아미파의 구원이 당도하기도 전에 전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사실 이미 전멸이었다. 남은 것은 그 자신 혼자뿐이었다.

“근데 ‘그것’이란 게 대체 무슨 거시기냐? 그 거시기가 뭔진 몰라도 우린 그런 거시기 가지고 있지 않다.”

유재룡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시간을 더 벌어야 했다. 아직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시침 떼지 마시오, 유 장주. 다 알고…….”

순순히 유재룡의 질문에 대답해 주던 혈표의 말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그가 주위를 두어 번 두리번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이.

유재룡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구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설마 아이들 신상까지 파악하고 왔단 말인가?”

다행히 아이들은 비밀 통로로 도망친 이후였다.

“이상하구려. 찾아도 안 보이길래 분명 함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복면인은 이미 수하들을 시켜 아이들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명해놓은 터였다. 소중한 인질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탓이었다.

“그 아이들은 여기 없다.”

유재룡의 대답에 혈표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복면 바깥으로도 충분히 그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건 재미없는 이야기구려. 뭐, 좋소. 짐작은 가니까. 어차피 갈 곳이라 해봤자 아미파 정도겠지. 곧 잡힐 테니 천만 유감이오.”

“이놈들아,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는 거냐! 그 아이들은 그냥 두어라!”

유재룡이 고래고래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조금이라도 더 당황하게 보이기 위해서. 물론 속내는 정반대였다.

‘제발… 제발… 제발……..

그는 속으로 기도하며 열심히 발악, 아니, 발광했다. 이들의 이목이 아미파로 쏠리길 기원하며.

혈표가 부하 몇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마 아미파로 가는 통로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였을 것이다. 괴한들 중 몇 명이 불타는 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 다. 유재룡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힐끔 혈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걱정 마시오. 아이들은 곧 만나게 될 거요.”

그리고 아마 그곳은 이 세상이 아니리라.

“네놈들,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

돈도 필요없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니 명예도 필요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피에 굶주린 살인귀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유 장주,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요, 아니면 그동안 치매라도 드신 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우리가 필요한 건 그냥 하나의 ‘열쇠’요.”

유재룡은 그 소리에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어둠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았다. “그, 그걸 어떻게??

평생을 가슴속에 묻어온 비밀을 저들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거, 거절한다! 네놈 같은 악적들에게 어찌 청룡은장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은고의 심장을 건넬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된다!”

그러자 혈표가 혀를 차며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허, 왜 이러시나, 유 장주! 내가 말하는 열쇠가 그 열쇠가 아님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나 또한 그러하고. 안 그렇소?”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군.”

유재룡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 참 유감이구려. 계속해서 말로는 부인하지만 장주의 목소리는 지금 떨리고 있지 않소? 여봐라!”

“예!”

삼석과 사석의 위치에 있는 부관들이 대답했다.

“당장 아이 두 명을 찾아와라! 눈앞에서 자식들이 오체분시당하는 것을 보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저… 어디서 찾아오죠?”

뻑!

서열 사위씩이나 되는 부하의 자릿값 못하는 얼빵한 질문에 복면인의 주먹이 번뜩였다.

“바보 같은 놈! 아이들과 아비가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이 안에서 사라졌다면 그게 하늘로 솟았겠느냐, 아니면 땅으로 꺼졌겠느냐? 여기 어딘가에 비밀 통로가 있 을 것이다! 찾아라!”

“예!”

그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온 이십여 명의 부하가 일제히 복명했다.

그러자 유재룡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 된다! 그 아이들만은 안 된다!”

유재룡이 고함을 지르면서 한쪽 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검을 들고는 흉흉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그곳을 건드릴 수 없다는 듯이. “그 아이들만은 절대로 안 된다!”

그 모습을 본 혈표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힌다.

“속았구려, 유 장주!”

“…..!!”

“흐흐, 아무래도 비밀 통로는 그곳에 있는 모양이구려.”

“이, 이런!”

유재룡이 입에서 정말로 다급한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아도 그가 당황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실수가 적에게 실마리를 던져줬다. 는 사실에 경악한 듯했다.

“참영! 격운!”

명령과 동시에 복면인 두 명이 유재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혈표가 달려드는 부하들 뒤로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 들어야 할 답이 있다! 죽이지는 마라!”

유재룡에게 달려든 두 명의 복면인 참영과 격운은 지금까지 그의 칼 아래 고혼이 된 여타의 복면인 찌꺼기와는 확실히 격이 다른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 무리 중에서도 실력 행사깨나 하는 놈들인지 연신 유재룡을 몰아붙였다. 사실 이 둘은 대전에 들어온 이십여 명의 무리 중에서 각각 서열 이위와 삼위에 위치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왼팔을 노리며 접근해 오는 외날도의 사내가 서열 이위인 참영, 그리고 오른팔을 노리며 손에 쥔 귀두도를 풍차처럼 휘두르는 덩치 큰 사내가 서 열 삼위인 격운이었다.

“찾았습니다!”

기관 장치 탐색을 전문으로 하는 부하가 외쳤다.

“좋아!”

“안 돼!”

한 명은 흐뭇해하고 한 명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자는 비명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찾아낸 줄을 힘껏 당겼다.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어놓다니! 바보같이!?

이래서는 찾아달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 정도의 전문가에게 이 정도 기관을 찾아내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르르릉!

기계는 그에게 부여된 원칙을 따를 뿐이기에 주인과 적을 구별하지 못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관을 작동하자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통로가 쩌억 검은 입을 벌 렸다.

“절대 지나갈 수 없다!”

유재룡은 다급한 목소리로 고함치며 통로를 막기 위해 달려갔다.

“어딜!”

그러나 참영과 격운의 칼부림에 막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쫓아라!”

유재룡은 저 두 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복면인 십여 명이 열려진 비밀 통로로 신속히 뛰어들었다.

“조금 후가 기대되는구려, 유 장주!”

혈표의 이죽거리는 말에 유재룡이 대답했다.

“그렇구려. 정말 기대되오. 조금 후가.”

그 순간 유재룡의 입가에 걸린 그것은 분명히 짙은 미소였다. 좀 전의 절망에 가득 찼던 그 절박한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승리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혈표의 눈이 부릅떠졌다.

바로 그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꾸웨에에에엑!”

남아서 후방을 지키고 있던 복면인들은 한순간 동료들이 뛰어든 곳이 청룡은장의 비밀 통로가 아니라 지옥 문이었나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럴 정도로 문의 어둠 저편에서 들려온 비명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고 참혹하고 끔찍했다.

“……”

비명이 멎자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함과 정적이 대전 안을 가득 메웠다.

“속은 것은 아무래도 본인이 아니었던 모양이오, 혈 조장!”

좀 전의 이죽거림에 대한 보답으로 유재룡 역시 최대한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발아래에 조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목을 딸 기세로 그를 핍박하던 참영과 격운이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쓰러져 있었다.

***

“어, 어?”

소년의 입에서 의아성이 터져 나왔다. 유경영이 의아성을 터뜨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비가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데려간 쪽은 비싼 비밀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는 곳과 정반대 쪽이었던 것이다.

“어? 아, 아버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성큼성큼 유재룡이 걸어간 곳은 매우 흔하디흔한 옷장 앞이었다.

“이건?”

“서둘러라!”

유재룡은 옷장의 조그만 문을 열더니 옷가지 몇 가지를 재빨리 꺼냈다. 그리고는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한 문안에 몸을 집어넣더니 뭔가 열심히 만지작거리기 시작 했다. 작업은 금방 끝났다.

““자, 어서 이 안으로 들어가거라. 어서!”

“이, 이건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 당황해하던 유경영이 반문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저 기관은 가짜다. 아니, 기관은 진짜지만 통로는 가짜란 말이 더 정확하겠구나.”

“예?”

“여기가 진짜 비밀 통로다.”

“여, 여기가요?”

옷장의 높이는 어른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문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볼품없고 코딱지만 했다. 틀림없이 통로 또한 볼품없을 것 같았다. 마치……. “왜, 개구멍 같으냐?”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다.

본심을 들킨 아들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직 어린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는 그런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그게… 에, 예……..”

“아들아, 아비가 또 하나만 충고하마. 절대 비싸고 그럴듯하다고 해서 번지르르한 겉만 보고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겉멋이 아니라 실속이다. 상인은 모양새를 따지지 않는다. 상인이 따져야 할 것은 진정한 이(利)다.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말거라.”

더 이상 느긋하게 설명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유재룡은 딱 한 마디만을 덧붙였다. 감동적인 이별은 시간의 효과적 사용이란 취지 아래 배제되었다.

“동생을 잘 지켜주어라.”

유재룡은 자식들을 한 번씩 힘차게 안아준 다음 옷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년과 소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서둘러 옷장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내 옷장은 아이들을 몽땅 집어삼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원 상태로 돌아갔다.

“경영아, 선아야, 부탁한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옷장을 닫았다. 자물쇠는 달지 않았다.

“너희들만은…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거라.”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아이들이 도망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부터 그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마지막 장사로군.”

그는 이런 것까지도 장사라고 규정해 버렸다.

“최고의 이문(利文)을 남기지 않으면 체면이 안 서겠지.”

시간은 금(金)과 같다는 말은 틀렸다.

시간은 길이[度]를 잴 수도, 양(量)을 측정할 수도, 형(衡)을 달 수도 없고 손에 쥘 수도 없다. 고로 금보다 비싸다. 같은 급으로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게 시간 의 본심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자존심 상하니까.

밑지는 장사는 되지 않을 터였다.

“아버님만 계셨어도 이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으련만.

아버지가 지닌 능력의 십분지 일도 타고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못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 존재가 오늘 이때만큼 절실하게 느껴졌 던 때도 없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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